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링의 무덤>을 읽었다.
침입자의 머리를 삽으로 내리쳐 기절시켜버린 조앤의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이어진다.

오늘 반납해야하는데..
반납 전에 표제작인 <축제의 날들>을 읽기로 했다.
꽤 긴 중편이다.


레슬링의 무덤

조앤은 삽으로 침입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원래는 고속도로의 방해물을 치우려고 자동차 트렁크에 보관하던 것이었다. 뉴욕 외곽에는 거북이들이 갈대가 우거진 연못을 떠나 느릿느릿 시골을 떠도는 시기가 있었다. 거북이들은 도자기 파편처럼 도로에 흩어져 있었다. 상자거북은 손으로 집을 수 있지만, 늑대거북을 도랑으로 옮기려면 삽이 필요했다. 다행히 마침 트렁크에서 삽을 꺼낸 참이었다. 퇴비 문제 때문이었다. 조앤의 이웃이 퇴비 통에서 나는 악취가 너무 심하다며 불평한 것이다. 
토마토와 옥수수 속대,커피 찌꺼기가 섞여 발효되며 코를 찌르는 악취가 진동했다. 배수로 청소용 호스의 부착물을 빌려주러 온 이웃은 삽을 이용해 음식물 쓰레기와 흙을 조금씩 번갈아 넣으라고 제안했다. 그런 연유로 삽은 부엌으로 난 문 바로 옆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 P121

낯선 남자는 조앤에게 등을 돌린 채 서서 냉장고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조앤의 인기척을 느끼긴 했지만 아직 돌아서지는 않은 찰나, 벌새가 먹이통을 공격적으로 빨아대는 기계적인 윙윙 소리가 들렸다. 벌새들은 성격이 나빠서 언제나 나팔꽃 덩굴과 먹이통 주변에서 서로를 쫓아내려고 쪼아댔다. 그들의 엄지손가락만 한 몸뚱이는 악의로 번쩍거렸다. 낯선 남자를 얼마나 세게때려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를 때리는 것이 너무 끔찍한 일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멋진 일처럼, 불가피한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삽으로 내리쳐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가 목이 졸린 것만으로는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다시 그녀를, 아니면 개를 공격하러 돌아올지도 몰랐다. 그는개들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몸집이 큰 필그림은 그를 공격했다가몇 차례나 발로 차였다. 마치 그저 별 생각 없이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듯 잔인하고 일상적인 움직임이었다. - P122

조앤은 결심했다. 낯선 남자가 목덜미 털을 눈에 겨우 보일 정도로 곤두세우며 냉장고에서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하려는 그 찰나의 순간을 노려 그의 머리를 내리치기로. 그녀는 가냘픈 여자였다. 정확히 말하면 옛날에는 그랬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은 중년 같았다. 그녀의 팔다리는 여전히 탄탄했지만, 몸통은 휴지심 같았다. 조앤의 아름다움은 그녀 자신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옛날 사진들을 보던 조앤은 자신이 늘씬하고 감정이 풍부한, 머리칼에 윤기가 흐르는 여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시절에는 스스로가 푸석푸석하고 벌레 같은 얼굴에 볼품없이 깡마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 P123

온 힘을 다해 내리치기에는 망설여졌다. 그것은 그녀의 본성과 반대되는 일이었다. 우선 그녀가 여자라는 것부터 그랬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삽은커녕 주먹으로조차도 누군가를 때려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전력을 다할 경우 혹은 전력을 다하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온전히, 철저히 힘껏 내리치는 게 이치에 맞았다. 그러지 않으면 잠시 기절시키거나 화나게 하는 데 그칠 수도 있었다.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수년 전 미술관에서 일할 때 배웠던 지렛대 원리를 떠올리고는 삽의 손잡이 맨 끝을 붙잡았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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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력이 아직 대부분 일어나지 않은 시간까지 다아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앞으로 두 달 안에 구슬 같은 근사한 지구에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 생명체의 관점에서 희망찬 일은 하나도 없다. 떠도는 별 하나가 태양계 전체와 지구를 뒤흔들 수도, 운석 충돌로 대멸종이 벌어질 수도, 지구의 자전축 기울기가 커질수도, 궤도가 휘고 밀려나 몇몇 행성이 쫓겨날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대략 넉 달 후, 그러니까 50억 년 후에는 연료를 다 소진한 태양이 적색 왜성으로 팽창해 결국 수성과 금성을 집어삼키리라는 것이다. 지구는 그때까지 살아남는다고 쳐도 바짝 시들고 건조해져 바다가 끓다 메말라버릴 것이고, 그렇게 백색 외성 흑색 왜성 죽어가는 태양이 있는 지긋지긋한 궤도에 갇힌 잉걸불로 남을 것이다. 그러다 끝내 궤도가 쇠하고 태양이 우리까지 먹어치우면, 쇼는 모두 끝이다. - P200

이것은 국지적인 장면에 불과하다. 작은 소동, 미니드라마다. 우리는 충돌하고 부유하는 우주에 갇혀 있다. 최초의 빅뱅으로 우주가 쪼개지며 길고 느리게 퍼져 나간 잔물결 속에 우리가 있다. 가까이 있는 은하들은 서로 충돌하고, 남은 은하들은 서로를 피해 흩어진다. 그렇게 홀로 떨어지고 나면 스스로 팽창하는 공간, 저절로 탄생하는 공허만이 남는다. 그때도 존재할 우주력에서 인간이 무엇을 했고 존재했는가는 
1년 중 딱 하루, 찰나에 깜빡였다 사라지는 빛이어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 P201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세상 반대편에 대한 감각이있었다. 머나멀어서 닿지 않는 그런 곳. 그런데 이제 이들은 대륙들이 웃자란 정원처럼 서로 달려드는 모습을보고 있다. 아시아와 오스트랄라시아는 하나도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사이에 있는 섬들로 이어져 있다. 러시아와 알래스카도 그렇게 맞닿아 있다. 물 한 방울도 둘을 갈라놓지 않는다. 팡파르 소리도 없이 유럽과 아시아가 만난다. 대륙들과 나라들이 잇따른다. 지구는 작지 않지만 거의 끝없이 이어진다. 유려히 흐르는 운문들의 서사시다. 상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타래가 풀리듯 바다가 다가오고, 계속 다가오고 다가오고다가오는 동안에도, 윤기 나는 파란색을 제외하면 육지는 물론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도, 아는 나라들이 죄다 우주 동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처럼 보일 때도 다른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다른 무언가는 없기 때문이다.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그러다육지가 다시 나타나면 정신을 뺏어 간 꿈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참, 육지가 있지, 하고 생각하고, 그러다 또바다가 나타나면 꿈속의 꿈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참,
바다가 있지, 하고 생각한다. - P217

해가 뜰 때마다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일출은 매번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긴다. 빛의 칼날이 벤 자리에서 태양이 찰나의 완전한 별로 터져 나와 양동이를 뒤집은 것처럼 빛을 쏟아 내어 지구가 빛에 잠길 때마다, 순식간에 밤이 낮이 될 때마다, 지구가 잠수하는 생물처럼 우주로 가라앉아 깊은 우주에서 날마다 또 다른 하루를 발견할 때마다, 90분마다 돌아오는 하루, 무한히 공급되는 새날을 발견할 때마다 이들은 놀란다. - P223

선원들이 자는 동안 우주선은 꼬박 90분이 걸려 지구를 한 바퀴 더 돌았다. 오늘 열여섯 번 도는 궤도 중 열다섯 번째 궤도였다. 이제 오른쪽을 바라보면 눈 덮인 히말라야산맥이 도로처럼 쭉 뻗은 풍경이 펼쳐진다. 광활하고 탁 트인 도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산맥 남쪽으로는 도시 라호르와 뉴델리가 있는데, 찬란한 낮의 햇살에 풍경이 하얗게 바래 사라지고 마치 인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광막한 지형에 삼켜진다. 산맥만이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어진다. - P224

러시아는 아침이 한창이다. 지구는 날카로운 빛을 받아 또 한 번 칠흑 같은 우주 속 유리구슬이 된다. 인접한 별들과 행성들을 더는 볼 수 없게 된 지금, 지구는상실감에 빠졌고 연약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반대의 존재가 되어 있다. 지구의 흠 없는 표면 위에는 깨트러질 게 아무것도 없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지구는 물질성이 희미해지고 환영이나 성령에 가까워진다. - P224

전 지구가 발아래를 지나갔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이들은 궤도를 한 번 돌 때마다 서쪽으로 몇 도씩 이동할 것이고 90분이 지나 궤도가 다시 북쪽을 향하게 되면 새 하루가 밝는 동유럽 위를 건널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나날 중 또 한 번의 새날이 시작된다. 지구는 파란 고리 모양이고 눈으로 뒤덮여 있다. 궤도는 북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 북극권 한계선의 아래쪽 가장자리에서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너머 북극점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제 러시아에서 내려와 5000마일 간 이어지는 태평양 길로 향한다. - P225

궤도 16
달우주비행사들이 작은 골무처럼 생긴 사령선을 타고 달 궤도를 향해 가고 있다. 지금 그들은 플라이바이 첫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지상관제 팀의 교신 담당자가 말한다. 세상에서 번개를 가장 여러 번 맞은 사람의 기록이 깨진 거 알아요? 원래 일곱 번이었는데 지난주 중국에서 어떤 남자가 여덟 번째 번개를 맞았대요. 달 임무 팀원 중 하나가 반응한다. 오, 피뢰침이라도 갖고 다녔대요? 사람들은 기록을 깨려고 그런 일들을 하지, 다른 팀원이 웃으며 말하자 교신 담당자는 참고로 번개에 맞아 죽는 사람의 84퍼센트가 남자라고 덧붙인다. 여자 팀원은 그게 당연하다고 한다. 바보짓 하다가 일찍 죽는 건 남자니까.  - P223

외부에서 보면 달 우주비행사들은 회전하는 두 천체 사이에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오랫동안 아무도 다니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들은외롭게 모험을 떠난 게 아니다. 인공위성 무리와 바글바글 궤도를 도는 작은 물체들, 자리에서 밀려난 2억개의 물체들 사이를 지나고 있다. 작동 중인 인공위성들, 산산조각이 난 인공위성 잔해들, 자연위성들, 페인트쪼가리들, 얼어붙은 엔진 냉각수, 로켓 상단 엔진, 스푸트니크 1호와 이리듐 33호와 코스모스 2251호의 잔해들, 고체 로켓의 배기 입자, 누군가가 잃어버린 연장 가방, 잘못 둔 카메라, 놓쳐버린 펜치와 장갑, 시속 2만 5000마일의 속도로 궤도를 돌며 우주를 깔끄럽게 만드는 2억 개의 물체들. - P227

외부에서 보면 달 우주선이 이런 쓰레기장 사이를살금살금 지나는 게 보인다. 우주선은 태양계를 통틀어 가장 붐비고 쓰레기로 넘치는 지구 저궤도에 있다가 분사 연료를 사용해 가장 덜 어수선하면서 달로 가기에 가장 수월한 경로로 이동한다. 
억만장자 로켓을 타고 최대 속력으로, 쓰레기장 밖으로, 멀리멀리 달아난다. 부서지고 불타고 폭풍이 치고 동요하는 지구에서 
멀리, 범죄 현장에서 달아나듯 떠난다. 뿌리째 뽑아내고 내동댕이치는 무자비한 태풍, 도로를 덮친 집들이 급류처럼 쏠려 가고 피해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재앙적인 폐허에서 멀리. 비스듬한 궤도를 따라 미약하게 비틀대는, 급소에 총을 겨눈 인류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행성에서 멀리 벗어나 정복을 기다리는 미개척 광야로 향한다.
정복하기 좋게 무르익은 새로운 검은 황금의 땅을 향해, 25만 마일의 우주 잔디를 헤쳐 간다. - P228

매일 쏟아지는 공격을 견디며 여기저기 움푹 찌그러
진 튜브 형태 모듈에 안톤, 로만, 빌, 치에, 숀, 피에트로가 잠들어 있다. 저마다 수면실에 박쥐처럼 매달려 있다. 안톤은 뺨에 주먹이 스쳐 잠깐 잠에서 깬다. 처음이자 유일하게 든 생각은 달로 떠난 우주선에 대한 궁금증이다. 뒤이어 즐거웠던 어린 시절이 비눗방울처럼 빵터지는 날카로운 느낌과 함께 다시 잠에 빠져든다. 피에트로의 머리 근처 장비에 고정된 모니터에 무음으로 아내의 메시지가 도착한다. 메시지에는 참혹한 태풍 피해를 보도한 뉴스 링크가 있다. 메시지는 아침이 밝을 때까지 읽지 않은 채 그대로일 것이다. 숀의 모니터 화면에도 읽지 않은 메시지가 와 있다. 트램펄린에서 뛰는 염소 영상을 딸이 보내왔다. 다른 설명 없이 사랑해!
라고만 쓰여 있다. - P228

동쪽 태평양에서부터 무자비한 열기가 방향을 
틀어 환하게 몰려온다. 마지막으로 하강하는 열여섯 번째 궤도에서 그것은 해체된 빛이 구리색으로 찬란히 물든 모습으로 보인다. 물도 아니고 흙도 아니다. 그저 광자들이어서 잡히지 않으며 가만히 남아 있지도 않다. 남태평양 한 자락에서부터 급격히 밤이 깊어지면 그제야 흐트러진다.
이로부터 몇 년 후, 지금 지나고 있는 태평양의 바로이 지점에서, 이 우주선은 우아하게 궤도를 벗어나 대기권을 뚫고 바다로 떨어질 것이다. 잠수함들이 잔해를 찾아 내려갈 것이다. 그러나 그건 3만 5000번의 궤도만큼 떨어져 있는 일이다. 이 궤도는 남극 대륙에서 오로라가 깜빡이고 달이 찌그러진 자전거 바퀴처럼 커다랗게 뜨는 가장 깊은 가장자리까지 도달한다. 수요일 아침 5시 30분, 달 착륙 날이다. 별들이 폭발한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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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문장들>


그러다 어느 날 변화가 찾아온다. 이들은 지구를 보다가 진실을 마주한다. 정치가 정말로 촌극인 게 아닌가. 정치는 그저 터무니없고 어리석고 가끔은 정신 나간 쇼일 뿐이며, 그걸 제공하는 인물들은 어느 구석이라도 혁명적이거나 혜안이 깊거나 현명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목소리가 크고 힘이 세고 과시에 능하고 뻔뻔하게 권력 싸움을 갈망했기에 그 자리까지 오른 자들 아닌가.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해 여기서 끝났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들은 정치가 촌극이 아님을, 촌극에만 그치지 않음을 서서히 깨닫는다. 정치는 아주 거대한 힘이어서, 우주에서 봤을 때는 인간의 힘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지상의 모든 것을 일일이 다 결정지었다.


오염되고 온난화되고 남획되는 대서양에서 아찔한 네온색 또는 붉은색 조류藻類가 대발생하는 현상은 대부분 정치와 인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졌다. 줄어들고 있거나 이미 줄었거나 쪼개지고 있는 빙하, 이제껏 녹은 적 없던 눈이 녹아내려 화강암 맨살이 갓 드러난 산등성이, 그을리고 불타는 숲과 관목지, 면적이 감소하는 대륙 빙하, 기름 유출로 시작된 화재, 처리되지 않은 하수를 먹고 사는 부레옥잠의 침입을 알리듯 변색된 멕시코 저수지, 비정상적으로 물이 불어난 수단,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노스다코타주의 강, 물이 말라붙어 계속 분홍색으로 보이는 호수들, 한때 열대 우림이었던 그란차코로 침투하는 소 목장, 소금물에서 리튬을 채굴하는 증발못이 늘어나면서 나날이 퍼지고 있는 푸른 기하학 무늬들, 클루아조네 기법으로 세공된 분홍빛의 튀니지 소금 평원, 더 많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게 공을 들여 조금씩 바다를 뭍으로 덮느라 달라진 해안선, 혹은 땅이 필요한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데도 나 몰라라 조금씩 뭍을 집어삼킨 바다 때문에 달라진 해안선, 뭄바이에서 사라지고 있는 맹그로브 숲, 스페인 남단 전체에서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백 에이커의 비닐하우스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정치의 영향력은 너무나 자명하게 보인다. 애초에 어떻게 놓쳤는지 의아할 정도다. 시야 구석구석에 빠지지 않고 그 힘이 드러난다. 중력이 지구를 구체로 빚어내고 조수를 밀고 당기며 해안선을 만들었듯 정치도 사방에서 자기 흔적을 조각하고 형성해서 남겨 놓았다. 

이들은 비로소 욕망의 정치를 목격한다. 성장하고 획득하는 정치,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10억 가지의 외삽적 추론, 지구를 내려다보면 그게 보이기 시작한다. 실은 굳이 내려다볼 필요도 없다. 로켓 부스터가 발사될 때 자동차 100만 대 연료를 한꺼번에 태웠다는 점에서 이들은 누구보다도 그 외삽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실로 놀라운 힘이 지구를 형성한다. 그 힘이 모든 걸 바꿨다. 숲, 극지방, 저수지, 빙하, 강 바다, 산, 해안선, 하늘을. 욕망에 따라 윤곽이 그려지고 조경된 행성을.(129~132쪽)



이윽고 상황이 달라진다. 일주일 정도 도시를 보며 경탄하던 것도 잠시, 이제는 감각이 넓어지고 깊어져 이들은 낮의 지구를 사랑하게 된다. 인간이 없는 땅과 바다의 단순함, 마치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숨 쉬는 듯한 지구. 무심한 우주 속 지구의 무심한 회전, 모든 언어를 초월하는 구체의 완벽함. 태평양의 블랙홀이 황금 밭으로, 그 밑에 점점이 흩어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로 바뀐다. 세포 샘플을 닮은 섬들, 오팔색 마름모꼴의 환상산호도環狀 珊瑚島. 다음으로 길쭉하고 가느다란 중앙아메리카를 떨구고 나면 이제 바하마와 플로리다, 그리고
카리브판 위 활화산들의 둥근 궤적이 눈에 들어온다. - P126

황토색으로 드넓게 펼쳐진 우즈베키스탄, 눈으로 뒤덮인 산들이 아름다운 키르기스스탄. 깨끗하고 찬란하며 형용할 수 없이 푸르른 인도양. 희미하게 합쳐지고 갈라지는 강바닥의 선들로 추적해 갈 수 있는 살구색 타클라마칸 사막. 이들이 은하계에서 다지고 있는 사선의 길은 잡히지 않는 공허 속 유혹이다. - P127

그러다 엇갈리고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들은
훈련 때 불일치하는 감각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이음매 없는 지구를 계속 보다 보면 벌어지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들었다. 충만한 지구를, 땅과 바다 사이말고는 어떤 경계도 없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국가들은 지워지고, 쪼개질 수 없으며 전쟁은커녕 그 어떤 분리도 모르는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될 것이라고. 그러면 한꺼번에 두 방향으로 당겨지는느낌을 받을 것이다. 기쁨과 불안, 황홀과 우울, 애정과 분노, 희망과 절망을 느낀다. 전쟁이 끊이질 않고 사람들이 국경을 지키느라 죽이고 죽어 나간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P127

그런데 이곳에서는 저 멀리 작게 주름진 땅을 보고 산맥임을 알고, 웬 줄기를 보고 큰 강이 있음을 가늠할 수 있지만, 그게 끝이다. 장벽이나 장애물은 없다. 부족도 전쟁도 부패도, 뭔가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 P127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에게 욕망이 싹튼다. 이토록 거대하면서 작디작은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욕망, 아니 (열정이 추동하는) 요구. 이렇게나 기적 같으면서 별나게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대안이 마땅치 않으므로 지구는 의심할 여지없는 집이다. 무한한 공간, 충격적일 만큼 환히 빛나며 우주에 떠 있는 보석. 인간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순 없는 걸까? 지구와도 잘 지내면 안 되나? 이건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아니라 다급한 요구다.
우리 삶이 달린 유일한 세상을 탄압하고 파괴하고 약탈하고 낭비하는 짓을 멈출 순 없을까? 그러나 이들도 뉴스를 보고, 이미 세상을 살아 봤다. 희망을 품는다고 순진해지진 않는다. 그러면 뭘 하지? 어떤 실천을 해야 하지? 말해봤자 소용 있을까? 이들은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들이다. 그건 축복인 동시에 저주다. - P128

모든 걸 따져 보자면 차라리 뉴스를 멀리하는 게 속편해 보인다. 누군가는 뉴스를 읽고 누군가는 읽지 않지만, 속 편한 쪽은 후자다. 이들이 보는 지구는 뉴스에 이러쿵저러쿵 등장하는 시시한 정치 촌극에 어울리는공간 같지 않고, 그런 흔적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그 촌극을 위엄 있고 점잖은 무대에 올린다는건
모욕처럼 느껴진다. - P128

또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하찮아보인다. 이들은 뉴스를 듣는 순간 곧장 피로해지거나 참을성을 잃을 것이다. 너무 단순하고 또 너무 복잡한언어로 장황히 말해지는 비난, 불안, 분노, 비방, 추문.요즘 이들이 아침마다 눈을 뜨면 보는, 우주 속 지구에서 나오는 듯한 하나의 선명하고 낭랑한 소리와 비교하면 그런 이야기들은 이해하기 힘든 방언 같다. 지구는 한 바퀴 돌 때마다 그런 것들을 훌훌 털어 낸다. 이들이 라디오를 듣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주로 음악을 감상하거나, 차라리 순수하고 아예 중립적인 무언가를 찾아들을 때다. 코미디나 스포츠 같은 것, 노는 느낌을 주고 중요하면서 중요하지 않은 듯한 감각을 주는 것. 왔다가 흔적 없이 가 버리는 것. 하지만 그마저도 점점 드문드문 듣는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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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 궤도를 도는 우주선, 그 안에서 여러 임무를 수행중인 6 명의 우주 비행사...
로만, 숀, 치에, 안톤, 피에트로, 넬.
2명의 여성과 4명의 남성, 2명의 러시아인과 미국, 영국, 일본, 이탈리아인 각 1명의 구성.


이제 그들 아래에는 칠흑 같은 밤의 남태평양이 지나간다. 끝없는 암흑 구덩이. 행성은 없고 그저 대기권의 부드러운 녹색 선과 무수히 많은 별뿐이다. 놀라운 고독. 모든 게 너무나 가깝고 무한하다.(P50)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이어져 지금 이곳에이렇게 갇혀 있다는 게. 물건들을 쌌다가 풀었다가 하면서, 실험실에서 완두콩싹과 목화 뿌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어디로도 가지 않지만 돌고 또 돌면서 나날을 보낸다. 변함없이 오래된 생각도 곁을 맴돈다.
불평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 아니고말고, 불평하는게 아니다. - P35

침범하지 말 것. 이들끼리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비좁은 공간에 사생활이랄 것도 거의 없이 딱 붙어 지내고,저마다 과사용하는 공기를 나눠 쉬며 그렇게 몇 달을 지내야 한다. 그러니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 서로의내밀한 생활까지 들춰 보진 말자는 거다. - P35

부유하는 가족이라고 하지만, 정확히 말해 가족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가족보다 더한 동시에 덜한 사이다.
이 짧은 시기 동안 이들은 서로에게 전부나 다름없다.
존재하는 게 자신들뿐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의 친구이자 동료이고, 스승이고, 의사이고, 치과의사이자 미용사다. 우주유영을 하고, 우주로 발사되고 지구로 재진입할 때, 비상 상황에서도 서로가 서로의 구명 밧줄이다. 각자가 서로에게 인류 대표가 되어 수십억 명몫을 감당해야 한다. 가족, 동물, 날씨, 섹스, 물, 나무까지, 지상의 모든 것 없이 지낼 줄 알아야 한다. 산책도 포기해야 한다. 가끔은 그냥 걷거나 눕고 싶은 날이 있다. 사람들과 사물들이 그리워지고, 지구가 아득하다 느껴져 며칠을 우울함에 허우적대고, 심지어 북극에서 저무는 석양을 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때는 선내의 사람들 얼굴을 보며 계속 살아가게 할 무언가를 발견해야만 한다. 일종의 위안을. 하지만 매번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다. - P36

이들은 자신들이 자주 느끼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말하자면 그건 융합의 감정이다. 자신들이 서로와, 또 우주선과 아주 구분되어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에 오기 전 어떤 사람이었으며, 훈련 환경이나 배경이 얼마나 달랐고, 동기와 성격이 어떻든, 어느나라 출신이며, 자신들의 국가가 충돌하고 있든 말든, 이곳에서 이들은 우주선의 정교한 힘으로 동등해진다.
행성을 따라 완벽히 계획대로 이동하는 선체의 움직임과 기능을 수행하는 단일한 존재다.  - P37

말수가 적고 건조한 유머를 구사하며 감상적이기도 해서 영화나 창밖 풍경에 대놓고 눈물을 흘리는 안톤은 우주선의 심장이다. 피에트로는 머리다. (이번 체류 기간의 선장으로, 능숙하고 유능해 뭐든 뚝딱 고치고 밀리미터 수준의 정밀함으로 로봇팔을 제어할 줄 알며 극도로 복잡한 회로기판도 배선하는) 로만은 손이다. (모두에게 영혼이 있노라고 주장하는) 숀은 영혼이다. 꼼꼼하고 공정하고 현명한, 쉽게 정의 내리거나 납작하게단정 짓기 힘든 치에는 양심이고 (8리터의 폐활량을 자랑하는) 넬은 숨통이다. - P38

이내 이들은 이런 메타포가 어이없다고 생각한다.
헛소리. 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다. 살아나 자신들의 일부가 되어 뻗어 나가는 우주선을 타고, 단일한 존재가되어 지구 저궤도를 따라 돌진하다 보면 이런 생각에기운다. 이들은 이런 삶이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해 살아가며, 장치의 한 부분이 고장 나기라도 하거나 화재, 암모니아 누출, 방사능,
운석 충돌, 무엇에 의해서든 모든 게 순식간에 끝날지도 모르는 이런 삶이 말이다. 가끔은 정말 위태롭기도하지만 대체로는 아니다. 어쨌거나 모든 존재는 몸이라는 생명 유지 장치 속에서 살아가며 그 역시 언젠가 필연적으로 고장 나게 되어 있다. 이들을 태운 장치는 물론 위태롭다고 하겠지만 궤도의 리듬을 벗어나지 않는다. - P38

궤도 위에서 뜻밖의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예측 못 할 일도 모조리 예측된다. 매일 스물네 시간 내내 감시되고, 유심히 관찰되고, 강박적이다시피 보수된다. 빠짐없이 경보 장치가 달렸고, 꼼꼼히 패드를 댔고, 날카로운 물체가 극히 적고, 걸려 넘어지거나 떨어질 물건도 없다. 이와 다르게 감시당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돌아다니는 지상의 자유에는 여러위험이 따른다. 이를테면 바위 턱과 높은 곳, 도로와 총,
모기와 전염병, 빙하의 크레바스, 기구하게 얽힌 800만종이 생존을 위해 다투는 일 따위 말이다. - P39

가끔은 놀라운 생각을 한다. 자신들이 진공 심연을홀로 지나는 잠수함을 타고 있다는 생각 밖으로 나가면 안전할 것 같지 않다. 지구 표면에 다시 떨어졌을 때 이들은 생경한 존재들이리라. 
미쳐 버린 낯선 세상을배우러 온 외계인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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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메꼬‘
하나쯤 갖고 싶긴 하지만... 넘 비싸다! ㅠ


우리 숙소, 아리 하우스가 위치해 있는 ‘디자인 디스트릭트‘는 유네스코가 세계 디자인 수도로 지정한 헬싱키에서 절대 놓치고 지나가서는 안 되는 곳이다. 그야말로 ‘핀란드 디자인의 보고‘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영어로 된 안내문에서도
‘gems‘라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전에는 이 디자인 디스트릭트를 무작정 돌아다니기로 했다. 걷는 내내 핀란드 특유의 조용한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공예, 가구, 패션, 갤러리뿐만 아니라 서점, 소품 숍, 앤티크 숍까지 분야를 막론한 다양한 디자인 상점들이 즐비해 있어서 이곳의 골목을 그저 발길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내 눈이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 P332

마리메꼬에는 여러 유명한 패턴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패턴은 역시 우니꼬였다.
마리메꼬의 창립자인 아르미 라티아는 실제 꽃의 진정한 본질을 인쇄물로는 충실하게 담아낼 수 없다고 믿었고 그 정신을 담아 디자이너인 마이야 이솔라가 꽃의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꽃의 감각을 추상화해서 개발한 디자인이 바로 우니꼬라고 했다. - P333

나 역시 이 우니꼬 패턴을 좋아해왔다. 옷을 산 건이번이 처음이지만 지난 여행에서 에코백을 샀었고 그외에도 여러 접시, 컵, 앞치마 등의 주방용품에 우니꼬가 그려진 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니꼬가 대체 왜 이렇게 좋을까?
핀란드 사람들은 대체로 무표정한 편이지만, 그 대신 내게는 우니꼬가 아주 크게 웃는 표정처럼 느껴진다. 우니꼬는 주로 밝고 경쾌하고 눈에 띄는 컬러를 쓰곤 하는데 때로는 채도를 쫙 뺀 톤 다운된 컬러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역시나 비대칭적으로 활짝 펴진 그 꽃 이파리들이 각기 다른 크기를 하고 늘어선 특유의 패턴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저항없이 와하하하! 소리를 내며 아주 크게 웃고 있누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 P333

예진이와 내가 계속 "이건 여기에서 입어야 한다"라는 말을 한 이유는, 이 도시에서 우니꼬로 대표되는 마리메꼬를 입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볼 수 있어서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아주 적게 잡아도 최소 하루 다섯 명은 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의 패션이 비슷하고획일적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이 도시에서 자국의 브랜드가 다루어지는 양상이 무척이나 특이했다. - P334

마리메꼬는 강렬한 패턴과 컬러를 사용하기 때문에 ‘조용한 브랜드‘는 결코 아니다. 마리메꼬를 입으면 누가 봐도 ‘나 마리메꼬를 걸쳤다!‘ 티가 나게 되는 것이다. 가격이 합리적이지도 않다. 내가 산 롱 스커트도 할인을 받지 않은 정가는 50만 원 가까이 되고 소매 없는 면 원피스가 60만 원 정도로 비싸다. 가방 중에는100만 원에 가까운 것도 있었다. 럭셔리 명품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고가에 속하는 브랜드인 것이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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