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케이크의 특별한 슬픔
에이미 벤더 지음, 황근하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책 표지, 제목을 보고 청소년 소설인가 싶었지만, 소설의 장르는 환상과 그로테스크의 중간 어디쯤일 거 같다. 가족 구성원 한 명, 한 명 모두 마음이 쓰인다. 서로의 고통을 어렴풋이 알지만 자신의 고통과 외로움이 너무 커서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슬픔.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남아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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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사라진 그날 밤, 그 식당이 처음 내 관심을 끌었다는 것은 어딘가 맞아떨어지는구석이 있었다. 그날 밤은 내가 조지 오빠 맞은편에 앉아 아빠 양복 재킷을 걸치고 덜덜 떨면서 방금 본 것을 이해해보려 애쓰던 밤이자, 얼마 안 있어서는 조지 오빠와 함께 우리 오빠 방의 공기를 바꾸어놓던 밤이었으니까.  - P325

그 여자는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 주방 문 쪽으로 돌아갔다. 비둘기들이 내 뒤에서 소리를 냈다. 그 여자 역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 같아보였다. 특별히 속물 같거나 다혈질이라거나 아니면 엄청나게 인기가 많거나 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닭고기, 다임과 버터에 푹 담근 그토록 맛 좋은 온기를 가진 닭고기를 나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오직 닭고기의 맛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맛. 어떻게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손에서 음식은 그 자체로 살아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금치는 시금치가 되었다. 좋은 농장에서 자라나고 소금과 열기, 그리고 그녀의 관심을 받아 이파리 많고 널찍한 자기 자신 안으로 편안히 녹아들어 있는 시금치. 마늘은 그 생기 있는 성질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토마토는 쇠고기만큼 중요한 것같이 느껴졌다. - P327

한 가지만 더, 아빠가 말했다.
너 그날 뭔가를 보았지, 그렇지?
달빛이 아빠 얼굴을 훤하게 비추었다.
언제요? 내가 알면서도 물었다.
아빠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의자 팔걸이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맞아요. 내가 말했다.
네가 뭘 보았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겠다. 아빠가 사진첩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말했다. 다만 한 가지는 알고 싶구나. 괜찮겠니?
괜찮아요, 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지프가 돌아올 수 있니?
아니요.
아빠는 스스로를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처럼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동안 그렇게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 P354

조지프도 무슨 능력이 있었니?
나는 눈을 감았다. 네, 오빠도.
삼십분 정도, 아빠는 이마를 누른 채 발을 흔들었다. 고개를저었고 한쪽으로 기울였다. 핀볼 하나가 아빠 몸속에 떨어져 뼈와 힘줄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처럼, 그리고 아빠는 그 핀볼을 피하려는 것처럼 이 새로운 소식을 이리저리 피하며 밀어내고 있는것 같았다. 나는 무엇인가를 바라보거나 생각하기에는 너무 피곤해서 계속 눈을 감고 있다가 조금 잠을 잤다. - P355

알고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오빠가 말했다.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나는 귀를 오빠 입에 바짝 갖다 대야 했고, 너무 조용해서 말들을 놓치지 않고 다 듣기는 아주 어려웠다.
그 목소리로 오빠는 내게 의자가 가장 좋았노라고, 삶을 지속할수 있는 가장 수월한 방법이었노라고 속삭였다. 가끔씩은 침대에도, 옷 서랍에도, 테이블에도, 소탁자에도 들어갔었노라고. 시간이 걸렸고, 거의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했다고. 그렇게 멀리 가 있는 동안은 좋았지만, 돌아오면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봤어, 오빠가 말했다. 여러 가지 다른 것도 선택해봤어. 그런데 그 의자가, 최고야.

나는 더 잘 듣기 위해 오빠가 말하는 동안 눈을 감았다. 놓칠 듯말 듯한 말들. 우리 손 위의 햇살. 병원 침대를 팽팽하게 감싸고 있던 톡 쏘는 표백제 냄새를 희미하게 피워 올리던, 침대 시트. - P383

있지, 오빠 나 부탁이 하나 있어.
기계들이 우리 옆에서 윙윙 돌아갔다. 문밖으로 간호사 한 명이 걸어갔다. 고무 밑창 신발을 신은 부드러운 발소리.
오빠가 대답 대신 내 손을 가볍게 힘주어 잡았다.
오빠에게는 감히 우리 오빠에게는 보통 부탁이란 것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오빠에게 뭔가를 실제로 부탁해본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학교에서 조지 오빠를 보게 해준 적이 있었을 뿐, 내가그 오랜 시간을 같이 놀아달라고 졸랐어도 오빠는 엄마가 뇌물로 새 과학책을 사줄 때에만 나랑 놀아주었다. 오빠가 충동적으로 나를 한 번 안아준 것은 그날, 오래전, 내가 입에 대해서 발작을 일으키고 나서 응급실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우리는 같이 놀러나가지 않았고, 같이 식사를 하지 않았고, 전화 통화도 하지 않았다. 때로 나는 오빠가 내 이름을 잊어버렸을 거라고 확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오빠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 P384

 눈길을 낮춰 베개 한구석에 고정시킨 다음 가장자리의 솔기를 따라가면서, 내가 의자에 그어놓은 선에 대해서 오빠에게 말했다. 나는 오빠에게 앞으로는 꼭 그 의자만 선택해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의자는 말고.
다른 어떤 물건도 말고 그것만.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알 테니까. - P384

볼펜으로 그은 선일 뿐이야. 내가 말했다. 하지만 쉽게 눈에 보여. 나는 더 가까이 몸을 숙였다. 오빠의 심장이, 바로 옆 스크린 녹색 화면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부탁이야, 내가 말했다.
오빠의 눈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 눈이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말 듣고 있어, 오빠?
응.
말이 되지?
돼.
그렇게 해줄 거야?
오빠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응. - P385

이건 오빠가 카드 테이블 의자를 선택한 것과 비슷한 것 아니었을까? 다만 내 선택으로 난 세상에 남을 수 있었고, 오빠는 그럴 수 없었다는 점만 빼면.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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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장르가 대체 뭘까? 환상소설인가?












비록 부모로서는 대체로 부족했지만, 그래도 나의 아빠는 매우좋은 사람이었다. 아빠는 부유층을 상대로 일했기 때문에 평범한서민들을 닦달할 일이 없었고, 자기 일을 올바르게 잘하고 싶어했기에 책을 읽으며 공부도 열심히 했다. 봉급이 꽤 많았지만 그것을 과시하지 않았다. 시카고 출신의 아빠는 가난 속에서 자란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어머니 밑에서 반듯하게 자랐다. - P142

아빠의 의외의 모습 한 가지는-사실은 전혀 어울리는 짝이라고 할 수 없는 엄마를 선택한 것도 의외기는 했지만 병원을 놀랍도록 혐오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싫어하는 것 이상이었다.
아빠는 병원이라면 질색을 했다. 운전하다가 병원이 있는 동네가 나오면 그 앞을 지나가는 것조차 싫어서 굽이굽이 불편한 샛길을 지나야 하는 더 먼 길을 택했다. - P143

오빠는 곧잘 사라지고는 했다. 그러나 평범한 사춘기 소년처럼, 종일 안 보이다가 취해서 집에 들어온다거나, 무릎에 검불을 묻히고 머리칼은 땀으로 눌린 채 새벽 두시에 들어오는 그런 식이 아니었다. 한적하고 고요한 대낮에, 오빠는 집에 있다가도 집에서 사라졌다. 나는 오빠가 자기 방에서 대학교 기숙사로 떠날 짐 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물건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다가도 문득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P158

우리는 만장일치로 래리를 사장으로 뽑았지, 엄마가 줄줄이 걸린 팔찌들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그 말하는 폼이 사랑에 빠진 소녀가 너무 티나지 않게 그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싶어 애쓰는 모습 그대로였다. 취미가 이토록 오래 이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 P136

조금 뒤 아빠는 접시를 말끔히 비우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오빠는 방으로 돌아가 전자기학에 관한 숙제를 했다. 엄마는 수세미로 조리대 위를 닦았다. 나는 식탁을 마저 치우고 나서 구운 쇠고기 남은 것을 랩으로 싸 냉장고 안에 넣었다. 다음 날 불륜 샌드위치 속에 들어가겠지. - P137

나는 문 앞에서 오빠를 불렀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불을 켰다. 오빠가 방 한가운데, 카드 테이블 앞에, 노트북 컴퓨터를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옷을 입고 있었고, 깨어 있었다. 오빠는 아파 보였고 수척했지만, 내게 오빠는 늘 조금 아프고 말라 보였다.
오빠, 내가 놀라서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여기 있었어? 괜찮아?
괜찮아, 오빠가 조용하게 말했다.
- P247

오빠는 보통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처럼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니 의자 다리가 오빠 신발 안으로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였다. 의자의 두 다리가 오빠의 바짓단 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 같았고, 더욱 가까이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의자 다리가 바짓단을 통과할 수 있게 오빠가 실제로 바지에 딱 맞는 크기로 구멍을 낸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명백하게도,
의자 다리가, 발치에 고무가 씌워진 그 밝은 회녹색 알루미늄 금속이, 오빠의 발이 있어야 할 그 공간에, 오빠 신발 안에 들어가있는 걸 볼 수 있었다.
- P253

의자 다리가 왜 오빠 바지 속에 들어가 있는거야? 내가 물었다. 그저 어떤 상황인지 알려고 가볍게 물은 거였다.
오빠는 아무 말이 없었다. 더 이상 화를 내지도 않았다. - P254

나는 오빠 발치로 가 앉았다. 오빠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기는 쉬웠다. 오빠가 나를 차버리고 싶어 한다는 게 느껴졌지만, 오빠 다리 가까이에 의자 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오빠는 나를 찰 수 없었다. 나를 손으로 붙잡아 멀리로 밀어버릴 수도 있었건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좀 전의 부드러움이 여전히 그 안에 있었다. 로지, 오빠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몸을 숙이고 오빠 바짓자락을 들췄을 때, 상처는 없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본 그것을. 피는 전혀 없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피가 오빠 다리에서 솟구쳐 나오는 것을 보았다면, 오빠에게 수술이, 진통제가 필요했다면, 베이지색 카펫 위로 피가 스며들고 있었다면. - P255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오빠가 의자 다리를 자기 살 속에 찔러넣지는 않았다는 것, 하지만 아무튼 거기 있는 것은 양말이 신겨져 신발 안으로 들어가 있는 의자 다리라는 것이었다. 살점으로된 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혹은 사람 다리 같은 옅은 환영만이 희미하게 어른거릴 뿐이었다. 오빠가 자기 다리를 자른 건가? 아니었다. 다시 한번 피는 전혀 없었다. 대신 의자 다리 주변에 사람다리의 어스름한 형체가 의자의 억센 금속 주변으로 인체의 부드러운 희미한 빛무리가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그랬는지 아무튼금속과 살갗이 무리 없이 뒤섞여 있었다. 의자가 당연하다는 듯 오빠 다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렇게 오빠를 해체시키거나 흡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그렇다는 양 자연스럽게. - P256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침묵. 오빠 집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그 모어헤드 의자들. 어느 날 내가 불쑥 나타났을 때, 이 집에 있는 것들은 침대를 비롯해 다른 가구들까지 전부 복도에 나와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오직 모어헤드 의자 네 개만이 오빠 방에 있는 건 아닐까. 펜 몇 개와, 신발과 함께. - P256

오빠에게 일어났던 그 일을 나는 내게 있었던 일인 듯 정확하게 다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실에만 관심을 두었다. 나는 오빠를 보았다. 분명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오빠는 내게 말을 했고, 나를 로지라고 불렀다. 오빠는 뭔가에 몰두해 있었고, 짜증이 나있는 것 같았고, 그다음에는 무척, 달콤할 만큼 친절했다. 근처에 무기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았고, 약을 한 것 같지도 않았으며, 내게 여러 번, 자기는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빠는 나를 현관에서 맞아주지 않았다.  - P265

조지프 괜찮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목구멍이 꽉 막혀왔다.
나도 몰라, 내가 잠시 뒤에 말했다. 아빠에게도 전화할 거야.
나 존스에 있어, 점원이 눈을 비비고 잡지를 한 장 넘기는 것을 보며 내가 다시 말했다. 점원은 잡지를 접어 다른 물건들 사이에 쑤셔 넣었다.

또 사라진 거야? 조지 오빠가 물었다.
응, 내가 낮게 말했다. - P270

더 단순하게 지내는 것이, 기숙사 학교 식당에서 벌어질 뻔한 드라마는 애초부터 피하는 것이 내게 더 좋은 선택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오빠가 없어졌기 때문에 집에 남아 있었다. - P302

내가 오빠 집에 다녀온 뒤로, 오빠는 딱 한 번 돌아온 적이 있었다. 엄마는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차를 몰고 오빠 집으로 갔고, 엿새째 되던 날 오후 오빠가 다시 자기 방바닥에 불가사리처럼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지프가 돌아왔어! 오빠 집 전화기 너머에서 엄마가 우리에게 노래를 불렀다. 조지프가 살아 있어! 엄마는 병원에서 오빠 곁을 지켰다.

안도감에 흠뻑 젖어 오빠 손에 입을 맞췄고, 아빠는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가 몇 번 더 왔고 팡파르가 울려 퍼졌지만, 나는 아무런 안도감도 느낄 수 없었다. 의사들이 와서 오빠를 여러 가지로 검사했고 아빠는 전문가들에게 전화해 특별히 신경 써줄 것을 부탁했으나, 오빠는 일단 병원에서나오자 이삼 일 더 머물렀을 뿐이었다. 오빠는 자기 집에 혼자 남겨지자마자 다시 사라졌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 P302

그래도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역시 버몬. 트의 그곳, 프랑스 식당, 리요네즈였다. 조지 오빠와 아빠와 같이 있던 그 밤,
내게 최고의 양파 수프를 내주었던 곳.
  두 명의 주인은 프랑스 리용이 파리 버금가는 식도락 도시로 급성장하기 전에 리옹에서 이리로 건너왔다. 안에 들어가면 테이블은 달랑 두세 개에 웨이터들은 불러야만 왔으며, 창문에는 등급 B라고 적힌 데다, 내가 가면 보통 젖히고 들어가는 주방 문 바로 옆자리에 앉혔지만, 난 그런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 P323

거기서 나는 치킨 디종이나 뵈프 부르귀농, 아니면 간단한녹색 채소 샐러드나 파테 샌드위치를 시켰고, 음식이 나오면무엇이 됐든 녹아들고 말았다. 특히 곁들여 나오는 약간의 사극치 그라탕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시금치와 치즈의 균형을 정확히 맞추는 요리사의 기분은 기쁨에 넘쳤다. 시금치와 치즈의만남을 주선하고 있는 둘이 즉시 사랑에 빠지리라는 걸 알고 있는 중매쟁이 같았다. 물론 소소하게 다른 데 주의를 빼앗기거나딴생각에 빠져 있는 마음도 들어 있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음식을 느낄 수 있었다. 음식이 중심이었다. 그 음식을 만든 사람은마음을 다해 음식에 열중하고 있어서 나는 정말로, 다른 데서와는 비교할 수 없이, 음식을 즐길 수 있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천천히 먹었다. 내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목적이생기는 것 같았다. 이런 게 바로 조지 오빠가 가는 길일 것이었다. 흔들리는 주방 문 따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한주에 적어도 한 번, 때로는 더 자주 그 식당에 갔다. 보통 내 일상은 부모님과의 고요하고 슬픈 저녁들 그리고 그것을 제외하면점심이나 저녁을 먹으러 세상으로 통하는 출입구와 같은 이 식당에 들르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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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주의, 역사기록, 그리고 공익

기록관리자에게 두 가지 제안만 하고 싶다.
 첫째, 모든 정부 문서의 공개를 요구하는 캠페인을 펼쳐야 한다. 특별히 공개할 수 없는 예외가 있다면, 공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이유를 입증해 보일 책임이 있다. 지금처럼 정보를 원하는 시민에게 그런 책임을 지워서는 안된다. - P221

둘째, 보통 사람들의 삶 • 욕구 · 필요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 기록의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쓰기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이 두가지 제안은 민주주의 정신과 양립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신은 국가가 하는 일을 국민이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하층계급의 조건 · 불만 · 의지가 나라 안에서 반영돼야 한다고 요구한다. - P221

-학문의 효용

※전통적인 학문에 대한 언급 뒤에 새로운 접근 방식을 언급하고 있다.
■ 규칙 5 : 학자가 되려면 ‘감정 표출을 삼가야 한다.
 한 아시아 연구 학자가 베트남에서 돌아와 비평문을 썼는데 대학 당국한테서 ‘너무 감상적‘이라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감정이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해 역시 향상시킬 수도 있다. 학자의 역할 중 하나가 정확한 기술이라면, 전쟁을 냉정하면서도 정확하게 기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한편 제한된 경험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 지닌 특별한 능력이라면, 감정을 통해 이 능력은 더욱 강화되고 그 인식은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다. 예컨대, 노예제도를 다분히 감정적으로 기술한 경우에 백인 대학생들은 흑인에게 노예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233

-시민으로서의 역사가

역사가에게는 함정이 하나 더 있다. 과거의 자료들을 가지고 작업하면 할수록, 과거의 무게는 점점 더 무겁게 느껴진다. 이미 발생한 사건들을 필연적이었던 일로 보기도 한다. 사실, 순식간에 발생해서 더 개입하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만 그 사건들은 필연적이다. 과거의 필연성은미래를 생각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더 나아가 행동하고자 하는 생각을 꺾어 버리기 쉽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에 상처받고, 그리하여 우리는 인간이 역사에 의해 옴짝달싹 못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 P256

그러나 역사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만약 현재가 돌이킬수 없는 자연의 사실이라면, 과거는 그것[과거]이 없었다면 우리가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최상의 가치를 드러낸다. 요컨대, 과거는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우리를 고취한다. 과거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는 갖가지 신화에 맞설 수 있다. 과거를 통해 우리는 국민 전체가 세뇌될 수도 있음을 알게된다 - P256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집단 학살을 자행하기도 하고,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나라가 노예제를 유지하기도 하며, 겉으로 보기에 무력하게 종속돼 있던 사람들이 지배자들을 무찌르기도 하고, - P256

경제계획이 꼭 자유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고, 억압받던 사람들이 억압하는 사람들로 변모하기도 하고, ‘사회주의‘가 전제적으로 될 수도 있고, 모든 국민이 순한 양떼처럼 전쟁에 끌려갈 수도 있고, 대의를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믿기 어려운 희생이 강요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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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바랐던가, 바로 그때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기억에 오래 남을 문장이다.


그 일이 처음 일어난 것은 어느 따뜻한 봄날, 할리우드 근처평지에 있는 우리 집으로 서쪽 바다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와 화분에 새로 심은, 가운데가 검은 팬지 꽃잎을 흩어놓던 화요일 오후였다. - P11

그러나 바깥이 어둑해지고, 내가 베어 문 한 입의 케이크가 목구멍을 다 타고 넘어갔을 즈음, 그 첫맛이 사라져갈 즈음, 나는 예상치 못한 내 안의 미묘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내 안에 깊숙이 묻혀 있던 센서 같은 것이 이제 막 탐지기를 곧추세우고 몸속을 돌아다니며 뭔가 새로운 것이 있다고 내 입에 경고하는 것 같았다. 최고급 초콜릿과 가장 신선한 레몬 같은 좋은 재료들은 더 커다랗고 어두운 무언가를 덮어버리려는 연막에 불과한 양, 그 아래 숨어 있던 것의 맛이 치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분명 초콜릿 맛이었지만, 그 맛이 퍼지며 흔적을 남기는 동안 동시에 내 입안에 가득 차는 것은, 하찮음과 위축된, 화가 난 느낌의 맛, 어쨌든 엄마와 연관이 되어 있는 듯한 거리감의 맛, 엄마의 복잡한, 소용돌이 같은 생각의 맛이었다. 마치 아스피린을 여러 알 집어 먹게 만드는 두통 때문에 이를 앙다무는 엄마의 느낌까지 맛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 좀 누웠다 올게... 하던 엄마 말 속의 말줄임표처럼 침대 탁자 위에 흰 줄을 이루며 나란히 놓여 있던 아스피린의 맛... - P21


그중 어느 것도 아주 고약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맛에는 뭔가가 빠져 있는 듯한, 어딘가 구멍이 뚫린 듯한 맛이 났다. 레몬과 초콜릿이 그 뚫린 구멍을 그저 감싸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엄마의 솜씨 좋은 손이 케이크를 만들었고 머릿속은 재료의 비율을 어떻게 맞추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거기, 그 케이크안에, 엄마는 없었다.

- P21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그때까지도 건널목에서 꼭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건넜다고 했다. 열 살에야 나는 누구의 손도 잡지 않고 길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여러 번 오빠 손을 잡고 길을 건넜지만, 오빠 손을 잡는 것은 그저 식물을 붙잡는 느낌이었고, 맞잡아주지 않는 손가락에서 오는 실망은 너무나 날카로워 어떤 때는 대신 팔뚝을 잡는 쪽을 택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처음 몇 번은 길을 건널 때 그렇게 했지만, 오크우드 애비뉴에서 모퉁이를 돌면서 나는 충동적으로 조지 오빠의 손을 잡아버렸다. 곧바로 내 손을 꽉 잡는 손가락들, 태양, 진분홍 무더기를 이루며 창문 위로드리워진 더욱 탐스러운 부겐빌레아 넝쿨. 
그의 따뜻한 손바닥.
인도에 웅크리고 앉은 오렌지색 줄무늬고양이. 낡은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활짝 열리는, 도시. - P88


우리는 인도에 도착했고, 손을 놓았다. 얼마나 바랐던가, 바로 그때,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 P88

아이들은 겁이 없다. 두려움도 전과 같았고 희망도 변함 없었지만, 바로 그 희망 때문에, 나는 은 포크를 집어 들었다. 작은 흰 접시 위에 놓인 엄마의 파이 한 조각을, 천장의 붙박이 이중 전구 아래서 입안으로 가져갔다. 목 늘어난 버니 양말에 데이지꽃 잠옷바람으로, 맛은 너무 고약해서 입안에 물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어떠니? 엄마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맛을음미하며 물었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시작이 케이크였다면, 끝은 파이였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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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3-2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8페이지의 문장은 제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라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

은하수 2023-03-21 19:14   좋아요 0 | URL
ㅎㅎ
사실은 저도 반가웠어요^^
다락방님 글에 등장할 때마다 궁금했거든요. 발견의 기쁨이 꽤 큽니다. 잊기 힘들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