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호를 건너고 산 마르코를 지나고 대운하를 따라 올라가는 친숙한 항해였다. 아센바흐는 뱃머리의 둥그런 의자에 앉아 한 팔로 난간을 짚은 채 손으로 이마를 가려 눈을 그늘지게 했다. 공원들을 뒤로하자 작은 광장이 한 번 더 장엄하고우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줄지어 늘어선 궁전들이 나타났고, 수로가 방향을 틀자 리알토 다리의 웅장한 대 - P70
리석 아치가 자태를 드러냈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는 여행객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도시의 분위기,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바다와 습지의 살짝 썩은 냄새, 이제 아센바흐는그 냄새를 가슴 아리게 깊이 들이마셨다. 이 모든 것에 내 마음이 얼마나 애착을 느끼는지 모르다니,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날 아침에 어렴풋이 애석한 마음이 들면서 과연 잘하는 짓인지 슬며시 의심이고개를 들었다면, 이제는 비통했으며 실제로 가슴 저미게 슬프고 고통스러웠다. 너무 혹독하게 고통스러워서 자꾸만 눈물이 치솟았으며, 이럴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혼잣말했다. 아셴바흐가 그토록 참기 어렵고, 심지어는 도저히 견딜수 없다고 느낀 것은 베네치아와는 이걸로 영영 이별이며 베네치아를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 것같았다. 이 도시가 벌써 두 번째로 그를 병들게 했고, 벌써 두번째로 허둥지둥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 P71
그러는 동안 수상버스가 기차역에 가까이 다가갔고, 고통과 당혹감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고조되었다. 이대로 떠날 수도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서 너무 괴로웠다. 아셴바흐는 이렇듯 완전히 착잡한 심정으로 역에 들어섰다.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기차를 타려면 단 한순간도 지체해서는 안 되었다. 한편으로는 기차를 타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고 싶지 않았다. - P72
호텔 직원이 나타나서 커다란 여행가방을 벌써 발송했다고 알렸다. 여행 가방을 벌써 발송했다고요? 네, 아주 안전하게 코모로 보냈습니다. 코모로 보냈다고요? 화가 난 질문과 당황한 답변을 옥신각신 주고받은 결과, 엑셀시오르 호텔의 수화물 운송팀이 아셴바흐의 여행 가방을 이미 다른 사람들의 화물과 함께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발송했음이 밝혀졌다. - P72
아센바흐는 이런 상황에서도 납득할 만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모험적인 기쁨과 믿기지 않는 명랑함이 거의 발작적으로 가슴을 뒤흔들어놓았다. 호텔직원이 혹시라도 가방을 붙잡을 수 있을까 해서 뛰쳐나갔지만, 예상대로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그러자 아센바흐는 짐없이 여행하길 바라지 않으며 차라리 해변 호텔로 돌아가 짐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고는 호텔 소유의 모터보트가 역에 있냐고 물었다. 직원은 배가 문앞에 대기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이미 구입한 기차표를 반환해야 하는 상황을 매표구 직원에게 이탈리아어로 장황하게 설명했다. 호텔 직원은 당장 전보를 칠 생각이며 빠른시간 안에 여행 가방을 돌려받도록 비용을 아끼지 않고 모든수단을 동원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그래서 여행객이 역에도착한 지 이십 분 만에 다시 대운하를 따라 리도로 되돌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 P73
-제4장
아셴바흐는 어디에서나 소년을 보고 어디에서나 소년과 마주쳤다. 호텔 아래층 공간에서, 시원하게 배를 타고 시내에 갈때나 시내에서 돌아올때, 화려한 광장에서, 그리고 운이 좋으면 중도에 길이나 다리에서도 자주 마주쳤다. 하지만 해변에서 보내는 오전 시간이 주로, 게다가 더없이 다행히도 규칙적으로 그 어여쁜 모습을 집중해서 자세히 살펴볼 기회를 충분히 제공했다. 그렇다. 이러한 행운, 매일 어김없이 다시 시작되는 이러한 유리한 상황은 아셴바흐를 만족감과 삶의 기쁨으로 채우기에 적절했다. 이곳에서의 체류를 소중하게 만들어주었고, 행복한 나날이 기분 좋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해주었다. - P80
아셴바흐와 어린 타지오는 불가피하게 어떤 식으로든 서로관 계를 맺고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더 많은 아센바흐는 자신의 관심과 애정에 전혀 반응이 없는 건 아님을 확인하고 기쁨에 떨었다. 예를 들어 미소년은 아침에 해변에 나타날 때 왜 오두막 뒤쪽의 널빤지 길을 더는 이용하지 않을까? 왜 항상 앞쪽의 길만을 이용해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아셴바흐가 있는 곳을 지나갈까?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왜 이따금 아셴바흐 바로 앞을 지나갈까? 왜 아센바흐의 테이블과 의자를 거의 스치듯 지나서 가족들이 있는 오두막으로 슬렁슬렁 걸어갈까? 우월한 감정이 발산하는 매력과 마력이 그 여리고 별생각 없는 대상에게 이런 식으로 영향을 미친 걸까? 아센바흐는 날마다 타지오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 P95
하지만 어느 날 저녁 평소와는 다른 일이 일어났다. 폴란드 남매들이 가정교사와 함께 커다란 홀에서의 식사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셴바흐는 근심스레 그걸 알아차렸다. 식사를 마친 후 폴란드 남매들이 어디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야회복 차림에 밀짚모자를 쓰고서 호텔 앞의 테라스 근처로 나갔다. 그때 수녀 같은 차림의 누나들이 가정교사와 함께 갑자기 아크등 아래 모습을 나타냈고, 네 발짝 거리를 두고 타지오가 뒤따라왔다. 무슨 이유에선가 시내에서 식사를 하고, 선착장에서 오는 게 분명했다. 물 위는 서늘한 모양이었다. - P96
그런데 서늘한 대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달빛 같은 희미한 불빛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오늘은 평소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균형 잡힌 눈썹이 더 뚜렷이 두드러졌고, 눈빛은 깊숙이 어둡게 빛났다. 소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센바흐는 말이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 있을 뿐 묘사할 수는 없다는 걸 이미 자주 고통스럽게 느꼈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그 소중한 모습이 나타날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 P96
소년은 예기치 않게 불쑥 나타났고, 아센바흐는 평온하고 품위 있는 표정을 지을 여유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애타게 찾던 인물에 부딪쳤을 때 기쁨과 놀람, 감탄이 거기에 고스란히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타지오가 미소 짓는 일이 일어났다. 타지오는 아셴바흐를 향해 말하듯이 친밀하고 사랑스럽고 솔직하게 입술로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물 위로 몸을 굽히는 나르키소스의 미소였다.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을 향해 두 팔을 뻗는 나르키소스의 미소, 매력에 사로잡히고 매혹당한 심오한 미소, 아주 살짝 이지러진 미소, 물에 비친 자신의 사랑스러운 입술에 입맞추려 하지만 뜻을 이룰 수 없어 이지러지고 요염하고 호기심 어리고 살짝 괴로움에 떨며 유혹하고 유혹당하는 미소. - P97
너무 충격을 받아 테라스와 앞뜰의 불빛으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었으며 뒤쪽 공원의 어둠 속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기이하게도 노기와 애정 어린 경고의 소리가마음속에서 새어 나왔다. "너는 그렇게 미소 지어서는 안 돼! 명심해, 누구에게도 그렇게 미소 지어서는 안 돼!" 아셴바흐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으며, 밤에 수목들이 내뿜는 향내를 - P97
정신없이 들이마셨다. 벤치에 등을 기대고 두 팔을 늘어뜨린채 감정에 압도당해 여러 차례 부르르 떨며 그리워한다는 상투적인 말을 속삭였다. 이 경우에는 온당하지 않고 터무니없고 벌받아 마땅하고 우스꽝스럽지만, 이 경우에도 신성하고존중해야 하는 말. "너를 사랑해!" - P98
-제5장
그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데도 아셴바흐는 베네치아로 향했다. 보호자와 함께 선착장으로 가는 폴란드 남매를 보고는 뒤쫓아 가려는 욕망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산 마르코에서 아센바흐는 숭배하는 우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광장의 그늘진 쪽에 있는 둥근 철제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다가 별안간 대기에서 특이한 냄새를 맡았다. 며칠 전부터 뚜렷이 의식은 못 했지만, 그 냄새가 감각을 스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과 상처, 수상쩍은 청결을 상기시키는 불쾌한 약품 냄새였다. 아센바흐는 그게 무슨 냄새인지 곰곰 생각했으며 결국 답을 알아냈다. 그는 간단한 식사를 끝내고 성당 맞은편의 광장을 떠났다. 비좁은 곳에 이르자 냄새가 더욱 강렬해졌다. 길모퉁이에 인쇄된 공고문이 부착되어 있었다. 이런 날씨에 흔히 발생하는 소화기 계통 질병의 위험이 있으니 굴과 조개 섭취, 운하의 물을 조심하라고 주민들에게 경고하는 시 당국의 공고문이었다. 상황을 적당히 얼버무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 P100
정열은 이로운 점이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하는 탓에 모든 시민적인 조직의 이완, 세상의 혼란과 재난을 반긴다. 그래서 아센바흐는 시 당국이 베네치아의 지저분한 골목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은폐하는 것에 은밀한 쾌감을 느꼈다. 베네치아의 고약한 비밀은 그 자신의 비밀과 하나로 융해되었으며, 그에게는 그 비밀을 지키는 게 중요한 문제였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오로지 타지오가 떠날 것만을 염려했다. 그리고 만일 타지오가 떠난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 P102
이튿날 오후, 그 고집스러운 자는 또다시 외부 세계를 탐색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으며, 이번에는 가능한 선에서 모든 걸 알아냈다. 그는 우선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영국 여행사를 찾아갔다. 창구에서 약간의 돈을 교환한 후 거기서 일하는 직원에게 불신에 찬 이방인의 표정으로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이튿날 오후, 그 고집스러운 자는 또다시 외부 세계를 탐색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으며, 이번에는 가능한 선에서 모든 걸 알아냈다. - P118
그 시선은 실짝 경멸을 품은 채 직원의 입술을 주시했다. 그러자 영국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것은 당국의 설명입니다." 그는 조금 동요하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는 그렇게 주장해야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 다른 뭔가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더니 영국인 직원은 솔직하고 편안한 어조로 진실을 말했다. - P119
이미 몇 년 전부터 인도 콜레라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심하게 확산되는 경향을 보였다. 인도 콜레라는 갠지스강 삼각주의 따뜻한 습지에서 생겨났다. 사람들이 피해 다니는 쓸모없고 울창한 원시림과 섬의 정글에서 내뿜는 악마적인 숨결도 여기에 일조했다. 그곳의 무성한 대나무 숲 속에는 호랑이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인도 콜레라는 이례적으로 인도 전역에서 오랫동안 격렬하게 맹위를 떨쳤다. 동쪽으로는 중국까지,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까지 번졌으며, 카라반의 주요 이동로를 따라 아스트라한까지, 심지어는 모스크바까지 그 끔찍한 두려움을 실어날랐다. 유럽은 이 망령이 그곳에서 육로로 침입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는 동안 인도 콜레라는 시리아의 상선에 묻어 바다를 건너왔으며, 지중해의 여러 항구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했다. - P119
이탈리아반도의 북부 지방은 그나마 안전했다. 그런데 올해 5월 중순, 베네치아에서 선박 노동자와 채소장수 여인의 수척하고 거무스름한 시신에서 끔찍한 비브리오균이 같은 날 발견되었다. 이 사건들은 은폐되었다. 하지만 일주일 후에는 그런 시신이 열 구가 되었고, 스무 구, 서른 구가 되었으며, 그것도 여러 구역에서 발견되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남자가 베네치아에서 며칠 휴가를 즐기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만 숨을 거두는 일도 발생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인도 콜레라 증상을 보였다. 그래서 수상도시 베네치아에 재난이 닥쳤다는 소식이 처음으로 독일 신문에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베네치아 당국은 도시의 위생 상태가 전에 없이 우수하며 질병퇴치를 위한 필수 조치를 취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식료품, 채소나 육류, 우유가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당국이 부인하고 은폐하는 가운데 죽음이 비좁은 골목길 곳곳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 P120
그렇다. 질병이 마치 새로이 소생할 힘을 얻고, 병원균의 내성과 번식력이 두 배로 증대한 듯 보였다. 질병을 이겨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환자백 명 중의 팔십 명이, 그것도 끔찍하게 목숨을 잃었다. 질병이 극히 맹렬하게 덮쳐서 ‘탈수증‘이라고 불리는 매우 위험한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혈관에서 다량으로 분비되는 수분을 몸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환자는 비쩍 마르게 되고, 역청처럼 끈적끈적해진 피 때문에 경련을 일으키며 쉰 목소리로 고통을 호소하다 질식사에 이르렀다. - P121
이러한 일들과 관련해 영국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단 하루도 미루지 말고 오늘 당장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것입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봉쇄 조치가 내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셴바흐는 이렇게 말하고 그곳을 나왔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광장은 후덥지근했다. 실상을 모르는외국인들이 카페 앞에 앉아 있거나 온통 비둘기들로 뒤덮인 성당 앞에 서 있었다. - P123
아셴바흐는 집으로 돌아가 냉철하게 정신을 차려서 심혈을 기울여 대작을 남길 생각을 하자 토할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하면 안 돼!" 아셴바흐는격정적으로 속삭였다. "말하지 않을 거야!" 지친 뇌가 조금 마신 포도주에 취하듯이 아셴바흐는 진상을 알고 있는 공범이라는 생각에 취했다. 재난으로 황폐해진 도시의 광경이 혼란스럽게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 광경은 이해할 수 없게도 이성을 넘어서서 무척 감미롭게 마음속에 희망의 불을 붙였다. 이러한 기대와 비교하면, 좀 전에 꿈꾸었던 섬세한 행복은 무엇일까? 혼란에서 얻는 이득 앞에서 예술과 미덕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아셴바흐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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