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봄날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6
오 헨리 지음, 송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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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마음이 풀어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체질상 음식을 많이 먹지는 못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도 좋아하고 관심도 많아서 여기저기 채널을 찾아 다니면서 이것저것 해보기도 하고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서 자주 먹어본다. 색다르면서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도 식구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한 두 번 해보다 그만두는 경우도 다반사이지만 그럼에도 평소 우리 집에서 해 먹던 스타일대로가 아닌 새로운 방법을 살짝 가미해서 변형한 음식들의 반응이 좋을 때는 더없이 기분이 좋고 뿌듯해서 그 레시피대로 정착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책으로 읽게 되는 음식이야기들이야 말할 것도 없이 넘넘 궁금하고 그 맛이 어떨지 상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솔직히 우리나라 음식이나 먹어본 음식이 아닌 경우에는 그 맛을 상상할래야 상상이 되지 않고, 그 음식이 이야기의 전개상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을 때는 특히 그 맛이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런 궁금증은 외국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누구나 겪는 현상일 것이다. 

음식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 하나 더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 외국 음식의 메뉴판을 보면 정말 친절하게도 그 음식에 들어간 재료가 무엇인지 구구절절 친절하게 나열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소설 속에서도 뭐가 들어가고 그 재료는 어디에서 온 것이고 어떻게 조리가 되고 어떤 방식으로 숙성이 되고 등등 굳이 이런 거까지 다 써놔야 하나 싶은 것들까지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는 부분들이 있다. 어이쿠야! 내가 그걸 읽는다고 해서 맛을 상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는 재료라면야 음... 그럼 이런 맛이겠군 싶다가도 결정적으로 모르는 양념이나 향신료가 나왔다간 다시 그 맛은 미궁으로 빠지기 일쑤이고 거기에 조리법마저 구구절절 세세히 설명하는 단계라면... 다시 머리를 부여잡고 "아유 머리 아파 이게 대체 뭐람!"을 외치며 관심도는 나락으로 쳐박히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설명을 곁들였을 때 내가 아는 요리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너무 간단하지만 맛있게 굽기가 의외로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스테이크. 지난주 코스** 갔을 때 스테이크용 고기가 넘 좋아보여서 대량 구매하게 되었다. 고기 상태가 너무 좋아서 소분하여 냉동시키기가 너무 아까운 거다. 그래서 주말에 식구들이 모두 모였을 때 구워 먹었다. 날이 좋을 때는 밖에서 숯불을 피워 구워 먹으면 다른 양념이나 가니쉬가 거의 필요가 없고 기름장만으로도 그야말로 금상첨화지만 지금은 추워서 불 피우기 엄두가 안나 따뜻한 실내에서 구워 먹기로 했다. 별거 아니지만 그날의 레시피를 적어보자.


   "먹기 한 시간 전에 스테이크용 소고기(미국산)를 꺼내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와 블랙페퍼를 뿌려 시즈닝해두었다가 팬을 센불로 달군 후 스테이크를 앞뒤로 돌려가며 구워준다. 이때 염도가 낮아 스테이크용 소금으로 좋다는 잘츠부르크 소금을 뿌려준다. 스테이크에서 나온 기름을 이용하여 가니쉬를 구워준다. 가니쉬용으로는 아스파라거스, 마늘, 양파, 브라운송이 등을 준비했다. 중불에서 구워 접시에 세팅하고 파슬리 가루를 뿌려준다. 소금장을 내도 좋고 쥬세페 주스티 모데나 5 메달 20 년 산 발사믹을 종지에 담아내도 좋다." 


그야말로 식구들이 순식간에 흡입을 했다는 건 말하나 마나!

여기서 잠깐... 내가 만약 이 잘츠부르크 소금과 주세페 주스티 모데나 5 메달 20 년 산 발사막의 맛을 모른다면.... 그러면 어땠을까. 난 어떤 생각을 할까. 소금이 다 그렇지... 혹은 발사믹이 거기서 거기 아닌가 하면서 상상이 안되니 답답하지만 두루뭉실 그냥 넘어가겠지. 사실 잘추부르크 소금은 내가 생각하기에 염도만 살짝 다를 뿐 일반 소금과 별 차이를 모르겠고 발사믹은 분명 맛이 천차만별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레시피를 읽었다면 그 맛이 더 와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난 이렇게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이 된 음식 이야기를 문장으로 읽을 때면 내가 그 맛을 모르고 상상할 수 없어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 더없이 마음이 따스해지면서 깊이 빠져드는 나 자신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렇게 자세히 설명된 레시피나 메뉴판을 대할 때면 그 음식에서 정성과 사랑, 따뜻함, 배려가 느껴진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다. 스테이크야 어떻게 구워도 맛있는 거 아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요리를 해 본 사람이라면.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그 음식을 조리한 사람의 정성과 사랑, 배려, 따뜻함을 함께 먹는 거란 생각이 들어서 더없이 그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오 헨리의 단편집 『식탁 위의 봄날』에는 음식과 관련한 18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익히 알고 있는 「마녀의 빵」,「크리스마스 선물」,「마지막 잎새」,「경찰과 찬송가」 등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하다. 이 단편집은 오 헨리의 수많은 단편들 중에서 음식과 관련한 단편들을 가려내어 묶었다는데 특별함이 있다. 그의 단편의 주인공들은 대도시의 냉혹하고 무정한 뒷골목에서 가혹한 하층민으로서의 삶을 견디며 살아가지만 작가의 눈에는 따뜻함이 머물러 있다. 가난하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 머무는 기적과도 같은 한 순간을 그들에게 선물함으로써 사람들은 온기와 희망을 얻는다. 그래서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잠시 마음이 쉬어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애정을 담아 집필했기에 더 음식이 소중했는지도 모른다. 정성을 다한 음식을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면서 친밀감을 느끼고 온기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소중한 일상의 풍경이 아니겠는가! 


「하그레이브스의 연기」에서 미국 남부 스타일의 줄렙(위스키에 설탕, 박하 등을 넣은 청량음료)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성을 다해 만들어 대접하는 모습, 「녹색의 문」에서 며칠 간 굶어 쓰러지기까지 한 처음 만난 아가씨를 위해 한달음에 달려나가 두 팔 가득 음식을 구해 온 젊은이, 추수감사절을 맞아 굶주리고 있는 신사를 위해 식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배불리 먹이려는 마음을 담은 「추수 감사절의 두 신사 」, 임신한 아내가 먹고 싶다는 복숭아를 구하기 위해 봄날의 늦은 밤거리를 헤매는 권투선수의 이야기를 담은 「힘들게 얻은 과일의 작은 흠집」등을 읽노라면 재치있는 그 입담과 따스한 배려의 마음이 저절로 전해져 옴을 느끼게 된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길다고 할 수 있는 「식탁 위의 큐피드」는 그야말로 음식 자체가 작품의 제목이 되기도 한다. 식탁에서 먹고 또 먹고 끊임없이 먹어대는 남성들의 모습을 "두 발 달린 되새김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며 두 청년의 구애를 거절하던 메임 양이 어느 날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프의 마차를 얻어타고 같이 길을 가게 되었는데 길을 잃은데다 갑작스런 폭우에 외딴 오두막에 피신을 하게 되고 물이 빠지지 않아 며칠 간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배가 너무 고파진 그녀와 제프는 맛있는 음식을 상상하며 줄줄이 음식들을 나열하는데 그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거 아닌가. 두껍게 썬 고기는 레어로, 프렌치프라이랑 계란 여섯 개를 부드럽게 휘저은 스크램블드 에그를 토스트 위에 얹고, 생맥주 한 잔,미디엄으로 구운 스테이크와 줄리엔(잘게 썬 야채를 넣은 묽은 수프) 세 개, 팬케이크는 노릇하게, 쌀을 곁들인 작은 카레 양념 닭구이, 아이스크림이랑 커스터드 한 컵, 닭간 파이랑 토스트에 바른 콩팥 소테, 양 구이, 박하 소스랑 칠면조 샐러드, 속을 채운 올리브, 산딸기 타르트랑 옥수수 빵, 하드 소스 뿌린 사과 파이에 듀베리 파이... 이 얼마나 즐거운 대화인지... 그들이 먹고 싶은 음식 이야기는 끝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녀는 남자들에 대한 편견을 떨쳐버린다. 

익히 아는 단편이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의 두 연인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들의 대단히 자랑스러운 재산을 기꺼이 팔아버린다. 아내 '델라'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남편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금시계의 줄을 장만한다. 남편 '짐'은 금시계를 팔아 아내의 아름다운 머리를 더욱 윤기나게 빗어내릴 수 있는 빗 세트를 선물한다. 서로의 선물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심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다.

   " ....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은 아무도 셀 수 없을 거예요. 고기 넣을까요. 짐?" 

   "델라, 우리 크리스마스 선물은 잠시 치워두도록 합시다. 지금 당장 쓰기에는 너무 좋은 것들이라서요. 당신 빗을 살 돈을 마련하느라 시계를 팔았어요. 이제 고기를 넣어도 되겠군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오 헨리는 대중적인 인기에 비해 평단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단편들의 전개가 지나치게 우연이 남발되고 있고 비극보다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식탁 위의 봄날」,「아르카디아의 단기 투숙객들」,「물레방아가 있는 교회」등은 모두 주인공들의 만남이 예기치 못한 우연에 의한 경우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을 하고 있고 이러한 플롯은 '오 헨리 트위스트'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고  할 정도로 억지스러운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조차도 오 헨리의 작품을 읽는 재미를 떨어뜨리지는 못하는 거 같다. 사실 정말 짧은 단편인데도 그 속에서 주인공들의 삶을 응원하고 있고 제발 원하는 그 사람을 빨리 만나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내 마음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렴 어때! 세라가 그토록 기다리는 월터를 어떻게든 만나기를 바라게 되고(식탁 위의 봄날), 도시에서의 외롭고 힘든 삶에 지쳐 브로드웨이의 여름 휴양지에 있는 아르카디아로 찾아온 두 젊은이 메이미와 지미 맥매너스가 꼭 이루어지길 바라게 되고(아르카디아의 단기 투숙객들), 결정적으로 어린 딸 '애글레이아'를 잃어버리고 회한에 젖어 있던 방앗간 주인 에이브럼 신부가 체스터 양을 만났을 때 제발 그 체스터 양이 '애글레이아 양'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되는 것은 정말 나도 어쩌지 못한다(물레방아가 있는 교회). 마음이 저절로 그렇게 흘러가게 된다. 그래서 두 부녀의 극적인 재회가 정말 억지스럽고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다 싶지만 그럼에도 감격스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음식 이야기이건 아니건 오 헨리의 단편들에는 역시 따뜻함이 느껴지고 뭔가 앞으로는 잘 될거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갖게 되고 결국 사랑스러운 주인공들에 감동하게 된다. 가끔은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행복한 결말이나 신파조의 이야기를 읽는 것도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달까... 마음이 우울할 땐 오 헨리의 단편을 읽으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오 헨리의 단편들처럼 우리 현실도 이렇게 따뜻하고 낙관적인 믿음으로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좀 나아지려는지 도통 낙관할 수가 없으니 가슴이 답답하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ㅈㅁ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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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4-12-14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따뜻하게 읽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그저 편견을 벗어나게 하고, 식당 메뉴판이 연인을 연결해 주고,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과거의 주인을 돕는 뭐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했지 말입니다. 맛을 상상하지는 못했어요. 그저 스프는 따뜻하다, 고기는 단백질이고, 질기면 소화가 힘들텐데 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저도 음식 맛을 상상하면서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현실도 동화처럼 따뜻하면 좋겠습니다^^

은하수 2024-12-14 23:25   좋아요 1 | URL
어... 저도 요정님과 같은 생각 했는걸요. 메뉴판이 연인을 연결해주고 과거의 주인을 돕는 일도 있을 수 있지... 그게 연기일지라도 멋진 일인걸... 하구요^^
근데 저 스테이크 이야기는... 제게 좀 특별한 날이어서 ... 그날 딸램 결혼할 남친이 처음 인사 온 날이라 특히 기억에 남아 있어서 더 이 단편들과 연결이 되었던 거 같아요... 물론 어릴 때부터 음식과 관련한 소설들을 좋아하긴 했지만요... 그 맛을 알 수 없어 늘 답답해하긴 했죠. 어른이 되어 여러 향신료의 냄새와 맛을 알게 되어 좋았던 기억은 잊지 못하죠~~
 
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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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12월 10일 밤 12시부터 오늘 새벽 사이에 방송된 노벨상 시상식 현장의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면서 온전히 한강 작가의 작품과 언어에 빠져 있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시상식을 맞고 싶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며 미리 책을 구입해 놓고 기다리다가 엊그제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예전에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가 심하게 트라우마를 겪은 경험이 있었고,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을 읽으며 제주 4.3의 진상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나름의 준비를 하고 싶었던 거였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소년이 온다>나 <순이 삼촌>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큰 동요 없이 언어의 아름다움에 집중해서 작가가 이끄는 대로 보여주려는 그 세계로 바로 진입하여 모든 준비를 다 마친 사람처럼 의연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순이 삼촌>은 제주 4.3 그날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잔인할 정도로 세밀하게 보여주어 충격을 던져 주었고, 반면에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날의 진실을 하나하나 파헤쳐 나가면서 실종된 가족의 유해를 수습하고자 기울이는 노력의 과정을 보여주는 설정이어서 서로 상보적으로 읽히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 강 작가의 작품에 나타난 제주 4.3의 참혹함이 반감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학습의 결과로 인해 개인적으로 그리 느낀 거라고 생각한다.



새벽 시간에 방송된 시상식 현장의 라이브 방송에서 한 강 작가의 심사평을 작성하여 읽는 스웨덴 아카데미 위원이자 노벨문학상 위원회 위원인 작가 엘렌 마트손의 심사평은 한강의 작품에 대한 찬사를 이어간 우아하고 아름다운 서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절묘하게도 <작별하지 않는다>를 중심으로 쓰인 심사평이어서 더 유심히 듣게 되었고 그 하나하나의 문장들을 받아 적어 남겨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다 더 좋은 리뷰를 쓸 수 있을까? 없다. 펜을 열심히 놀려 적어놓은 심사평을 여기에 남겨본다.



*한강 작가 심사평 : 엘렌 마트손(스웨덴 아카데미 위원, 노벨 문학상 위원회 위원, 작가)


한강의 작품에서 두 가지 색, 흰 색과 붉은 색이 만납니다. 흰색은 눈을 나타내며 작가의 여러 작품에 눈이 내려서 화자와 세상 사이의 보호막을 드리워 줍니다. 하지만 흰색은 동시에 슬픔과 죽음의 색이기도 합니다. 붉은 색은 생명을 상징하지만 고통, 피, 그리고 칼로 깊게 베인 상처이기도 합니다.

작가의 목소리는 매혹적일만큼 부드럽지만 차마 형용할 수 없고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을 말합니다. 학살로 쌓인 시체 더미에서 피가 흐르고 짙어지다가 이내 호소가 되며 또 그리 답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질문으로 변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죽은 자들, 납치된 자들, 그리고 실종된 자들과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들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을까요?

붉은 색과 흰색은 작가가 소설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다루는 역사적 경험을 상징합니다.

2021 년 작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눈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만날 공간을 생산합니다. 중간에 떠다니는 자들은 어디에 속하는지 아직 결정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 소설은 내내 눈보라 속에서 전개됩니다. 소설 속의 화자는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면서 시간의 층을 미끄러지듯이 통과하고 죽은 자들의 그림자와 소통하고 이들의 지식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결국 모든 것은 지식과 진실을 추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과정이 견디기 어렵다고 해도 말입니다. 

절묘하게 구현된 한 환상에서 소설 속 친구는 육체가 머나먼 병상에 갇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장에서 자료집이 담긴 상자를 꺼내 역사의 모자이크 한 조각을 더해줄 수 있는 문서를 찾아냅니다. 꿈은 현실로 넘쳐흐르고 과거는 현재로 이어집니다. 경계가 녹아 사라지는 이러한 변화는 한 강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더듬이를 뻗어 양 방향을 가리키며 신호를 포착하고 또 해석하려 합니다. 인물들은 때때로 본인이 보고 목격하는 것으로 인해 좌절하기도 하며 그럴 때는 매번 마음의 평화가 무너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필요한 힘을 가지고 계속 나아갑니다. 결코 잊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죽였지? 살해 당한 소년의 혼이 묻습니다. 소년의 이목구비가 문드러지고 윤곽선이 무너집니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다른 질문이 남습니다. 오로지 고통만 남겨준 이 몸뚱이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문으로 으스러져 피 흘리는 이 몸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몸이 포기하려 하면 영혼이 말을 이어갑니다. 혼이 피폐해지면 육체가 걸음을 이어나갑니다. 깊은 내면에는 고집스러운 저항, 말보다 강한 고요한 주장 또한 있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잊으려고 하는 것은 목표가 아니며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한강의 작품 세계에서 사람들은 상처 입고 취약하고 어떤 면에서는 약하지만 그래도 충분한 힘을 가졌습니다. 또한 꼭 필요한 힘을 가졌기 때문에 한걸음 더 나아가고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자료를 하나 더 요청하고 살아남은 목격자를 한 명 더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이 희미해지며 죽은 자들의 그림자는 벽 위를 계속 맴돕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으며 그 무엇도 끝나지 않습니다.


친애하는 한 강 작가 님, 한림원을 대표하여 2024년도 노벨상 수상에 진심으로 따뜻한 축하를 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출처: SBS TV)




시상식이 끝나고 이어진 축하연에서 한 강 작가가 수상 소감을 영어로 낭독하였는데 한 편의 단편소설 같았던 이 글도 남겨둔다. 1,300 여 명만 초대 받은 연회장에 한강 작가를 소개하는 한국어가 울려 퍼졌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소개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약간 어색하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소개하는 음성이 귀에 쏘옥 하고 들어와 박혔다. 올 블랙의 수수한 롱 드레스를 착용한 한강 작가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약 4 분간 연회장에 울려 퍼진다. 


제가 여덟 살이던 날을 기억합니다. 

오후 주산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비가 너무 세차게 내리자 20 여 명의 아이들이 건물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길 건너편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처마 밑에 또 다른 작은 군중이 보였습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제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물기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저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이 모든 사람들, 

그리고 건너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나'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요.

저와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 이 비를 보고 있었습니다. 제 얼굴에 촉촉이 젖은 비를 그들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일인칭 시점을 경험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쓰면서 보낸 시간을 되돌아보니 이 경이로운 순간이 몇 번이고 되살아났습니다.

언어의 실을 따라 또 다른 마음 속 깊이로 들어가 또 다른 내면과의 만남,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질문을 실에 매달아 다른 자아에게 보내는 것. 

그 실을 믿고 다른 자아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 

이러한 질문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져온 질문이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묻는 언어, 

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과 생명체의 일인칭 시점으로 상상하는 언어,

우리를 서로 연결해주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지니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문학을 위한 이 상이 주는 의미를 폭력에 맞서는 분들과

이 자리에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SBS TV)




아침 나절에 미용실에 가서 머리 염색을 하고 왔다. 외출할 일이 별로 없어 흰머리가 몇 센티미터나 올라오고 있는 것도 상관없이 지냈는데 갑자기 부부 동반 모임이 있어서 외출할 일이 생겼다. 한강 작가는 화장 안한 수수한 얼굴로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했던데 ... 그래서 더 멋지지 않으냔 말이다. 근데... 난 그게 안된다. 돌아와서 오후에 마리아 미즈의 <마을과 세계>를 펼쳤는데 서문에 이런 문장이 첫 문장으로 나온다. 


     우리 마을의 규범을 따르지 않던 타보 디디(Tabo Didi)는 언젠가 "인간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아요!" 라고 말했다. 나는 이 철학적인 말을 잊지 않았다.(9쪽)


한강 작가의 소감문을 읽으면서도 자연스레 든 거지만 이 문장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를 보고 드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지금의 우리 나라의 상황과 연결이 되었다. 물론 작가의 작품 제주 4.3 사건 당시의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힘없는 국민들은 국가 권력의 총칼 앞에, 장갑차 앞에 맨몸으로 맞선다.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는 일인데 다시 또 계엄이라니... 머리가 쭈뼛 서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12월 3 일의 그 밤을 잊지 못한다. 살아서 계엄을 또 겪게 될 거라곤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한강 작가와 마리아 미즈는 잊지 않기 위해서, "망각에 저항해" 쓰고 또 쓰면서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거다. 문학의 힘을 믿는 한강 작가의 소감문이 주는 감동으로 오늘 하루도 이겨내고 다시 힘을 내본다. 

기어코 ... 이루어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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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4-12-1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하수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한강 작가 심사평, 한강 작가 수상 소감 둘 다 너무 좋네요^^b

은하수 2024-12-12 11:10   좋아요 1 | URL
그쵸~~~~?^^
저 새벽에 이 문장들 들으면서 가슴이 너무 벅차오르더라구요!
조곤조곤 읽어나가는 두 작가의 목소리에 위안 받았답니다.~~
넘 멋진 여성들이지 않습니까!^^

고양이라디오 2024-12-13 22:10   좋아요 1 | URL
목소리 직접 들으면 더 좋을 거 같네요!!!

한강작가님 낭독도 너무 좋아요ㅜ
 
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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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은미 작가의 이 소설집에 수록된「눈으로 만든 사람」,「나와 내담자」,「내게 내가 나일 그때」의 3개 단편은 '폭력 생존기' 3부작, 혹은 '친족 성폭력 생존기' 3부작(오혜진 평론가)이다. 이 작품은 물론 '정희진의 공부工夫 10 월호'를 듣고 읽게 된 거지만 평소 최은미 작가에 대해 품고 있던 나름의 평가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나를 설레게 한다. 앞으로 최은미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게 될 테니까. 그리고 역시 정희진 샘의 추천은 이번에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 ㅡ배동근 님이 번역한 『고래가 가는 길』도 넘넘 멋진 작품이었지만 에세이와 학술적 고찰을 넘나드는 방대한 양의 작품을 짧은 리뷰로 갈무리 하는 것은 나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ㅡ 이것도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 나하곤 안 맞아... 이랬다면 앞으로 의심을 하게 될 테니까 나만의 감정으로 맺은 독서와 인생의 친구를 잃게 되는 거라 많이 속상했겠지!




세 단편은 친족 성폭력의 경험을 쓴 작품이라는 점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세 작품이 마치 연작인 듯 겹쳐지는 부분들이 있어서 읽고 나면 각기 세 편의 작품을 읽었다기 보단 이어지는 하나의 작품을 읽은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친족내 성폭력 사건들에서 발견되는 유사점이 그런 착각을 불러오고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눈으로 만든 사람」의 강윤희와 「내게 내가 나일 그때」의 유정은 각기 교사와 유명 소설가로서 직업도 다르고 성인이 된 후에 그 사건에 대응하는 방식이나 상처를 대하는 방식이 전형적이지 않은데도 그러하다. 이는 여성 화자들이 통과해온 파괴적인 경험을 서술하는 방식의 동일성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개의 글들에서 일상성을 벗어나는 끔찍한 사건이 서술되고 이로 인한 고통의 양상들을 서서히 풀어나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친족 성폭력 생존기' 3부작의 경우 언어를 통하여 고통을 오히려 확장하였고, "사건 후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깊이 새겨져 있는 흔적들을 더듬어나가며 세계에 대응하는 인물의 몸을 드러낼 뿐", 섣불리 개입하거나 동일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개 방식을 보면서 "전형적인 성폭력 피해자는 없다. 단지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말한 정희진 샘의 말에 결국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래서... 난 세 개이지만 하나처럼 읽히는 이 3 부작 중 「내게 내가 나일 그때」를 줄거리 하나하나 되짚어 가면서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내가 나일 그때」는 친족 성폭력에 대해 쓴 소설이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것임을 밝히고 난 후 결코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 소설가 유정의 이야기를 다룬다. 어린 시절 고향 미산에 살던 시절의 창용이 오빠로부터 아주 오랜만에 전화를 받게 되고 유정에게 언제 한 번 고향에 놀러오라는 말을 들으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거기다 남동생 유태가 막냇 삼촌인 재상이 삼촌 - 성폭력의 가해자 - 의 소개로 미산에 땅을 계약하러 가기로 하면서 누나인 유정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는데, 유정은 어릴 적 당한 성폭력의 트라우마로 인하여 고향엔 절대 가지 않을 거라며 펄쩍 뛴다. 하지만 같이 동행하기로 하는데 고향 마을엔 가지 않고 고향 미산이 내려다 보이는 내린천 휴게소에서 창용이 오빠 가족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유태가 땅을 계약하러 간 사이 유정은 휴게소에서 창용이 오빠 가족들을 기다린다. 


내린천 휴게소는 백미터 높이의 교각 위에 세워져 있는듯 보이는데 그곳에 서면 고향 미산의 마을이 바로 앞에 보이고 허공에 구름 다리처럼 떠있는 듯하면서 비행접시 같기도 하고 야광 삼각자 같기도 한 기이한 형태의 견축물인데다, 내부는 통유리로 되어 있어 뷰가 좋고  푸드코트, 어린이 놀이시설, 쇼핑센타 등을 갖추고 있어서 이 휴게소만 보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유정은 유태가 땅을 계약하러 가고 남은 시간 동안 해바라기 센터 선생님에게 보낸 것인지 회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문자를 쓰면서 요즘 자신이 힘들어하는 상황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다. 자신이 일 년 전 이맘 때, 산문 한 편을 썼고 글이 실린 겨울호 문예지가 집 우편함에 도착하고 그러다 받은 글의 청탁 취지문에 적힌 문장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창작자로서 당신이 부딪히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유정은 자신을 가장 부딪히게 하고 굴절시켰던 것에 대해 쓰고 싶었고, 결국 자신이 썼던 산문이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글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글을 쓴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유정은 이전을 생각했다. 그 산문을 쓰기 이전. 친족 성폭력 얘기를 쓴 자신의 소설이 자전적 경험을 모티프로 한 것임을 밝히기 이전. 재상이 삼촌이 전화를 하면 받고 들렀다 가라고 하면 들르기 이전."(247쪽)


   "유정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그 글을 읽은 것인지, 읽었다면 누가 읽고 누가 못 읽은 것인지, 그들이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글로 써서 발표까지 해놓고 왜 자신은 가족들한테 정식으로 얘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직접 말은 못하지만 이렇게 썼으니 알아서 알아채주길 바라는 것인지, 계속 모르길 바라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247쪽)


   "분명한 것은 가족들은 모두가 이전의 상태에 있고 유정 혼자 이후의 상태로 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 글을 쓴 뒤 유정은 더이상 이전처럼 그러려니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정 자신을 제외한 모든 상황은 이전 그대로였다. 그 불일치가 자신을 어떻게 휘저을지 유정은 그 산문을 송고할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유정은 그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가 일단락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248쪽)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유정은 자신을 충분히 방어할 수 없는 어린 나이였고 가해자는 어른 남성(재상이 삼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 일에 원인을 제공한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 일을 내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는 것도 납득하고 충분히 받아 들일 수가 있는데 "자신이 잘못된 존재가 아니라는 건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259쪽)고 "죄책감은 가까스로 넘어설 수 있어도 수치심은 아직도 거대한 벽이었다."(같은쪽)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러니까 나는 왜 이러냐구요, 선생님. 나는 왜요. 왜 나한테. 왜 나는."(259쪽) 혼자 있을 땐 끊임없이 처음으로 되돌아가면서 거대한 벽을 마주하는 기분이었고 "그때 무엇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어떻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았기 때문에 집에서 가장 가까운"(258쪽) 그 곳 상담소에 전화를 하게 된다. 유정은 이제 더 이상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타인으로부터도 자신으로부터도 자신을 지켜낼 수 없었고 삼십 년 전의 시간들도, 일 년 전부터 시작된 새로운 상황도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동안 전전해온 육아 우울증과  부모 치료와 부부 상담과 만성적인 정신질환들이 아니라 어려서 받은 성학대,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같은쪽)




그런데... 왜? 왜 아무도 유정에게 사과하지 않는 것일까? 가족이라면 사과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왜 아무도. 심지어 엄마조차도 동생 유태도 재상이 삼촌도! 알았다면 알았던 대로, 몰랐다면 몰랐던 대로. 재상이 삼촌에게 당한 성폭력의 경험을 알고 있을 텐데. 유태는 왜 아무렇지 않게 재상이 삼촌을 말하고 만나고 유정에게 고향에 같이 가자고 말하는 것일까? 가족들 누구로부터도 그와 관련해서 어떠한 연락도 받은 적 없는 유정. 미투 운동이 불 붙은 듯 일어나 여성들의 언어와 폭력의 경험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던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었던 친족 내 성폭력의 문제는 여성 피해자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야기하는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결코 쉽게 말할 수 없고 공개할 수도 없다. 결국 그 친족 내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두려움을 감수하고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가 될 지 너무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최은미 작가의 말을 잠시 요약해보자면, '친족 성폭력을 나의 경험이자 개인의 문제로만 갖고 있었는데 '가족내성폭력' 해시태그가 그 당시 트위터를 통해서 제기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걸 공적으로 발화하고 그것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계속 논의되는 장면을 보니까 나도 이것을 공적인 문제로 제기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하게 됐다'(정희진의 공부 10월호, 오혜진 평론가의 말 참조함)고 명백하게 작가의 변을 밝힌 적이 있다. 

작가의 말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듯 유정은 작가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 인물이다. 하지만 말이 넘치는 시대에 말을 하고 글을 썼는데 돌아오는 것은 침묵 뿐이다. 이것이 유정은 더 견디기가 힘들다. 창용이 오빠를 만났을 때 유정은 말한다. "내가 얼마 전에 술을 끊었거든요." ... 술을 먹으면 자꾸, 죽고 싶어진다는 유정의 말에 유태의 얼굴은 더 이상 웃지 않고 일그러진다. 유정은 휴게소의 난간을 붙잡고 서서 고향 미산을 앞에 두고 바라본다. 고향이 바로 보이지만 갈 수가 없고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내린천 휴게소는 불안해서 조증과 극심한 울증을 동반하는 현재의 유정의 심리를 나타내는 중요한 메타포다. 유정은 지금 지독한 울증의 상태를 겪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모든 것을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유태를 자신이 얼마나 괴롭히고 싶어하는지, 얼마나 피 흘리게 하고 싶어하는지를 깨닫는다! "자신이 마침내 무너지는 그 순간에 가장 힘들어할 사람이 유태이길 유정은 바랐"(261쪽)던 것이다.  




내가 이 단편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고 문제적이라고 생각한 말은 이것이었다. 바로 유태의 이 말...!


"누나는 한 번이라도, 소설보다 먼저, 가족들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265쪽)

"누나한테 누나 소설 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같은 쪽)

유정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유태가 말하는 소설이 자신의 모든 소설을 말하는 것인지 작년의 그 산문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유정이지만 자신의 소설들로 인해서 가족들이 가해자가 되고 다치는 것을 결코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대체 어떤 정신 머리를 가진 자식이면 저딴 말을 할 수가 있는 건가 싶어서 너무 너무 화가 난다. 남자라서 그런 일을 안 당해봐서 모르는 건지, 알려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너무 오래된 일인데 아직도 그러는 게 이해가 안되는 것인지 도통 그 가족들의 무반응을 용서할 수가 없는 거다. 유정의 모든 소설을 읽었다면 유추할 수 있었을 것인데. 고향 마을에 같이 가자고 전화하는 사이라면, 최소한의 애정을 가진 누나라고 생각한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을 했을텐데, 단지 누나가 신경질적인 성격이어서 주위 친척들과 소원한 관계를 맺는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렇다면 넌 동생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다. 나였다면... 이런 동생이어서 이런 엄마여서 인연을 끊어버리고 말았을까? 혼자 극심한 고통 속에 남겨지는 것은 또 얼마나 두렵고 끔찍할까. 유정이 원하는 것은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도 새삼스럽게 사과를 받고 싶은 것도 아니다. 유태를 계속 보고 엄마를 계속 보고, 단톡방에 올라오는 조카 사진을 보고 웃고, 딸 소은의 소식을 전하며 "몇 달에 한 번이라도 둘러앉아 웃을 수 있는 것이었다."(264쪽) 유정이 두려운 것은 가족들을 안 보게 되는 것, 무언가를 체념한 채로 가족들을 보면서 그런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되는 것이고, 유정이 원하는 것은 어떤 분열도 겪지 않고 제정신으로 가족들을 계속 보는 것이다. 하... 정말 너무 어렵지 않나. 그러니 유정은 극심한 정신질환을 겪으면서도 가족들을 떠나지 못하고 결국엔 자기 자신의 몸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만다.




동생 유태의 저 말을 들었을 때 그동안의 노력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오로지 여기에 서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만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버틸 수 없다고,이제 더 이상 한 방울의 기력도 남아있지 않다고 느낀다. 반병의 와인만으로도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자신을 오래도록 파먹고 있던 그 마음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걸 유정은 알았다. 그래서 "알고 있어서, 유정은 계속, 계속, 소리조차 나지 않아서, 계속, 가슴을 쳤다."..."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채로, 계속, 가슴만 내리찍었을 뿐인데, 찍어버렸을 뿐인데,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찍어버렸을 뿐인데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리고..."(269쪽) 유정의 이상 상태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창용이 오빠의 아내, 베트남에서 온 디엔 씨였다. 머나먼 이국에서 행복을 꿈꾸며 떠나왔지만 나이차도 많이 나고 한국 여자들처럼 세련되지도 교육을 잘 받은 것도 아니면서 한국말 좀 할 줄 안다고 한국 여자들처럼 사치나 부리려고 한다는 타박을 받으면서 삶을 견디고 있는 디엔 씨. 가부장적인 분위기의 창용이 오빠네 가족을 보면서, 유정과 디엔은 서로에 대해 잘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억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디엔 씨는 차를 타고 떠나면서 쓰러지는 유정을 낚아채 듯 차에 태워 미산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데려온다. 


다음 날 새벽, 잠에서 깬 유정은 방 밖으로 나와 마당에서 저만치로 보이는 교각 기둥을  올려다본다. 유정은 동네를 산책 하면서 경기북부 해바라기 센터의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날을, 진술녹화실 테이블에서 문서 작성이 이루어졌던 첫 시간을, 정확하진 않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4학년 여름방학 이후였던 것 같다고, 가해자의 이름을 직접 적은 것도, 너무도 익숙하고 낯선 그 이름을 적었던 그 시간을 시간이 아무리 지나고 환갑 쯤이 되더라도 자신이 처음 센터에 전화했던 2019년 10월 4일, 그 가을을 기억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신호가 가고 네, 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어떻게 찾아와야 하는지 적힌 웹 발신 문자를 받던 과정 모두가, 자신에게 얼마나 절실한 응답이었는지를" 기억하게 될 거라고...! 




마침내 유정이 고향 미산 마을에 단단히 발을 디딘 것도 너무 좋았고 그 매개자가 오히려 억압받고 있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가지고 당당하게 헤쳐나가는 베트남 여성 디엔 씨여서 더 좋았고, 어젯밤의 음주로 정신을 못차리고 뒷자석에 널브러진 채 자고 있는 유태를 태우고 돌아가는 길에, 맑은 정신으로 운전석에 앉아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며 힘차게 출발하는 그 모습에서 한층 단단해진 유정이 마침내 '내게 내가 나일 그때'를 향해서 출발하는 것 같아 또 좋았다. 결국 나의 상처는 그 누구도 대신 아파할 수 없고 내 스스로 일어설 수 밖에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유정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표제작인 「눈으로 만든 사람」과 「나와 내담자」,「내게 내가 나일 그때 」 3 작품이 '친족성폭력 생존 3부작'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가 바로 피해 여성들이 피해자로서 전형적이지 않고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고통을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일 것이고 그래서 읽고 나서 마냥 가슴이 답답하지 만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작품을 앞으로 계속 계속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게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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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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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의 <밤은 노래한다>는 1930년대, 우리가 간도(연변, 동만주로 불리는 곳.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 조선과 인접한 네 개 현을 지칭했다고 한다)로 알고 있는 동만주의 항일 유격 근거지에서 벌어졌던 '민생단 사건'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분명 우리 조선 사람들의 역사이지만 너무도 생소한 '민생단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었다. '민생단'이라는 정치 조직은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 간도지방은 항일 운동의 근거지로 혹은 일제의 침탈로 정든 고향을 등지고 쫓겨나다시피 옮겨간 고난의 땅이었다. 그곳에서 우리 민족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유혈 사태가 일어나 일제의 토벌로 죽은 수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는데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전혀 들어본 적도 없고 역사적 사실임에도 역사 시간에조차 배운 적이 없을 만큼 민감한 사안이라는 것, 그리고 그 '민생단 사건'을 간략히나마 알지 않고서는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하다는 점, 이 민생단 사건이 중국의 공산당과 관련이 깊고 이후 소규모로 이루어진 유격대의 조선인들의 가족과도 같은 끈끈한 조직성이 북한의 김일성 정권의 형성과도 연관이 깊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소의 불편감이 몰려왔다. '공산당' 조직과의 연관성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 잊혀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이러한 불편감은 작품을 읽는 내내 사라지지 않지만 그와는 별개로 작품에 더욱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불편감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보자면, 일단 민생단이라는 조직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채로 처음 접하게 되었고 작품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알아지는 부분이 있지만 한 마디로 명확하게 규정하긴 힘들었기 때문이며, '민생단 사건'의 전개 과정이 너무 참혹했다는 점 ㅡ 서로를 민생단으로 밀고하고 거짓으로 자백하고 가족과 친지,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하고 온갖 억울한 누명을 쓰고 허망하게 죽어나가는 조선인 사회 ㅡ 을 보면서 우리가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는 북쪽의 정권이 연상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불편감이 더욱 심화된다. 불편감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사실은 내 감정에 딱 맞는 용어를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민생단 사건'의 과정은 검색을 통해서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현대사학자 한홍구 선생의 '해제(그 긴밤, 우리는 부르지 못한 노래, 밤이 부른 노래)'를 읽으면서 더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어렴풋이 느낌으로 아는 것과 명확하고 또렷하게 아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글을 읽으며 느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민생단 사건'은 친일과 공산당 조직, 스파이라는 용어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정치 조직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자, 일부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간도의 친일 조선인들은 간도를 만주로부터 떼어내어 식민지 조선에 병합하자는 움직임을 물밑에서 벌였다. 이런 흐름은 중국인 공산주의자들 ㅡ이들은 동시에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ㅡ을 당연히 자극했다. 1932년 2월, 간도에서 일군의 친일 조선인들은 한때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했던 민족주의자나 전향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하여 '민생단'이라는 정치조직을 결성했다. 이 민생단은 조선인의 간도 자치를 표방했는데, 일제는 조선인의 간도 자치나 간도의 조선에의 병합이 중국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가져올 것이라 우려하여 금방 민생단을 해산해버렸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일제가 민생단원을 훈련시켜 중국공산당 내에 스파이로 잠입시키고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일제가 중국 공산당 내에 밀정을 침투시킨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만한 일이었지만, 스파이에 대한 공포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해제, 민생단 ㅡ빛,어둠,그림자 중에서 발췌, 348쪽) 


우리 민족이 일제를 피해 고향 땅을 등지고 간도 땅에 정착하였지만 그곳은 엄연히 중국 땅이었으며 우리 조선인들은 앞으로는 중국인들에게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당했고 뒤로는 일제의 토벌대에 막혀 퇴로도 없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중국, 일본, 조선 그 어느쪽에서도 보호를 받지 못했던 우리 조선인들에게 "'공산당'은 피억압 인민들을 유토피아로 인도해줄 메시아적 존재"로 다가왔으며 일제의 토벌을 피해 산간 오지 마을에 피란민 마을을 세운 조선 이민자들은 이 피란민 마을에 "소비에트 또는 적색정권"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다. 토벌을 피해 도망쳐와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일본의 토벌대가 무기조차 변변이 갖추지 못한 유격근거지에 쳐들어오면 더 깊은 산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중국 공산당은 이런 현실을 당과 유격대 내에 민생단 스파이가 침투한 결과로 돌렸고 일제의 토벌대에 포위된 '유격근거지'는 민생단 숙청이라는 광풍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민생단이라는 감투를 쓰고 처형된 항일혁명가들의 혐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들이었다. 일제에 체포되었다가 구사일생 살아나거나 처형장에서 중상을 입고 돌아와도 민생단으로 처형했고, 일을 게을리하면 민생단의 지령으로 태업을 일으키려 한다고 하고 반대로 일을 열심히 하면 정체를 감추려 한다고 민생단으로 몰았다. 밥을 흘리면 어렵게 구한 식량을 낭비한다고, 밥을 설익게 하거나 태워도, 밥을 물에 말아 먹으면 용변을 자주 보느라 혁명과업을 게을리하게 된다고, 고향이 그립다고 말하면 민족주의적 향수를 조장한다고, 동지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려도 패배주의를 조장한다고, 가족 중에 민생단 혐의자가 나와도 모두 민생단으로 몰아 처형하는 등의 간첩, 스파이 꼬리표는 끝이 없었다.(해제 참고함) 






『밤은 노래한다』는 일본 만철의 직원으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는 무감각한 조선 청년 김해연, 학창 시절을 함께하며 혁명을 꿈꾸었던 박도만, 최도식, 안세훈, 박길룡이라는 네 젊은이, 그리고 역시 신여성으로서 혁명조직의 일원이었던 이정희의 얽히고 설킨 관계 속에서 '민생단 사건'의 잔혹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김해연은 만철의 직원으로 대련에서 일하다 용정으로 파견되어 측량작업을 하면서 간도 임시파견대(토벌대)의 중대장인 나카지마 다쓰키 중위와 친해지게 되고, 박길룡의 소개로 이정희라는 신여성을 알게 된 뒤 결혼을 꿈꿀 정도로 깊이 사랑하게 된다. 혁명조직의 일원이었던 이정희는 나카지마 등을 통해 일본 토벌대의 정보를 수집하여 조직에 전달하다가 발각되자 김해연에게 피하라는 메세지가 담긴 편지를 남기고 자살한다. 김해연과 나카지마는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과거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전향한 최도식을 만난다. 

김해연은 이정희의 자살로 충격을 받아 조사를 받고 풀려난 후 아편에 중독되어 괴로워하다 만철에서도 해고되고 결국 이정희가 자살했던 나무에 목을 매달지만 가지가 부러져 살아난다. 그러나 그에 대한 후유증으로 말을 잃게 되고 한동안 말문이 막혀 고통받는다. 김해연은 일본 만철에서 측량 기사로 일하던 경력으로 사진 현상을 할 줄 알았고 용정의 한 사진관에서 현상 기사로 일하게 되는데 그곳이 하필 혁명조직과 연결된 곳이란 걸 알게 된다. 그는 그 곳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혁명조직에 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하던 여옥을 만나 다시 사랑하게 되었고 유격대장 박도만과도 친해지게 된다. 사진관 식구들과 여옥 언니의 결혼식이 있었던 유정촌으로 가던 중 일본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사진관 식구들이 모두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여옥은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는 불운을 겪는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해연은 결국 혁명조직에 몸 담기로 결심하고 유격대의 훈련과 정신 개조를 하고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 당시 중국 공산당은 조선인들의 스파이 활동에 대한 의심이 짙은 시기여서 조선인들의 공산당 입당에 엄격한 제한을 두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드는 두번째 의문이 중국 공산당 입당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이 의문도 '해제'를 읽음으로써 해소되었다. 


"1930년대 초반의 동만주는 일본 제국주의와 동아시아 민중이 격돌하는 최전선이었다. 그러나 전선은 매우 복잡했다. 이곳은 조선공산주의운동, 중국공산주의운동, 국제공산주의운동이 아주 복잡하게 읽히면서 '일국일당一國一黨'원칙이 강력히 시행된 곳이었다. 일국일당 원칙이란 한 나라에 체류하는 외국인 공산주의자들이 자국의 공산당이 아니라 주재국의 공산당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해제, 347쪽)


그러나 문제는 만주의 경우 중국 본토와 달리 중국 공산당의 세력보다 조선인 공산당의 수가 월등했고 중국은 조선인들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할 때 '중국혁명'을 '조선혁명'보다 우선시할 것이라고 의심하였는데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조급해져 조선인 공산당원들이 '조선혁명'에 주력할 경우 중국혁명을 위한 역량이 분산될 것을 우려하여 '조선혁명', '조선독립'을 말하는 것을 금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와중에 1932년 2월에 친일 행적을 가진 조선인들이 민생단이라는 정치조직을 결성하였고 이들이 내세운 '조선인의 간도자치 표방' 과 '간도의 조선에의 병합'이라는 모토는 중국 공산당과 중국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들이 서로 얽힌 복잡한 형국에서 해연과 박도만은 다리를 절단하고 혁명조직의 재봉대에서 일하고 있던 여옥을 만나기 위해 가다가 토벌대의 정보를 듣게 되었고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다시 돌아갔다가 민생단 혐의로 체포된다. 조선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혁명을 위해 힘써야한다는 '국제주의자'였던 박도만은 결국 민생단의 머리로 불렸던 박길룡에게 사살 당하고 만다. 왜놈들이 아니라 동무들의 손에 죽게 되어 영광이라 말하며 한평생 혁명에 앞장섰던 박도만에게 민생단이라는 굴레를 씌워 배신자로 낙인을 찍은 것이다. 이제 혁명의 격랑에 휩쓸리게 된 해연은 결국 이정희의 죽음에 관계했던 박길룡과 최도식을 처단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하였고 토벌대의 포위로부터 조선 혁명군을 구하기 위해 나카지마를 인질로 삼아 고립된 주민들을 구한다. 학생시절부터 친구였던 박도만의 중국혁명 우선 원칙과 대립하였으며 중국공산당과 결별하고 조선인의 손으로 조선혁명을 외치던 박길룡도 이때 포위를 빠져나왔는데 이정희의 죽음에 연관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해연은 그를 그냥 둘 수 없었고 한발의 총성으로 그를 처단한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최도식. 그와 박길룡은 자신들의 스파이 행적을 감추기 위해 모든 덤터기를 해연에게 씌우기로 하고 이정희를 협박하였으며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정희가 편지를 남기고 자살하였던 것인데, 그를 처단하기 위해 8년의 시간이 흘러 찾아갔지만 그는 이제 완전히 친일의 앞잡이가 되어 만주중앙은행 용정 사무처에서 일하고 있었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이미 어린 아이들을 둘이나 둔 아버지였고 그의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인 최도식을 처단할 수 없었던 해연은 정희의 편지를 전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고 만다. 






간도의 조선인들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조선이니 민족이니 하는 구호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그들의 생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는 했던 것일까. 희망이라곤 찾을 수도 없이 어디에서도 보호를 받지 못했던 그들은 스스로 빛을 찾아 희망을 찾아 삶의 의미를 찾아내어야 했지만 일제와 만주, 동아시아의 정세는 극심한 혼란의 와중에 있었고 '민생단 사건'으로 혼란스러웠던 유격 근거지의 조선 혁명투사들은 어느 쪽으로 노선을 정할 수 없었다. "혁명 만세. 그저 앞사람을 따라 하는 것인지, 그저 혁명 만세. 조선혁명 만세도, 중국혁명 만세도, 세계혁명 만세도 아니고, 그저 혁명 만세. 그 어느 쪽도 받아들이지 않아 변경에서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자들의 모호한 아우성, 그저 혁명 만세."(230쪽)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욕구, 가족과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살기 좋은 아름다운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 무에 잘못일까. 유토피아를 꿈꾸며 선택했던 공산주의, 그리고 자신만 잘 살아보겠다고 동지들을 버리고 선택했던 친일주의자들... 그리고 역사 속에 묻혀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참으로 낯설고 생소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오늘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체사상, '어버이 수령'과 인민들 간의 독특한 혈연적 유대관계, 자주노선, 정치적 생명론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인간 본성의 가장 가장 열악하고 약한 부분을 건드림으로써 굴복하게 만들고 자신에게 불리한 당의 결정일지라도 끝까지 충성을 맹세하며 죽어가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기막힌 역설. (이러한 토대 위에 세워진 북한 정권을 생각해보자)이것이 진정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이 민생단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혹은 반동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 남을 밀고하고 거짓 고발하는 이런 기막힌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역사를 『밤은 노래한다』를 읽으면서 또 다른 역사 속 조선인들을 알게 되고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ㅡ자신의 것을 포함해ㅡ 초를 밝힐 것"(한강, 『흰』중 「넋」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어쨌든 결국 우리는 어제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어제와 다른, 새로운 세계. 그게 중요한 것이다. 반드시 복수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 당장 내 눈앞에서 정의가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 이게 어제와 다른, 새로운 세계라면." 그리하여 나도 주인공 해연이 복수하지 않고 최도식을 그의 아이들 앞에서 용서한 것. 그 결론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니 그러한 결말이어서 좋았다. 그런 결말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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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개가 온다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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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개‘로 지칭되는 우울증의 심각성이 묵직하게 가슴을 짓눌러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우울증도 치료 받아야 할 질병으로 인식 개선이 이루어질 날이 우리 사회에 도래하기를 기다려 보겠다. 아울러 악의惡意를 가진 인간의 마음속 악마의 형상을 찾아 심판할 수 있다면 좋겠단 생각이 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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