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문장들>
그러다 어느 날 변화가 찾아온다. 이들은 지구를 보다가 진실을 마주한다. 정치가 정말로 촌극인 게 아닌가. 정치는 그저 터무니없고 어리석고 가끔은 정신 나간 쇼일 뿐이며, 그걸 제공하는 인물들은 어느 구석이라도 혁명적이거나 혜안이 깊거나 현명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목소리가 크고 힘이 세고 과시에 능하고 뻔뻔하게 권력 싸움을 갈망했기에 그 자리까지 오른 자들 아닌가.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해 여기서 끝났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들은 정치가 촌극이 아님을, 촌극에만 그치지 않음을 서서히 깨닫는다. 정치는 아주 거대한 힘이어서, 우주에서 봤을 때는 인간의 힘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지상의 모든 것을 일일이 다 결정지었다.
오염되고 온난화되고 남획되는 대서양에서 아찔한 네온색 또는 붉은색 조류藻類가 대발생하는 현상은 대부분 정치와 인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졌다. 줄어들고 있거나 이미 줄었거나 쪼개지고 있는 빙하, 이제껏 녹은 적 없던 눈이 녹아내려 화강암 맨살이 갓 드러난 산등성이, 그을리고 불타는 숲과 관목지, 면적이 감소하는 대륙 빙하, 기름 유출로 시작된 화재, 처리되지 않은 하수를 먹고 사는 부레옥잠의 침입을 알리듯 변색된 멕시코 저수지, 비정상적으로 물이 불어난 수단,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노스다코타주의 강, 물이 말라붙어 계속 분홍색으로 보이는 호수들, 한때 열대 우림이었던 그란차코로 침투하는 소 목장, 소금물에서 리튬을 채굴하는 증발못이 늘어나면서 나날이 퍼지고 있는 푸른 기하학 무늬들, 클루아조네 기법으로 세공된 분홍빛의 튀니지 소금 평원, 더 많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게 공을 들여 조금씩 바다를 뭍으로 덮느라 달라진 해안선, 혹은 땅이 필요한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데도 나 몰라라 조금씩 뭍을 집어삼킨 바다 때문에 달라진 해안선, 뭄바이에서 사라지고 있는 맹그로브 숲, 스페인 남단 전체에서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백 에이커의 비닐하우스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정치의 영향력은 너무나 자명하게 보인다. 애초에 어떻게 놓쳤는지 의아할 정도다. 시야 구석구석에 빠지지 않고 그 힘이 드러난다. 중력이 지구를 구체로 빚어내고 조수를 밀고 당기며 해안선을 만들었듯 정치도 사방에서 자기 흔적을 조각하고 형성해서 남겨 놓았다.
이들은 비로소 욕망의 정치를 목격한다. 성장하고 획득하는 정치,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10억 가지의 외삽적 추론, 지구를 내려다보면 그게 보이기 시작한다. 실은 굳이 내려다볼 필요도 없다. 로켓 부스터가 발사될 때 자동차 100만 대 연료를 한꺼번에 태웠다는 점에서 이들은 누구보다도 그 외삽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실로 놀라운 힘이 지구를 형성한다. 그 힘이 모든 걸 바꿨다. 숲, 극지방, 저수지, 빙하, 강 바다, 산, 해안선, 하늘을. 욕망에 따라 윤곽이 그려지고 조경된 행성을.(129~132쪽)

이윽고 상황이 달라진다. 일주일 정도 도시를 보며 경탄하던 것도 잠시, 이제는 감각이 넓어지고 깊어져 이들은 낮의 지구를 사랑하게 된다. 인간이 없는 땅과 바다의 단순함, 마치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숨 쉬는 듯한 지구. 무심한 우주 속 지구의 무심한 회전, 모든 언어를 초월하는 구체의 완벽함. 태평양의 블랙홀이 황금 밭으로, 그 밑에 점점이 흩어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로 바뀐다. 세포 샘플을 닮은 섬들, 오팔색 마름모꼴의 환상산호도環狀 珊瑚島. 다음으로 길쭉하고 가느다란 중앙아메리카를 떨구고 나면 이제 바하마와 플로리다, 그리고 카리브판 위 활화산들의 둥근 궤적이 눈에 들어온다. - P126
황토색으로 드넓게 펼쳐진 우즈베키스탄, 눈으로 뒤덮인 산들이 아름다운 키르기스스탄. 깨끗하고 찬란하며 형용할 수 없이 푸르른 인도양. 희미하게 합쳐지고 갈라지는 강바닥의 선들로 추적해 갈 수 있는 살구색 타클라마칸 사막. 이들이 은하계에서 다지고 있는 사선의 길은 잡히지 않는 공허 속 유혹이다. - P127
그러다 엇갈리고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들은 훈련 때 불일치하는 감각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이음매 없는 지구를 계속 보다 보면 벌어지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들었다. 충만한 지구를, 땅과 바다 사이말고는 어떤 경계도 없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국가들은 지워지고, 쪼개질 수 없으며 전쟁은커녕 그 어떤 분리도 모르는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될 것이라고. 그러면 한꺼번에 두 방향으로 당겨지는느낌을 받을 것이다. 기쁨과 불안, 황홀과 우울, 애정과 분노, 희망과 절망을 느낀다. 전쟁이 끊이질 않고 사람들이 국경을 지키느라 죽이고 죽어 나간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P127
그런데 이곳에서는 저 멀리 작게 주름진 땅을 보고 산맥임을 알고, 웬 줄기를 보고 큰 강이 있음을 가늠할 수 있지만, 그게 끝이다. 장벽이나 장애물은 없다. 부족도 전쟁도 부패도, 뭔가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 P127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에게 욕망이 싹튼다. 이토록 거대하면서 작디작은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욕망, 아니 (열정이 추동하는) 요구. 이렇게나 기적 같으면서 별나게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대안이 마땅치 않으므로 지구는 의심할 여지없는 집이다. 무한한 공간, 충격적일 만큼 환히 빛나며 우주에 떠 있는 보석. 인간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순 없는 걸까? 지구와도 잘 지내면 안 되나? 이건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아니라 다급한 요구다. 우리 삶이 달린 유일한 세상을 탄압하고 파괴하고 약탈하고 낭비하는 짓을 멈출 순 없을까? 그러나 이들도 뉴스를 보고, 이미 세상을 살아 봤다. 희망을 품는다고 순진해지진 않는다. 그러면 뭘 하지? 어떤 실천을 해야 하지? 말해봤자 소용 있을까? 이들은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들이다. 그건 축복인 동시에 저주다. - P128
모든 걸 따져 보자면 차라리 뉴스를 멀리하는 게 속편해 보인다. 누군가는 뉴스를 읽고 누군가는 읽지 않지만, 속 편한 쪽은 후자다. 이들이 보는 지구는 뉴스에 이러쿵저러쿵 등장하는 시시한 정치 촌극에 어울리는공간 같지 않고, 그런 흔적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그 촌극을 위엄 있고 점잖은 무대에 올린다는건 모욕처럼 느껴진다. - P128
또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하찮아보인다. 이들은 뉴스를 듣는 순간 곧장 피로해지거나 참을성을 잃을 것이다. 너무 단순하고 또 너무 복잡한언어로 장황히 말해지는 비난, 불안, 분노, 비방, 추문.요즘 이들이 아침마다 눈을 뜨면 보는, 우주 속 지구에서 나오는 듯한 하나의 선명하고 낭랑한 소리와 비교하면 그런 이야기들은 이해하기 힘든 방언 같다. 지구는 한 바퀴 돌 때마다 그런 것들을 훌훌 털어 낸다. 이들이 라디오를 듣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주로 음악을 감상하거나, 차라리 순수하고 아예 중립적인 무언가를 찾아들을 때다. 코미디나 스포츠 같은 것, 노는 느낌을 주고 중요하면서 중요하지 않은 듯한 감각을 주는 것. 왔다가 흔적 없이 가 버리는 것. 하지만 그마저도 점점 드문드문 듣는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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