뚱뚱이 베브가 다 마신 오렌지주스 통을 철제 휴지통에 던져넣자 조용한 사무실에 퉁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손등으로 입을 닦으면서 맞은편에 앉은 에이미 굿로를 쳐다보았다. 베브는 이 아이가 안쓰러웠다. 그녀는 딸 셋을 키웠는데 에이미를 보면 어딘지 이상했다. 얼굴에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중년 여자들이 우글우글한 후텁지근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 따분하지 않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베브는 그날 아침 로지 탕궤이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 기사가 났네, 베브, 다중중독에 대해" 하고 말하며 책상에 툭 던지고 간 잡지로 부채질을 했다. 제기랄, 로지, 점심으로 당근을 먹다니.) 하지만 에이미라는 아이에게는 어딘지 잘못된 구석이 있다고, 이 후텁지근한 공간에서 따분한 일을 하는 것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며 베브는 부채질을 하면서 찬찬히 뜯어보았다. - P74

이를테면 에이미는 껌을 씹지 않았다. 베브의 아이들은 껌을 입에 달고 살았다. 커다란 껌덩어리를 입속에서 굴리고 딱딱 소리를 내고 풍선을 빵 하고 터뜨려서 주변 사람들을 환장하게 했다. - P74

그런 예라면 더 있었다. 에이미 굿로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해야 할 나이였다. 아이섀도를 조금만 바르고 속눈썹을 칠하면 사람들을 뒤돌아보게 할 수도 있었다. 베브는 담배를 찾으면서, 이 아이는 사람들이 뒤돌아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에 코를 얻어맞을 개처럼 늘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지독히 수줍은 아이였으니까. 몹시 안타까웠다.  - P75

매니큐어나 향수에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는데, 십대 소녀라면 당연히 그런 것에 관심이 있지 않나? 앉아서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았고, 옷이 어떻다는 말도 없었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지도 않았다. "전화라도 좀 하렴." 푹푹 찌는 더운 날에 에이미가 지루해하는 듯 보이자 뚱뚱이 베브가 말했다. 에이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그러니까 이건 자연스럽지 않았다. - P75

그리고 머리는 어쩌다 저 모양이 됐지? 제정신이라면 누가 그렇게 아름다운 곱슬머리를 자르겠는가? 오, 여자아이들에게는 저들만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베브도 알았다. 그녀의 맏딸은 머리를 빨갛게 염색해서 한동안 백치 같아 보였고, 록샌은 몇 주 동안 투덜거리면서도 그 끔찍한 파마를 끈질기게 하고 다녔다. 그런데 그런 머리 모양을 자르다니. 머리 모양은 형편없었고 얼굴에 잘 어울리지도 않았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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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와 이저벨》
_____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지난달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바닷가의 루시》를 읽었을 때 마지막에 작가의 모든 주인공들이 한 곳에 모인 것을 보았다. 루시와 올리브 키터리지, 버지스, 에이미... 메인주 바닷가 마을에 모두 모인 주인공들을 보니 너무 반가웠다. 비록 《에이미와 이저벨》, 《버지스 형제》를 읽진 않았지만 이 책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닷가의 루시》에 너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에이미, 버지스가 작가 작품의 그들이란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아직 읽지 않은 두 작품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98년에 발표된 데뷔작인 《에이미와 이저벨》부터 읽기 시작이다.

지지난주 도서관에 가서 빌려왔다. 반납일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겨우 읽기 시작했고 빨리 읽어야겠단 생각에 맘이 급한데...
에이미와 이저벨은 모녀지간이었다.... 이 사실이 순간 내게 크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딸과 함께 있기 때문이고 에이미와 이저벨을 읽어나가다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부분에서도 나와 딸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다시 그 시절을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저벨은 부모님도 남편도 죽고 아기 때부터 에이미를 홀로 키우는 엄마였다. 일을 하러 나가야 하니 에이미를 남의 집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에이미는 같이 있어주는 엄마에 목말랐을 것이다. 이저벨은 그런 에이미의 마음을 잘 받아주었고 에이미가 꾸무럭거리며 먹던 시간 동안 늘 같이 있어주었다. "엄마.", "같이 앉아 있어줄 거죠?" 하고 불안스레 물어보면 이저벨은 지치고 신경이 곤두서서 차라리 잡지를 뒤적이거나 설거지를 해치우고 싶었지만 아이의 조그만 소화기관이 놀랄까봐 재촉은 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는데 그 시간이 두 모녀만의 오붓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내가 특히 와 닿은 문장들은 이 부분이다.

"그 시절 이저벨은 일하러 가면서 에이미를 에스터 해치의 집에 맡겼다. 해치의 집은 타운 변두리에 있는 다 쓰러져가는 농가였는데, 아기들과 고양이들이 우글거리고 고양이 오줌 냄새가 코를 찌르는 끔찍한 곳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저벨의 벌이로 감당할 수 있는 곳은 고곳뿐이었다.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에이미를 그 집에 두고 떠나기 싫었고, 에이미가 헤어질 때 인사하지 않는 것도, 창문으로 쪼르르 달려간 뒤 소파에 기어올라 멀어지는 엄마를 지켜보는 것도 싫었다. 이따금 이저벨은 진입로에서 차를 빼면서 에이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을 흔들었는데, 그건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이미가 창가에서 그렇게, 창백한 얼굴로 웃지도 않는 것을 보면 누가 목구멍에 뭔가를 억지로 쑤셔넣는 기분이 들었다. 에스터 해치는 에이미가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했다.(34쪽) 

30 개월 무렵부터 우리 옆 동 놀이방에 아이를 맡기고 출근을 했는데 아이를 안고 옆 동으로 갈 때부터 울기 시작해서 놀이방에 도착해 선생님에게 안겨줄 때까지 내 목을 꽉 끌어안고 놀이방 가기 싫다고 떼를 쓰며 울고 불고 해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그야말로 눈물의 이별이 되곤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건 그 여리디 여린 팔 어디에 그런 힘이 있었는지 정말 내 목이 아플 정도로 꽉 끌어안고 매달리던 그 감촉과 몰아치던 강렬한 팔의 힘이 내 목에 고스란히, 그리고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아이를 선생님에게 안겨주곤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가슴이 찢어진 채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 나왔었다. 퇴근해서 아이를 다시 데리러 가면 아이는 다른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한산해진 놀이방에 홀로 남아 힘없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고 나오면 다시 엄마 목을 꽉 끌어안고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듯이 매달렸다. 그러면 나는 그 작고 여린 몸을 꼭 안아주었다. 
에이미는 엄마에게 떼쓰는 아이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울지 않았던 거다. 우리 딸과는 달랐다. 그래도 나는 그 시절의 우리 딸이 맘 아프고 그래서 에이미에게서도 그런 감정을 느낀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가 될지 더 궁금해진다.

지난 주 화요일, 우리 딸이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복강경 수술을 하게 되어 월요일부터 바빴다. 1박2일의 짧은 입원을 하게 되지만 입원 준비를 위해 용인 우리집에서 딸이 있는 고양시까지 가서 이것저것 준비하러 다니고 화욜 새벽에 입원해서 차례를 기다렸다 수술을 하고 다행히 경과가 좋아 하루 만에 퇴원을 해 집으로 데리고 왔다. 아무리 복강경으로 하는 수술이라지만 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통증이 심했고 허리를 전혀 움직일 수 없어 힘들어 하는 딸 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진통제를 먹었는데 약기운이 떨어지면 계속 아파했고 그게 2~3일 정도 지속됐는데 주말 쯤부터는 많이 나아졌다고 해서 움직임이 한결 편해지게 되었다. 그 동안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도 먹고 잠도 실컷 자고 엄마의 케어를 받으며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는 딸을 보니 한편으론 짠하고 맴이 아픈데 한편으론 또 뿌듯하고 행복한 기분도 들어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정신 없는 중에 주말에 김장도 했다.
텃밭에서 키운 우리의 배추 35포기, 쪽파, 무, 청갓과 홍갓을 뽑고 다듬고 씻어 김칫소를 버무려 배추김치와 쪽파 김치를 담가 김치냉장고 가득 채우고 나니 벌써 맘이 푸근하고 든든하다. 생굴 넉넉하게 넣은 김칫소에 수육 삶아 친구네와 같이 술잔 기울이며 즐거운 시간도 보냈다. 올해 처음으로 삼시세끼에서 늘 보던 화로 사서 커다란 솥 걸고 불 피워 수육을 삶아봤다. 확실히 인덕션이나 가스보다 화력이 세서 진짜 깜짝 놀랐다. 삼겹살 큰 덩어리째 넣었는데 금방 익는거 아닌가! 이런게 사는 재미런가 싶어 행복해졌다.
금방 회복한 딸램과 함께 할 수 있어 더 좋다!


이곳 카페는 잠봉뵈르 샌드위치가 진짜 맛이 좋다. 딸램 오면 꼭 같이 와야지.. 했는데 지금 이렇게 같이 와 내가 좋아하는 샌드위치도 반으로 잘라 나눠 먹었고, 난 《에이미와 이저벨》, 딸램은 《스토너》 읽고 있는데 배도 부르고 카페는 따뜻해서 살짝 졸음이 와 각자 딴짓 하는 중이다. 2층의 통창 뷰도 가을가을하니 좋고 책을 읽거나 컴 작업하기도 좋아 월욜 오전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다. 밖은 바람이 부는지 키 큰 단풍나무의 높은 가지가 춤을 춘다.

이번 주부터는 그동안 주춤했던 독서에 매진해야 한다. 밀려있는 책이 여간 많아야 말이지...
《신곡》은 연옥편을 읽다 중단 중이고
《세계 끝의 버섯》도 재미있게 읽고 있었는데 다시 시작해야하고...
《생명의 여자들에게 : 엉망인 여성 해방론》은 문장이 어쩜 그리 시원한지 정말 읽다보면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여전히 엉망이고... 난 저 ‘생명의 여자들‘이란 말이 너무 좋다. 제목만도 위로가 된다. 50 년전에 쓰여진 책이지만 감안하고 읽어도 여전히 엉망이라 안타깝다.
빌려온 책들도 구입한 책들도 넘 많아 책꽂이를 벗어나 책상 위까지 점령하고 있다.
이러다 읽어보지도 못하고 반납하거나 팔아먹게 생겼다. ㅠㅠ
한강 작가의 책도 몇 권이나 샀는데 언제 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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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20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 잠봉뵈르 샌드위치 제가 정말 좋아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품 중에서 개인적으로 [에이미와 이저벨]을 별로 좋아하진 않거든요. 간혹 다른 연작 단편들 속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긴 하는데, 왜 미성년자 여자아이와 성인 남자와의 성적인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에이미와 이저벨은 그래서 괴로웠는데 사실 그 지점에서 어쩌면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한건 아닐까 해서 다시 읽어보고 싶기도 해요.

이 페이퍼에 링크된 책들이 죄다 제가 아는 책들이라 너무나 기쁩니다. ㅎㅎ
 

여자는 남성 중심 사회를 만드는데 공범이었다. 여자는 암컷으로서 남자 코끝에 대고 스스로의 성을 흔들며 남자들의 경쟁을 부추겨 끝내 약자,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자를 아예 버릴 수 있게 한 사회 구조의 뿌리를 지탱해 왔다. - P36

예나 지금이나 수컷의 가격은 휴지조각이고, 
암컷의 가격은 그보다 더한 휴지조각이다. 휴지조각인 비참한 인생들이 "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를 말한 혀끝의 침이 마르기도 전에, 이제는 다시 번영의 길로 가자고 충성 하나로 오로지 달린 결과가 이렇듯 빈 깡통 소리 요란한 약육강식의 문명대국인 것이다. 자국의 여자를 암컷으로 경멸하는 나라는 타국의 여자도 당연히 능욕한다. 메이지 백년간 일본의 수컷이 그 정액으로 더럽힌 조선의 여자들과 동남아시아 여자들의 하잘것없이 여겨져 쓰러진 그 생명을 생각해보라. "여자들이여, 편하게 살고 싶으면 무능한 척을 하라니, 이 따위 말은 입이 찢어져도 하지 못하는 게 마땅하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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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을 당하는 자는 나약함이나 어리석음과 같은 부정적인 면으로 이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약함이나 어리석음, 비참함 따위가 나 자신과 딱 들어맞을 때, 서로를 외면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증오가 싹튼다. 나 자신의 비참함과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된 자가 느끼는 짜증이 그 속에 있다. 여자들끼리 미워하고 갈등하면서 낳은 중오. 그것은 여자인 채 어떻게 ‘여자로 살기‘를 그만두면 좋을지 논의하지 못하고 여자라는 사실로부터 도망 다니는 자가 느끼는 비참함, 바로 여자의 역사성에서 나온다. - P29

바보 역할은 진짜 배우에게도 어렵다는데, 스스로를 바보라고 믿도록 강요당한 자는 바보 역할을 할 수가 없다.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라고는 하나, 살아 있는 인간에 관한 부정의 부정은 전면적인 부정일뿐이다. 존재의 전면적인 부정이다. 그래서 결코 자신을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는 여자만이 ‘바보 여자‘인 척 연기할 수 있다. - P29

여자로 사는 어려움, 이것은 여자의 일상을 끊임없이 침식하는 가치가없는 나‘라는 협박 같은 관념과 함께 존재한다. "인류 및 여성 여러분"이라고 처음 말한 이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는데, 그 말은 여자는 과학자든예술가든 음악가든 될 수가 없고, ‘암컷‘만 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역사의 진실을 묻어 버리지 않고 알려 주는 말이다. 물론남자를 제치고 사회를 자신의 것으로 밝혀 온 여자들이 지금껏 무수히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여류 음악가‘, ‘여기자‘, ‘의사‘ 등 ‘여류‘로 그존재를 허락받았던 것에 불과하다.  - P33

 ‘남자인간‘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사회에서 여자가 개인 주체로 어떻게 나 자신을 찾아야 할지, "여자인 주제에" 하고 매도당하며 암컷으로 살아온 역사성이 우리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남자는 집 문지방만 넘어서면 사방이 적인지라 엄혹한 세상에서 녹초가 되어 살아간다는데, ‘사회‘에서 자신을 찾고 구하려는 여자들에게는
‘사회‘ 자체가 적이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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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전화해, 제발.
실수인지 안부용 서식으로 전송되었다. 가장자리가 검게 칠해진 편지와 분홍빛 장미 꽃봉오리로 장식된 전보를 함께 들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엘런은 몸을 떨기 시작했다. 편지를 읽어도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 P222

엘런은 아이의 침실로갈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해치워 버릴 생각에 급하게 움직였다.
바닥에 아이가 가지고 놀던 요새와 군인 장난감이 있었고 침대 위에는 다림질해 차곡차곡 개켜 둔 깨끗한 옷이 그대로였다. 엘런은 생각했다. ‘지금 눈물을 터뜨리면 절대 멈추지 못할 거야.‘ 엘런은 옷을 집어 서랍장에 넣어 두고는 밖으로 나와 문을 잠갔다. 바쁘게 집 안 곳곳을 살펴보며 전부 떠날 때모습 그대로인지 확인했다. 정원은 처참했다. 화분의 제라늄이 죽어 있었다. 엘런은 흙을 만져 보았다. 
시멘트 같았다. 호스를 꺼내 정원 여기저기로 다니며 화단, 돌, 심지어 죽은 제라늄에도 물을 뿌렸다. 정원이 다시금 살아 숨 쉬는 듯했고 흙에 물이 스며들며 촉촉하게 바스라졌다. - P222

그 즉시 엘런의 익숙한 상처가 다시금 욱신거렸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엘런의 머리도 허리까지 올 만큼 길었다. 그때 웬일인지 엘런의 감정에 변화가 생기며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안도의 눈물이었다. 남편은 황량한 삶의 한복판에서 새로 시작할 힘을, 건강한 젖이 흐를
것만 같은 깨끗한 초원 같은 가슴에 머리를 누일 힘을 낸 것이다. 이상하게도 엘런은 고마웠다. 남편은 엘런이 느껴야 했을 영원한 죄책감의 압박을 없애 주고 그를 해방시켰다. 엘런은 무엇보다 그들이, 남편과 미지의 여자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 여자가 남편을 찾아온 이유가 그저 집이 필요하거나 파손 위험이 있는 우편물을 전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면 견딜수 없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엘런 안의 호기심이 죽어 버렸다. 그토록 열렬한 무관심은 처음이었다. 아이의 죽음과 덧창 닫힌 집이 두 사람의 결혼을 완전히 종결시켰다. 더 이상 고통은 없다.
때가 되면 남편이 우편물을 보내겠지만 절차 진행을 위한 연락일 테고 엘런의 답변 역시 사무적일 것이다. - P224

"결과가 나왔어요." 여자가 결과지를 들고 말했다. "이차 감염이 있었지만 임질은 아닌 것 같아요......."
"걱정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 엘런이 말했다. 속은 듯한 기분이었으나 어쨌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잠시나마 손뼉을 치는 것 같은 불경한 짓을 저지를 뻔했다. 엘런은 처방전을 받아 알약과 제비꽃 빛깔 로션을 샀고, 약국을 떠나며 바지에 로션 얼룩이 묻어난다면 그 자체로 애도의 증명이 되리라 생각했다. 들쑥날쑥하고 추한 보랏빛 얼룩. - P235

엘런은 약 꾸러미를 꼭 붙든 채로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걸어갔다. 자작나무는 잎사귀마다 자력을 발휘해 외양을 바꾸는 듯했다. 거친 풀의 밑동부터 흙빛이 피어났고, 땅에는 빛바랜 듯 희미한 노란색이 번졌으며, 공기는 녹녹했다. 엘런은 빠르게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섰다. 이제 서두를 필요가 없고,
서둘러서 해야 할 일이 없고, 그저 가만히 호흡할 뿐이고, 행복하지 않으나 불행하지도 않았다. 낮이 전처럼 찬란하고 밝지 않다면, 밤도 그렇게 새카맣지는 않으리라. - P235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니 좋았다. 
나뭇잎이 떨어졌고, 엘런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여전히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로 너울너울 떨어져 낙엽 더미 위에 자리 잡는 모습을 보았다. 수많은 나뭇잎이 사방에서 그렇게, 단순하고 무던하게 낙하하고 있었다. 적어도 한두 달쯤은 이렇듯 서늘하고 감미로운 가을이 이어질 것이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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