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는 황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이없게 흘러간다. 갑자기 제자의 이혼한 누나로부터 -한 번의 만남으로부터 6 년이란 시간이 지나 - 이런 편지를 받는다면 그 남자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거지? 어떤 식으로 이야기긴 전개가 될런지 전혀 짐작도 못하겠다. 그래서 계속 읽게 되는거다. ㅎㅎ










제가 처음 당신과 만난 것은 벌써 6년이나 지난 옛일입니다. 그때 전 당신이란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동생의 스승, 그것도 어느 정도는 불량한 스승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죠. 그리고 함께 컵에다 술을 마신 뒤, 당신은 제게 가벼운 장난을하셨죠. 전 아무렇지 않았답니다. 단지 이상스레 몸이 공중에 붕 뜬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신을 좋아하는 또는 싫어하는 어떤 감정도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동생의 기분을 좀 맞춰주려고 당신이 쓴 책들을 빌려 어떤 건 재밌어하며 또 어떤 건 지루해하면서 읽었지요. 그다지 열심히 읽진 않았는데, 6년의 나날이 그렇게 흘러가면서 어느 새 당신이란 존재가 물안개처럼 내 가슴속으로 스며든 겁니다. 그날 밤, 지하실 계단에서 우리가 한 일도, 불현듯 그 순간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라, 뭔가 그건 내 운명을 결정할 정도로 중대한 순간이었다는 기분이 들고, 당신이 너무나 그리워서, 이것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옥죄어와 흐느껴 울었습니다.  - P96

훨씬 전에, 당신이 아직 홀몸이실 때, 그리고 저도 아직 야마키씨와 결혼하지 않았을 그때, 우리가 만나 결혼했더라면 저도 지금처럼 괴로워하지 않고 살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제 당신과결혼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념하고 있습니다. 당신 부인을 밀어내는 일 같은 그런 교활한 폭력은, 전 싫습니다. 저는 애첩(이런 단어는 죽어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지만, 애인이란 말로 바꿔봤자 의미는 마찬가지니 확실히 말하죠)이라는 신분도 참을 수 없어요. 

하지만 보통 첩의 생활이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 같아요. 사람들 말로는 첩은 보통 볼일이 끝나면 버려진대요. 나이가 육십가까이 되면 어떤 남자라도다 본처에게로 돌아가게 된다는 거죠. 그러니 첩 따윈 영 할 짓이 못된다고, 니시카타초의 하인과 유모가 하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 P97

하지만 그건 보통의 첩들 이야기고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한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당신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당신이 절 좋아하신다면 우리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는게 당신이 일을 하시기에도 좋을 거고요. 그러면 당신 부인도 우리 두 사람의 일을 납득해줄 것 아니겠어요? 참으로 교묘하게 잘도 짜 맞춘 변명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전 제 생각이 어디 한군데 틀린 점은 없다고 생각해요. - P97

문제는 당신 답변에 달렸어요. 저를 좋아하시는지 싫어하시는지, 아니면 저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으신지 당신의 답변이 무척이나 두렵지만, 꼭 들어야겠습니다. 얼마 전 보낸 편지에도 전 ‘매달리는 애인‘이라고 쓰고, 또 이 편지에도 ‘매달리는 중년 여자‘라고썼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당신이 답장을 보내주지 않으면, 전 매달리려 해도 실오라기 하나 붙잡을 곳 없이 그저 혼자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다 말라갈 겁니다. 당신의 한마디가 없으면 전 이대로 끝입니다. - P98

꼭 한번 이쪽에 놀러 오시지 않겠어요? 제가 먼저 나오지에게 당신을 모셔 오라고 말하는 것도 좀 그러니까, 당신이 그저 술김에 불쑥 들른 것처럼 해서 오시라고요. 나오지가 모시고 와도 되지만, 될수 있으면 혼자서 그리고 나오지가 도쿄에 가고 없을 때 오세요. 나오지가 있으면 당신을 나오지가 독차지하고는, 분명히 둘이서 오 - P102

사키 씨네로 소주 같은 거나 마시러 나가버려, 거기서 끝날 게 뻔할 테니까 말이에요.  - P102

전 말이죠, 불량한 게 좋아요. 그것도 꼬리표가 붙은 불량을 좋아해요. 저도 그렇게 꼬리표가 붙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는 게 제가 유일하게 살길 같아요. 당신은 일본 제일의 꼬리표 붙은 불량자죠?
그리고 요즘은 또 많은 사람이 당신을 지저분하다, 천박하다, 하면서 심한 말로 공격한다고 동생한테 들었어요. 전 점점 더 당신이 좋아지는 거 있죠? 당신은 분명히 이런저런 여러 부류의 친구들이 있으시겠지만, 이제부턴 저 한 사람만 좋아하시게 될 거예요. 왠지 모르게, 전 그게 정답 같아요. 그리고 당신은 저와 함께 살며 매일매일 즐겁게 작업을 할 수 있겠죠. 어릴 때부터 전 사람들에게 자주, ‘너랑 같이 있으면 피곤이 다 풀린다‘라는 말을 들었어요.  - P102

만나기만 하면 돼요. 이젠 편지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 그저 한번만 만나주세요. 제 쪽에서 도쿄에 있는 당신 댁으로 찾아가면 가장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어머니가 늘 와병 중이나 다름없어 저는 붙박이 간호사 겸 하녀 노릇을 해야 해서 도저히 무작정 올라갈순 없답니다. 제발 부탁드려요. 아무쪼록 절 찾아 이쪽으로 한번 와주세요. 딱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만나면 알게 될 일. 제 입가에 생긴 희미한 주름을 봐주세요. 슬픈 나날이 만든 주름을 봐주세요. 제가 하는 어떤 말보다 제 얼굴이 제 심정을 또렷이 당신께 알려드릴 겁니다. - P103

이런 편지를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자가 살아가려는 노력을 조롱하는 사람입니다. 여자의 생명을 조롱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항구에 꼼짝 않고 고여 있는 숨 막힐 듯한 공기 속에서는 숨을 쉴 수 없어,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닻을 올려 항구 밖으로나가고 싶습니다. 머물러 있는 배는 예외 없이 더럽습니다. 저를 비웃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모두 정박해 있는 배입니다. 아무것도 할수 없는, 그저 떠 있는 배 말입니다. - P104

제 말뜻 아시겠어요?
사랑하는 데 이유는 없습니다. 변명 아닌 변명을 너무 늘어놨습니다. 제 동생의 말투를 흉내 낸 것 같기도 합니다. 그저, 오시길 기다릴 뿐입니다.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뿐입니다.
기다림. 아아, 인간의 삶에는 기뻐하고 화내다가 슬퍼하고 증오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지만, 그래도 인생의 1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감정들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사는 것 아닐까요. - P106

-5
나는 올여름 한 남자에게 세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한 장도 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그 외에 다른 살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세 통의 편지에 내 가슴속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던터라, 절벽 끝에 서서 성난 파도 속으로 몸을 던지는 심정으로 우체통에 넣었건만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나오지에게 그 얘기는 함구하고 그 사람에 관한 얘길 들어보니, 그는 이전과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이 매일 밤 술이나 마시며 돌아다니고 점점 더 부도덕한 이야기를 써서 세상의 빈축을 사고 지탄받고 있는모양이다.  - P107

 그저 나 혼자 멀찍이 동떨어져 불러봐도, 소리쳐봐도 아무 메아리도 없는, 황혼의 가을 들녘에 초라하게 서 있는 듯한,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처절한 고독에 휩싸인다. 이게 그 실연이란 것일까. 들녘에 이렇게 홀로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사이, 해도 지고 마침내 밤이슬에 얼어 죽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는 걸까 생각하면 메마른 통곡으로 어깨와 가슴이 부서질 듯 요동치고 숨조차 쉴 수 없다. - P108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다, 어떻게든 상경해서 우에하라 씨를 만나야지, 나의 돛은 이미 하늘 위로 솟고 항구 밖으로 나왔으니 이대로 서 있을 수는 없다, 가야 할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 이렇게 소리없이 도쿄로 갈 마음의 준비를 하던 차에 어머니의 상태가 심상치않았다.

어느 날 밤 기침이 심하게 나서 열을 재보았더니, 39도였다.
"오늘 날이 추워서 그렇지. 내일이면 괜찮을거야."
어머니는 여전히 콜록대면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씀하셨지만, 내 눈에는 왠지 보통 기침 같지는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은 아랫마을 의사에게 왕진을 부탁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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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한 권도 안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기억이 안난다... 왜 안 읽었을까..
꽤 많은 일본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고 나름 자부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검색해봐도 없다.. 충격적이다!





1
아침 식탁에서 수프를 한 숟가락 뜨신 어머니가 "아" 하고 가는신음 소리를 내셨다.
"혹시 머리카락이라도?"
수프에 뭔가 비위 상하는 거라도 빠졌나 싶어 여쭈었다.
"아니."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살짝 수프를 한 숟가락떠서 입에 흘려 넣으시고는, 고개를 돌려 부엌 창문 너머 만개한 산벚꽃에 시선을 보내며 얼굴을 그대로 모로 둔 채 다시 수프를 살짝작은 입술 사이로 떠 넣으셨다. 살짝이라는 표현은 어머니에겐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여성잡지 등에 나오는 식사 예법과는 정말이지,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 P7

"자, 모두 묵념하자."
HPHA내가 몸을 구부리고 합장하자 아이들도 얌전히 내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합장했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과 헤어져 혼자 돌계단을 천천히 올라오는데, 계단 위로 늘어진 등나무 덩굴 밑 그늘에 어머니가 서서 말씀하셨다.
"아주 몹쓸 짓을 했구나."
"살무사인 줄 알았더니 그냥 뱀이었어요. 그래도 잘 묻어줬으니괜찮겠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런 일을 어머니께 들킨 게 영 찜찜했다.
어머니는 결코 미신을 믿는 분은 아니었지만, 10년 전 아버지가 - P16

니시카타초 집에서 돌아가신 이후 뱀을 아주 무서워하신다. 아버지가 임종하시기 전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머리말에서 가늘고 새까만줄이 떨어져 있는 걸 보고 뭔가 하고 집어 들었는데 그게 바로 뱀이었단다. 스르르 도망쳐 복도로 나가서는 그 뒤론 어디로 갔는지 그대로 사라져버렸단다. 그것을 본 사람은 어머니와 외삼촌 두 분이었는데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는 임종 전에 집안을 소란스럽게 하지 않으려고 잠자코 앉아 계셨다고 한다. 우리도 그 자리에 같이 앉아 있긴 했지만, 그래서 그때 뱀이 나타났었는지는 전혀 몰랐다. - P17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저녁, 정원 연못가 나무에 올라가있던 뱀은 나도 직접 보았다. 나는 지금 스물아홉 살 아줌마가 되었지만, 1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열아홉이었다. 이미 꼬마는아니었기 때문에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생생한데, 내가 영전에 꽂아둘 꽃을 꺾으러 정원 연못 쪽으로 걸어 내려가 연못가 바위 옆 철쭉이 핀 곳에 서서 힐끔 쳐다보니 철쭉 가지 끝에 작은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흠칫 놀라 그 옆 황매화 가지를 꺾으려 했더니 그 가지에도 뱀이 감겨 있었다. 또 그 옆에 있던 물푸레나무에도 어린 단풍나무 가지에도 금작화에도 등나무에도 벚나무에도 이나무 저 나무에 모두 뱀들이 몸을 둘둘 말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무섭진 않았다. 뱀도 나처럼 우리 아버지의 임종을 슬퍼해 구멍에서 기어 나와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곧 정원에서 보았던 뱀 이야기를 어머니께 해드렸더니 어머니는 침착하게 무언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이시고는 딱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 P18

하지만 이 두 번의 뱀 사건이 그날 이후 어머니가 뱀을 질색하게된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뱀을 질색한다기보다는뱀을 무슨 영물인 양 생각해 두려워하는, 다시 말해서 공포심을 갖게 된 것 같다. - P18

우리가 도쿄 니시카타초에 있는 집을 버리고 이즈에 있는 약간중국풍의 산장으로 이사한 때는 일본이 전쟁에서 무조건 항복한 그 해 12월 초였다. - P20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집안의 경제는 어머니의 남동생이자 현재는 어머니의 유일한 혈육이며 와다에 사시는 외삼촌이 전적으로 돌봐주고 계셨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로는 세상이 전과 달라져 와다의 외삼촌이 이젠 안 되겠으니 집을 팔아야겠다고, 하녀도 내보내고 모녀 둘이서 어디 시골에 작은 집 한채를 마련해 형편에 맞춰 사는 게 낫겠다고 어머니께 충고했는지,
어머니는 돈에 관해서는 아이들보다 더 아는 게 없는 분이라 외삼촌에게 그런 말씀을 듣고 그럼 알아서 잘 좀 처리해달라고 부탁한모양이었다.
- P21

만약 어머니가 심술궂은 구두쇠여서 자식들을 구박하고 자기 앞날만 생각해 돈을 몰래 숨겨두는그런 사람이었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뀐다 해도 이렇게 죽고 싶은 심정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아, 돈이 없다는 것은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두려운, 비참한 살아날 구멍 없는 지옥 같다는 걸 태어나 처음으로 깨닫고는 가슴속에서 뜨거움이 복받친다. 속이 꽉 메어와 울고 싶어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인생의 쓴맛이란 이런 느낌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나는 빳빳이 굳어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다.

다음 날 어머니는 여전히 좋지 않은 낯빛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잠깐이라도 더 이 집에 머물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외삼촌이 오셔서 이제 짐은 거의 다 부쳤으니 오늘 이즈로 출발하자고 재촉하시는 바람에 어머니는 마지못해 코트를 입고 작별 인사하는 키미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를 대신하고는, 외삼촌과 나와 함께 셋이서 니시카타초 집을 나섰다. - P25

"정말 명의시다. 나는 이제 다 나았어."
아주 말간 얼굴에 부드러운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듯 말씀하셨다.
"어머니, 창문을 좀 열까요? 눈이 오고 있어요."
탐스러운 함박눈이 벚꽃잎 흩날리듯 나풀나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창문을 열고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유리문 너머 이즈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젠 아프지 않아."
어머니는 다시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옛일이 모두 꿈이었던 것 같아. 실은 난 말이야, 막상 이사할 때가 돼서 이즈로 떠나오기가 아무리 맘을 바꾸려애써봐도 싫었어. 니시카타초의 그 집에서 하루라도, 아니 반나절동안만이라도 더 있고 싶었어. 기차에 올라탔을 때는 거의 절반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지. - P31

여기 도착했을 때도 처음에만 잠깐 정신이 들었을 뿐 날이 어둑해지니까 벌써 도쿄가 그리워서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제정신이 아니게 된 거야. 보통 병이 아니지. 신께서 날 한번 죽이고는 어제까지와는 다른 나로 다시 환생시켜주신거야." - P31

2
뱀 알 사건이 있고 열흘정도 지나면서 불길한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 어머니를 더 깊은 슬픔 속에 빠뜨리고 숨통을 옥죄었다.
내가 불을 내고 말았다.
내가 집에 불을 내다니. 내 생애에 그런 무서운 사건이 일어나리라곤 태어나서 지금까지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불을 소홀히 다루면 큰일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도 깨닫지못할 정도로 나는 철부지 ‘아씨‘였던가. - P33

"그전부터 하고 싶은 얘기였는데, 우리 서로 기분이 좋을 때 하려고 오늘까지 기다렸어. 그다지 좋은 이야기는 아니야. 왠지 오늘은나도 맘 편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어서 그러니까 음, 너도 끝까지 잘 좀 들어줬으면 좋겠어. 사실 말이야, 나오지는 살아 있단다."
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5, 6일 전에 와다의 외삼촌한테 연락이 왔어. 예전에 외삼촌 회사에서 일했던 사람이 최근에 남쪽 지방에서 돌아와 외삼촌 계신곳으로 인사를 왔는데 그때 이런저런 얘기 끝에 우연히도 나오지와같은 부대에 있었다고, 그래서 나오지는 무사하다고, 이제 곧 돌아올 거라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영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그 사람 얘기로는 나오지가 아주 심한 아편중독 상태였대………."
"또!"
나는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입을 일그러뜨렸다.  - P50

아버지와 비와 호수에서 모터보트를 타고, 내가 물속으로 뛰어들자 물풀 사이에 사는 작은 물고기들이 내 다리를 스쳐 지나가고, 호수 속으로 내 다리의 그림자가 또렷이 떠올라 울렁울렁 움직이던그 모습이, 지금 어머니와 둘만 있는 이 상황에 어떠한 연관성도 없이 불현듯 가슴속에 떠오르다 사라졌다. 나는 침대에서 미끄러지듯내려와 어머니의 무릎을 껴안고 그제야 비로소 제대로 말할 수 있었다.
"어머니, 아까는 죄송했어요."

생각해보면 그즈음이, 어머니와 나에게 마지막 행복의 불꽃이 반짝였던 때였고, 나오지가 남쪽 지방에서 돌아온 다음부터 우리의 지옥 같은 나날이 시작됐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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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4-26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경험이 있죠. 저도 톨스토이 책을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아 작년에 부활을 읽었더랬습니다. 왜 안읽었는지 저도 모르죠..ㅎㅎ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을 읽고 사양도 읽었는데...그리고 또 한 작품을 읽었는데...인간실격만 줄거리가 생각나고 나머지 작품들은 암것두 생각이 안나요...ㅠㅠ 오래 전에 한 번 휘리릭 읽으면 바로 증발하나 봅니다. 인간실격은 3번 읽었거든요..ㅎㅎ 그래서 아직도 기억이 나요..ㅎㅎ

은하수 2023-04-27 00:25   좋아요 1 | URL
당연히 읽었다고 착각하는 단계가 있나봐요^^ 작가를 혼동하기도 하구요.
읽은 책 까먹는거야 그냥 예사로운 일이죠~~ㅎ
yamoo님께선 인간실격이 더 좋으셨나봐요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총,균,쇠> 읽고 바로 시작해서 그런가...
흥미진진 소설처럼 읽힌다. 영감 받은 책이 <총,균,쇠>라고 한 이유를 너무 잘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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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4-28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총, 균, 쇠>는 많은 자료를 기반으로 각 대륙 문명 격차의 원인을 다루었다면 <사피엔스>는 인류의 각 발전단계를 재구성하기에 훨씬 재미있어요. 연작으로 출간된 <호모 데우스>는 미래에 대한 책이기에 이어서 읽으시면 더 재미있으실거에요. ^^

은하수 2023-04-28 13:02   좋아요 1 | URL
<사피엔스>에 국한한 전개인데도 스피디하고 전개과정이 아주 재밌네요 아주 잘 읽힙니다.
<호모 데우스>도 재밌었으면 좋겠어요 기대하게 됩니다^^
 
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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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고 사랑하고 끌어안아주는 로봇 고고, 그리고 고고가 사랑하는 랑을 다시 만나고 싶고 그리워하는 감정들이 오롯이 랑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게
희망적으로 다가온다. 랑을 만나기 위해 지나온 사막에 대해 랑에게 다 말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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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의 말처럼 내 몸은 나아진 게 아니므로 상태가 좋아진 건 아니었지만 급속도로 무너지던 내몸을 생각하면 확연히 다르다. 살리가 망가진 내무릎에 지카가 주었던 검은 천을 감싼다. 덕분에걸을 수 있게 된다.
살리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천천히 고요한 소용돌이가 부는 곳으로 향한다.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려면 그 아이를 계속 생각해. 네가 원하는 지점이 있잖아. 그럼 데려다줄거야."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묻고 싶지만 그런 질문은 이제 별 소용없는 것 같아 나는 알겠다고만 대답한다. 살리가 소용돌이 앞에서 나를 놓는다. 소용돌이와 우리 사이에 투명한 벽이 있는 것 같다.
매우 빠르고 거센 소용돌이다. 한번 들어가면 절대 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 P142

살리가 내게 악수를 요청한다.
"내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존재치고 굉장히 좋았어. 즐거운 추억 줘서 고마워. 좋은 기억 가지고 갈게." - P142

나는 살리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나의 첫인상 ••••••찮았나?"
"그럼! 무척 좋았어."
살리의 악수에 응한다. 랑에게 해줄 말이 많다.
무엇보다 내 첫인상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걸제일 먼저 말해주고 싶다.
소용돌이로 한 발을 뻗는다. 거센 바람 소리가그제야 들린다. 몸은 금방이라도 소용돌이에 휩쓸릴 것 같다. 나는 힘주어 한 발자국씩 내딛는다. 그때 소용돌이 밖에서 살리의 외침이 들린다. 소용돌이와 함께 안으로 흘러 들어온 살리의 목소리가어둡고 시끄러운 이 공간에 가득 퍼진다. - P143

"나 드디어 네가 기억났어. 네가 어떤 로봇이었는지! 너는 전쟁시대에 만들어졌어!"
나는 살리가 당부한 대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너는 그곳에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살리는 일을 했어!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는 일을했어! 너는 사람을 끌어안아야 하는 로봇이었어.
두 팔로! 네팔은 다른로봇팔과달라. 인간을 안았을 때 안정감을 줬어. 너는 그 팔로 인간의 마음을 안았ㅇ니! 고고, 너는 랑을 진심으로 사랑했던거안! 네 마음은 진짜야." - P143

랑을 다시 만나면 이야기해주고 싶다. 내가 만난 사막에 대해. 너를 만나기 위해 걸어온 나의 사막에 대해. 그렇게 늙어가는 랑의 곁에서 조금씩망가져 가는 내 몸으로 이야기하겠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로소 랑과 시간이 맞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이번에는 너와 함께 늙어갈 수 있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랑을 떠올리며, 더 깊은어둠으로 내려간다.

간절하게.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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