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앞에서 읽었던 <달떡>과 이어지는 거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또한 아니 에르노의 《다른 딸》과 유사한 경험이어서 오늘 다시 한강 작가의 글을 읽으며 딱 떠올라 놀랐다.


......

이제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초> 중에서


당신의 눈

당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 나는 다르게 보았다. 당신의 몸으로 걸을 때 나는 다르게 걸었다.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종종 캄캄하고 깊은 거울 속에서 형상을 찾듯 당신의 눈을 들여다봤다. - P118

그때 그 외딴 사택이 아니라 도시에 살았더라면. 어머니는 성장기의 나에게 말하곤 했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갈 수 있었더라면, 당시 막 도입되었던 인큐베이터에 그 달떡 같은 아기를 넣었더라면. - P118

그렇게 당신이 숨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결국 태어나지 않게 된 나 대신 지금까지 끝끝내 살아주었다면. 당신의 눈과 당신의 몸으로, 어두운
거울을 등지고 힘껏 나아가주었다면. - P119

수의

어떻게 하셨어요, 그 아이를?
스무 살 무렵 어느 밤 아버지에게 처음 물었을 때, 아직 쉰이 되지 않았던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겹겹이 흰 천으로 싸서, 산에 가서 묻었지.
혼자서요?
그랬지, 혼자서 - P120

아기의 배내옷이 수의가 되었다. 강보가 관이 되었다.
아버지가 주무시러 들어간 뒤 나는 물을 마시려다 말고 딱딱하게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폈다. 명치를 누르며 숨을 들이마셨다. - P120

그녀

그 아기가 살아남아 그 젖을 먹었다고 생각한다.
악착같이 숨을 쉬며, 입술을 움직거려 젖을 빨았다고 생각한다.
젖을 떼고 쌀죽과 밥을 먹으며 성장하는 동안, 그리고 한 여자가 된 뒤에도, 여러 번의 위기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되살아났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매번 그녀를 비껴갔다고, 또는 그녀가 매번 죽음을 등지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
그 말이 그녀의 몸속에 부적으로 새겨져 있으므로. - P38

그리하여 그녀가 나 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한다.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로.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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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한강/난다/2016년

분명 읽었던 책인데 유독 이 책만 스토리가 하나도 기억이 안나는 이유는.....?
소설을 표방했는데 너무 짧은 챕터로 이루어진 에세이. 혹은 시로 읽혀서......?
<달떡>의 감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하지만 이 단편이 이리도 짤막하다!
이번엔 별점을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





달떡

지난봄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이 어릴 때, 슬픔과 가까워지는 어떤 경험을 했느냐고. 라디오 방송을 녹음하던 중이었다.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른 것이 이 죽음이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나는 자랐다. 어린 짐승들 중에서도 가장 무력한 짐승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 그이가 죽은 자리에 내가 태어나 자랐다는 이야기. - P22

달떡같이 희다는 게 뭘까, 궁금해하다가 일곱 살 무렵 송편을 빚으며 문득 알았었다. 새하얀 쌀반죽을 반죽해 제각각 반달 모양으로 빚어놓은, 아직 찌지 않은 달떡들이 이 세상 것 같지 않게 곱다는 것을. 하지만 정작 얼기설기 솔잎들을 매달고 접시에 담겨 나온 떡들의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고소한 참기름에 반들거리는, 찜솥의 열과 김으로 색깔과 질감이 변형된 그것들은 물론 맛이 있었지만,
눈부시게 곱던 쌀반죽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 P22

엄마가 말한 달떡은 찌기 전의 달떡인 거야, 그 순간 생각했었다. 그렇게 깨끗한 얼굴이었던 거야. 그러자 쇠에 눌린 것같이 명치가 답답해졌다. - P23

지난봄 그 녹음실에서 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어릴 때 기르던 개 이야기를 했다. 내가 여섯 살이 되던 겨울 죽은 백구는 진돗개의 피가 절반 섞여 유난히 영리한 개였다고 했다. 다정하게 함께찍은 흑백사진 한 장이 남아 있지만, 살아 있었던 때의 기억은 이상하게도 없다. 선명한 건 오직 죽던 날 아침의 기억뿐이다. 
하얀 털, 까만 눈, 아직 축축한 코.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손을 뻗어 개의 목과 등을 쓰다듬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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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10-20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 전에 읽었는데
기억이 정말 하나도 나지
않는다는.

백색의 기억입니다.

은하수 2024-10-20 21:05   좋아요 1 | URL
저도요...
아무리해도 하나도 기억이 안났는데
읽다보니 어렴풋이 아... 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백색의 기억이 딱 맞는 말씀이네요.
이번에 읽을 땐 처음보다 더 좋았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셔도 좋으실 듯해요^^
 

캐런 제닝스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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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작은 등대섬에서의 고립을 선택한 새뮤얼, 그리고 그곳에 떠밀려온 젊은 남자. 원치 않는 동거 생활은 긴 세월 외로움과 맞서 싸워온 그의 늙고 연약한 육체와 정신에 엄청난 불안을 야기한다. 고통스러웠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이야기는 결국 파국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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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와 독재자의 형제들, 친구들, 사촌들이 득시글거리는 자동차 행진은 뭐가 다릅니까? 독재자도 자기 측근들을 권력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대체 옛 대통령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입니까? 독재자가 살육한 그 모든 사람은요?"
"오, 형제여, 진정해. 그만하면 됐어. 그분은 우리를 구해냈어. 교도소에서 그 긴 세월을 썩으면서 아직도 그걸 깨닫지 못하나?" - P146

새뮤얼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는 잠들어 있는 죄수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그 긴 세월을 보내고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말해볼까요?"
"말해봐." - P146

"나는 내 자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내 아들은 아직 아기입니다.
내가 광장 가두시위에 나가던 그날 아침 마지막으로 보았던, 내 어머니 품에 안긴 그 모습 그대로 작은 갓난아기입니다.
나에게 바깥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으며, 모든 것은 그 아기를 중심으로 그대로 서 있습니다. 내 여동생은 십 대이고, 내 아이의 어미는 여전히 석상 위에서 시위하고 있으며, 양친 모두 살아 계십니다. 내게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곳에서 나는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조차 잊습니다. 가끔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도 난 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저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묻고 싶다고요." - P147

"그런 의문은 품지 말아야 해. 내가 말했듯 거울 속 그 남자는 스스로 충성심을 보여준 남자야."
새뮤얼은 고개를 돌려 다시 교도관을 쳐다보았다.
 "그런말 마십시오. 나는 나 자신 말고 누구에게도 충성한 적이 없습니다." - P147

그가 본 가장 작은 아기였다. 자그마한 몸에 낯선 노르스름한 기가 돌았다. 아기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눈을 감고 있었다. 새뮤얼은 아기를 안고, 냄새 맡고, 아기의 작고 연약한 몸을 느꼈다. 그다음 아버지가 말했던 자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 어린것에게 자유가 어떤 의미가 될지. 새뮤얼은 말했다. "그래, 하겠어. 서약하겠어."
잠들어 있는 메리아 옆에서 레시를 안고 앉아 있는데 주마가 찾아왔다. 새뮤얼은 주마가 아기를 보러 온 줄 알았지만, 주마는 축하하는 대신 숨죽인 목소리로 바깥으로 나가자고 속삭였다.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새뮤얼은 가야 했다. - P192

섬. 섬. 섬은 새뮤얼의 것이다. 그의 그만의 것이다. 헛간 바닥의 흙을 맛본 사람도 그였으며, 이곳을 다듬고 길들이고 구축해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사람도 그였다. 그는 섬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할 때다. 그는 충분히 친절을 베풀었고, 다른 사람들이 해줄 법한 것보다 많은 것을 주지 않았던가. - P241

 이제는 남자의 얼굴을 대면하고 말해야 한다. 공급선이 올 때까지만 이곳에 있을 수 있다고. 공급선이 올 때까지 남자는 소파에서 잠자고 내주는 옷을 입고 앞에 놓인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더는 섬을 어슬렁거려선 안된다. 새뮤얼 방에 들어오는 것도, 위협이나 손가락질도 안되고, 물건을 제멋대로 만지거나 가져가서도 안 된다. 2주 후남자는 무조건 섬을 떠나야 하며 다시 돌아올 생각도 말아야한다. 남자는 환영받지 않는다. - P242

새뮤얼은 돌멩이를 내던지고 축구 유니폼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비가 그치고 하늘은 며칠 만에 처음으로 푸른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새뮤얼은 시신 옆을 떠나 연신 손을 닦으며느릿느릿 오두막으로 향했다. 시신은 당분간 저대로 두어도 괜찮으리라. 내일 시신을 바다로 끌고 가 그것이 온 곳으로 표류해 돌아가게 할 것이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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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관은 귀에 선 밋밋한 억양으로 단호하게 강제 퇴거 명령을 전했다. 통역관은 주민들에게 골짜기의 경작지는 식민주의자의 재산이 되었다고 했다. 
"총독의 명령에 따라 너희는 원숭이들이 사는 산악지역으로 돌아간다. 이 땅은 이제 너희게 아니다. 왕에게 영광을, 위대한 제국에 영광을" - P52

처음에는 아무도 통역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느 누가 그들을 움직이게 한단 말인가. 먼 옛날부터 조상 대대로 터전으로 삼은 이곳에서 몰아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들이 왔다. 남자들은 누구도 이곳에 남을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땅은 몰수되었다. - P52

새뮤얼의 가족은 숟가락 하나 챙기지 못하고 맨몸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쉬지 않고 달렸다. 그의 어머니가 발이 채여 넘어지는 통에 업혀 있던 동생이 이마를 찧어 혹이 났어도 계속 달렸다. 내내 칭얼거리던 동생은 이제는 아파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럼에도 그들은 피와 침을 흘리면서, 불타는 골짜기의 시꺼먼 연기 구름에 쫓기며 저 앞 푸른 하늘을 향해서 앞으로 앞으로 쉬지 않고 달렸다. - P52

도망치는 새뮤얼 가족을 기다리는 것은 이미 벌거숭이가된 황무지와 마을뿐이었다. 메뚜기 떼가 휩쓸고 간 자리처럼 눈길 닿는 곳마다 파괴되어 있었다. 그들은 먹을 만한 것을 찾아 대치는 대로 뒤지고 잎자루, 뼈, 도둑맞우 둥지를 뒤졌지만 끝내 주린 배를 잡고 밤을 새워야 했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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