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는 사물의 확실함을 가진 강렬한 추억에서 나오고, 돌처럼 그것들이 느껴져야 비로소 글로 분출이 된다는 것. 그래서 늘 구체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 경험한 것만 쓸 수 있다는 것.

글을 쓰면서 느끼는 강력한 감각, 진짜 삶, 탐구의 시간, 있어야만 할 장소, 이르러야 할 완벽한 상태. 이런 감각은 대체 어떤 것일까? 너무 궁금해!

[세월]을 다시 읽는다면 이젠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책 읽기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MP.:『남자의 자리』 그리고 당신의 다음 작품들이놀라운 점은, 늘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거예요.
A.E : 20년 전에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을 거예요.
이제는 추상적인 것, 물질적인 형태가 없는 것들은 문제가 있어 보여요.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이미지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저는 저를아이디어로 이끄는 내면화된 시각적인 이미지, 또 현실의 이미지만을 가지고 글을 쓰거든요. 아이디어, 아이디어는 먼저가 아니죠. 그것은 나중이에요. 예를 들 - P88

자면 아이디어는 정말 사물의 확실함을 가진 강렬한 추억에서 나와요. 추억은 사물이에요. 단어도 사물이죠. 돌처럼 그것들이 느껴져야 해요. 어느 순간이 되면 페이지에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해야 하고요. 만약 그 상태가 되지 못한다면 저에게 이 단어와 문장이라는 물질은 적합하지 않은 것, 근거가 없는 것이 되죠. 이 모든 것은 상상의 세계에 속해 있어요. 물론 글에서의 상상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고요. 저는 글을 쓴다는 것이 강바닥에 있는 돌을 꺼내는 일과 같다고 생각해요.
바로 그거죠. - P89

M.P. :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당신은 프루스트와 비슷한 건가요?
AE. : 네, "진짜 인생, 마침내 드러난 밝혀진 인생, 실제 경험의 결과로 나온 유일한 인생은 바로 문학이다" 라는 프루스트의 문장은 저에게 자명한 이치죠.
 드러난, 밝혀진 인생, 이 표현이 중요한데, 사람들이 이 문장을인용하면서 자주 잊더라고요. 문학은 인생이 아니에요. 문학은 인생의 불투명함을 밝히는 것이거나 혹은 밝혀야만 하는 것이죠. - P103

철학자 클레망 로세는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마세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저는 글을 쓰면서 저의 내면을 보는 것 같진 않아요. 기억 속을 들여다보죠. 이 기억 속에서 사람들을 보고, 길을 봐요. 말을 듣고, 이 모든 것들은 저의 외부에 있죠. 저는 카메라일 뿐이에요. 그저 녹화를 하는 거죠.
글쓰기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 기록되었던 것들을 찾으러 가는 데 있어요. 텍스트를 쓰는 거죠. 그러나 가끔 언제 어떻게 글이 끝이 났으며, 언제 어떻게 써진 것인지 스스로 물을 때가 있어요. - P109

M.P. : 글을 쓰지 않고 살 수 있으세요?
A.E. : 저는 머릿속에 글에 대한 계획이 없으면, 혹은 계획이 너무 모호하면 진짜 삶을 살지 못해요. 탐구의 시간이라고 하지만 진짜 삶은 아니죠. 진짜 삶은 제가 책 안에 있을 때, 그것을 끝내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예요. 그때는 정말 사는 것 같아요. 잘 사는 것 같죠. 잘산다는 것은 머릿속에 늘 책을 생각하면서 사는 거예요. - P110

 모든 게 책과 연관되어 있죠. 책을 쓰는 것과 현실 세계와의 지속적인 관계요. 사실상 저에게는 그 둘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이, 글을 쓰기 위한 기다림이죠.
[세월』같은 책은 문자 그대로 저를 사로잡았어요.
그러니까 몇 년 동안 글에 갇혀 버렸죠. 그렇지만 제약의 느낌은 전혀 아니었어요. 오히려 반대로 이 영향력이 강력한 감각을 나오게 했죠. 제가 있어야만 하는 장소에 있었던 거예요. 책이 끝나지 않는 한 항상 바꾸고 고칠 것이 있으며, 이르러야 할 일종의 완벽한 상태가 있어요. 그것에 이르는 것이 숙제이죠. 이 숙제는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고요? 저도 몰라요. - P111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죠. 그것은 하나의 상태예요. 의식의 상태, 이전처럼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특별한 상태이죠. 가끔은 스스로에게 물어요. 내가 전에는 어땠었지? 이 의무감이, 이 욕망이 없었을 때는? 그런데 그게 언제일까요? 스무살 때부터 이 욕망을 가지고 살았는데. 이 욕망을 죽인 적도 있었죠. 『얼어붙은 여자』를 쓰고 난 후처럼, 더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이제 그런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아요. 어쩌면 그게 더 나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 P117

움직이게 하는 것, 다르게 보게 만드는 것은 형식이죠. 이전의 형식, 미리 설정된 형식으로는 다르게 볼 수없어요. 1950년대와 1960년대 사이에는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은 현실주의 문학이 있었죠 - 예를 들자면 앙드레스틸 - 전혀 멋을 부리지 않은,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스스로 금지한 문학이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에 프루스트는, 샤르댕에 관하여 엘스티르처럼",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단념할 때만
그것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썼죠. 우리는 우리가 존경하는 작가들과 다르게 써야만 해요. - P137

이제는 같은 구멍을 파고 있는 느낌이에요. 제 책들은 모두 다르지만 하나로 모스는 무엇인가가 있죠. 그것들을 모으는 것이 무엇인지, 제 책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 제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에요. 책에 대해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언젠가 프라하에서 열린 컨퍼런스가 끝날 때 즈음에 저를 초대했던 문화 고문관의 발언에 놀란 적이 있어요. 그는 "그녀는 자신의 책에 대해 전혀 말할 줄 모르는 군요"라고 말했죠.
분명 그의 말이 옳았을 거예요.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저에게는 어려워요. 특히 호의적으로 만드는 것은 더어렵죠.

 글쓰기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조금 더 잘할 수 있어요. 만약 누군가가 저를 최후의 참호로 몬다면, 그래도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느끼는 곳은 역시 거기이니까. 저만의 진정한 장소이죠.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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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역사의 힘]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

‘2부 진정한 민주주의‘ 읽고 있는데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또 대통령들의 정책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동안 뉴스나 다른 매체를 통해 알고 있었던 미국이라는 거대 제국의 모습을 미국인의 말로 읽으니 속은 시원하다.
한편으로는 지금 20 년도 전에 쓰여졌던 글을 읽는 이 시점에도 제국주의적 정책 방향은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고 경제 블럭화를 강화하는 미국의 행태는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세계화를 외치던 그 입들로 다시 끼리끼리 편가르기 하면서 자기네 편으로 하나라도 더 끌어들이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우리 같이 힘없는 나라는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느라 바쁘고 정부도 기업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하필 두 어깨들 사이에 끼어서리...

국내 정치도 한심하긴 매 한가지다. 부자를 위한 감세는 있어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싸워야 할 정부는 없다. 나는 할머니들을 희생해서 국익(?)을 취하고 그것으로 얻은 비굴한 고기 한 점 더 먹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는데 왜 국익이라고 하는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모르는 정부는 철퇴를 맞아야한다. 역사의 심판이 두렵지 않은건가. 명분도 실리도 다 잃는 정책 기조에 분노한다.

차라리 귀막고 눈가리고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일이나 하러 가고 싶다. 이 나이에 일하러 나가는 것도 엄두가 안나지만 내 일에 치여 아무 것도 안듣고 싶다.아무 것도 몰랐으면 싶기도 하다. 그런데 하워드 진은 이렇게 말했다.

˝정부든 혁명가든, 자신의 무지에는 무관심한 채 본인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평범한 대중의 생명과 자유를 희생시키게 해서는 안된다.˝(29면)

잘못된 길로 가는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하기 위해 매번 거리로 나가야하는 건가? 피로감이 저절로 몰려온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이러한 문제에 맞닥뜨릴 때마다 하워드 진은 어떻게 절망하지 않고 매번 이렇게 희망적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낙관한다‘고 말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요즘의 나는 나이가 들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걱정이 많아졌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아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과 같은 지치지 않는 신념을 갖고 싶다.



어제 ‘1부 행동하는 양심‘ 읽으면서 이것저것 검색을 하게 되었다. 잘 몰랐거나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몰랐던 것을 알게되니 책 읽는 재미가 한층 배가 되는 것을 느꼈다. 1999년 시애틀 운동, 로자 파크스, 공민권 운동, 피케팅, 저항의 서약, 과두제의 철칙, 비폭력 직접 행동, 그리고 반전 운동의 대표적 구호가 되었던 ˝우리 이름으로는 안돼(Not in our name)˝ -˝당신들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의 이름을 팔지 마라˝ 라는 뜻 - 같은 용어들의 뜻, 그리고 ˝파업, 보이콧, 복종하지 않기, 복잡한 사회구조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능력 등 이 모든 행동은 여전히 국가나 기업의 무시무시한 권력에 맞서는 강력한 무기˝(18면)라고 말하는 하워드 진의 글에서 다시 희망을 찾아보기로, 눈 감고 귀 막고 싶은 심정을 다시 돌이켜보려 애썼다.

사실 따지고보면 지구에 가장 해가 되는 국가는 끊임없이 자기 배를 불려가는 미국이 아니던가. 안끼는데없는 트러블 메이커다! 하나 해결도 못하면서 더 큰 불안을 조장하는 국가다! 하워드 진의 글을 읽으며 더 굳어지는 생각이다.







시애틀 저항이 우리를 낙담시키는 이 시대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가능성의 불꽃만 보여 준 것일지라도, 그 저항은 권력과 힘없는 사람들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원칙을 되돌아보게 해 줬다. 언론이 홍수처럼 쏟아 내는 무의미한 기사들이 사회운동의 역사를 묻어버린 탓에 쉽게 잊힌 그 기본 원칙을 상기시킨 것이다. - P19

물론 몰려든 텔레비전 카메라들이 앞다퉈 담아간 것은 시애틀 거리의불길과 깨진 유리창이었다(사실이 불길도 경찰이 사용한 폭발성 최루탄 때문에 생긴 것이다). 유리창을 깨뜨린 실제 당사자, 경찰 마찬가지로, 아나키즘 철학에 무지한 언론인들은 시위자들을 ‘아나키스트‘로 묘사했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분노 때문에 거리를 행진하며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를 방해한 사람들 대부분이 평화적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 그것은 비폭력 직접행동이었다. - P19

미국 역시 똑같은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 군대를 보냈지만 이기지 못했고, 결국 휴전 협정에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전면전을 펼친 인도차이나에서도 결국 철수해야 했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폭격을 이 조그만 반도에 퍼부었는데도 말이다.
오랜 군사 개입 덕택에 양키 제국주의를 구가할 수 있었던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어마어마한 국부와 무기를 갖고 있는 강대국 미국은 좌절을 겪었다. 쿠바혁명도 막지 못했고, 칠레에서는 성공적으로 반혁명을 조직했지만, 니카라과혁명은 막거나 저지할 수조차 없었다. 처음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나라들은 북아메리카 사람들의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막강하다고 여겨지던 세력이 무력하다고 여겨지던 세력을 지배하는 데 실패한 증거를 신문의 머리기사를 통해 매일 같이 보고 있다. - P27

예측 불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잃을 것이라곤 권력과 폭력에 대한 환상밖에 없다. 그 대신에, 우리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 사용되는 수단이라면, 그 수단이 혁명적 변화를 위한 것일지라도 인권은 지켜야만 한다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정부는 혁명가든, 자신의 무지에는 무관심한 채 본인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평범한 대중의 생명과 자유를 희생시키게 해서는 안 된다. - P29

나는 비관주의를 이해하지만 믿지는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증거로 따져 봐야할 문제다. 강력한 증거일 필요는 없다. 희망을 주기에 충분하면 그만이다. 희망을 위해 필요한 것은 확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역사는 우리에게 이런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비록 모든 경우마다 "역사는 보여 준다", "역사는 증명한다" 같이 확고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 P31

나는 이런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이것은 자신들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완벽히 통제하지 못하고, 행동이 단속적이며, 고통받아 온 집단들이 수세기에 걸쳐 사용해 온 방법이다. 미국의 흑인 반란은 이 방법에 ‘힘을 신중하게 사용하기‘라는 특징을 부여했다. 최소한의 피해만으로 최대한의 변화를 이루는 이 방법은 바로 비폭력 직접행동이다.

  비폭력직접행동의 형태는 너무나 다양해서 우리의 상상력이 한계에 도달하지 않는 한, 그 형태 역시 한계에 부딪히지 않는다. 연좌농성, 자유 승차와 자유 행진, 기도순례, 백인 전용 수영장에 들어가 인종차별에 항의하기, 기도 시위, 자유투표, 자유 학교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그리고 또 어떤 형태가 등장할지그 누가 알겠는가?

 그 형태를 막론하고 비폭력직접행동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비폭력직접행동은 현상 유지 상태를 뒤흔들어 놓고,
대다수 사람들의 현실 안주에 문제를 제기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분노와 상처를 표현해 주고, 불의를 폭로하고, 크든 작든 기존의 모든 개혁이무능함을 드러내고, 긴장과 불화를 일으키고, 그리하여 권력자들을 압박해 그런 압박을 받지 않았을 경우보다 더 빨리 사람들의 불만을 해결하게끔 만든다.
- P52

1976년, 또다시 선다형 문제(대통령선거)가 제출됐다. 더 나은 후보나 더 나쁜 후보가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 나라의 미래가 다음번 대통령에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는 구경꾼 민주주의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먼 길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지 안될지는 높은 세금, 높은 물가, 실업, 낭비, 전쟁, 부패에 질려 버린 미국 시민들이 미국 전역에서 1930년대의 노동자 봉기나 1960년대의 흑인 반란보다 더 거대한 변화의 요구를 조직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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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13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일 책 반납하러 가는데 그냥 보내기 아쉬워서 살짝 남겨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잊히지 않는 모습이다.
타워크레인 위로 올라가는 밥과 물...

마지막 시 ‘해가 뜬다‘도 기록해 둔다.


해가 뜬다

해가 뜰 땐
당당해야 해.
거짓말하지 말아야 해.
약한 사람 괴롭히면 안 돼.
(176면)


-85호 크레인

꿈에 85호 크레인이 나왔어. 무서운 사람들이 쫓아와서 막 도망갔어. 다리도 아프고 숨도 찬데 아무리 찾아봐도 숨을 곳이 없었어. 그만 포기할까 하고 있는데 비상구가 보이는 거야. ‘어, 여기 비상구가 왜 있지?‘ 잽싸게 들어갔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환해져서 눈이 아팠어. 눈을 비비고 주위를둘러보니 노란, 빨간 작은 꽃들이 피었고, 살랑이는 바람 속에서 째르르 짹짹 새소리가 들리고, 바위들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거야. 정신없이물을 마시는데 앞에 누가 있네. 처음엔 개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호랑이인 거야. 호랑이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85호 크레인이라는 거야. 처음엔 미친 호랑이인 줄 알았어. 어, 근데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로 뻗은 크레인이 보이는 거야. 우아! 멀리서만 볼 수 있었던 그 크레인에 들어온 거야. 김진숙 이모를 보려고 후다닥 크레인 위로 올라갔어. 김진숙 이모는 즐겁게 누군가와 통화하고 또 통화하고 너무 바빠서, 아무 얘기도 하지못하고 내려왔어. 여자들은 오래 전화하는 걸 좋아하잖아. 그래서 호랑이랑크레인 아래위로 뛰어다니면서 재미있게 노는데, 어 근데 좀 이상한 거야. - P170

크레인에는 전기도 안들어오고 밥도 아래서 올려주어야 먹을 수 있고 여름엔 무지무지 뜨겁고 겨울엔 쌩쌩 찬바람이 불어 춥고 가만히 있어도 흔들흔들 무섭다는데, 이 크레인에는 근사한 집들도 있고 안테나도 있어. 텔레비전도 실컷 보고 인터넷도 하고 아름다운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하하 웃으며 즐겁게 지내고 있었거든. 그래서 호랑이한테 어떻게된 거냐고 물어보니까. 호랑이가 "바보, 꿈이니까 그렇지!" 하면서 "어흥!" 하는 거야. 그 바람에 깜짝 놀라 꿈에서 깼단다. 무슨 이런 꿈이 다 있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같이 실컷 재미있게 놀다가 갑자기 어흥 하고 달려든 호랑이는 좀 이해가 안 돼.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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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희망의 발견

《런던에서 열린 사회주의자들의 국제 모임에 참석하고 난 뒤 쓴 이 글을 통해, 최근 좌파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비관주의에 대해 생각해 봤다.》

어느 날 상부(고문을 당해도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으련다)에서 이런 지시가 내려왔다. "힘을 북돋아 줄 만한 글을 쓸 것." 더 정확하게는 "사람들의힘을 북돋아 주십시오" 하고 적혀 있었다. 나는 이 점잖은 표현에서 뭔가 절망감을 감지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설명을 좀 해야겠다.
진보적 · 급진적 운동을 위해 글을 쓰는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특기가 있다. 침울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고, 유머러스한 글을 잘 쓰는 사람이있다. 개중에는 동료 좌파 작가를 조롱하는 데 열중인 사람도 있다. 이번달 호에는 서두에서 사람들의 힘을 북돋아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은데, 결국 내가 선택된 것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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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 이윤엽 이야기 판화 그림책
이윤엽 지음 / 서유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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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엽의 이야기 판화 그림책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의 마지막 Chapter 3은 '기억하는 마음'이다.

Chapter1의 '신기한 일', Chapter 2의 '이런 꽃 저런 꽃'은 동시 작자의 주변 인물이나 정경, 풍경, 동물, 마을 사람들이었다면 Chapter 3의 '기억하는 마음'은 그 영역이 좀 더 확대되었다. 가족과 이웃, 주변 식물, 사물에서 기억하고 싶은, 그리고 기억해야 하는 사람들로 확장되었는데,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작가가 보여주는 아름다움만 생각하고 슬슬 읽던 마음이었다가 그래서는 안된다고 그렇게 모두 잊어서는 안된다고 조용조용히 하지만 간절하게 말하는 것 같다. 



우는 사람


어떤 사람이 울어.

어떤 사람이 울면

나는 슬퍼.


나는 괜찮은데

어떤 사람들이 울면

어떤 사람들이 슬프면

나도 슬퍼져.

나도 눈물이 나.

사람은

다른 사람이 슬프면 같이 슬퍼져.

(138면)



  연탄 배달이 안되는 좁은 길 끝에 살아서 개울을 건너 몇 번이고 연탄을 날라와야 하는 김씨 아저씨, 그 아저씨 예쁘게 사진을 찍어 주고 싶어 꽃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꽃만 환하게 나왔다는데 "꽃보다 더 환한 아저씨인데"라고 말한다. 올빼미도 아닌데 밤에 일하러 가는 노동자들, 밤에 일하면 온종일 몽롱하고 밥맛도 없고 비실비실 힘이 빠지고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고 그래서 사람은 사람처럼 살아야 하고 올빼미는 올빼미처럼 살아야 한다고... (밤에 일하러 가는 사람). 군인들이 기지를 만들기 위해 흙을 덮는 바람에 쫓겨난 대추리 사람들과 솔부엉이(황새울).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공장이 중국으로 이전하면서 해고 당한 노동자들의 시(기타 만드는 공장)는 우리 사회 흔한 이야기인가 사실은 아니겠지 싶어 검색해보니 콜트.콜텍이라는 기타 만드는 공장이 실제로 있었고, 공장 지붕 위에서 고공 농성하는 노동자들의 기사를 비롯해서 줄줄이 검색된다. 30 년을 몸 바쳐 일했던 회사가 주말을 보내고 출근해보니 공장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었고 이것도 기가 막힐 일인데 곧 이은 해고조치에 맞서 노동자들은 등촌동 본사에서 또 한강 망원동 지구에서 대법원 앞에서 시위를 이어갔지만 부당해고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경영상 필요한 조치였고, 공장폐쇄도 정당하다는 것뿐이었다. 열악한 근무환경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젊은 사무직원들의 폭언, 폭력도 견디며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지만 보상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 바쳤던 열정을 알아 달라"고, 그리고 "다시 콜트.쿨텍의 국내공장을 정상화시켜 해고를 철회하고 복직히켜 달라"고.((투테이 신문, 2014. 05.21, 이경은 기자의 글 발췌)


  농민 백남기(좋은 사람), 한진 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벌인 김진숙 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85호 크레인)을 다룬 사건들은 워낙 많이 회자되는 기사들이었기 때문에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들도 다 기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잊으면 안되는데 우리는 어느 순간 이렇게 마음을 무겁게 하던 사건들도 다 잊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 느닷없이 새로운 사건이 다시 등장하고 사라지고 또 등장하면서 우리는 다시 잊으며 살아간다. 잊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그래도 다시 기억하려고 애써보자. 애써야 한다. 책을 읽으며 다시 기억들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잊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이상하게 저절로


사람들이 슬퍼하면

저절로 슬퍼져.

사람들이 엉엉 우는 걸 텔레비전에서 보면

저절로 눈물이 나와.

모르는 사람이고

아주 멀리 있는 사람들인데도

사람들이 슬퍼하는 걸 보면

이상하게 저절로 슬퍼져.

내가 이상한 거야?

(172면)



  너 그렇게 생각없이 슬슬 읽다가 뒤통수 맞은 기분이지? ㅎㅎㅎㅎ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서 껄껄 웃는 것 같다. 

봄비가 내 방 앞 데크에 떨어지는 소리 들으며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기분 좋았는데 Chapter 3 첫 시부터 슬슬 시동 걸다가 점진적으로 강해진 주먹에 맞은 기분이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쉽게 잊는거냐고, 멀리 있는 사람일지라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이라도 슬퍼하지만 말고 기억하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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