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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3월
평점 :
책을 다 읽고 나서 사양(斜陽)의 뜻을 정확히 알자 싶어 검색을 해보았다.
"저녁 때의 햇빛, 또는 저녁 때의 저무는 해/ 새로운 것에 밀려 점점 몰락해 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이 작품에는 두 가지의 뜻이 모두 잘 어울린다. 패전 후 불안하고 암울한 일본 사회에서 점점 몰락해가는 젊은 귀족 집안의, 누나 가즈코와 남동생 나오지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가즈코'와 '나오지'라는 인물은 일본의 패전 후 빠르게 몰락해가는 귀족 집안이지만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귀족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극과 극이다. 누나는 구차하고 비참하지만 끝까지 투쟁하여 혁명적인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살아남고자 하는 인물이고, 동생은 죽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천박함에 물들이고 스스로 지금까지 버틴 것도 최대한의 발악이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하는 인물이다.
누나 가즈코는 스물 아홉살이고 이혼과 사산이라는 아픔을 가진 여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경제적으로 몰락해가는 친정으로 돌아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마지막 귀족의 자태를 가진, 그러나 현실에는 적응해나갈 힘을 잃어버린,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며 살아가고 있다. 외삼촌의 도움으로 됴쿄의 저택을 팔고 이즈라는 시골의 산장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이들 집안이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몰락한 귀족 집안을 은근히 무시하는 시골에서의 삶이란 것이 쉽지 않다. 그러한 그녀의 삶에서 버팀목이 되어주는 존재는 동생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작가 '우에하라 지로'이지만 그와의 인연은 6 년 전, 동생 나오지 문제로 한 번 만나 어이없는 키스를 받은 채로 헤어진 것이 다이다. 혼자만의 사랑을 키워왔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가 유부남인데다 술로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자신의 타오르는 절절한 사랑의 감정 - 만나주기만 하면 된다, 우리 집으로 한 번 찾아와 달라,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 사랑해주기만 하면 된다 등등 -을 적어 편지를 보낸다. 아, 정말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꿈꾸는 혁명적 사랑이란 것이 유부남의 아이를 임신하는 것이고 그의 아이를 꿋꿋이 키워내는 것이라니... 아무리 패전 후의 암울한 사회라고 해도, 그리고 아무리 귀족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편협한 시각을 가진 여자라고 해도 사실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이것이 얼마나 어이없고 황당한 일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무작정 우에하라를 찾아가 사랑을 나누고 이이를 잉태하게 되는데 자신의 주위에 있던 모든 가족을 떠나보내고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삶의 희망은 그녀가 잉태한 그 아이라는 것이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로는 다행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난 행복합니다. 내 바람대로 아기를 가진 것 같아요. 나는 이제 모든 걸 떠나보낸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내 배속에 작은 생명이 내게 옅은 미소를 짓게 하는 씨앗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손가락질받을 짓이었다고는 절대 생각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전쟁, 평화, 무역, 조합, 정치가 존재하는 건 무엇 때문인지, 요즘 전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은 모르시겠죠? 그러니까 언제까지나 불행한 거예요. 그건 말이죠.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여자들이 좋은 아이를 낯기 위해서예요. 난 처음부터 당신의 인격이라든가, 책임감에 기댈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의 한결같았던 모험을 무릅쓴 사랑의 성취가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을 완수했으니 이제 나의 가슴 속은 숲속의 작은 옹달샘처럼 잔잔합니다.(178~179쪽)
어이없고 활당하기도 하지만 이 얼마나 기개 넘치는 자신감인지... 헛, 하고 웃음이 난달까. 그녀는 이제 귀족 의식을 버리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아이와 함께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단 기분이 된다. 사생아와 그 어미, 앞으로 수많은 꼬리표가 붙을 그녀의 삶이 아무리 비참하고 비루해도 그녀는 혁명적 사랑을 완수한 것이다. 나 자신은 이런 삶의 자세를 이해할 수 없지만 손가락질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살기 위하여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고 손가락질 하지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것, 할 수 있는 것,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아 총력을 기울여 사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애쓰는 것. 그것이 손가락질 받을 일일 수도 있지만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럼 죽음을 택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조언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녀 가즈코는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남고 싶었던 것이고 살아남는 것이 결국 승리하는 것이라고 최선을 다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부남을 사랑하여 그의 아이를 잉태하고 키우는 것 -가즈코는 그것을 기존의 도덕적 관습을 깨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혁명적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여전히 동의할 수 없지만!
그에 반하여 동생 나오지는 자신이 귀족이라는 신분의 굴레에서 죽는 순간까지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스스로 비참해지기를 선택한 인물이다. 학생 시절부터 일부러 천박해지려 애쓰면서 '그것이 민중의 벗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을 하였고, 비행을 일삼고 마약에 손대면서 가산을 탕진하고 어머니와 누나를 도탄에 빠뜨리지만 그러한 발악도 귀족 계급으로서 갖는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 어딘가 중대한 결함이 있는 잡초, 게으른 놈, 여자나 밝히는 놈, 자기 편한 대로 쾌락만 쫓는 놈이라는 규탄을 받으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쩔쩔매고 부끄러워하면서 끝없이 사과하고 죄스러워하며 살아왔지만 결코 그런 삶은 나오지가 원한 삶은 아니었으므로 절망의 끝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애인과 동반 자살한 다자이 오사무가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누나
믿어줘
난, 그렇게 굴러 다녔어도 전혀 즐겁지 않았어. 쾌락 불감일지도 몰라. 나는 그저 귀족이란 나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광하고 시시덕거리고 타락한 거야.
누나
정말로 우리에게 죄가 있는 걸까. 귀족으로 태어난 것이 우리의 죄일까. 그저 그 집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영원히, 예를 들어 유다 집안의 자식처럼, 민중에게 죄스러워하고, 끝없이 사죄하고, 부끄러워하며 살아가야만 해.
나는 좀 더 일찍 죽었어야 해. 하지만 단 하나, 엄마의 애정. 그것을 생각하면 죽을 수 없었어. 인간은 자유롭게 살 권리를 가짐과 동시에 언제라도 자기 뜻대로 죽을 권리를 갖고 있지만, '엄마'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죽을 권리를 유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것은 동시에 '엄마'도 죽이는 일이 될 테니까.(166~167쪽)
그러면서 자신이 단 한 사람 사랑했던 여인, 어느 서양 화가의 부인인 '스가'에 대하여 - 누나에게만은 말하고 싶다
글을 남긴다. 유부남과 유부녀를 사랑한다는, 비슷한 조건의 사랑을 하지만 한 사람은 투쟁하여 쟁취하고 한 사람은 차마 도덕적 금기를 무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타락해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혼란기의 일본인들의 심정을 잘 어루만진 다자이 오사무. 그 자신도 일본의 패전 후 대저택의 삶이 몰락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경험을 하였으며 이를 작품에 잘 살려내어 발표 당시 '사양족'이라는 유행어가 돌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나오지의 유서에서 '인간에게는 살 권리와 동시에 죽을 권리도 있는 법'이라고 피력한 다자이 오사무 자신도 죽을 권리를 행사했지만, 그리고 나는 역시 가즈코와 같이 살 권리와 죽을 권리 중에 살 권리에 손을 들어주겠지만 나오지와 작가 자신의 선택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은 한다. 난 권리는 있지만 행사하지 않겠다. 우리와 같은 듯 다른 일본인들의 죽음에 대한 사고방식의 차이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