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웰의 글 《책 대 담배》에서 읽었던 문장들을 여기 리베카 솔닛의 《오웰의 장미》에서 만났다. 심지어 작가도 ˝내 오랜 신조가 되어 준 문장˝이라며 글을 이어 나간다.
작가들에게 있어 ˝예술적 글쓰기˝란 그리도 중요한 논제인가보다.
명징성, 정직성, 정확성, 진실성 같은 것들이 오웰에게는 심미적 가치들이요 즐거움이었다.
그런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흔히 시사하는 시각적 미려함과 반드시 비슷할 필요가 없다. 1946년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는 그런 문제 전반을 다룬 글이다. 글을 쓰는 몇 가지동기 중 하나로 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았다. - P306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그에 상응하는 단어들과 그 적절한 배열이 갖는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에 미치는영향이나 훌륭한 산문의 견고함과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발견하는 즐거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놓쳐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
그도 젊었을 때는 "결말이 불행하고, 자세한 묘사와 매혹적인 비유로 가득한, 그리고 어느 정도 소리를 위해 택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화려한 구절이 가득한, 거창한 자연주의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런 화려함에대한 애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면, 따분한 책들을 쓰고 화려한 문구나 의미 없는 문장,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빠져 있었던 것은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있던 때였다." - P307
윤리적 목적이 심미적 수단을 첨예하게 한다는 점을 그는 분명히 한다. 그를 무의미에서 구해낸 것은 정치였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나는 장식적이거나 그저 묘사적인 책들을 썼을지도, 그리고 내 정치적 방향성에 대해서는 거의 의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종의 시사 논설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사 논설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심미적 요구나 즐거움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하게하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내 우선적인 관심사는 사람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 P308
뒤이어 내 오랜 신조가 되어준 문장들이 나온다.
"하지만나는 책을 쓰는 일도, 그저 좀 긴 잡지 기사를 쓰는 일도, 그것이 또한 심미적인 경험이 아니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작품을 꼼꼼히 읽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인 선전 글이라 해도 전업 정치인의 눈에는 무관하게 보일 대목들이 많다는 걸 알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살아서 정신이 멀쩡한 한, 나는 줄곧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땅의 표면을 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대상들과 쓸데없는 정보 조각들에서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무관하게 보일 만한 것이란 일련의 즐거움들과 개인적인 열심들이다. 마치 ‘빵과 장미‘에서 장미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세계관이란 많은 사물에 대한 폭넓고 길들여지지 않은 흥미, 특히 뒤이은 문장에 나오는 땅의 표면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일 터이다.) - P308
명정성, 정직성, 정확성, 진실성 등이 아름다운 것은 그런것들 가운데서 비로소 대상이 진실하게 재현될 수 있고, 앎이 민주화되고, 사람들이 힘을 얻고, 문들이 열리고, 정보가 자유롭게 이동하고, 계약들이 준수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런 글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그 글에서 흘러나오는 것에서도 아름답다. - P309
오웰의 작품에는 더 인습적인 종류의 아름다음 바다의 숲에서 영국의 초원에 이르는 자연 경관, 그 모든 꽃들과 두꺼비의 황금빛 눈알에 이르기까지도 있다. 하지만 윤리와 심미성이 별개가 아닌 이 아름다움, 진실과 전일성의 언어적 아름다움이야말로그가 자신의 글쓰기에서 도달하고자 노력했던 핵심적인 아름다움이다. 그런 아름다움은 언어와 그것이 묘사하는 것 사이, 한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 한 공동체나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종의 온전함이요 유대감으로 작용한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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