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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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란 행과 연을 쌓아가면서 보여주는 우리의 인생이다. 그러나 함축적으로 쓰여진 詩語들 속에 감춰진 인생을 탐구하는 일은 나에겐 너무 버겁고 딱히 다가가고 싶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다. 이 책 덕분에 혼자라면 절대 돌아보지 못했을 인생의 역사를 두루 거친 기분이랄까.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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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3부 읽고 있다.
근데 앞은 좀 어렵다. 반복해서 읽으니 이해되는거 같기도 하고 그래도 안되는건 넘어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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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야겠다. 얼마 안 남았는데 마무리 안되고 있는 책들 정리 좀 하자.
책 펼치자마자 잉?


임을 위한 행진곡

날 붙잡지 못한 걸
후회하지 말아요

날 기억해 주는 것
그걸로 되었소

어찌 우리 그 날을
잊을 수 있겠소만

어찌 우리의 한이
풀릴 수 있겠소만

얼마나 더 그대를 기다릴건지
언제 우리 웃으며 또 만날건지

그때까지 그대여
부디 잘 계시오

그때까지 그대여
부디 잘 계시오


-5.18 40주년 기념식에서
정재일 편곡, 박창학 가사, 정훈희 노래





5월 광주에서의 자신을 증언하는 분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누구라도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자신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는 말.
제 허물을 용서하기 위해 인간 전체를 용서해버리는 사람도 많은데, 그분들은 자신이 도달한 숭고함을 인간성 그 자체에 헌정하고 있었다. 많은 학자의 말대로 ‘5월 공동체‘는 개별성에서 연대성으로 도약하는 인간성의 한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죽고 싸우고 따르는 그런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지고한 경지 하나를 재현하는 노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인간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 노래를 우리의 국가國歌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은 과분해서다. 이 노래가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격이 없어서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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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토니오 크뢰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망,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내적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토마스 만은 <토니오 크뢰거>를 자신과 관련해 ‘일종의 자화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짜증난다.
음력 생일인데 자꾸 생일 축하한다고..
음, 양력 체크는 왜 하냐 제발 이런거 좀 보내지마라.
축하한다고 기분좋아지는거 아닌데
정말 쓸데없는데 돈 낭비, 시간낭비!








1
비좁은 도시를 겹겹이 덮은 구름층에 가려진 우윳빛의 겨울 해가 흐릿하고 빈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박공지붕 건물들이 늘어선 골목길에 축축한 바람이 불었으며, 얼음도 아니고눈도 아닌 부드러운 우박 같은 것이 간간이 흩날렸다.
학교 수업이 끝났다. 수업에서 해방된 학생들은 포석이 깔린 교정을 지나 격자 창살 교문 밖으로 우르르 떼 지어 몰려나왔다. 학생들은 좌우로 흩어져 갈라졌다.  - P143

토니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에는 듯 아팠다.
약간 비스듬한 눈썹을 찌푸린 채 휘파람을 불려고 입술을 오므리며 고개를 갸웃 숙이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건 토니오특유의 표정이자 몸짓이었다.
- P146

문제는 토니오가 한스 한젠을 사랑하고 그 때문에 많이 괴로워한다는 것이었다. 원래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불리하고 괴로워하기 마련이다. 열네 살 소년의 영혼은 이런 단순하고 가혹한 가르침을 이미 삶을 통해 터득했다. 소년은 이런 경험을 똑똑히 인지하고, 말하자면 마음속에 새기고 어떤 의미에서는 즐기는 성격이었다. 그렇다고 물론 그 상황에 순응해 실질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또한 토니오는그러한 가르침을 학교에서 강요하는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흥미롭게 여겼다.  - P147

 이따금 토니오는 대략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로 충분해. 나를 바꾸고 싶지 않고 또 바꿀 수도 없어. 나는 주의가 산만하고 고집이 세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일들에 신경을 써, 입맞춤을 해주고 대충 음악으로 넘어가기보다는 적어도이런 나를 진지하게 꾸짖고 벌주는 게 당연해. 우리는 초록색마차를 타고 떠돌아다니는 집시가 아니라 예절 바른 사람들,
크뢰거 영사의 가족, 크뢰거 집안이라고・・・・・・  - P149

자기 자신이나 자신과 삶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는 이런 방식은 한스 한젠에 대한 사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토니오가 한젠을 사랑한 건 무엇보다도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젠이 모든 면에서 자신과는 다르고 반대된다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스 한젠은 우등생인 데다가 영웅처럼 승마와 체조와 수영을 하고 모두에게 인기 있는 활발한 소년이었다. 교사들은 한스 한젠에게 거의 애정어린 호의를 보였으며, 성을 뺀 채 이름만 불렀고, 온갖 방식으로 격려하고 장려했다. 학우들은 한젠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다.  - P150

토니오 크뢰거는 한스 한젠처럼 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 소망은 진심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스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길 고통스럽게 갈망했다. 토니오는 자신의 방식으로 천천히 진심을 다해 헌신하고 고뇌하는 애수 어린 방식으로 한스의 사랑을 얻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애수는 토니오의 이국적인 외모에서 예상되는 그 어떤 격렬한 열정보다도 더 깊고 더 애타게 타오를 수 있었다.
- P151

2
금발의 잉게 잉게보르크 홀름, 고딕식 분수가 여러 단으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광장 옆에 사는 의사 홀름의 딸. 토니오 크뢰거가 열여섯 살 때 사랑한 사람은 금발의 잉게였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토니오는 잉게보르크 홀름을 이미 수없이 많이 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저녁 불빛 아래서 잉게를 보았다. 잉게가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좀 거만하게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걸 보았다. - P160

그날 저녁 토니오 크뢰거는 잉게의 모습을 가슴속에 담아왔다. 굵게 땋은 금발, 웃음 짓는 길쭉하고 푸른 눈, 주근깨가 나고 윤곽이 부드러운 콧마루. 잉게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아서 토니오는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잉게가 대수롭지 않은 말을 했을 때의 억양을 나지막이 흉내 내보려고 시도하고는 전율했다. 그동안의 경험은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토니오는 이 사랑이 틀림없이 많은 고통과 고뇌, 굴욕을 안겨주고, 더욱이 평온을 파괴하고 마음을 선율로 채울 것이란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틀림없이 무슨 일인가를 완성하고 차분하게 전체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토니오는 그 사랑을 기쁘게받아들였으며, 자신을 오롯이 사랑에 내맡기고 온마음을 다해 사랑을 가꾸었다. 사랑이 인간을 활기차고 풍성하게 해준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니오는 차분하게 전체를 마무리 짓는 대신 활기차고 풍성해지길 갈구했다. - P161

이런 생각을 하자 토니오 크뢰거의 심장이 고통스럽게 조여왔다. 우울하면서도 멋지게 유희하는 힘들이 자신의 가슴속에서 약동하는 걸 느끼는데, 자신이 갈망하는 사람들은 다가갈 수 없이 쾌활하게 살며 그 힘들에 대립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게 너무 마음 아팠다.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절망적인 심정으로 수심에 잠겨 닫힌 블라인드 앞에서 외로이 밖을 내다보는 척해도 토니오 크뢰거는 행복했다. 그때 토니오의 심장은 살아 숨 쉬었기 때문이다.
 잉게보르크 홀름, 내 심장이 너를 위해 따뜻하고 슬프게 고동치고있어. 토니오의 영혼은 행복하게 자신을 부정하며, 경쾌하고오만할 정도로 평범하고 작은 금발의 잉게를 감싸 안았다. - P169

4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의 건강이 약화되는 것에 비례해 예술가 기질은 강화되었다. 그는 까다롭고 고상하고 정교하고 섬세해졌으며, 진부한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형식과 취향의 문제에서 극히 예민해졌다.
 토니오 크뢰거가 등단했을 때 문단에서는 찬사와 환호가 쏟아졌다. 수준 높게 가다듬고 고뇌의 흔적과 재치가 가득한 작품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 예전에 교사들이 꾸짖으며 불렀던 이름, 호두나무와 분수와 바다에 보내는 최초의 시들에 서명했던 이름, 남쪽과 북쪽이 융합된 음향, 이국적인 분위기의 시민적인 이름은 탁월함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끈질기게 버티며 명예를 추구하는 보기 드문 근면성이 자신의 경험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끝까지 파헤치는 기질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 근면성은 까다롭고 예민한 취향과의 싸움에서 격렬한 고통을 겪으며 특이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 P176

 리자베타, 내가 ‘인식의 혐오‘라고 부르는 게 있어요.
그건 하나의 사태를 꿰뚫어 보는 것만으로도 죽고 싶을 정도로(그래서 절대로 화해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을 정도로) 역겹게느껴지는 상태입니다. 덴마크 사람 햄릿, 이 전형적인 글쟁이가 바로 그런 경우죠. 알아야 하는 소명을 타고나지 않았는데도 알아야 하는 소명을 짊어진다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햄릿은 알고 있었어요. 눈물 젖은 감정의 베일을 뚫고서 사태를 간파하고 인식하고 알아채고 관찰합니다.  - P190

6
 마음속에 품어둔 집이 있는 길을 올라가볼까? 아니, 내일 가자. 지금은 너무 졸려. 기차를 오래타고 왔더니 머리가 무거웠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아련하게천천히 머릿속을 스쳤다.
지난 13 년 동안 이따금 위장이 말썽을 부릴 때마다 토니오 크뢰거는 고향 집에 다시 돌아오는 꿈을 꾸었다. 경사진 골목길에 위치한 고향 집은 유서 깊은 고택이었고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꿈에서는 아버지도 아직 살아 있었는데 행실이 단정하지 못하다고 아들을 심하게 나무랐다. 그럴 때마다 토니오 크뢰거는 꾸중 듣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치 지금 감각을 현혹시키는데도 뚫고 나올 수 없는 그런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꿈속에서는 이게 망상인지 현실인지 묻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현실이 확실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러다 결국 꿈에서 깨어난다.……. 토니오 크뢰거는 바람을 맞으며 조금 북적거리는 거리를 따라 걸었다. 바람을 피하려고 고개를 숙인 채 밤에 묵을 호텔, 시내의 일급 호텔을 향해 몽유병자처럼 걸음을 옮겼다.  - P202

유서 깊은 나지막한성문을 지나 항구를 따라 걷다가 어린 시절의 집을 향해 바람이 부는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갔다.
그 집은 300년 전부터 회색의 장중한 자태를 자랑하며 이웃집들에 에워싸여 있었다. 박공지붕이 이웃집들보다 높이솟아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현관문 위의 반쯤 지워진 경건한 문구를 읽었다. 그러고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집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심장이 불안하게 고동쳤다. 지금 1층을 지나가다보면 어딘가 문 하나에서 귀 뒤에 펜을 꽂은 사무복 차림의 아버지가 나타나 그를 불러 세우고는 방탕한 삶을 산다고 근엄하게 추궁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만일 아버지가 그런다고 해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는 아
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1층을 지났다. - P208

그곳은 아침 식사를 하던 방이었다. 아침에는 푸른색 벽지에 흰색 조각상들이 튀어나와 있는 위층의 커다란 식당이 아니라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 . 저기 저곳은 침실이었다. 연세가 많은 할머니가 저곳에서 힘들게 투병 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인생을 즐기는 사교적인 부인으로 삶에 대한 애착이 많았었다. 나중에 아버지도 그 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훤칠한 키에 꼼꼼하고 생각이 깊고 조금 애수에 젖은 듯하고 단춧구멍에 들꽃을 꽂고 다녔던 신사・・・・・…. 아버지가 임종하던 날, 토니오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침대 발치에 앉아있었다. 무언의 강렬한 감정, 사랑과 고통에 숨김없이 자신을 내맡긴 채. 어머니, 아름답고 열정적인 어머니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래놓고 남쪽의 예술가와 저 멀리 떠나버렸다……….

 하지만 저기 뒤편의 좀 작은 세 번째 방, 다른 방들처럼 책으로 가득하고 초라한 차림새의 직원이 지키고 있는 방은 오랜 세월 토니오 크뢰거 만의 방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거나 산책을 하고 나면지금처럼 그곳으로 돌아왔다. 한쪽 벽면에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토니오는 처음으로 쓴 은밀하고 어설픈 시들을 그 책상서랍에 보관했다.... 호두나무…………. 가슴 아릿한 애수가 밀려왔다.  - P210

경찰관이 말을 이었다. "부모도 알 수 없고 신분도 확인할 길 없는 인물이 사기와 다른 범죄를 여러 차례 저지른 탓에 뮌헨 경찰이 뒤쫓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그자가 덴마크로 도주 중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토니오 크뢰거가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런 반응은 주목을 끌었다.
"뭐라고요? 아, 물론 아니겠지요!" 경찰관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제하제 씨가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려고 끼어들었다.
"순전히 형식적인 절차입니다." 제하제 씨는 말했다. "별일 아닙니다! 경찰 공무원이 오로지 맡은 의무를 다할 뿐이라는사실을 헤아려주십시오. 손님이 어떤 식으로든 신분을 증명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무슨 서류라도 있으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신분을 밝혀서 이 사태를 끝내야하는 걸까? 내가 정체불명의 사기꾼이나 초록색 마차를 타고 유랑하는 집시가 아니라 크뢰거 영사의 아들, 크뢰거 집안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제하제 씨에게 털어놓아야 하는 걸까? - P215

그날 아침은 황홀한 축제 분위기로 시작되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이유는 모르지만 뭔가에 흠칫놀라 잠에서 벌떡 깨어났다. 그런데 불가사의하고 마법적인 빛, 기적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묵는 방은 유리문과 발코니가 해협 쪽을 향해 있었고, 흰색의 얇은 망사 커튼을 통해 거실 공간과 침실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벽지는 부드러운 색상이고 엷은 색의 가벼운 가구들이 놓여 있어서 항상 밝고 친근한 인상을 주었다. 그런데 잠에 취한 눈에 비친 방은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듯 더없이 환하고 화사하게 빛났다. 벽과 가구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망사 커튼을 은은한 붉은빛으로 타오르게 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고 향긋한 장밋빛으로 방 전체가 푹 감싸여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떠오르는 해가 빚어내는 현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며칠 동안 줄곧 흐리고 비가 왔다. 그런데 이제 연파랑 비단을 팽팽하게 펼쳐놓은 듯 하늘이 바다와 육지 위로 청명하게 어른어른 빛났다. 둥근 태양이 살며시 일렁이며 반짝이는바다 위로 장엄하게 떠올랐다.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빛나는 구름이 태양을 에워싼 채 가로질러 갔다. 바다가 태양 아래에서 전율하며 붉게 타오르든 듯 보였다...


*아~~~ 묘사가 넘 멋진 이 문장들!
- P230

그때 별안간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한스 한젠과 잉게보르크홀름이 홀을 가로질러 갔다.

토니오 크뢰거는 수영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산책을 한 터라 나른한 피곤함을 즐기며 의자 깊숙이 기대앉아 있었다. 베란다와 바다를 향해 앉아서 훈제 연어를 얹은 토스트를 먹고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들어왔다. 전혀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걸어 들어왔다.  - P232

그래, 그들이 거기 있었다. 오늘 햇살을 받으며 토니오 크뢰거의 옆을 지나갔던 두 사람이 거기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는 그들을 다시 보았다. 두 사람을 거의 동시에 알아보고는너무 기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스 한젠이 거기 있었다.  - P239

내가 너희들을 잊었을까? 토니오 크뢰거는 물었다. 아니, 결코 잊지 않았어! 한스 너도 잊지 않았고, 금발의 잉게 너도 잊지 않았어! 내가 작품을 쓴 건 너희들 때문이었어. 그리고 박수갈채를 받을 때마다 혹시 너희들이 그 자리에 있지 않을까 하고 남몰래 두리번거렸지……….  - P239

 내가 너처럼 될 수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너처럼 올바르고 쾌활하고 소박하고 규칙을 존중하고 질서를 준수하고 신과 세상과 한마음이 되어 소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잉게보르크 홀름, 너를 아내로 맞이해서 한스 한젠 너 같은 아들을 둘 수 있다면, 인식의 저주와 창작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한 평범함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칭송할 수 있다면! ………. 다시 한번 새로 시작할수 있을까?
 하지만 그래봤자 아무 소용 없을 거야. 다시 지금처럼 될 거야. 모든 게 또 지금처럼 이렇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길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아서 어쩔수 없이 헤매게 되어 있거든.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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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를 건너고 산 마르코를 지나고 대운하를 따라 올라가는 친숙한 항해였다. 아센바흐는 뱃머리의 둥그런 의자에 앉아 한 팔로 난간을 짚은 채 손으로 이마를 가려 눈을 그늘지게 했다. 공원들을 뒤로하자 작은 광장이 한 번 더 장엄하고우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줄지어 늘어선 궁전들이 나타났고, 수로가 방향을 틀자 리알토 다리의 웅장한 대 - P70

리석 아치가 자태를 드러냈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는 여행객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도시의 분위기,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바다와 습지의 살짝 썩은 냄새, 이제 아센바흐는그 냄새를 가슴 아리게 깊이 들이마셨다. 이 모든 것에 내 마음이 얼마나 애착을 느끼는지 모르다니,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날 아침에 어렴풋이 애석한 마음이 들면서 과연 잘하는 짓인지 슬며시 의심이고개를 들었다면, 이제는 비통했으며 실제로 가슴 저미게 슬프고 고통스러웠다. 너무 혹독하게 고통스러워서 자꾸만 눈물이 치솟았으며, 이럴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혼잣말했다. 아셴바흐가 그토록 참기 어렵고, 심지어는 도저히 견딜수 없다고 느낀 것은 베네치아와는 이걸로 영영 이별이며 베네치아를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 것같았다. 이 도시가 벌써 두 번째로 그를 병들게 했고, 벌써 두번째로 허둥지둥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 P71

그러는 동안 수상버스가 기차역에 가까이 다가갔고, 고통과 당혹감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고조되었다. 이대로 떠날 수도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서 너무 괴로웠다. 아셴바흐는 이렇듯 완전히 착잡한 심정으로 역에 들어섰다.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기차를 타려면 단 한순간도 지체해서는 안 되었다. 한편으로는 기차를 타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고 싶지 않았다.  - P72

 호텔 직원이 나타나서 커다란 여행가방을 벌써 발송했다고 알렸다. 여행 가방을 벌써 발송했다고요? 네, 아주 안전하게 코모로 보냈습니다. 코모로 보냈다고요? 화가 난 질문과 당황한 답변을 옥신각신 주고받은 결과, 엑셀시오르 호텔의 수화물 운송팀이 아셴바흐의 여행 가방을 이미 다른 사람들의 화물과 함께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발송했음이 밝혀졌다. - P72

아센바흐는 이런 상황에서도 납득할 만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모험적인 기쁨과 믿기지 않는 명랑함이 거의 발작적으로 가슴을 뒤흔들어놓았다. 호텔직원이 혹시라도 가방을 붙잡을 수 있을까 해서 뛰쳐나갔지만, 예상대로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그러자 아센바흐는 짐없이 여행하길 바라지 않으며 차라리 해변 호텔로 돌아가 짐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고는 호텔 소유의 모터보트가 역에 있냐고 물었다. 직원은 배가 문앞에 대기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이미 구입한 기차표를 반환해야 하는 상황을 매표구 직원에게 이탈리아어로 장황하게 설명했다. 호텔 직원은 당장 전보를 칠 생각이며 빠른시간 안에 여행 가방을 돌려받도록 비용을 아끼지 않고 모든수단을 동원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그래서 여행객이 역에도착한 지 이십 분 만에 다시 대운하를 따라 리도로 되돌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 P73

-제4장

 아셴바흐는 어디에서나 소년을 보고 어디에서나 소년과 마주쳤다. 호텔 아래층 공간에서, 시원하게 배를 타고 시내에 갈때나 시내에서 돌아올때, 화려한 광장에서, 그리고 운이 좋으면 중도에 길이나 다리에서도 자주 마주쳤다. 하지만 해변에서 보내는 오전 시간이 주로, 게다가 더없이 다행히도 규칙적으로 그 어여쁜 모습을 집중해서 자세히 살펴볼 기회를 충분히 제공했다. 그렇다.
이러한 행운, 매일 어김없이 다시 시작되는 이러한 유리한 상황은 아셴바흐를 만족감과 삶의 기쁨으로 채우기에 적절했다. 이곳에서의 체류를 소중하게 만들어주었고, 행복한 나날이 기분 좋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해주었다. - P80

아셴바흐와 어린 타지오는 불가피하게 어떤 식으로든 서로관 계를 맺고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더 많은 아센바흐는 자신의 관심과 애정에 전혀 반응이 없는 건 아님을 확인하고 기쁨에 떨었다. 예를 들어 미소년은 아침에 해변에 나타날 때 왜 오두막 뒤쪽의 널빤지 길을 더는 이용하지 않을까? 왜 항상 앞쪽의 길만을 이용해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아셴바흐가 있는 곳을 지나갈까?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왜 이따금 아셴바흐 바로 앞을 지나갈까? 왜 아센바흐의 테이블과 의자를 거의 스치듯 지나서 가족들이 있는 오두막으로 슬렁슬렁 걸어갈까? 우월한 감정이 발산하는 매력과 마력이 그 여리고 별생각 없는 대상에게 이런 식으로 영향을 미친 걸까? 아센바흐는 날마다 타지오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 P95

하지만 어느 날 저녁 평소와는 다른 일이 일어났다. 폴란드 남매들이 가정교사와 함께 커다란 홀에서의 식사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셴바흐는 근심스레 그걸 알아차렸다. 식사를 마친 후 폴란드 남매들이 어디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야회복 차림에 밀짚모자를 쓰고서 호텔 앞의 테라스 근처로 나갔다. 그때 수녀 같은 차림의 누나들이 가정교사와 함께 갑자기 아크등 아래 모습을 나타냈고, 네 발짝 거리를 두고 타지오가 뒤따라왔다. 무슨 이유에선가 시내에서 식사를 하고, 선착장에서 오는 게 분명했다. 물 위는 서늘한 모양이었다. - P96

 그런데 서늘한 대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달빛 같은 희미한 불빛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오늘은 평소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균형 잡힌 눈썹이 더 뚜렷이 두드러졌고, 눈빛은 깊숙이 어둡게 빛났다. 소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센바흐는 말이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 있을 뿐 묘사할 수는 없다는 걸 이미 자주 고통스럽게 느꼈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그 소중한 모습이 나타날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 P96

소년은 예기치 않게 불쑥 나타났고, 아센바흐는 평온하고 품위 있는 표정을 지을 여유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애타게 찾던 인물에 부딪쳤을 때 기쁨과 놀람, 감탄이 거기에 고스란히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타지오가 미소 짓는 일이 일어났다. 타지오는 아셴바흐를 향해 말하듯이 친밀하고 사랑스럽고 솔직하게 입술로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물 위로 몸을 굽히는 나르키소스의 미소였다.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을 향해 두 팔을 뻗는 나르키소스의 미소, 매력에 사로잡히고 매혹당한 심오한 미소, 아주 살짝 이지러진 미소, 물에 비친 자신의 사랑스러운 입술에 입맞추려 하지만 뜻을 이룰 수 없어 이지러지고 요염하고 호기심 어리고 살짝 괴로움에 떨며 유혹하고 유혹당하는 미소. - P97

 너무 충격을 받아 테라스와 앞뜰의 불빛으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었으며 뒤쪽 공원의 어둠 속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기이하게도 노기와 애정 어린 경고의 소리가마음속에서 새어 나왔다.
 "너는 그렇게 미소 지어서는 안 돼!
명심해, 누구에게도 그렇게 미소 지어서는 안 돼!" 
아셴바흐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으며, 밤에 수목들이 내뿜는 향내를 - P97

정신없이 들이마셨다. 벤치에 등을 기대고 두 팔을 늘어뜨린채 감정에 압도당해 여러 차례 부르르 떨며 그리워한다는 상투적인 말을 속삭였다. 이 경우에는 온당하지 않고 터무니없고 벌받아 마땅하고 우스꽝스럽지만, 이 경우에도 신성하고존중해야 하는 말. "너를 사랑해!" - P98

-제5장

그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데도 아셴바흐는 베네치아로 향했다. 보호자와 함께 선착장으로 가는 폴란드 남매를 보고는 뒤쫓아 가려는 욕망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산 마르코에서 아센바흐는 숭배하는 우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광장의 그늘진 쪽에 있는 둥근 철제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다가 별안간 대기에서 특이한 냄새를 맡았다. 며칠 전부터 뚜렷이 의식은 못 했지만, 그 냄새가 감각을 스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과 상처, 수상쩍은 청결을 상기시키는 불쾌한 약품 냄새였다. 아센바흐는 그게 무슨 냄새인지 곰곰 생각했으며 결국 답을 알아냈다.
 그는 간단한 식사를 끝내고 성당 맞은편의 광장을 떠났다. 비좁은 곳에 이르자 냄새가 더욱 강렬해졌다. 길모퉁이에 인쇄된 공고문이 부착되어 있었다. 이런 날씨에 흔히 발생하는 소화기 계통 질병의 위험이 있으니 굴과 조개 섭취, 운하의 물을 조심하라고 주민들에게 경고하는 시 당국의 공고문이었다. 상황을 적당히 얼버무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 P100

정열은 이로운 점이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하는 탓에 모든 시민적인 조직의 이완, 세상의 혼란과 재난을 반긴다. 그래서 아센바흐는 시 당국이 베네치아의 지저분한 골목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은폐하는 것에 은밀한 쾌감을 느꼈다. 베네치아의 고약한 비밀은 그 자신의 비밀과 하나로 융해되었으며, 그에게는 그 비밀을 지키는 게 중요한 문제였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오로지 타지오가 떠날 것만을 염려했다. 그리고 만일 타지오가 떠난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 P102

이튿날 오후, 그 고집스러운 자는 또다시 외부 세계를 탐색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으며, 이번에는 가능한 선에서 모든 걸 알아냈다. 그는 우선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영국 여행사를 찾아갔다. 창구에서 약간의 돈을 교환한 후 거기서 일하는 직원에게 불신에 찬 이방인의 표정으로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이튿날 오후, 그 고집스러운 자는 또다시 외부 세계를 탐색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으며, 이번에는 가능한 선에서 모든 걸 알아냈다.  - P118

그 시선은 실짝 경멸을 품은 채 직원의 입술을 주시했다.
그러자 영국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것은 당국의 설명입니다." 그는 조금 동요하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는 그렇게 주장해야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 다른 뭔가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더니 영국인 직원은 솔직하고 편안한 어조로 진실을 말했다.
- P119

이미 몇 년 전부터 인도 콜레라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심하게 확산되는 경향을 보였다. 인도 콜레라는 갠지스강 삼각주의 따뜻한 습지에서 생겨났다. 사람들이 피해 다니는 쓸모없고 울창한 원시림과 섬의 정글에서 내뿜는 악마적인 숨결도 여기에 일조했다. 그곳의 무성한 대나무 숲 속에는 호랑이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인도 콜레라는 이례적으로 인도 전역에서 오랫동안 격렬하게 맹위를 떨쳤다. 동쪽으로는 중국까지,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까지 번졌으며, 카라반의 주요 이동로를 따라 아스트라한까지, 심지어는 모스크바까지 그 끔찍한 두려움을 실어날랐다. 유럽은 이 망령이 그곳에서 육로로 침입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는 동안 인도 콜레라는 시리아의 상선에 묻어 바다를 건너왔으며, 지중해의 여러 항구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했다. - P119

이탈리아반도의 북부 지방은 그나마 안전했다. 그런데 올해 5월 중순, 베네치아에서 선박 노동자와 채소장수 여인의 수척하고 거무스름한 시신에서 끔찍한 비브리오균이 같은 날 발견되었다. 이 사건들은 은폐되었다. 하지만 일주일 후에는 그런 시신이 열 구가 되었고, 스무 구, 서른 구가 되었으며, 그것도 여러 구역에서 발견되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남자가 베네치아에서 며칠 휴가를 즐기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만 숨을 거두는 일도 발생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인도 콜레라 증상을 보였다. 그래서 수상도시 베네치아에 재난이 닥쳤다는 소식이 처음으로 독일 신문에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베네치아 당국은 도시의 위생 상태가 전에 없이 우수하며 질병퇴치를 위한 필수 조치를 취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식료품, 채소나 육류, 우유가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당국이 부인하고 은폐하는 가운데 죽음이 비좁은 골목길 곳곳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 P120

 그렇다. 질병이 마치 새로이 소생할 힘을 얻고, 병원균의 내성과 번식력이 두 배로 증대한 듯 보였다. 질병을 이겨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환자백 명 중의 팔십 명이, 그것도 끔찍하게 목숨을 잃었다. 질병이 극히 맹렬하게 덮쳐서 ‘탈수증‘이라고 불리는 매우 위험한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혈관에서 다량으로 분비되는 수분을 몸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환자는 비쩍 마르게 되고, 역청처럼 끈적끈적해진 피 때문에 경련을 일으키며 쉰 목소리로 고통을 호소하다 질식사에 이르렀다.  - P121

이러한 일들과 관련해 영국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단 하루도 미루지 말고 오늘 당장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것입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봉쇄 조치가 내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셴바흐는 이렇게 말하고 그곳을 나왔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광장은 후덥지근했다. 실상을 모르는외국인들이 카페 앞에 앉아 있거나 온통 비둘기들로 뒤덮인 성당 앞에 서 있었다. - P123

아셴바흐는 집으로 돌아가 냉철하게 정신을 차려서 심혈을 기울여 대작을 남길 생각을 하자 토할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하면 안 돼!" 아셴바흐는격정적으로 속삭였다. "말하지 않을 거야!" 
지친 뇌가 조금 마신 포도주에 취하듯이 아셴바흐는 진상을 알고 있는 공범이라는 생각에 취했다. 
재난으로 황폐해진 도시의 광경이 혼란스럽게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 광경은 이해할 수 없게도 이성을 넘어서서 무척 감미롭게 마음속에 희망의 불을 붙였다. 이러한 기대와 비교하면, 좀 전에 꿈꾸었던 섬세한 행복은 무엇일까? 혼란에서 얻는 이득 앞에서 예술과 미덕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아셴바흐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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