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키스의 말 - 2024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배수아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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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오비디우스의 《변신》에서 바우키스와 그녀의 남편 필레몬은 변장한 신을 잘 대접한 보상으로 죽는 순간까지 함께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을 말한다.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순간 서로의 몸에서 자라나는 잎사귀를 보는 순간 두 사람이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배수아 작가의 <바우키스의 말>은 이 마지막 순간에 관한 아름다운 소설이다. 하지만 바우키스의 말이 무엇이었을지 알 수 없듯이 배수아 작가의 소설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붙잡으려는 생각에 문장을 여러번 자꾸 읽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리듬을 발견하게 된다. 




특별한 줄거리를 찾을 수 없는 소설이지만 그래도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음악가(이 작품에서는 등장 인물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모형 비행기 수집가, 예술가, 음악가'라는 식으로 호명이 된다)'의 즉흥 퍼포먼스에 초대를 받았을 때의 일을 쓴 문장들이었다. 음악이 연주된 홀은 텅 비어 있고 초대를 받은 몇 사람만이 연주회장에 모여있었는데 음악가는 오래전부터 피아노 앞에 앉아 뚜렷한 음악의 시작도 알 수 없고 "최초의 음이 발현하기를 기다리는 행위"를 하는 것, 그것이 전부인, 그럼에도 계속해서 계속해서 듣고 있는 행위..., 그러면서 음악가는 여기에 없는 것들을 향해서 귀 기울임으로써 음악을 시작하고 있었다 말한다. 


"보리수 안의 바람, 강비탈에 핀 부처꽃들의 기울어짐, 언젠가 붉은 가을, 자갈을 밟으며 다가오는 발자국, 기차가 도착하는 신호음,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책상 위의 편지들이 흩어지는 소리, 서로 은밀하게 마주 잡는 두 손, 새들이 만들어내는 허공, 하나의 편지 위로 내려앉는 또 다른 편지, 그리고 붉은 가을, 오직 하나의 어휘가, 하나의 음이, 하나의 그림이 떠오를 때까지 마침내 모든 음들이 소리의 최소 성분으로 수렴될 때까지. 멜로디 없는 음악, 최소의 음악. 돌과 나모의 내부로부터, 저절로_중얼거림. 겨울 아침 서리의 속삭임. 지금 여기 없는 것들의 기억. 그 어휘가 무엇일까. 강물에 비친 하루.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음악가는 피아노 건반을 하나 누르고 소리의 울림이 사라질 때까지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았다.(45쪽) 




이어서 연주회장의 몇몇 사람들이 돌을 하나 들고 음악가의 연주에 공명하여 어느 순간, 자신이 원하는 순간, 음악의 일부가 되어 돌을 떨어뜨리면서 하나의 어휘를 발설하는 행위를 하게 되는 이 퍼포먼스, 이 연주가 아주 아주 느리게 느리게 천천히 이어져 나간다. 그 어휘가 무엇일까! 이 문장들은 자연스럽게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마지막 발화를 삼킨 바우키스를 연상하게 만들고, 돌과 돌이 떨어지는 사이, 음악가는 사람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을 말해주는데 "이 곡의 이름은 '바우키스의 말'입니다.(51쪽)"   


"말을 꺼내려는 인간이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이미지는 소설 전체를 장악하면서 여러 번 반복된다. 이를 테면 '나'는 언젠가 모형 비행기 수집가와 숲을 산책하다가 각각 나무를 깊이 껴안고 포옹한 적이 있다. 나무의 떨리는 내면이 느껴질 때까지. 그제야 마침내 입 없이도 하나의 어휘가 발설되고, 두 사람은 숲속 나무의 이미지와 포개진다. 그러니까 가장 결정적인 말이 나오기 위해서는 언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이 영원히 발설되지 못할 것 같은 어휘가 언어의 차원에서 음악의 차원으로 변신하는 순간에 예상치 못하게 온다."(8~9쪽, 심사평 중에서) 


이 단편의 의미를 '나무'에서 찾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최후의 순간 바우키스는 나무로 변하는 자신을 느끼고 지금 이 순간 나무로 변하고 있을 필레몬을 느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이 나무껍질로 변하기 직전, 바우키스는 사랑하는 필레몬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으리라. 마침내 도달한 최후의 순간, 하나의 어휘가 해방되었으리라. 그리고 나는... 배수아 작가의 잡히지 않지만 아름다운 문장들을 되풀이해서 읽고 있었다.






문지혁의 <허리케인 나이트>는 마지막의 반전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도 이 단편의 줄거리는 계속해서 기억할 수 있을 거 같다. 문지혁의 단편과 더불어 예소연 작가의 <그 개와 혁명>은 《2025이상문학상작품집》에서 이미 읽었기 때문에 다시 여기서 새삼스레 리뷰를 쓰지는 않겠다. 예소연 작가의 단편은 이상문학상 대상수상작이었는데 아버지의 장례와 관련한 단편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사실 공감하기는 어렵고 너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작품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과정도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면서 하나도 재미있지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재미있게 읽은 단편이 있는데 예소연 작가의 작품 외에 아버지의 장례와 관련한 작품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박지영 작가의 <장례 세일>이었다. 이 세상 모든 물건들, 아니 인간 비인간 할 거 없이 모든 것들을 다 파는 세상인데 아버지의 장례를 세일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전제 하에 아버지 독고 씨의 장례 비용을 가늠하고 한편으로는 지극히 상식적으로 최소한의 체면을 차려줄 수 없을 지도 모를 얼마되지 않을 조문객을 걱정하면서 공정한 죽음 비용에 대해 생각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리고 그 과정이란 것이 아버지란 사람의 애도를 소비할 가능성이 있는 지인의 지인들까지 찾아낸, 최대한 많은 예비 조문객들에게 앞서서 "따뜻하고 육즙이 가득한 맛있는 동그랑땡의 맛을 보여주고 애도를 준비하게 하는 것"을 영업 목표로 하여 아버지의 영업일지와 수첩들을 토대로 감사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시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하지만 평생을 그러한 기회와는 등을 지고 산 아버지가 그럴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현수의 노력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는데,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인연과 뜻밖의 대가 없는 순수한 애도를 받게 되면서 현수는 깨닫게 된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는데 애써 하는, 어떤 가격을 매겨도 공정하지 않은 완벽히 불공정한 선의"(143쪽)에 대해! 아무 관계 없는, 아무 이유 없는 완벽한 타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완전한 선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한 사람 몫의 공정. 

현수는 아들이면서도 아버지의 인생을 '그래도 싼' 인생으로 비하하려던 생각을 바꾸어 나간다는 사실이 먹먹하게 다가왔다. 아버지의 인생을 '그래도 싼' 인생이라고 말하는 이면에는 자신에 대한 비하도 담겨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의 삶과 죽음에 가능한 애도란 없을 거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지금부터 천천히 공정가를 높이는 장례 세일을 준비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그 늦은 밤, 뜻밖의 완전한 타인의 완벽한 선의에 의해 이루어진 애도의 몫을 보면서 오늘밤만큼은 "아버지 독고 씨의 죽음과 함께 세상의 모든 '그래도 싼' 죽음을 모르는 자의 선의로 다만 애도해보고 싶어지는 것"이었고, 내 애도의 값은 내가 결정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전춘화 작가의 <여기는 서울>은 조선족 청년인 '영화'가 한국의 서울에 있는 대학에 대학원생으로 유학을 오게 되고 연변에 있는 아버지의 소개로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본부'라는 단체에서 일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잘 보여주어 흥미로웠다. 여태는 우리 눈에 비친 조선족, 연변 동포(혹은 고려인, 새터민, 일본 교포 등으로 치환가능하다)를 우리의 시각으로 조명했다면 이 작품은 조선족 청년의 눈으로 본 현재의 한국과 청년세대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한국말을 쓰니까 그저 적응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결코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물며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도 다르고 우리와 달리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서 우리의 역사를 배울 기회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해나가고 원활하게 대화를 해 나간다는 것이 어려운 과정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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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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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11월'을 지나 '불확실한 그해 봄'을 지나는 팬데믹 기간 동안 확실한 것은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 뿐이었다. 미국에서 그렇게도 많은 사망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들도 없었을 거다. 코로나 초기, 혼란 속에 확진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또 그렇게 "어이없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을 보면서 진정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는 빠르게 봉쇄되었고 멀리 집을 떠난 사람들은 한동안 그곳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작중 화자인 노년의 작가는 2020년 봄, 뉴욕이 봉쇄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지인의 앵무새를 돌보는 일을 대신하게 된다. 전임자였던 지인의 친구 부부의 아들이 불가피하고도 무책임하게 도시를 탈출하면서 어쩔 수 없이 버려진 앵무새는 지능이 높고 영리한데다 활달하기까지 해서 이틀 이상을 돌보는 사람이 없이 버려진 채로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말에 지인의 앵무새를 돌보기 시작한다. 앵무새의 이름은 '유레카'이다. 유레카와 작가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둘은 이러저러한 놀이를 하기도 하고 하는 사이에 약간의 유대감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뉴욕으로 자원봉사를 하러 온 호흡기 내과 의사가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자신의 집을 내어주면서 유레카가 있는 지인의 집으로 들어와 동거를 시작한다. 



산책을 즐기는 작가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점점 긴 시간 동안 밖에서 머물게 되었고 유레카와 같은 야생 동물들과의 유대, 교감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데, 이어져 나가는 생각의 방향을 읽어나가는 것도 흥미로웠다. 다큐멘터리로 보았던 내용들도 떠올리며 생각을 이어나가는데. 그 생각이란 크레이크 포스터라는 사람이 제작한 프랑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내용이다. 그가 우울증에 시달릴 때 그에게 삶의 활력을 다시 찾게 도와준 문어와 우정을 쌓아나갔던 시간들을 영상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 우정과 유대감은 분명 문어의 호기심과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문어가 험난한 삶의 여정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다시 일어나 자신감을 되찾는 자신을 보게 해준다. 그러한 자신감을 함께 다이빙을 시작한 어린 아들에게 불어 넣어주고자 애쓴다. 

    "그리고 그는 아들이 더 위대한 교훈을 체득하는 걸 지켜본다. 그것은 '온화함'이다. 온화함은 자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배우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크레이그 포스터는 말한다... ... 아마도 영상에 담긴 증거가 없었더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생의 문어와 인간의 다정한 상호작용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114~115쪽)



이러한 다정함과 온화함이야말로 팬데믹 시기에 처한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일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을 읽으면서 그래서 너무 좋았다. 다정함, 온화함. 마음이 따뜻해지는 말이다.

팬데믹으로 도시가 봉쇄되었지만 작가의 산책과 유레카와의 놀이, 그리고 먹고 자는 일상은 계속되어야 하고 작가는 작가들의 글쓰기에 대한 견해들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글을 생각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어서 자신의 글을 쓰고 싶어한다. 



작가가 잠든 어느 날, 앵무새를 버리고 도시를 탈출했던 대학생이 연락도 없이 불쑥 돌아온다. 노년의 작가와 에코 테러리스트이며 분노조절 장애를 가진 어린 대학생과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부모와의 관계에서 어릴 때부터도 어려움을 겪었던 대학생 '베치'와는 결과적으로 함께 동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서로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고 피해다니기에 좋을 정도로 넓은 집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어려움을 인정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세대를 뛰어넘고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은 도시에서 두 사람은 그 관계에서 일말의 안정을 찾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이 그해 봄의 불확실성 속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노 작가의 생각의 갈래들은 여기로 저리고 흘러가는데 독백인 듯한 어린 시절의 회상들이 에세이처럼 편하게 읽힌다. 한편으로는 노년의 작가로서의 생각들에 공감이 가기도 했다. 그리고 노년의 작가와 Z세대 대학생의 연결이 흥미롭게 다가와 따뜻함을 느꼈다. 노 작가 생각의 한 편...


    "그날 그렇게 바위에 앉아 있으려니 차가운 물속의 손이 시리기 시작했지만, 중대한 깨달음에 이르기 직전인 것 같아서 집중력을 잃고 싶지 않아 그냥 참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가는 건 이 지나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 한 방향으로 빠르게 흐르고 붙잡거나 멈출 수 없다. 그게 어른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피할 수 없는 힘이다. 삶도 다른 모든 사람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지나간다. 나는 그걸 이해했다.하지만 아직 어린애라 두려움을 몰랐다. 그저 내 마음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것에 대한 흥분 뿐이었다. 나는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터질 듯했다." (249쪽)




노작가의 일상은 온통 작품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니까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들이 재밌으면서도 코믹하고 유머러스해서 하나도 심각하지 않았다. 때론 뭐 이런 생각까지 다하지? 싶은 하등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나 이야기들도 들려주고 있어서 이 작가가 꽤 긍정적인 사고의 소유자인가보다 생각하게 되었다. 평생 심각한 정신적 외상은 겪지 않고 살아내는 사람이 아닐까도 생각하게 되었다. 좋은 자세가 아닐런지... 그래야 힘든 시기를 잘 버텨낼테니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바닷가의 루시>도 같은 팬데믹 기간 중에 일어난 일을 소재로 했는데 이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일단 그 저변에 심각함이 짙게 깔려있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였고 루시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윌리엄과 무사히 잘 견뎌내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는 없었다. 메인 주 바닷가로 탈출한 루시의 이야기가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나의 처지와 감정과 부합하는 면이 있었다. 힘들고 감정 소모가 많으면서 스트레스가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가족들이 걱정되고 만나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럴 수 없어 몹시 괴로웠다.  



그해 봄, 온통 불확실성 투성이인 시간에 난 마스크를 끼고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회사가 모기업이 위치한 곳으로 이전을 하게 되면서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고 다행히 출퇴근이 원활하지 않은 30km 이상의 거리로 이전하였기 때문에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다음 해 봄부터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1년 과정 수업을 듣게 되었다. 집에서만 갇혀있다시피 생활했지만 그 덕분에 힘든 시간을 잘 견딜 수 있었다. 저녁에는 아파트 바로 옆 공원으로 매일 운동을 다녔다. 잘 닦인 산책로를 따라 더 멀리까지 갔다올 때도 있었다. 오로지 할 게 공부밖에 없어서였는지 다행히 성적은 굉장히 잘 나왔다. 6개월 과정의 줌으로 하는 원격 강의도 그때 처음 경험했다. 색다르면서 어색하고 그러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 재밌었다. 문제는 학과 과정이 끝나고였다. 아파트 문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도 마스크를 끼어야하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너무 어렵고 조심스럽던 시기여서 무언가 집중하던 일이 갑자기 끝나버리니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래서 그 힘든 시간과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곳이 지금 이곳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건 잘한 일이었다! 새삼스럽게 그 시기를 돌아보니 인생이 정말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를 덜렁 들어 데려다 놓은 것처럼 의외의 곳에서 살게 되었지만, 직장을 다니고 또 1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공부를 하면서 보낸 시간 동안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낼 수 있었고, 이곳으로 이사한 후엔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대문 밖을 나설 수 있고 동네를 산책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가족들도 건강하게 잘 지나왔다. 이렇게 생각하니 난 루시보다는 노작가와 비슷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저 긍정적인거 말이다. 그래서 다행이지 뭔가. 그리고...느닷없이 창궐한 코로나는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노작가와 베치와 유레카의 동거는 아기를 낳은 집주인이 돌아오면서 끝나게 된다. 베치는 로프트 아파트를 세 내어 떠나면서 유레카를 데려갔다. 노작가 나름의 애정을 쏟았던 유레카를 향한 마음은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유레카의 야생성을 키워주고 싶어하는 베치의 노력을 인정하기로 했다. 별로 필요하지 않는 문장일 수도 있는데 작가는 다시 자기만의 몽상에 빠져 이러한 생각을 들려준다. 


    에드먼드 화이트에 따르면, 제임스 메릴이 한 젊은 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팬은 왜 우리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할까? 우리의 알맹이는 책 속에 있기에 결국 빈 껍데기만 만나게 되리란 걸 깨닫지 못한 걸까?>


    질문: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인생 이야기를 써주기를 바랍니까?

    

    빼어난 글솜씨뿐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할 줄 아는 크나큰 마음까지 겸비한 사람. (307쪽) 






<불확실한 봄이었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이 문장 말고는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책이 1880년에 시작되었다는 것도(나중에 찾아보기 전까지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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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혁명 -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예소연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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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오전에 수영 끝나고 회원님들과 주민자치센터 앞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잠시 커피 타임을 가졌다. 처음엔 요즘 배우고 있는 영법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누는 게 우리들의 국룰... 평영이 너무 안된다는 둥, 웨이브를 하는데 뭔가 자세가 어색하다는 둥, 연결 동작이 잘 안되고 너무 어렵다는 둥, 발 따로 팔 따로... 어깨를 눌러주라는 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둥,내가 하는 건 웨이브가 아니라니까 ㅠㅠ... 이런 이야기를 열나게 하다 보면 새삼 결론은 "언니... 그만두지 않고 계속 같이 가주셔셔 넘 고마워요"로 끝난다. 


그러다 갑자기 포근해진 날씨 이야기로 넘어가고 날씨가 이렇게 좋으니 또 나가서 마냥 걷고 싶다니까 이구동성으로 자기들도 그렇다고 하는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동네는 마음껏 편히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마땅히 갖춰져 있는 곳이 아니다. 집에서 바라보는 한적한 시골 동네로서의 풍경은 더없이 고즈넉하고 아름답지만 실상은 변변한 산책로나 안전하게 걸어다닐 수 있는 인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진 않은 곳이다. 그럼에도 2021년 11월 지금의 용인 양지면으로 이사온 이후 다음 해 봄부터 동네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다. 오늘은 집 앞쪽 동네로, 내일은 저 초등학교 뒷 동네로 또 다른 날은 총신대 앞쪽까지 가리라 하면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이 집도 슬쩍 구경하고 저 집도 슬쩍 구경하면서 온 동네를 걸어다녔는데 지치지도 않고 그 짓을 그 다음 해까지도 했던 거다. 그것도 혼자서!




어느 날 약간의 불편함을 안고 계속 하던 산책 중에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건데 뭔지 모르게 올라오는 불만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거다. 번듯한 중심지에서 멀지 않은 도시 외곽 지역은 변변한 산책로도 조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넘 속상했고, 걷다 보면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옆으로 비켜서야 한다는 것이 기분이 상하면서 같은 용인시민인데 난 왜 이런 환경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는 건가 싶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간다는 것에도 화가 났다. 오랜 시간 즐겁고 행복했던 산책이자 운동은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 혼자 노는 것도 좋았지만 그때쯤엔 나도 모르게 나도 어딘가엘 가서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던 거다. 혼자 여기저기 산책을 다녀도 사람을 사귀는 건 불가능하고 아무리 시골이고 주택단지라 해도 나 어릴 때처럼 옆집이랑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프게 자각하게 된 거다. 그래서 용인 수지에서는 물이 너무 무서워 엄두도 못내던 수영 강습에 용기내어 등록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 혼자서도 그다지 우울하지 않고 시간적으로 여유로우니 만족도도 높았는데도 어딘가에 소속이 된다는 것과 누군가와 교류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사람과 교류하는 삶에 순응하게 된 것이다.^^




정기현 작가의 <슬픈 마음 있는 사람>에는 직장을 잠시 쉬면서 동네를 산책하는... 혹은 배회랄지 탐험이랄지... 아무튼 동네를 산책하는 '기은'이 나온다. 동네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준영'을 만나는데 예배가 있는 주일을 제외하면 평일의 교회는 도서관이나 베이커리에 가까운 곳이었다. 교회 사모의 권유로 평일 낮에 교회에 나가 책도 읽고 빵도 마음대로 먹고 그러다 평일 낮 시간에 교회를 찾는 거의 유일한 어른이었던 준영을 만난 것이다. 이야기는 두 사람이 별다른 대화 없이도 시간을 함께하는 과정을 담담하고 보여준다. 우연히 어느 날 같은 시간에 귀가를 하게 된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게 되고 준영으로부터 기둥에 있는 낙서에 대해 듣게 된다. "김병철 들어라. ~~~"로 이어지는 낙서들... 동네 곳곳에 경고조로 쓰여진 낙서를 찾아 어느 날은 아예 날을 잡아 특정한 낙서를 찾아 동네를 샅샅이 훑다시피 돌아 다닌다. '기은'이 이 골목 저 골목을 낙서를 찾아 샅샅이 훑고 다니는 모습 어디에서도 나와 닮은 점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는데도 난 '기은'의 그런 행동들이 이상하게 너무 이해가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걸을 때의 '기은'은 원래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동네의 비밀을 파헤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가진 산책으로 변해간다. 어떠한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게 된 것인지 확실히 드러나지 않지만 '기은'의 산책이 자아내는 무언지 모를 슬픔의 분위기는 준영을 만나면서 변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준영에게 낙서의 비밀을 알아내서 이야기해 주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고 낙서를 찾아내고 비밀을 알아내지 못할까 초조해하기도 한다. 그러한 슬픈 마음의 정서가 준영과의 미래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아늑함"을 느끼는 부분에서 설렘이 감지되었다. 아... 기은이 그 마음을 "슬픔을 아는 마음"이라고 하면서 어째서 "아늑함"을 떠올리게 된 건지 알듯 모를듯했지만 그 마음이 느껴진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산책은 이러한 서사가 끼어들 여지도 없었고 "슬픈 마음"으로 나에게 집중하는 산책은 아녔지만 오히려 어이 없이 이게 뭔가 싶은 자괴감만 남기고 끝나버린 데 반해 -하지만 이로 인해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니 나의 실패한 산책으로 인한 방향 전환도 사실은 대단히 긍정적인거 아닐까? - '기은'의 산책은 정말 약간의 설렘이 느껴지는 "아늑함"을 남기게 되어 좋았다. '기은'이 다른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김기태 작가의 단편 <일렉트릭 픽션>은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한 남자의 밋밋해 보였던 일상이 기타를 배우기로 하면서 크지는 않지만 변화하게 되었고 그 변화의 방향이 평소의 생활과는 다르게 긍정적인 교류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의 전환이어서 희망적으로 비쳤다. 거기다 소설의 구조가 특이해서 마지막에 "엇!" 하는 감탄사를 사용하게 된다. '전기 기타를 치는 그'에 대한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전기 기타를 치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되는 독특한 구조가 된다. 맞게 말한 건가?.... 특이한 구조로 기억에 남을 듯한데 작가와 선우은실 평론가의 대답을 읽어보니 이와 같은 서술 방식이 작가의 다른 소설에서도 왕왕 발견이 된다고 해서 작가가 이러한 서술 방식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문지혁 작가의 <허리케인 나이트>는 작가가 실제로 미국에 거주하던 시절에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구성이 되었다. 작품 속에서 허리케인이 몰아친 날 집에 물이 차서 친구의 집에 피신하게 되었는데 대형 로펌에 근무하다 자신의 법률 회사를 운영하는 친구 피터의 집은 '럭셔리 콘도미니엄'의 펜트하우스였다. 외국어 고등학교 동창으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이지만 대치동에서 한 해에 몇 십명이 입학하는 고등학교 출신이었던 피터와 중곡동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의 사회, 문화, 경제, 가정환경의 차이는 자석의 S극가 N극의 사이만큼 멀기만 했지만 내가 써서 인쇄한 소설을 우연히 읽었고 재미있었다며 다음에 또 보여달라는 피터의 말을 들었던- 불편한 - 기억을 떠올린다. 피터와의 사이는 이렇게 불편한 기억들로 채워져 있다. 안전한 곳이라고 믿었던 피터의 펜트하우스에서 랍스타를 저녁으로 먹고 쉬고 있는데 허리케인으로 인한 것이겠지만 갑작스레 정전이 발생한다. 안전하다 믿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러한 설정에서 유발되는 은근한 긴장감이 소설을 읽는데 흥미를 더한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건 고등학교 시절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다가 작은 소동이 벌어진 사건을 들려주는 데서 온다. 골대 근처에 주차된 자동차에 소지품을 올려두고 용준(피터)이와 아이들이 농구를 하던 사이 차는 사라져 버리고 아이들의 냄새나는 옷이나 양말 따위의 것들은 근처에 있었는데 유독 용준(피터)이의 - 롤렉스 -손목시계만은 찾지 못했던 것. 괜찮냐고 묻는 친구에 비해 너무 침착하고 무덤덤한 친구 피터의 반응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러한 두 사람의 거리감이 유발하는 긴장감과 불편한데도 계속 이어지는 두 사람의 동행, 그리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세계조차 무너진다면...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데 이 단편 전체의 인상을 바꿔버리는 결정적인 몇 개의 문장은 가히 압권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집의 별점이 대거 상승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 ... ... 아니, 이제는 내 롤렉스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어느덧 시계는 나와 함께 보낸 시간이 더 길고, 피터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롤렉스가 함께할 것이므로.(172쪽)" 

내가 훔쳤지만 결코 빼앗지는 못했고 착용할 수도 없었던, 그래서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는, 내가 살 수도 없는 물건 때문에 겪는  내면의 갈등은 계속 되겠지. 




퀴어 소설의 지향점이 어디일지 고민하며 썼다는 서장원 작가의 <리틀 프라이드>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상실감'과 욕망의 기록들도 읽는 재미가 있었고, 작가가 추천해 주었던 김원영의 <희망 대신 욕망>,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도 읽어 보고 싶다.

마지막 수록작인 최민우 작가의 <구아나>도 재미있었다. 연인 사이인 '도윤'과 '해영'은 동거하는 사이인데, 해영의 오빠인 해준이 두 사람의 집에 방문하는 사건을 계기로 도배도 하고 집안을 단장하게 된다. 두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지만 무작정 관습에 순응하기를 망설인다. 오빠인 해준이 해외 이민을 가게 되면서 가족 사긴을 찍자는 제안을 하는데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도배를 하고 나니 거슬렸던 집안의 소소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바꿔 나가기로 하고 가장 먼저 문손잡이를 바꾼다. 3개의 문손잡이 중 2개가 고장나 있었는데 문손잡이를 바꿨다고 큰 변화가 있을 거로는 생각되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 고치는 거야"라는 '해영'의 말에서 희망이 보였다. 전셋집이지만 사는 동안 내 집이니 문손잡이를 바꾸고 싱크대 수전도 바꾸고 욕실 곰팡이도 다 닦고 벽이랑 바닥 줄눈도 새로 그리고 후줄근한 상부장도 교체해서 멋진 집에서 살겠다는 야무진 꿈을 꾼다. "흔들의자의 다리처럼 완만하게 휘어진 금속 곡선이 방금 이뤄진 간단한 성취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빛을 발했다. 어디든 무엇이든 붙들 것이 있다면 그 다음은 어찌어찌 해나갈 수 있었다(281쪽)" 

그래서 현실의 모든 커플들이 이런 희망적인 결말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따뜻하고 세심하게 바라봐주는 작가의 시선이 나는 참 와닿았다. 결혼 적령기의 자녀가 둘이나 있으니 이게 도저히 남의 일 같지가 않아 보이는 거다. 우리 딸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고 남자 친구와 결혼을 결정한 걸까, 우리 아들도 '해영'과 같은 여성을 만나게 될까... 뭐 이런 생각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정말 사람이란 어쩔 수가 없는 건지 나도 모르게 생각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엊그제 사다 놓은 화분에 물을 주었더니 꽃들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천리향의 향기는 썬룸에 진하디 진한 향수를 뿌려놓은 듯하다. 제라늄의 작은 얼굴도 선명해졌고. 책상 앞에 창문을 열고 있어도 오늘은 바람이 차지 않고 상쾌하다. 책 보다 컴퓨터 검색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풍경에 취한다. 이런 평범한 일상과 인생이 이 작품집 속에도 있다. 마지막까지 읽기를 잘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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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발견 - 사랑을 떠나보내고 다시 사랑하는 법
캐스린 슐츠 지음, 한유주 옮김 / 반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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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1월 돌아가신 아버지는 우리 3 남매에겐 더 없이 다정하고 세심하신 분이셨지만, 엄마와 결혼을 하고 군대가셨다 심장 판막에 이상이 생겨 의가사 제대를 하신 이후 몸이 계속 좋지 않으셨다. 공무원 생활을 하시다 결국 퇴직하시고 계속 앓으셨기 때문에 우리 온 가족은 조금씩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그 충격이 여기 이 캐스린 슐츠와는 다른 강도로 다가왔던 거 같다. 엄마와 우리 3 남매는 늘 하던대로 엄마는 홀로 힘들게 우리 3 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기 위해 고군분투 장사를 하시고 우린 학교 갔다 오면 누군가 한 명은 엄마를 도와드리고 우리는 그저 우리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아버지께선 우리에게 더없이 다정다감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성격이 강하고 한편으론 우악스럽게 느껴지기도 한 우리 엄마와의 일상은 쉽지 않았고 불화의 연속이었으며 그래서 더욱 아버지의 부재를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살아내느라 너무 바빠서 그걸 여유롭게 돌아보고 되새겨볼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더 오래 사시다 우리와 좋은 시간을 보내셨더라면 아마도 그 충격은 이 책의 작가와 같은 상실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난 아버지를 약간 어려워하면서도 너무 좋아했으니까...!



캐스린 슐츠가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가지게 된 상실과 애도의 시간들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같지는 않겠지만 누구나 이러한 감정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공감하게 될 거라고 본다. 이 글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내 남동생이다.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겪은 상실감보다 젊고 건강했고 아버지를 닮아 다정하고 천상 선비 같았던 우리 남동생이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병으로 급작스럽게 하늘나라로 가버렸기 때문에 그 충격과 상실감, 애도와 눈물, 비탄과 후회의 시간은 길었다. 당시 9살, 초등학교 2학년이 막 되었던 조카가 이제 대학생이 되었을텐데... 지금도 생각만 하면 눈물 나는 최고의 눈물 버튼이다. 가끔 여동생과 통화하면서 동생 얘기만 하면 목소리가 먹먹해지면서 둘 다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 눈물 흘린다. 남동생은 아버지가 가신 후 우리 집안 여자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착한 우리 남동생을 계속 생각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생이 잊혀지는 게 맘이 쓰이기 때문이다. 잊고 싶지 않은데 그러니까...



캐스린 슐츠는 '1부 상실'에서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상실의 아픔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언제든 상실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올 것임을 알기에 작가가 이끄는대로 함께 애도해나가는 친절한 손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애도하는 중이라도 우리의 일상은 충실하고 행복과 기쁨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행복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게 된다. 상실과 애도의 시간 속에서 살아남은 나 혼자 이렇게 기뻐하고 웃고 행복해도 되는 것인가 고민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고, 이러한 행복한 시간 속에 우리 동생이 영원히 함께 있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팠기 때문이었다. 



'2부 발견'의 시작은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들판에서 우연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을 발견한 소년 '빌'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이 이야기의 결말은 놀라운 인연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1부에서도 그렇지만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놀라운 발견의 순간들에 대해 조곤조곤 들려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발견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기 전 작가는 사랑하는 여인 C를 만난다. 결혼을 결심하게 될 정도로 소중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서로의 닮은 점을 기뻐하고 차이점을 알아가면서 천천히 평생의 반려자,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도 들려준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 세상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과정을 듣다 보면 나의 인생에서도 이러한 소중한 일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C의 고향마을에 정착하게 된 캐스린 슐츠는 C의 부모님을 만나게 되는데 '빌'은 그녀의 아버지였던 것... 이 부분을 읽으며... 음, 이 작가 글을 풀어나가는 실력이 정말 뛰어난데... 오호....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3부 그리고'에서는 이 단순한 접속사가 가진 놀라운 힘을 말한다. 그리고는 한 단어와 한 단어, 하나의 개념과 다른 하나의 개념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우리와 세계가 연결될 때 어떤 상실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삶은 찰나이기에 "인생을 잘 산다는 건 보이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것임을 말한다. 그 결과 '그리고'는 한낱 접속사와는 달리 연속된다는 기분을 안겨준다. 슐츠는 그녀 C와 결혼을 하고 나서 행복한 일상, "매일의 비범함(remarkableness)"을 경험하는 현재를 영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일본어로 "모노노 아와레"라 부르는 것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는 바꿀 수 없는 운명에 공감하고 불쌍히 여기며 그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감정을 말한단다.

 작가가 지금까지 말한 '상실과 발견'의 감정은 "찰나의 폭로를 통해 우리의 실존적 조건을 깨닫는 느낌이다. 삶이 얼마나 근사한가, 얼마나 허약한가, 얼마나 찰나인가. 이 감정이 우주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조그만 위치에 대한 반응에서 일부 비롯되기는 해도, 경이로움awe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이 감정에는 너무 많은 일상이, 또 너무 많은 슬픔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 얘기하는 감정은 광휘도 공포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신 감사한 마음과 갈망, 그리고 예측된 슬픔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어단어에서 이 감정과 가장 가까운 혈족은 '달콤 쌉싸름한bittersweet' 일 것이라고 말한다. '달콤 쌉싸름한' 이 행복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해도, "이 단어의 내밀한 기원은 우리가 세계와 마주할 때의 필연적인 측면, 즉 우리가 가진 전부를 언젠가는 상실하게 된다는 문제를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유형의 '그리고'에 대해 이 말이 가장 적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슬픔은 어떤 형태건 우리의 슬픔과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는 자각". '그리고'에는 이토록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단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캐스린 슐츠는 아버지의 상실 이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상대적으로 어머님에 대해 소홀한 것이 아니라고도 말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하지 못하는 집안의 모든 대소사와 교육과 육아를 챙기면서 자신의 일도 잘 챙기신 분이셨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몫이 결코 아버지에 뒤지지 않았다고...

남동생이 떠나고 난 후 오랜 시간 동안 엄마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우리보다 더 남동생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엄마의 자부심이었던 동생은 남편의 대신이자 집안의 가장이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대단한 존재였다. 적어도 엄마에겐 그랬다. 그래서 우리와 엄마 사이엔 서로 이 공감이라는 것이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가능했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거나 대화를 하게 되면 그 즉시 서로의 해묵은 감정들이 올라와 싸움이 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렇게 강건하고 괴팍하고 독선적이고 독립적이어서 혼자서도 잘 드시면서 뭐... 천년만년 잘 살아가실 것 같던 엄마가 어느 날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연락이 왔다. 특별히 병이 있으셨던 건 아니고 영양실조... 영양 불균형으로 쓰러지셨다고 했다. 특별한 병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동안은 엄마도 일흔이 훨씬 넘은 노인이라는 자각이 없었던데다 워낙 사이도 안좋으니 차라리 자주 만나지 말자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엄마는 혼자서도 잘 사실 줄 알았다. 나이가 드시면서 원래도 좋아하지 않았던 육류를 전혀 드시지 않아 단백질 부족으로 인한 영양 불균형으로 쓰러지신건데... 영양불균형으로 그럴 수 있단 것에 깜놀!!! 한동안은 골고루 반찬을 해서 갖다 드렸는데 너무 멀고 번거롭고 특히 엄마와 우리의 음식 취향이 너무 달라 빠른 포기. 그런 후 차라리 엄마에게 고기를 보내드리는 것이 낫다 싶어 코스*코 가서 고기를 사서 한 번 먹을 양 만큼 소분해서 냉동시켰다 보내드린다. 스테이크용, 국거리용, 보쌈용, 구이용, 장조림용.... 소화도 잘 되고 부드러운 고기를 다양하게 보내드리려다보니 그것도 보통 일은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더 나이가 드셨고 그렇게라도 안하면 안드시는데 엄마가 이걸 또 엄청 좋아하신다. 의외로! 그래서 몇 년째 계속 해나간다. 그렇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더해지면서 조금씩 서로의 앙금이 풀려나가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엄마의 삶을 공감해주고 격려하는 대화도 하게 되었다. 우리를 위해 무언가 남겨주려 애쓰지 말고 엄마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가고 싶은 여행 마음대로 하시라고.... 내일 당장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건강할 때 하시라고... 이런 말들이 엄마의 감성을 건드렸나 보다. 요즘은 엄마와 거의 싸우지 않는다. 꽤 됐다~~^^ 그동안 몰랐던 건데 엄마와 어찌하면 잘 지낼 수 있는지 알게 된 것이 동생이 하늘나라 가고 내가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다. 정말 안된 말이지만 동생이 있었다면(동생아 미안 ㅠㅠ) 아마 평생 엄마와 불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시 엄마와의 튀르키예 여행을 예약했다. 작년 가을 떠나려다 어그러져 엄마가 엄청 속상해 하셨다. 내가 엄마와 여행 가기 싫어서 취소한 걸로 오해하셨던 건데 이젠 엄마가 원하면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 노인네는 이제 말끝마다 내가 언제까지 멀리 비행기 타고 여행을 갈 수 있겠냐고 반 협박조로 말씀하신다. 그러니 지금 건강이 허락할 때 꼭 딸하고 여행 가고 싶으시다니... 어쩌겠는가. 엄마가 경비를 다 내신다니 덕분에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럭셔리 여행을 가게 생겼다. 감사한 마음으로 따라갈 밖에.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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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2-27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저도 아빠의 몇 번에 걸친 수술과 입원을 겪으면서 상실이라는 게 나에게도 이제 훅, 다가오겠구나 생각했었어요. 은하수 님의 리뷰을 읽고나니 제가 이 책을 사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덜 아픈건 아니겠지만, 이 책을 읽는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은하수 님.

은하수 2025-02-27 12:59   좋아요 0 | URL
상실은...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아무리해도 막을수가 없죠. 안타깝게도 다가오고야 말죠!
이 책 저도 작년에 시작했는데... 이제서야 다 읽었어요. 근데 읽길 너무너무 잘했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 책 읽는 중에 엄마 연락와서 정말 엄마랑 여행가기 싫은 거냐고 물어보셔서 철렁했거든요. 엄마가 마냥 편하진 않아도 여행조차 가기 싫을 정도는 아닌데 싶어... 안쓰러웠어요. 그런 엄마가요. 다시금 살다보니 이런 생각도 하게 되네 싶더라구요. 상실을 겪고나서 후회하는거보다 지금 좀더 잘하고 싶어졌어요^^

꼭 완독 하시길요~~^^
 
표면으로 떠오르기 세리프
캐슬린 제이미 지음, 고정아 옮김 / 빛소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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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린 제이미는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에세이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풍경과 문화에 뿌리를 두면서도 여행, 여성문제, 고고학과 시각예술 등을 아우르는 작품을 쓰고 있다. 2021년 스코틀랜드 마카르Makar(스코틀랜드 정부가 지정한 국가 시인)로 임명되었다. 자연과 풍경을 그린 에세이집을 활발하게 집필하고 있는데, 『발견들Findings』,시선들Sightlines』, 『표면으로 떠오르기』가 폭넓은 찬사를 받았다. 

이 중 "빛소굴 세계산문선" 세리프Sefif로 『시선들』과  『표면으로 떠오르기Surfacing』가 간행되어 있고, 

이 두 권을 모두 읽은 셈이 되었다. '세리프' 시리즈로 출간되기 전엔 이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지만 먼저 

출간되었던 『시선들』을 읽고 나서 이 세리프 시리즈를 한 권, 한 권 다 읽어보고 싶단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 3권의 책만이 출간되었지만 말이다. 





먼저 읽었던 『시선들Sightlines』을 읽으면서도 그랬고,  『표면으로 떠오르기Surfacing』를 읽으면서도 실감하게 되었는데 작가 존 버거의 말처럼 "독자의 세계를 한층 넓혀주"는 글이란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시선들Sightlines』에서는 병원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세포의 아름다움, 빙산이 흩뿌려진 바다 위를 환히 비추는 북극광, 스코틀랜드 섬 위에 뜬 위성, 보존 작업 중인 고래 턱뼈의 구멍으로부터 뻗어 나간 사색의 경험, 요란하고 심각한 소동이 일어나는 절벽의 가넷 서식지, 박쥐를 따라 나섰다가 발견한 동굴- 속 신석기 시대 벽화 중앙에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새-인간 벽화 -을 찾아 나선 여행, 절벽들 사이를 휘돌아 다니는 바닷 속 범고래. 이 모든 여정들이 정확하고 섬세한 묘사로 아주 작은 세상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진 더 넓은 세상 끝, 깊은 심해로까지  우리를 이끈다. 





이번 작품에서도 캐슬린 제이미 작가는 스코틀랜드의 대자연의 풍경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봄날의 웨스트하일랜드 순록 동굴 탐험에 나선 탐험가들은 동굴 깊은 곳에서 표면으로 떠오른 곰의 뼈를 발견했다.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해 그 뼈가 자그마치 4만 5천 년 전의 것임이 밝혀졌다(「순록 동굴」). 

북행 기차를 타고 가는 여행 길, 바다와 숲이 만나는 앵거스의 시골에서 앉은 쪽 창문으로는 소나무 숲이 보이고 그 위쪽으로 배가 바다 위를 유유히 떠가는 상像이 맺혀 있는 모습을 유심히 보면서 윌리엄 스코스비라는 포경선 선장의 놀라운 경험을 들려준다. "7월의 어느 화창한 날, 바람이 가볍고 대기의 굴절률이 높을 때 스코스비와 선원들은 놀라운 광경을 맞닥뜨렸다. 하늘에 배 두 척이 뒤집힌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그 배들을 알았고, 그것들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15킬로미터 너머의 거리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로부터 2주일 뒤에 그 현상이 다시 나타났다. 북극 여름 저녁의 투명한 하늘에 배 한 척이 나타났다. 뒤집혀 있었지만 그 모양이 너무도 선명해서 돛 하나하나가 뚜렷이 보였다. 그는 그 배에 아버지의 배 이름을 따서 '페임 호號'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배는 당시에 수평선 너머에 있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수평선 너머를 볼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162~163쪽)" 하고 "하늘에 뜬 배" 일화를 들려준다. 짧은 글이지만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유리에 비친 모습」).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된 북구 하일랜드의 오크니 제도에서 신석기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과 경험을 토대로 써내려간 「링크스 오브 놀틀랜드I,II,III」도 다시 한 번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들고 외연이 확장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무엇보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에세이는 이 책에서 다소 긴 분량을 차지하는 두 편인데 모두 스코틀랜드 바깥을 배경으로 한다. 하나는 젊은 시절 방황할 때 찾아갔던 티베트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마주한 경험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추억하는 여행기이고(「바람의 말馬」), 다른 하나는 알래스카에서 고고학 발굴에 참여하여 에스키모인 조상들의 유물 발굴을 도왔던 경험을 쓴 이야기(「퀴나하크에서」)이다. 


티베트 여행을 소재로 했던 「바람의 말馬」은 중국 당국의 지배력 강화로 인하여 티베트와 긴장 상태에 놓인 불안한 티베트의 정치 상황이 배경으로 깔린다. 당시 중국 북경에서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로 인하여  5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내용이 본문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북경 '천안문 사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베이징에서의 불안한 정치 상황은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티베트에도 여파를 미쳐 여행객으로 갔던 작가를 비롯한 외국인들에게까지 불안을 야기하고 급기야는 예정했던 여행을 마치지 못하고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 이른다. 파키스탄 북동부에서 육중한 구형 버스를 타고 카라코람 고속도로를 달려 길기트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버스로 파키탄과 중국의 국경에 있다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경이라는 '쿤자람 고개'를 넘는 힘겨운 여정을 거쳐 마침내 경이롭고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높은 고도, 거친 설산,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놀랍도록 차가운 공기에 대한 감각이 강렬하고, 물이 흐르는 험준하고 아름다운 어느 계곡과 황량한 산비탈에 흩어져 보석처럼 반짝이던 집들이 생각나는 티베트의 중심 도시 '카슈가르'에 닿은 일을 읽을 때 흔히 티베트 여행이라고 하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정경이 글 속에 살아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 단편의 제목과 관련한 것인데, 호텔에 방을 잡고 바라본, 호텔 담 너머로 보이는 마을에서 바람에 '오색 경번'이 펄럭이는 모습이다. 언덕 위 티베트의 마을을 가장 아름답고도 이국적으로 만드는 풍경이 바로 '오색 경번'이 펄럭이는 모습이 아닐런지...


   "벽돌 담 너머 펼쳐진 땅 몇 미터 아래에는 쪼그라든 강이 있었다. ... 그 강은 황하의 지류였는데, 마을이 언덕 지대에 자리해서 해발 고도가 2,700미터 가량 되었기 때문에 봄에는 눈 녹은 물이 흘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6월 초라 눈이 없고 언덕은 푸르렀다. 마을 위쪽에서는 양과 야크 무리가 풀을 뜯었다. 아침이면 창밖으로 안개가 걷히면서 가장 가까운 봉우리에 있는 돌무덤과 그 곁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오색 경번들이 보였다. 경번. 이걸 보려고 참 먼 길을 왔구나, 하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장대에 매단 그 천 조각들을.(28쪽)"


이 에세이의 제목을 뜻하는 '바람의 말'도 이 경번에서 유래한다. 경번經幡prayer flags은 티베트 불교에서 쓰는 깃발로서 모두 다섯 가지 색깔이 있다. 가로로 거는 것을 '룽다'라고 하고 세로로 거는 것을 '타르초'라고 하는데, 이 중 룽다, 즉 가로로 거는 깃발을 '바람의 말馬'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가로와 세로로 거는 깃발에 각기 다른 이름이 있는데 그 중 가로로 거는 깃발을 '바람의 말'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었다, 달리는 말을 연상케 하는 깃발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퀴나하크'의 위치를 설명하는 글로부터 시작하는 「퀴나하크에서」.... 이 아름다운 에세이는 작가가 위도 60 도선의 지도를 한 바퀴 돌아 알래스카 주, 베링 해에 이르고 거기에서 알래스카의 마지막 150킬로미터 지역에서 쿠스코큄-유콘 삼각주를 지나 퀴나하크 마을에 이르는 길을 설명한다. 이마저도 아름답다. 퀴나하크 마을. 그 마을은 북위 60 도 선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지도를 보면 도로는 없고 녹색 물길과 얼음 녹은 웅덩이들만 보인단다. 여름엔 그렇고... 겨울엔 물론 강이 얼고 눈이 높이 쌓인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학 발굴은 짧은 여름 동안만 가능하다. 


마을엔 주민이 7백 여명 정도, 대부분 유피크Yupik 족이고 이들의 강인 카네크토크 강은 유명한 연어 회귀천이다. 이 단편을 읽다 보면 기후 위기라는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얼음이 녹아서 에스키모인들이었던 유피크 족은 원래 살던 곳에서 계속 남쪽의 땅으로 거주지를 이전하고 있는 중이다. 사진으로 보면 해변은 직선으로 1.5미터가량 뻗은 검은 모래밭이다. 바다를 마주하고 툰드라가 겨우 2~3미터 높이로 솟아있다. 해수면의 빠른 상승으로 툰드라가 빠르게 부식되고 있고 매일매일 새로운 흙덩이와 초목이 모래밭으로 떨어져 내려와 바다에 휩쓸린다. 그리고 영구 동토층이 녹아서 땅 자체가 버티지를 못하고 점점 바다에 굴복하려고 한다. 결정적으로 이 툰드라 벽을 바다가 할퀴어서 묻혀 있던 유피크 족의 선조들의 마을이 표면으로 드러났다. 퀴나하크 주민들은 전부터 이 지점에 오면 흙에서 갖가지 용품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유피크 물건"

그들의 조상이 바깥 세계와 접촉하기 전, 유럽인들이 오기 전, 기독교 선교사들이 강을 타고 올라오기 전에 쓰던 장신구와 기구와 물건들... 이 누날라크 마을 현장은 겨우 5백 년 되었지만, 유피크인이 수렵채집으로 자급자족하던 시절,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던 시절을 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서구인들의 침탈로 명맥이 끊긴 그들의 문화, 그들의 전통을 잇고자 마을 회의를 거쳐 이 누날라크 마을을 발굴하기로 결정한다. 고고학자들과 고고학에 관심있는 대학생들, 그리고 마을의 젊은이들이 매해 발굴에 참여하게 되었고 발굴이 진행될수록 점점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문화를 알아가고 전통을 잇고자 애쓰게 되었다. 그해의 발굴이 끝날 시점에 전시회와 발표회 등을 하면서 주민들은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들에 참여하는 퀴나하크 마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풍경과 계절에 따른 유피크의 생활도 자연을 닮아있다. 베리를 따서 잼을 만들고 베리 따기가 끝나면 연어 낚시 철인데 겨울이 오기 전에 손질하고 말리고 얼리고 훈연해 두었다가 내내 먹는다. 연어 철 다음에는 말코손바닥 사슴 철이 오고 그 다음에는 

송어 철... 그러고 나면 겨울. 겨울이 오면 눈과 얼음이 풍성하기를 기다렸다가 언 강을 타고 툰드라 지대로 가서 늑대에 쫓겨 내려오는 순록을 잡는다. 뇌조를 잡기도 하고... 뇌조 수프는 물범 기름을 뿌려 먹어야 한다는데... 봄이면 얼음 낚시로 바다코끼리와 물범을 잡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 현대인, 도시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생활 모습이지만 이들의 사계절은 정말 빽빽하게 할 일이 많다. 유피크 족 사람들은 기꺼이 순응하고 

만족하며 살아간다. "자신들의 땅과 아주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영적이다.... 그런 그들에게 선교사를 보내고 그 땅을 정복하고 유피크인의 문화를 잃게 만든 외부 세계는 이제 그들에게 방송국 촬영팀을 보내고 카메라를 들이대며 "자연친화적 삶"이라고 포장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작가가 아마추어 고고학자로서 동굴탐험을 하고 퀴나하크와 북구하일랜드의 오크니 제도에서 발굴에 참여한 경험은 이 책 전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땅은 신화의 시대가 아닌, 실제적인 삶을 살았던 생명이 살아 숨쉬는 땅이었고, 이들의 삶과 그 실제성을 발굴을 통하여 체험함으로써 "지나간 삶과 현재의 삶, 앞으로의 삶을 다층적으로 투시해 보여"주고 있는데,  이 책의 제목이자 각각의 에세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면으로 떠오르기'라는 이미지와 표현을 통해서 더욱 생생해진다. 발굴된 유물들이 마침내 '표면으로 떠올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저자가 티베트 여행 중 개에게 물렸던 사소한 기억이 20년도 더 지나 저자의 꿈 때문에 기억이 표면으로 떠올랐고, 저자의 할아버지가 광산 매몰 사고 후, '지상으로 올라온' 경우도 그러하다. 공기를 타고... 예민한 감각으로 공기의 결을 가늠하며 상승 기류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수리의 묘사에서도 그러하다.


   "이 "떠오르기"들은 하나같이 생명력으로 이어진다. 잊혀졌다고 생각한 것들이 살아 돌아와서 파괴된 공동체를 복원해주고(「퀴나하크에서」), 생명을 되살려주며(「지상으로 올라오기」), 때로는 병마를 이기는 기묘한 계시가 된다(「티베트의 개」)(268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이 책의 담백한 문장들에 담긴 깨끗하고 빛나는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작가를 따라 여행을 다녀온 듯, 그리고 거기에 깃든 인류 생명체의 깊고 오랜 역사를 표면으로 끌어올려 잠시 들여다보고 돌아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이 책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웨스트하일랜드의 웨스트레이 스톤에 새겨진 나선형 무늬처럼 모든 것이 다시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처음과 다른 것일지라도 깨달음의 시간들로 인해 우리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캐슬린 제이미는 여행을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시간들을 반복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이처럼 멋진 에세이를 남기려고.... 나도 한번은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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