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서의 요리와 침대에서의 잠자리까지 모든 것은아빠의 사랑이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나는 아주 일찍부터섹스가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잠자리를 질색하지는 않았지만 참아내야 하는 것쯤으로본 것 같다. 한 번도 육체적인 사랑이 중요하지 않다거나여자에게는 귀찮기만 한 일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너희 아빠 정열적인 남자였어." "아빠는 언제나 준비가 돼있었어. 하룻밤에 여자 열 명이랑도 잘 수 있었을 거야."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옷을 벗고 어떤 남자 옆에 눕기 위해서는 그 남자를진짜로 진짜로 사랑해야만 하는구나. 그러지 않으면이 모든 사업에 막대한 지장이 생기는구나. 열여섯 살,
처음으로 순결을 위협받았을 때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날 - P37

때마다 짜증이 치밀 정도로 계속되는 머리와 몸의 전쟁을느꼈고 조용히 엄마의 자비를 빌었다. 하지만 엄마, 내가이 사람을 정말 정말로 사랑하는지 어떻게 알아? 내가아는 건 나도 몸이 달았고 이 남자가 날 밀어붙이고있다는 것, 끈질기게 조르고 있다는 것뿐이야. 골목에서, 공원 벤치에서, 열 발자국 떨어진 방에서 엄마가 뒤척이며누워 있는 우리 집 부엌에서…… 전쟁터에 나와 있는 것같아...... 하지만 나에겐 지원군이 없어.

엄마의 사전에 있는 그 단어는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가장 높은 차원에 있는, 영혼의 고귀한 본질,
윤리적 사명 자체였다. 존재하면 오해할 수 없고 부재할때도 오해할 수 없는 확실한 감정이다. "진짜 사랑하는지어떻게 아냐고? 그냥 아는 거야." 엄마는 말하곤 했다.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잘 모르겠으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이 문장은 시나이 문자처럼 엄마에게서 내게로 계승되었다.  - P38

엄마가 드러커 아줌마에게 창부라고 하고 1년 뒤에드러커네는 이 건물에서 나갔고 그 아파트에 네티러바인이 들어왔다. 드러커네가 이사 가고 네티가 이사 온낮은 기억에 없다. 트럭이나 봉고차가 들어와 가구 식기옷가지 들을 내가고 들여오는 장면도 없다. 사람들도 집도마치 아파트에서 증발하듯 싹 사라졌고 다른 사람들이 그공간을 차지했을 뿐이다. 나는 애착이 절대적이지 않고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속성을 지녔다는 걸 아주 어린시절에 알게 되었다.  - P51

엄마는 맞은편에 앉은 나를 찬찬히 훑어본다. "그래서우리 잘난 딸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요즘에는 사랑도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 해도."
엄마는 황당한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입이 떡 벌어졌고눈은 딱한 사람 보듯 연민으로 가득 찼다. 내가 방금 한말이 하도 무식하기 짝이 없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어서주무기인 말발마저 잃어버린 듯했다. 그러다 고개를천천히 주억거리더니 말한다. "아까 그 꼬마가 한 말을해줘야겠구나. ‘아줌마 완전히 반대로 아시네요." - P70

 네티는 이제까지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부여할 줄 아는 재능이 있었다.
물론 레이스도 많았다. 어딜 가나 네티가 짠 레이스가 있었다.
네티는 재능이 출중한 레이스 기술자였다. 사실릭 러바인을 만난 곳도 일하던 레이스 공장이었다.
레이스 실로 옷과 침대보는 물론 드레스와 코트까지 뜰실력이 됐지만 그걸로 수익을 내지는 못했다. 대신 인형베갯잇, 의자 등받이 덮개 같은 소품을 짜서 아파트를화사하고 앙증맞게 꾸미곤 했다.  - P80

나는 열네 살이 되었고 네티의 레이스는 나의 내면세계성장에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이듬해였고 내가 우리 집 비상계단에 밤늦게까지 앉아서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 시절이기도 했다.

당시 우리 집 분위기는 딱 영안실 같았다. 엄마의 비애는너무도 원초적이어서 생활을 전부 지배해버렸다. 슬픔은공기 속에서 산소만 빨아들였다. 집에 들어설 때마다머리와 몸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져 그저 원치 않는 곳으로질질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우리 셋, 그러니까 오빠 나엄마 중 누구도 서로에게서 평온과 안정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같은 유배지에 갇혀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는사람들이었다. 난생처음 외로움이란 감정이 나의 의식을장악한 채 놓아주지 않았고 그럴 때면 나는 고개를바깥세상의 거리로 돌려 구슬프고 몽환적인 내적망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것만이 언제나 손에 잡힐듯 감지되던 상실감과 패배감에서 빠져나와 쉴 수 있는유일한 안식처였다.
- P85

아빠는 11월 말 새벽 네 시에 돌아가셨다. 아빠가입원했던 병원에서 다섯 시 반에 전보가 왔다. 아빠는산소텐트에 일주일 동안 들어가 있었고 의사들은 최선을다해 생명을 구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난 기대하지 않았다.
아빠는 닷새 동안 세 번의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마지막발작이 아빠의 생명을 앗아갔다. 쉰 살이었다. 그때엄마는 마흔여섯, 오빠는 열아홉, 나는 열세 살이었다. - P96

초인종이 울렸을 때 가장 먼저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튀어나간 사람은 오빠였다. 엄마가 오빠 뒤를 따랐고 내가그 뒤에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그 손바닥만 한 전실에다닥다닥 붙어 서 있었다. 오빠는 문 앞에 서서 60와트전구가 비추는 연노란색 종이 한 장을 내려다보았다.
엄마는 손톱이 박힐 정도로 오빠의 팔목을 세게움켜쥐면서 말했다. "아버지 돌아가셨지? 그렇지, 그런거지?" 오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부터 곡소리가터져나왔다.
"아악." 엄마는 비명을 질렀다.
"아, 하느님."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하느님, 도와주세요." 또 소리를 질렀다.
눈물은 바닥에 떨어지고 샘물처럼 솟아올라서 복도를가득 메웠고 부엌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거실로 흘러들어 - P96

두 개의 침실 벽에 부딪혔고 우리 모두를 떠내려가게 했다.
그날 낮과 밤에 흐느끼는 여자들과 충격받은 얼굴을한 남자들이 우리 엄마를 에워쌌다. 엄마는 머리를쥐어뜯고 살갗을 찢고 몇 번씩 혼절했다. 누구도 감히엄마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엄마는 기이한 투명 막 안에홀로 격리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엄마 주변을 에워쌌지만어느 누구도 그 안으로 침범할 수 없었다. 엄마는 마법에걸렸다. 귀신에 홀려 있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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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와 적어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우리는 이사를 했다. 우리는 적어도 인구의 4분의 1이 독일어를 쓰는 국경 도시에 살러 갔다. 우리, 헝가리 사람들에게 독일어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상기시켰으므로 적의 언어였고, 그것은 또한 당시 우리나라를 점령했던 외국 군인들의 언어이기도 했다.
1년 후, 다른 외국 군인들이 우리나라를 점령했다. 러시아어가 학교에서 의무화되었고, 다른 외국어는 금지되었다.
아무도 러시아어를 알지 못한다.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등의 외국어를 가르치던 선생님들은몇 달 동안 러시아어 속성 수업을 배웠지만, 그들은 그 언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것을 가르칠 - P51

마음이 전혀 없다. 그리고 어쨌든 학생들도 그것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국민적인 지식의 사보타주를, 당연히 미리 계산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수동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저항을 목격하게된다.
우리는 소련의 문학과 역사, 지리도 이처럼 열정 없이 가르치고 배운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한세대의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한다. - P52

그렇게 해서 스물한 살의 나이로 스위스에, 그중에서도 전적으로 우연히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벽한 미지의 언어와 맞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언어를 정복하려는 나의 전투, 내 평생 동안 지속될 길고 격렬한 전투가시작된다.
내가 프랑스어로 말한 지는 30년도 더 되었고, - P52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언어를 알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말할 때 실수를 하고, 사전들의 도움을 빈번히 받아야만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이유다. 이 언어가 나의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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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리고 백수린 작가의 번역이다.
책은 아주 작고 표지의 그림은 아름다운 듯 슬프다.

작가는 아주 어릴 때부터 활자중독이었나보다.
모국어인 헝가리어를 잃고 프랑스어를 공부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의 시기를 문맹에 빗대어 적고 있다.

*시작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
신문, 교재, 벽보, 길에서 주운 종이쪼가리, 요리조리법, 어린이책, 인쇄된 모든 것들을.
나는 네 살이다. 전쟁이 막 시작됐다.
그 시절 우리는 기차역도, 전기도, 수도도, 전화도 없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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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 한 사람, 한 사람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아름답다.
책 속에선 여자들이 모두 ‘그‘로 지칭된다.
다세대 주택에 모여 살던 여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엄마! 엄마에 대한 이야기, 엄마와 딸의 이야기, 엄마와 이웃들의 이야기들이 그려진다.
누구나 마음 속에 이런 장소가 있지 않을까?
나도 결혼하고 아파트 분양 받고 와서 살던 용인 수지의 복도식 작은 아파트 언니, 동생들...
지금도 보고싶고 생각나는 사람들, 아직 만나는 동생네도 있고... 그 시절이 그리운건 나뿐일까?

근데... ˝여자로 산다는 것의 공허함˝이라니..
어쩜 이런 표현 너무너무너무 멋지잖아.,ㅠ
놓쳐도 되는 문장이 하나도 없어
이 작품 여자 사람이 쓴거 맞죠?!











그 다세대 주택에서 여섯 살 때부터 스물한 살 때까지 살았다. 스무 채의 빌라가 있는 4층 건물이었고 내가기억하는 건 오직 여자들만 있었다는 점이다. 거기살던 남자는 단 한 명도 기억이 안 난다. 물론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을 것이다. 남편이었고 아빠였고 아들이었을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 건물을 떠올릴 때마다 여자들만기억난다. 그곳 여자들 모두가 드러커 아줌마처럼 상스럽거나 우리 엄마처럼 외고집이었다. 그들은 자신이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 법이 없었고넘어온 삶의 고개를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행동만 보면 세상사를 다 꿰고 있는 듯했다. 약삭빠르고, 즉흥적이고, 무식하고, 시어도어 드라이저 (19세기 미국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자연주의 소설가로 이민자와 빈곤층의 삶에 주목했다)의 소설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잠시 평화로워보이는 시기도 있었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 충격적이고야만스러운 사건들이 터졌고 그 와중에 두세 명의 삶은 상처로 얼룩지고(어쩌면 몰락해버리고) 다시금 일시적인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또다시 울적한 고요함, 관능만 남은 무기력, 부정이 만들어내는 평정의 나날들이이어졌다.
 나라는 여자애는 그들 한가운데서 자라고그들의 이미지 안에서 만들어진 존재였다. 얼굴을 덮은천의 클로로포름을 빨아들이듯 나는 그 여자들을
빨아 들였다. 무려 30년이 흐른 후에야 내가 그들을 얼마나 이해했었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 P7

세사는 참 예쁘장하고 젊은 새댁이었어. 결혼한 지2년도 안 되었다고 했나. 남편을 사랑하지는 않았어.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않았지만 사실 그럭저럭 착실한남자였거든. 내가 아는 건, 남편을 안 사랑했고 매일 - P9

뻔질나게 외출을 했다는 거. 아마 따로 애인이 있었던모양이야. 엉덩이까지 찰랑찰랑 내려오는 검은 머리가눈에 확 띄었지. 그런데 어느 날 그 머릴 싹둑 자르고나타난 거야. 세련된 도시 여자가 되고 싶었나 봐. 남편은 아무 말 없었는데 친정아버지가 집에 오더니 깎은머리를 보고 냅다 뺨을 갈겨버린 거야. 너무 아프고어안이 벙벙해서 천국에 계신 할머니가 보일 정도였대.
그러곤 사위를 시켜 한 달 동안 집에 가둬버리라고했다나. 세사는 비상계단을 타고 우리 집으로 내려와서우리 현관으로 나갔지 뭐. 한 달 동안 매일매일 말이야.
한번은 우리 집 부엌에서 같이 커피를 마셨어.
 ‘세사, 친정아버지한테 여긴 미국이라고 말해. 우린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자유가 있다고 세사가 나를 빤히 보더니 그러더라. ‘네? 그게 무슨말이에요? 아버지한테 여긴 미국이라고 말하라고요?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양반이에요‘" - P10

내가 볼 때 이 아파트의 재미는 우리 집 부엌에도있었고 창문 밖의 다양한 삶에도 있었다. 그 재미란 진정 - P23

흥겹고 즐거운 것이었고 안과 밖의 대조되는 풍경 때문에더 고조되곤 했다. 이 부엌에서 나는 숙제를 한다. 옆에는 늘 엄마가 있고 나는 엄마가 하루를 준비하고 살아내는 모습을 지켜본다. 엄마는 살림을 쉽게 척척 해내는 기술이 있고 기운도 넘쳤지만 그걸 지긋지긋해하며 일체 언급하지않는다. 나에게도 집안일일랑 조금도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요리, 청소, 다림질을 배운 적이 없다. 엄마는 지루할정도로 능숙한 요리사였고, 맹렬한 청소부였으며, 악령들린 세탁부였다. - P24

엄마와 나는 온종일 그 부엌을 차지하고 있었다. 엄마는안뜰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사건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진 않았지만 놓치는 것도 없었다. 엄마는 모든 목소리를 들었고, 모든 움직임을 파악했으며, 침대보를 널고 걷는 소리를 들었고, 누가 누구를 부르고 무슨 대화를나누는지 재빨리 입력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엉터리 영어, 누군가의 경솔한 행동, 이쪽에서 나는 빽빽거리는 소리와 저쪽에서 나는 구성진 욕을 듣고 같이 웃곤 했다. 창문 바깥쪽 삶에 대한 엄마의 끊임없는 평가는 내가 처음으로 맛본 지성의 열매라 할 수 있었다. 엄마는 세간에 떠도는말을 정보로 변형시킬 줄 알았다. 한층 치솟은 목소리를들으면 이렇게 평가하곤 했다. "보나 마나 저 댁 오늘 - P24

아침에 남편하고 싸웠구먼." 한풀 잦아든 목소리를 듣고는 이렇게 말한다. "저 집 애가 아프네." 엄마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눈치 싸움에 밝았고 누가 누구와 사이가 틀어졌는지도 대번에 파악했다. 엄마가 그 골목에서 일어나는 세상사를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걸 듣고 있으면 인생은 조금 더 풍부해지고, 다채로워지고, 더 흥미로워졌다. 나는 우리 모녀와 창문 밖의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곤 했다. - P25

그 부엌, 그 창문, 그 안뜰. 그것은 엄마가 뿌리를 내린대기였고 엄마가 서 있던 배경이었다. 이곳에서 엄마는똑똑하고, 웃기고, 활기 넘쳤고, 권위와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는 당신을 둘러싼 환경을 경멸했다.
"여편네들이란, 으이구!" 입버릇처럼 말했다. "빨랫줄 앞에 모여가지고 이 집 저집 욕이나 하고." 엄마는 여기 아닌 다른 세상, 진짜 세상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가끔은 당신이 그 세상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열렬하고 절실하게. 엄마는 집안일에 열중하다가도 갑자기 모든 동작을 일제히 멈추고,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몇 분 동안 싱크대를 바닥을, 스토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그 세상이 어디 있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데? 그게 대체 뭔데? - P25

이것이 엄마가 처한 삶의 조건이었다. 여기 이 부엌에서당신이 누구인지 잘 안다는 것. 또한 이 부엌에서안절부절못하고 지리멸렬해한다는 것. 이 부엌에서엄마는 누구나 존경하고 감탄할 정도로 훌륭히 기능한다.
이 부엌에서 당신이 하는 일을 혐오스러워한다. 어쩌면 나중에 당신 입으로 말한 "여자로 산다는 것의 공허함"에대해 분노를 키우고 있다.  - P28

 그러다가도 골목에서 벌어지는 세상만사를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명랑하고 유쾌한 웃음을 터트린다. 아침에는 수동적이고,
오후에는 반항적이던 엄마는 매일 새로 만들어졌다가 매일 풀어져버리는 사람이었다. 당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재료를 굶주린 사람처럼 붙들고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 애정을 보이다가도 일순간 어쩔 수 없이 이 생활로 끌려온 부역자처럼 느끼곤 했다. 어떻게 그처럼 처절하게 분열된 삶에 당신의 모든 감정을 쏟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무슨 수로 엄마의 감정에 감정을 쏟지 않을수 있었겠는가?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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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남극을 향해

인듀어런스 호의 상륙 예정지는 위해 동쪽의 바셀 만(灣)이었다. 하지만 배가 웨들해의 강한 해류에 휩쓸린다면 그들은 얼음과 더불어 서쪽의 파머 반도로 가게 될 것이다.
자칫하면 얼음에 둘러싸여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엉뚱한 곳에서 발이 묶일지도 모른다.
그건 항해에 나선 섀클턴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12월 5일 아침에 사우스 조지아 섬을 출발한 인듀어런스 호는 이틀 뒤에 처음으로 부빙군을 만났다. 이후 6주 동안 배는 부빙군을 피해 멀리 돌기도 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밀고 나가기도 하며 조심스럽게 남쪽으로 내려갔다. 바다를 무려 250㎢나 뒤덮고 있는 엄청난 부빙군을 만난 적도 있었다. - P29

"얼음에 갇혔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여전히 단단함 길이 열릴 징후가 전혀 없음."
"물길이 다시 막혔음.".
"여전히 단단함."

3주 동안 대원들의 일기는 온통 이런 내용들로 채워졌다. 얼어붙은 부빙군을 바람이 쪼개줄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기대도 더 이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얼음에 갇힌 인듀어런스 호는 웨들해의 해류에
밀려 부빙군과 함께 표류했다. 섀클턴이 그톡록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기어이 현실로 닥치고 말았던
것이다. - P38

배는 육지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 그리고 겨울은 점점 더 다가왔다. 남극의 겨울이 얼마나 혹독한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과학자와 선원들은 남극 탐험을 함께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남극의 겨울을 함께 보낼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여름이 지나갔다." 섀클턴은 이렇게 적었다. "여름이 너무 짧았다…… 물개가 사라졌고 새들도 떠났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먼 수평선에 아직 육지가 보였지만, 지금 우리는 그리로 갈 수가 없다."

2월24일, 섀클턴은 항해 중단을 명령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얼음에 붙박힌 인듀어런스 호는 더 이상 배이기를 포기한 채 대원들의 월동기지가 되었다. 이제 좋건 싫건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섀클턴의 심정은 참담했다. 그는 이번 탐험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 그리고 전쟁중인 유럽, 이번에 실패하면 남극 탐험에 나설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을게 분명했다.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면 탐험을 재개할 수도 있겠지만, 섀클턴은 날이 갈수록 그것도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P38


조타수인 허버트 허드슨은 가장 가까운 송신기지가 있는 포클랜드로부터 무선 신호를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당시의 무선 기술은 그런 ‘기적‘ 을 허락하지 않았다. 탐험대는 육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고,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38

*3부 침몰

단조롭고 지루한 생활이 하루하루 이어졌다. 남극 겨울의 으스스한 고요와 기나긴 어둠이 주는 독특한 심리적 영향을 섀클턴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대원들이 겨울을 날 수 있는 쾌적한 숙소를 만드는 것이었다.

섀클턴은 맥니쉬를 시켜서 갑판 사이에 있는 창고를 선실로 개조했다. 3월 11일에 새로운 숙소로 거처를 옮긴 대원들은 그곳을 ‘리츠(고급 호텔 경영자 시저 리츠의 이름을 딴 것-역주)‘ 라고 불렀다. 대략 1.8mX1.5m 크기의 작은 선실마다 두명이 들어갔으며, 각각의 방에는 ‘빌라봉(물이 새지 않는 곳)‘, ‘앵커리지(은둔처)‘,  ‘세일러스 레스트(선원 휴게실)‘ 와 같은 다양한 이름들이 붙었다.

리츠는 따뜻했으며 아늑하고 편안했다. 하지만 크린, 와일드, 마츤, 워슬리는 리츠보다 훨씬 추운 일반 선원용 선실에 머물렀다. 섀클턴 역시 선장실에 그
대로 남았는데, 그곳은 인듀어런스 호에서 가장 추운 곳이었다. - P50

5월 1일, 태양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앞으로 4개월 동안은 해를 전혀 볼 수 없을 것이다. 대원들의 바깥 활동이 중단되면서 온갖 종류의 오락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새로운놀이를 하나 만들 때면 리츠 전체가 온통 시끌벅적하게 변하곤 했다. 5월말엔 모든 대원들이 겨울의 광기에 굴복하여 머리를 바짝 깎으며 야단법석을 떨었고, 헐리는 그 순간을사진에 담았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남극의 겨울밤은 대원들로 하여금 이 거친 세계로 모험을 떠난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얼어붙은 바다 위로 떠오른 달은 동화처럼 신비로웠고, 밤하늘의 완벽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밝은 빛을 내뿜었다. 가끔은수평선 위로 숨막히게 아름다운 오로라가 나타나기도 했다.

대원들의 일기를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모습을 찾아볼수 있다. 매일매일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일상이 스트레스를 주긴 했지만 특별히 문제가될 만한 마찰이나 불화는 없었다. "서로 관심 분야가 다르고 대원 대부분의 개성이 뚜렷하며 생활방식도 달랐지만, 우리 모두는 이곳에서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라고 오들리는 일기에 적었다.
- P53

섀클턴은 규율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지만 모든 일은 그의 동의를 받아 이루어졌다.
대원들은 그의 말이 ‘명령‘ 이어서라기보다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복종했다. 그는 늘 정했으며, 의복을 비롯한 모든 물품을 선발대나 고급 대원들보다 일반 대원들에게 먼저 배분했다. "일반 대원의 물품이 먼저 떨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라고 워슬리는 일기에 적었다. - P54

"배가 견딜 수 없을 거야, 선장."
작은 선실 안을 왔다갔다하던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아. 몇 개월이 될 수도 있고,
몇 주가 될 수도 있고, 단 며칠이 될 수도 있어.....…."

워슬리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언젠가 이 배를 정말로 버려야 하는 사태가 올지 모른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는 어쩌면 섀클턴보다도 훨씬 더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섀클턴은 조만간 다가올 사태를 이미 알고 있었고, 와일드 역시 같은 생각을하고 있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회의를 끝내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 P58

그날 저녁, 갑판에 있던 몇몇 선원들이 이상한 풍경을 목격했다. 어디선가 황제 펭귄 8 마리가 배를 향해 조용히 다가왔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황제 펭귄들이 함께 몰려다니는 건 매우 드문 경우였다. 잠시 배를 바라보던 펭귄들은 갑자기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섬뜩하고 기분 나쁜 소리로 길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들어본 불길한 통곡 소리였다." 워슬리는 이때의 기분을 이렇게 적었다.
"도저히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마치 펭귄들이 인듀어런스 호를 위해 장송곡을 부르는 것 같았다.
"저 소리 들었나?" 대원들 가운데 가장 미신적인 맥리오드가 낙담한 표정으로 맥클린에게 말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긴 틀렸어." - P75

10월 27일 오후 4시. 온종일 거세게 밀어닥치던 압력이 마침내 최고조에 달했다. 배가 한쪽으로 기우뚱거리며 쓰러지는 순간, 거대한 얼음이 키와 선미재를 맹수처럼 난폭하게 찢어버렸다. 갑판이 부서져 나가고 용골이 쪼개졌다. 바닷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왔고, 마침내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배가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 P75

오후 5시, 섀클턴은 배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개들을 대피시키고 모든 물품들을 얼음 위로 내렸다. 갑판 위에서 있던 섀클턴은 떨어져 나간 엔진이 바닥에 구르는 것을 기관실 위창을 통해 말없이 지켜보았다.

"도저히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섀클턴은 비통한 마음으로 기록했다. "뱃사람에게 배는 바다에 떠있는 집 이상의 의미가 있다・・・・・・ 비명을 지르고 부서지고 온 몸에 지독한상처를 입으면서, 인듀어런스 호는 천천히 삶을 포기하고 있었다."

헐리는 이미 물에 잠긴 리츠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고,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배에서 내렸다. 온갖소리들로 뒤범벅이 된 아수라장 속에서도 휴게실에 걸린 시계는 여전히 똑딱거리고 있었다. - P76

섀클턴은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렸다. 그는 인듀어런스 호의 푸른 함기를 높이 들어올렸고, 얼음 위의 대원들은 다들 그 깃발을 향해 경의를 표했다. 인듀어런스 호의 붉은 비상등이 마지막 인사처럼 조용히 깜박거렸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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