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분명해진 것은 나르사푸르의 레이스 
산업에서도 가난한 여성들은 가족뿐만 아니라 지역 자본가인 지주와 국제 기업을 위한 자급 기반을 만들어낸다는 점이었다. 이들의 자급 생산이 없었다면 이윤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급 생산은 과거에도 지금도 모든 생산의 필요조건이다. - P190

오늘날 우리는 소위 제3세계뿐만 아니라 산업 국가에서도 이런 상황을 목격한다. 여성과 남성 모두가 컴퓨터로 재택근무를 하고 지구 반대편에서 조립하는 부품을 만들며, 외주를 받은 하청업자처럼 가정주부화한 노동을 하고 있다. 고용구조는 1970년대 후반 나르사푸르의 레이스 노동자들의 사례와 다르지 않다. 자본에 있어 이점은 명백하다. 공장과기계에 드는 고정 비용이 없거나 매우 낮다. 
생산을 가사 노동과 결합하는 전 세계의 남성과 여성 노동자는 고립 · 개별화되어 있다. 노동조합을 조직하지 않는 노동자들은 사실상 파업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주문이 들어오지 않는 한 혼자이기 때문이다. 회사는 이들을 책임지지 않는다.  - P190

컴퓨터 기술의 혁신으로 가정주부화한 노동이 늘어났다. 오늘날에는 이를 ‘유연한‘ 노동이라 부른다. 현재 세계인 대다수가 이런 ‘유연한‘ 또는 ‘가정주부화한‘ 노동을 하지만, 나는 세계화한 자본주의에서 이런 새로운 형태의 고용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여전히 정규직 노동 조건을 생산 노동자인 남성의 노동 조건으로 간주한다. 그는 가장으로서 공급자인 반면 여성은 가정주부로서 재생산 노동을 수행하며 생산 노동은 부분적으로만 한다. - P1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자 룩셈부르크가 길을 보여주다
가사노동과 자본주의는 당시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많이 논의한 주제였다. 일부는 가사노동이 전 자본주의적이라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봉건적 유물로 여겼다. 많은 사람이 가사노동이 단지 ‘재생산‘인지 아니면 사실 ‘생산‘인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MariarosaDalla Costa)는 그것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생산이라고 주장했다(1972), - P176

우리는 이 접근이 마음에 들었지만 충분치 않다고 느꼈다. 라틴아메리카와 인도 시골과 도시 빈민가에서 일하면서 우리는 주부와 비슷한 노동 조건을 마주했다. 그들은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재생산‘을 확보할수 없을 정도로 낮은 임금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들의 임금은 너무 낮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자급과 가사노동 사이의 연관성은 어디 있는가? - P176

여기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왔다. 우리 셋 중 베로니카가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지식이 가장 깊었다. 그녀는 쾰른 대학교에서 이른바 자본에 관한 강좌‘에 참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반대로 마르크스에 대한 내 지식은 절충적이었다. 나는 ‘노동‘ ‘생산 노동‘ 같은 용어를 명확히 하고 싶을 때마다 마르크스의 파란색 책을 꺼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의 정의는 자본주의에서 가사 노동의 의미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했다. 1972년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의 축적》(Luxemburg, 1913)을 읽은 사람은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룩셈부르크가 ‘자본 축적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비자본주의 환경‘도 점점 더 많이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어떻게 증명했는지 우리에게 말했다. 그녀는 이 ‘비자본주의 환경‘이 농민, 소규모 수공업자, 일용직 및 식민지 노동자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유엔에서 정한 ‘비공식 부문‘의 착취는 필연적으로 이들의 생계를 파괴한다. - P176

"그것이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노동이야." 베로니카는 말했다. "가사노동은 소위 비자본주의 부문에 표면적으로 속할 뿐이야. 자본주의는 농민, 식민지, 자연을 대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가사 노동을) 착취하고 합리화하는 거야." - P177

로자 룩셈부르크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가 ‘자급 생산‘이라고 부르는 것을 설명할 방법을 보여주었다.
이 통찰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이론과 실천의 결정적 돌파구였다. 1983년 공동 저서인 《여성, 마지막 식민지》(Bennholdt-Thomsen,
Mies and von Werlhof, 1983, 영문판은 1988년에 출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논의했다.
그러나 우리가 답하고 싶은 이론적 질문은 많이 남아 있었다. 우리의 가설을 검증할 실증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베로니카는 멕시코로, 클라우디아는 베네수엘라로, 나는 인도로 돌아갔다. - P1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농부들은 대부분 소와 돼지를 도축했고 밭을 갈아 씨를 뿌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모두 아무 생각 없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우리 암퇘지를 화산암을 채석하던 슈테펠른의 동굴에 있는 
수퇘지에게 데려갔다.

어머니는 ˝삶이 계속되려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함을 알았다.˝
또한 ˝지금까지 ㅡ 특히 전쟁과 재난 이후 ㅡ 딸, 아들, 남편, 자연을 위해 삶이 계속되도록 책임진 사람은 어머니와 같은 여성들이다. 남성이 자연과 외국인에 맞서 전쟁을 벌이면 그 뒤를 치우는 것은 여성이다. 우리는 가부장적 전쟁 이후에도 삶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그런 전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싸워야 한다.˝(69쪽)


암퇘지를 ‘맥주‘에게 데려가는 것은 소년들의
일이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성과 임신에 관해 
배웠다. 그러나 전쟁 중에 소년은 한 명도 없었고 어머니는 직접 ‘맥주‘에게 암퇘지를 데려가야 했다. 이웃들은 그녀를 비웃으며 돼지를 도살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그녀는 전부 끝났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걸까? 어머니는 "삶은 계속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어쩌면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 P68

어머니는 암퇘지를 수퇘지에게 데려갔고 암퇘지는 ‘서‘ 있었다. 전쟁이 끝난 5월 말 암퇘지는 새끼를 열두 마리 낳았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새끼 돼지, 송아지, 망아지를 키우지 않았다. 그리고 돈은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새끼 돼지를 전쟁에서 돌아온 다섯 아들의 신발, 바지, 셔츠, 재킷과 바꾸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 P69

그런데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났을까? 어머니는 가만히 앉아 "삶은 어떻게든 계속될 거야"라고 혼잣말만 하지 않았다. 
또한 기독교인 농부의 아내지만 "주님께서 베풀어주시겠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자신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 살기 위해 자연과 함께 일해야 한다는것을 알았다.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그것이 어머니의 소망, 열정, 철학이었고 그녀에게 용기와 활력을 주었다. - P69

어머니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었고 생태학이라는 단어도 몰랐지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만큼 필요한 것이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삶이 계속되려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함을 깨달았다. 
오늘날 우리는 삶이그저 ‘자연스럽게‘ 계속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 생태학적 재난의 증가는 상품과 자본의 끊임없는 성장을 추구하는 현대 산업 사회가 스스로 회복하는 자연의 능력을 파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 특히 여성과 어린이를 비롯해 다른 자연의 본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 P69

지금까지 특히 전쟁과 재난 이후 딸, 아들, 남편, 자연을 위해 삶이 계속되도록 책임진 사람은 어머니와 같은 여성들이었다. 남성이 자연과 외국인에 맞서 전쟁을 벌이면 그 뒤를 치우는 것은 여성이다. 우리는 가부장적 전쟁 이후에도 삶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그런 전쟁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싸워야 한다. - P69

내가 이 사랑 이야기에서 배운 첫 번째 중요한 교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시야가 확장했다는 것이다. 처음 강렬한 향수병을 겪을 때부터 나는 집과 마을에 집착했지만 이제 낭만적 사랑이 새로운 세계, 즉 동양을 열어주었다. 전후 시대 사람 대부분은 서구, 더 정확하게는 미국이나 캐나다를 바라봤지만 나는 동양에 매력을 느꼈다. - P99

또 앞서 언급했듯 내 사랑 이야기로 인해 나와 줄피카르 사이에 벽을 만들던 가톨릭과 이슬람, 화해할 수 없는 두 가부장적 유일신교의 근본 사상 연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나는 종교가 ㅇ호늘날처럼 정치 문제가 되기 전 사랑에 빠진 여인의 눈으로 성경과 코란을 읽었고 이 두종교 공동체가 차이점이 아닌 광범위한 유사점으로 나뉨을 깨달았다. 두 종교는 유대교와 함께 선지자와 제사장이 쓴 ‘계시받은 진리‘의 책인 구약에 뿌리박고 있다. 이 책에서는 남편이 아내게게 하듯 자기 백성에게 신실과 순종을 요구하는 질투심 많은 가부장적 유일신 하느님에 초점을 맞춘다. 유일신교와 일부일처제는 밀접하게 연관되며 특히 여성에게 그렇다. 성경에 기반하는 이 세 가부장적 종교 사이의 적대감은 ‘기독교인‘과 ‘이교도‘사이 적대감과는 셩격이 다르다. 가부장제의 아들들 사이에서 적개심은 기본적으로 질투와 경쟁에 대한 것으로 여성에 대한 통제와도 관련이 있다(Mies, 2005a 참고). - P1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가난한 가족은 수공업자와 공예가, 특히 칼이나 맷돌 가는 사람, 제화공, 재단사, 화가의 가족이었다. 그들은 땅도 경작했지만 현금 수입에 의존했고, 사람들이 현물을 뒤늦게 지급하곤 했기 때문에 현금이 부족할 때가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추가 수입원을 찾으려 했다. 재단사는 구급대원이었고 칼이나 맷돌 가는 사람은 방역원이었으며 화기는 교회지기였다. - P52

또 다른 조롱의 노래는 다음과 같았다.

베드로와 바울 축일(6월 29일)에 할 일이 없다면,
마리아 방문 축일(5월 31일)에는 왜 일해야 하나?

이런 노래는 1920년대 독일어를 못해도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사회적 혜택을 받을 수 있던 ‘게으른 외국인‘에 대한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농민과 상인들의 기대에 순응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자 마을의 일부였다. 이 집단에는 마을의 ‘스톡하우스‘에 사는 형제들도 들어갔다. 그들은 본가에 남았고 땅을 상속받지 않았다. 또한 결혼하지 않았으므로 부모의 집에 머물 권리가 있었고 ‘삼촌‘이나 ‘대모‘로서 농장 일을 도우며 무급 하인으로 일했다. - P53

타보 디디
우리는 어릴 때 그들을 조롱했고 타보 디디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부유한 스톡하우스 출신 무두장이의 동생이었고 가끔씩만 일했다. 여름이연 열매와 덤불을 모으고 때로는 들판에서 일을 도왔다. 종종 도랑세서 잠자는 그를 볼 수 있었다. - P53

오빠들은 그의 침실이 책과 시계를 비롯한 장비로 가득하다고 했다. 그는 시계도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프랑스어를 비롯해 여러 언어를 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그의 이름 ‘요한‘이 프랑스어로 무슨 뜻인지 물었을 때 그는 "타보 디디"라고 대답했다. 그 후 온 마을이 그를 타보 디디라고 불렀다. 우리는 어릴 때 그의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를 따라 했다. 타보 디디는 일꾼이 많이 필요한 가을에 곡식 타작을 도왔다. 우리 집에서 모두에게 식사를 대접했는데 그들은 항상 좋은 이야기와 농담을 들려주었고 우리는 열심히 들었다. 
나는 타보 디디의 이야기 하나를 기억하는데 무엇에 관한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이펠 방언으로 말한 철학적 결론은 기억한다. 
"인간이되는 건 쉽지 않아요." - P54

중학교 때 작문 숙제를 하면서 이 문장을 제목으로 타보 디디와 필요한 만큼만 일한다는 그의 철학에 대해 썼다. 독일어 선생님은 이 글을 너무나 좋아해 가지고 다니면서 "인간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는 말을자주 인용했다. - P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부터는 정신차리고 읽어야지~~!
마리아 미즈가 말하는 ‘우리 마을‘의 경관은 너무 압도적이라 부러울 따름...
그런데 1960년대 초의 개발정책에 밀려 파괴되기 시작했다니 ...
파괴된 환경정책을 읽고 있으니 너무도 황망해져서 말이 다 안나온다!






킬렌베르크산에서는 사방으로 시야를 넓게 확보할 수 있다. 동쪽을 보면 한 화산 줄기가 다른 화산 줄기를 따라가며 새로운 지평선을 볼 수 있도록 시선을 유도한다. 북쪽에는 우리가 야생 버찌를 발견한 작은 나무숲 슈타인보이엘이 펼쳐진다. 우리는 상상과 놀이 속에서 이 작은 숲을 차지했다. 날씨가 좋으면 아이펠 산맥 뉘르부르크링과 최고봉호에 아흐트도 볼 수 있다. 서쪽으로는 슈테펠베르크산이 자리 잡고 있다. 원뿔 모양의 봉우리는 천연기념물로 이 지역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이 봉우리는 멧돼지의 머리처럼 생겼으며 오래된 너도밤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졌다. - P16

슈테펠베르크는 자연뿐만 아니라 역사도 흥미로운 곳이다. 로마 시대 이곳의 가마에서 숯을 만들어 인근 철 제련로에 불을 지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로마인들의 우회로가 슈테펠베르크를 지났다고 한다. 어머니는 산에 있는 ‘일곱 개의 방‘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는데 아마 동굴에서 숯돌을 구할 때 만들었을 것이다. 30년 전쟁 시기였던 1618년~1648년 사람들은 가축을 데리고 그곳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산 정상에누 성 마가(St.Mark)의 십자가가 서 있고, 봄에누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이 십자가까지 행진했다. 이는 사실 마가 성인과 관계없고 원시 종교의 전통에서 비롯했다. 일찍이 로마 시대에 ‘줄기녹병(밀, 보리에 발생하는 병해-옮긴이)의 악마‘를 달래기 위해 들판을 행진했다고 한다. - P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