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쪽수가 666
이 책을 사놨다는게 믿기지 않네
심지어 <화재의 색>도 같이 꽂혀 있었어.
언제 다 읽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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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시의 마법사 어스시 전집 1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지연,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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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시(EARTHSEA)의 마법사 새매 게드는 자신이 만들어 낸 죽음의 그림자를 물리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마침내 그림자와 하나가 된 새매 게드는 죽음의 그림자를 자신의 이름으로 지우고 ˝한 인간˝이 되었다 .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될지 아닐지는 다음편에서 볼 수 있겠지. 지금은 새매가 명성을 얻기 전의 이야기일 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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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5-01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갖고 있는 책이예요
애들이 읽었죠!
재미있다고 했는데, 저는 아직 못읽어 봤네요^^

은하수 2023-05-01 09:08   좋아요 1 | URL
전집의 1권이라 이야기의 시작이잖아요.
재미있게 본터라 다음권 바로 주문했어요^^
 

죽음의 그림자와의 추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젠 죽음의 그림자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게드가 그림자를 쫓는다는 것이 다를 뿐!




둘러보자 눈앞엔 아무것도 없었다. 게드는 이렇게 텅 빈 암흑을 응시하고 경계하는 데 지쳐 있었다. 그는 추위에 몸서리치며 일어섰다.
"이제 오너라"
그가 중얼거렸다.
"오라고, 뭘 기다리고 있는 거지, 그림자?" - P218

아무 대답도 없었다. 어두운 안개와 물결 속으로 더 캄캄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기가 왔던 이 춥디 추운 행로를 거꾸로 더듬어 감에 따라 그것이 이제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점점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게드는 돌연 큰소리로 외쳤다.
"나 여기 있노라, 나 새매 게드가! 내가 나의 그림자를 소환하노라!"
배가 삐걱거리고 파도가 찰싹댔으며, 하얀 돛에 스치는 바람이 울었다. 한순간 한순간이 지나갔다. 게드는 그대로 기다렸다.
그는 주목 지팡이로 세운 배의 돛대에 한 손을 얹은 채 북으로부터 들쭉날쭉한 전선을 그리며 바다를 가로질러 천천히 몰려오는 얼음 같은 가랑비 속을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순간이 지났다. 그러곤 물 위로 내리는 빗속 저 멀리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그는 보았다. - P219

낮이라 그림자는 반쯤 눈이 멀어 있었고, 또 게드 쪽에서 불러낸 것이었기에 그림자보다 게드가 먼저 상대를 발견했다. 그림자가 게드를 알듯 게드도 그것을 알아보았다. 모든 존재와 모든 그림자들 사이에서 그들은 서로를 알았다. - P220

겨울 바다의 절대적인 고독 속에 게드는 두려워하던 그것을보며 서 있었다. 바람은 그림자를 배에서 멀리 날려 버리려는듯했고, 그림자 밑을 달리는 파도는 눈을 어지럽혔다. 볼 때마다 그것은 더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 같았다. 그림자가 움직이는 건지 아닌지 게드는 알 수 없었다. 이제 놈은 게드를 보았다.
생명을 빨아내는 그림자의 건드림을, 그 차갑고 시커먼 고통을겁내는 마음이 소름 끼치는 공포로 온통 그를 사로잡았지만 게드는 꼼짝 않고 기다렸다. 그러다가 돌연 큰 소리로 주문을 외워 하얀 돛에 강하고 갑작스러운 마법풍을 불러들이자, 배는 잿빛 물살을 가르고 펄쩍 뛰어오르며 바람 속에
떠 흐느적대는 그림자를 향해 똑바로 돌진했다. - P220

완벽한 적막 가운데 그림자는 일렁였다. 그러곤 뒤돌아 달아났다.
그것은 바람을 거슬러 북으로 달아났다. 게드의 배도 바람을 맞받으며 뒤쫓았다. 그림자의 속도 대 마법의 대결이었고, 비바람은 양쪽 모두를 거슬러 불었다. 눈앞에 달아나는 늑대를 보고 사냥개들을 다그치는 사냥꾼처럼 게드는 배와 돛과 바람과 앞길의 파도를 향해 고함쳐 댔다. 그는 천으로 만든 돛이었더라면 모조리 찢어발길 만큼 강한 바람을 마법으로 짠 돛에 불어 넣어, 부풀어오른 거품이 소용돌이치는 바다 위로 점점 더 가까이 달아나는 그림자를 추격했다. - P221

안개가 그 얼굴 없는 뿌연 머리를 통과해 흐르고 있었지만 형체는사람과 같았다. 단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그림자인 양 형태가 일그러지며 변할 뿐이었다. 게드는 적을 깔아 버리고자 다시 한번 배를 돌진시켰다. 그 순간 그림자는 꺼져 없어졌고, 좌초한것은 그의 배였다. 
흐르는 안개가 시야를 가려 미처 보지 못한여울목 바위에 배를 세게 갖다 박은 것이다. 게드는 배에서 튀어나갈 뻔했지만 다음 충돌이 오기 전에 지팡이 돛대를 움켜잡고 버텼다. 사람이 달팽이 껍질을 집어 올려 부수듯이 파도가 작은 배를 물 밖으로 내던져 바위 위에 내동댕이쳤다.
- P223

이제 바다를 가로지르는 게드의 추적은 묘하게 되어 버렸다. 게드 자신도 잘 알다시피 그는 사냥감이 무엇인지도, 온 어스시 어디에 있을지도 알지 못하는 사냥꾼이었다. 놈이 게드를 쫓을때 그랬듯 추측과 직감과 운에 의지해 추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둘 다 상대의 존재를 뚜렷이 간파할 수 없었다. 그림자가 낮의 햇빛과 확고한 존재들에 방해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게드는 형체 없는 망령들로 인해 고투했다.  - P234

 게드에게 분명한 건 한가지였다. 이제 자신이 사냥꾼이고 사냥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게드를 속여 암초에 올라앉게 만든 이상, 그림자는 그가 반죽음 상태로 바닷가에 누워 있던 동안이나 폭풍우 속에 더듬더듬 모래 언덕을 헤매는 동안 얼마든지 제 맘대로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놈은 기다렸다가 그런 기회를 타지 않았다. 놈은 감히 게드와 맞서지 못하고 그를 속인 즉시 멀리 내뺐다.  - P234

그 점에서 게드는 오지언이 옳았음을 알았다. 자신이 맞서는 한 그림자는 자신의 힘을 빼내 갈 수 없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자에 대항하고 그것을 쫓아야만 한다. 비록 이 망망한 바다에 놈의 흔적이 까마득히 사라져, 남으로 부는 세계풍의 운과 남쪽이나 동쪽이 옳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추측 내지 느낌을 빼면 아무 지침이 없더라도 말이다. - P234

그림자는 게드를 꾀어 오스킬의 황무지로 가게 만들었고, 아개 속에서 그를 속여 정통으로 암초에 가 얹히게 했다. 이제 이건 세 번째 속임수인 걸까? 게드가 놈을 이리 몰아붙인 것인가.
아니면 놈이 그를 이리로 꾀어 들인 것인가? 이건 함정이 아닐까? 알 수 없었다. 게드가 아는 것은 오직 고통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공포와, 나가서 자기가 하게 되어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확신뿐이었다. 바로 두려움을 그 근원에까지 추적해 가서 그 사악한 것을 잡아 끝내는 일이다. - P238

 이제 좁게 파고든 물길의 끄트머리에 이르렀다. 겹겹이뒤엉킨 벌거벗은 바윗덩어리들이 좁은 물길의 폭을 더 좁히며 높직이 솟아 있었다. 파도의 끝자락이 거기 힘없이 찰싹거렸다.
- P238

게드는 배를 반 바퀴 돌렸다. 물 밑의 암초들에 걸리거나 뻗쳐난 뿌리와 가지들에 얽히지 않도록, 주문과 임시 변통으로 만든 노를 이용해 조심스럽게 돌려야 했다. 배가 다시 바깥쪽을 향하자 게드는 들어왔을 때 했던 대로 배를 내보내 줄 바람을일으켰다. 그러나 갑자기 주문이 입에서 얼어붙으며 심장이 섬뜩하게 차가워졌다. 어깨 너머 돌아다보자 그림자가 배 안에 서 있었다. - P239

게드가 한순간이라도 멈칫거렸더라면 파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준비가 되어 있었고, 팔 뻗으면 닿을 거리 안에서 흐느적거리며 떨고 있는 그것을 움켜잡으려고 몸을 던졌다. 지금은 어떤 마법도 그를 도울 수 없었다. 게드는 오로지 맨몸만으로, 자신의 목숨 그 자체만으로 생명 없는 그것에 대항했다. 게드는 말이나 주문 없이 공격했으며, 그렇게 갑작스레 돌아서 덤벼드는 바람에 배가 앞뒤로 요동을 쳤다. 고통이 팔을 따라 가슴속으로 밀어 닥쳐 숨을 막았고 얼음장 같은 차가움이 가득 차올라 앞이 캄캄했다.  - P239

그러나 그림자를 움켜쥔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캄캄함, 허공뿐이었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돛대를 잡고 비틀비틀 앞으로 나아가자 다시 눈에 빛이 쏘아져 왔다. 게드는 그림자가 자신을 떨쳐 내고 저만치에 움츠러드는 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그림자는 순식간에 그의 머리 위로, 배의 돛 위로 거대하게 펼쳐졌다. 그러곤 바람에 휘말리는 검은 연기처럼 뒤틀리며휙 날아갔다. 그렇게 놈은 형체를 잃고 물길을 되돌아 나가, 양쪽 절벽 사이에 밝게 보이는 출구로 달아나 버렸다. - P240

공포는 모두 사라졌다. 모든 기쁨도 꺼졌다. 이젠 추격이 될수 없었다. 이제 게드는 사냥꾼도 사냥감도 아니었다. 이 세 번째 만남에서 그들이 만나 서로 접촉했기 때문이다. 게드 쪽에서 스스로 그림자에게 돌아서서 살아 있는 손으로 놈을 붙잡으려들었다. 그것을 잡지는 못했지만, 게드는 둘을 묶어 끊을 수 없는 사슬을 채웠다. 이젠 그림자를 몰아붙일 필요도, 흔적을 뒤따를 필요도 없다. 놈이 날아간다 해도 소용없다. 양쪽 모두 상대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 이르면 그들은 다시, 마지막으로, 만날 것이다.
- P241

그러나 그때가 되기까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밤이건 낮이건,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게드는 쉴 수 없고 평화를 누릴 수 없을 터였다. 이제 게드는 그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이 일이 결코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 없으며 다만 시작했던 바를 끝맺을 따름이라는 깨달음은 차마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어두운 절벽 사이를 빠져나오자 바다 위엔 아침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북쪽으로부터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 P241

게드는 그 얼굴을 향해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지팡이에 어린광채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밝아졌다. 너무도 희고 엄청난 그 빛은 고대의 어둠마저 갉아 들며 물리칠 듯했다. 그 빛 속에 게드에게 다가오는 그것으로부터 모든 인간의 형상이 벗겨져 나갔다. 그것은 작게 움츠러들어 시커먼 덩어리처럼 되어 발톱이 돋친 짤막한 네 발로 모래 위를 기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입술도 귀도 눈도 없이 맹목적인 무정형의 주둥이를 게드 쪽으로 쳐든 채 그놈은 계속 앞으로 나아왔다. 게드와 만난 그 순간 주위에 타오르는 희디흰 마법의 빛 속에 놈은 완전히 새카맣게 보였다.
그것이 형체를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침묵 속에, 사람과 그림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채 정지했다. - P290

그 오랜 침묵을 깨뜨리며 크고도 분명하게 게드는 그림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 역시 입술도 혀도 없이 똑같은 단어를 말했다.
"게드"
그 두 목소리는 하나였다. 게드는 지팡이를 떨어뜨리고 손을 내뻗어 자신에게 뻗어 오는 그림자를, 검은 자신을 붙잡았다.
빛과 어둠이 만나고, 합쳐지고,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모래밭 멀찍이서 어스름 속에 두렵게 지켜보고 있던 들콩에게는 게드가 그림자에게 정복당한 것처럼 보였다. 뚜렷하던 광휘가 스러져 침침해졌던 것이다. 분노와 절망이 가득 차올라 들콩은 친구를 돕든가 함께 죽으려고 배를 뛰쳐나와 모래밭에 올랐다. 그러고는 메마른 땅 위 공허한 어스름 속에서 미약하게 꺼져드는 그 작은 빛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달리는 발 밑에서 모래가 꺼져 내려, 들콩은 유사에 휩쓸린 사람처럼 몸부림쳤다. 엄청난 물 흐름이 그를 휩쌌다. 포효하는 소음과 찬란한 날빛이 살을 에는 추위와 쓰디쓴 소금맛이 닥쳐들며 세계가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들콩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살아 있는 진짜 바다에 빠져 발버둥치고 있었다.
- P291

게드는 멍해 있었고 눈동자는 허공을 보는 듯했지만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오른손에 움켜쥔 지팡이는 모든 광채가 사라져 검은 주목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게드는 지팡이를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말을 잃은 채 물에 젖어 떨리는 몸을 기력 없이 돛대에 기대 웅크리고서, 돛을 올리고 북동풍을 받으려고 배를 돌리는 들콩을 한번 돌아보지도 않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 배가 나아가는 방향의 하늘 위 기다란 구름자락 사이로 맑은 푸른 광채의 만이 열리며 신월이 빛을 던질 때까지 게드는 세상의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았다. 달은 상아로 된 고리나 뿔나팔의 가두리 장식인 양 햇빛을 반사해 어둠 젖은 대양 위에 선연히 빛났다. - P292

게드는 얼굴을 들고 먼 서녘에 빛나는 초승달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오랫동안 거기 눈길을 못 박고 있었다. 그러곤 전사가 장검을 쥐듯이 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똑바로 섰다. 하늘과 바다와 머리 위에 부풀어 오른 갈색 돛과 친구의 얼굴을 빙 둘러 바라본 다음 게드가 말했다. - P293

"에스타리올, 봐, 이루어졌어. 끝난 거야."
게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상처는 치유되었어………… 나는 완전해. 나는 자유야."
그러고 나서 몸을 구부리고는 팔에 얼굴을 파묻고 아이처럼흐느꼈다.
그 순간까지도 들콩은 미칠 듯한 공포 속에 경계하고 있었다. 그로선 그 어두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배에 함께 타고 있는 존재가 게드인지 확신할수 없었기에, 들콩의 손은 벌써부터 쭉 닻에가 있었다. 여차하면 선체에 구멍을 내어 배를 바다 한가운데 가라앉혀 버릴 생각이었다. 게드의 얼굴과 모습을 한 사악한 존재를 어스시의 항구로 데려가기보다는 그 편이 나았다.  - P293

 그러나 이제 친구의 얼굴을쳐다보고 말소리를 듣자 의심은 사라졌다. 그리고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게드는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니며, 다만 자신의죽음의 그림자를 자기 이름으로 이름 지음으로써 자신을 완전하게 한 것이다. 그로써 그는 한 인간이 되었다. 진정한 자아 전체를 깨달은 인간이며 자신 아닌 그 어떤 힘에 이용당하거나 지배받지 않을 사람, 살기 위하여 살며 결코 파괴나 고통이나 증오나 어둠을 섬겨 살지 않는 인간이 된 것이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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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1월
-1
이 전쟁이 곧 끝나리라 믿었던 사람들은 모두가 오래전에죽었다. 다름 아닌 전쟁으로 죽었다. 그래서 곧 휴전이 될 거라는 10월의 소문에 알베르는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는 이 소문들을, 독일 놈들 총알은 얼마나 흐물흐물한지 물러터진 배처럼 군복 위에서 뭉개져 버린다고 주장하여 프랑스 연대들을 웃음바다로 만들곤 하던 전쟁 초기의 프로파간다만큼도 신뢰하지 않았다. 지난 4년 동안 독일군 총알을 맞고 웃다가 죽어버린 친구들을 무수히 보아 온 터다. - P11

알베르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미남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훤칠한 키, 늘씬하고 세련된 몸매, 구불구불하고 풍성한 흑갈색 머리칼, 쭉 뻗은 콧날, 멋들어진 선으로이어지는 얄따란 입술. 또 눈은 새파란 색이었다. 알베르에게는 정말이지 밥맛없게 느껴지는 면상이었다. 여기에다가 항상화가 나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페이스를 조절할 줄 모르는 조급한 유형의 사내였다. 가속하는지 아니면 정지하든지, 둘 중하나였다. 그는 항상 가구를 밀때처럼 한쪽 어깨를 불쑥 내밀고 나아갔고, 누군가에게 다가올 때는 후다닥 달려왔으며, 의자에 앉을 때도 급작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이게 그의 평소 리듬이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기묘하기까지 한 혼합이었다. 그의 귀족적인 거동에서는 지독하게 문명화된 모습과 근본적인난폭함이 동시에 느껴졌던 것이다. 바로 이 전쟁이 그렇듯이말이다. 프라델 중위가 이 전쟁판에서 그토록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었으리라 또 그런 성격과 체격이라면 조정 경기도, 어쩌면 테니스와도 잘 어울리리라.
- P13

또 한 가지 알베르가 싫어하는 것은 그의 체모였다. 그는 온몸이 검은 털로 덮여 있었다. 털은 심지어 손가락 위에도 나 있 - P13

었고, 목젖 바로 아래의 옷깃 밖으로도 수북했다. 평화 시에는뭔가 수상쩍은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면도를 했으리라. 물론 이런 걸 좋아하는 여자들도 있다. 이런남성적이고, 거칠고, 수컷스럽고, 뭔가 스페인적인 분위기가느껴지는 이런 털들을 말이다. 세실만 하더라도………. 뭐, 굳이세실 때문이 아니라도, 알베르는 프라델 중위를 좋아할 수가없었다. 무엇보다도 알베르는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가 공격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적진을 향해 돌진하고, 공격하고, 정복하는 것을 그는 정말로 좋아했다. - P14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는 평소보다도 풀이 죽어 있었다. 휴전 가능성이 그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렸고, 애국적 열정에 불타던 그를 김빠지게 만들었다.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프라델 중위를 절망에 빠뜨리고 있었다. - P14

그는 사뭇 불안스럽게 느껴지는 초조감을 내비치곤 했다.
장병들의 미적지근한 태도가 너무도 답답했던 것이다. 참호안을 성큼성큼 돌아다니면서, 한 번만 더 일제 사격을 퍼부으면 적들을 박살 내는 최후의 일격이 될 것이라고 아무리 열정적으로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돌아오는 것은 아주 조그맣게투덜거리는 소리뿐이었고, 병사들은 군화 위로 꾸벅꾸벅 졸며간간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것은 단지 죽는다는 두려움만이 아니라, 하필 지금 죽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막판에 죽는 것은 맨 처음에 죽는 거나 마찬가지야, 세상에 이보다 더 멍청한 일은 없지, 이게 알베르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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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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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다 읽고 나서 사양(斜陽)의 뜻을 정확히 알자 싶어 검색을 해보았다.

  "저녁 때의 햇빛, 또는 저녁 때의 저무는 해/ 새로운 것에 밀려 점점 몰락해 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이 작품에는 두 가지의 뜻이 모두 잘 어울린다. 패전 후 불안하고 암울한 일본 사회에서 점점 몰락해가는 젊은 귀족 집안의, 누나 가즈코와 남동생 나오지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가즈코'와 '나오지'라는 인물은 일본의 패전 후 빠르게 몰락해가는 귀족 집안이지만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귀족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극과 극이다. 누나는 구차하고 비참하지만 끝까지 투쟁하여 혁명적인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살아남고자 하는 인물이고, 동생은 죽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천박함에 물들이고 스스로 지금까지 버틴 것도 최대한의 발악이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하는 인물이다. 




  누나 가즈코는 스물 아홉살이고 이혼과 사산이라는 아픔을 가진 여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경제적으로 몰락해가는 친정으로 돌아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마지막 귀족의 자태를 가진, 그러나 현실에는 적응해나갈 힘을 잃어버린,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며 살아가고 있다. 외삼촌의 도움으로 됴쿄의 저택을 팔고 이즈라는 시골의 산장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이들 집안이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몰락한 귀족 집안을 은근히 무시하는 시골에서의 삶이란 것이 쉽지 않다. 그러한 그녀의 삶에서 버팀목이 되어주는 존재는 동생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작가 '우에하라 지로'이지만 그와의 인연은 6 년 전, 동생 나오지 문제로 한 번 만나 어이없는 키스를 받은 채로 헤어진 것이 다이다.  혼자만의 사랑을 키워왔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가 유부남인데다 술로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자신의 타오르는 절절한 사랑의 감정 - 만나주기만 하면 된다, 우리 집으로 한 번 찾아와 달라,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 사랑해주기만 하면 된다 등등 -을 적어 편지를 보낸다. 아, 정말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꿈꾸는 혁명적 사랑이란 것이 유부남의 아이를 임신하는 것이고 그의 아이를 꿋꿋이 키워내는 것이라니... 아무리 패전 후의 암울한 사회라고 해도, 그리고 아무리 귀족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편협한 시각을 가진 여자라고 해도 사실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이것이 얼마나 어이없고 황당한 일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무작정 우에하라를 찾아가 사랑을 나누고 이이를 잉태하게 되는데 자신의 주위에 있던 모든 가족을 떠나보내고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삶의 희망은 그녀가 잉태한 그 아이라는 것이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로는 다행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난 행복합니다. 내 바람대로 아기를 가진 것 같아요. 나는 이제 모든 걸 떠나보낸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내 배속에 작은 생명이 내게 옅은 미소를 짓게 하는 씨앗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손가락질받을 짓이었다고는 절대 생각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전쟁, 평화, 무역, 조합, 정치가 존재하는 건 무엇 때문인지, 요즘 전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은 모르시겠죠? 그러니까 언제까지나 불행한 거예요. 그건 말이죠.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여자들이 좋은 아이를 낯기 위해서예요. 난 처음부터 당신의 인격이라든가, 책임감에 기댈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의 한결같았던 모험을 무릅쓴 사랑의 성취가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을 완수했으니 이제 나의 가슴 속은 숲속의 작은 옹달샘처럼 잔잔합니다.(178~179쪽)




  어이없고 활당하기도 하지만 이 얼마나 기개 넘치는 자신감인지...  헛, 하고 웃음이 난달까. 그녀는 이제 귀족 의식을 버리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아이와 함께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단 기분이 된다.  사생아와 그 어미, 앞으로 수많은 꼬리표가 붙을 그녀의 삶이 아무리 비참하고 비루해도 그녀는 혁명적 사랑을 완수한 것이다. 나 자신은 이런 삶의 자세를 이해할 수 없지만 손가락질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살기 위하여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고 손가락질 하지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것, 할 수 있는 것,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아 총력을 기울여 사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애쓰는 것. 그것이 손가락질 받을 일일 수도 있지만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럼 죽음을 택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조언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녀 가즈코는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남고 싶었던 것이고 살아남는 것이 결국 승리하는 것이라고 최선을 다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부남을 사랑하여 그의 아이를 잉태하고 키우는 것 -가즈코는 그것을 기존의 도덕적 관습을 깨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혁명적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여전히 동의할 수 없지만!




  그에 반하여 동생 나오지는 자신이 귀족이라는 신분의 굴레에서 죽는 순간까지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스스로 비참해지기를 선택한 인물이다. 학생 시절부터 일부러 천박해지려 애쓰면서 '그것이 민중의 벗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을 하였고, 비행을 일삼고 마약에 손대면서 가산을 탕진하고 어머니와 누나를 도탄에 빠뜨리지만 그러한 발악도 귀족 계급으로서 갖는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 어딘가 중대한 결함이 있는 잡초, 게으른 놈, 여자나 밝히는 놈, 자기 편한 대로 쾌락만 쫓는 놈이라는 규탄을 받으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쩔쩔매고 부끄러워하면서 끝없이 사과하고 죄스러워하며 살아왔지만 결코 그런 삶은 나오지가 원한 삶은 아니었으므로 절망의 끝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애인과 동반 자살한 다자이 오사무가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누나

  믿어줘

  난, 그렇게 굴러 다녔어도 전혀 즐겁지 않았어. 쾌락 불감일지도 몰라. 나는 그저 귀족이란 나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광하고 시시덕거리고 타락한 거야.

  누나

  정말로 우리에게 죄가 있는 걸까.  귀족으로 태어난 것이 우리의 죄일까.  그저 그 집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영원히, 예를 들어 유다 집안의 자식처럼, 민중에게 죄스러워하고, 끝없이 사죄하고, 부끄러워하며 살아가야만 해.

  나는 좀 더 일찍 죽었어야 해. 하지만 단 하나, 엄마의 애정. 그것을 생각하면 죽을 수 없었어. 인간은 자유롭게 살 권리를 가짐과 동시에 언제라도 자기 뜻대로 죽을 권리를 갖고 있지만, '엄마'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죽을 권리를 유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것은 동시에 '엄마'도 죽이는 일이 될 테니까.(166~167쪽)




  그러면서 자신이 단 한 사람 사랑했던 여인, 어느 서양 화가의 부인인 '스가'에 대하여 - 누나에게만은 말하고 싶다

글을 남긴다. 유부남과 유부녀를 사랑한다는, 비슷한 조건의 사랑을 하지만 한 사람은 투쟁하여 쟁취하고 한 사람은 차마 도덕적 금기를 무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타락해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혼란기의 일본인들의 심정을 잘 어루만진 다자이 오사무. 그 자신도 일본의 패전 후 대저택의 삶이 몰락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경험을 하였으며 이를 작품에 잘 살려내어 발표 당시 '사양족'이라는 유행어가 돌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나오지의 유서에서 '인간에게는 살 권리와 동시에 죽을 권리도 있는 법'이라고 피력한 다자이 오사무 자신도 죽을 권리를 행사했지만, 그리고 나는 역시 가즈코와 같이 살 권리와 죽을 권리 중에 살 권리에 손을 들어주겠지만 나오지와 작가 자신의 선택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은 한다. 난 권리는 있지만 행사하지 않겠다.  우리와 같은 듯 다른 일본인들의 죽음에 대한 사고방식의 차이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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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4-30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저희 독서 모임 책으로
선정된 기억이 있습니다.

저도 참석하려고 책도 사고...
했으나 참석을 했는지 책을 읽
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패전 후, 일본인들의 사고 그리
고 죽음에 대한 생각에 대한
단상이 눈에 보이는 듯 하네요.

은하수 2023-04-30 09:39   좋아요 0 | URL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기도 했지만 우울한 시대를 헤쳐 나가는 자세가 우리와 많이 다르단 샛각이 이번에도 들었어요
이웃나라지만 우리와 다른점이 너무 많단 생각이 깊어졌어요.

읽은 책이어도 시간이 지나면 가물가물해집니다.
심지어 읽은 것도 잊는걸요^^

새파랑 2023-04-30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다자이 오사무 작품중에 <사양>이 가장 좋더라구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ㅋ

은하수님 리뷰 읽으니까 다시 읽어보고싶네요~!!

은하수 2023-04-30 10:45   좋아요 1 | URL
다시 읽으셔도 좋으실듯요^^
모두 공감되진 않지만 작품 자체로는 상당히 매력적이고 거기엔 잘 읽히는 문체도 한몫 하는거 같죠?
다른 작품.. 예를 들어 <인간실격> 읽어보면 어떨지 판단이 서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