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문장>

오랜 시간,*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틈조차 없었다. 그러다 삼십여 분이 지나면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에 잠이 깨곤 했다. 그러면 나는 여전히 손에 들고 있다고 생각한 책을 내려놓으려 하고 촛불을 끄려고 했다.
나는 잠을 자면서도 방금 읽은 책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약간 특이한 형태로 나타났다. 

*오랜시간 불면에 시달리며 잃어버렸던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는 것, 바로 이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
(역주)


~~첫 문장부터 역주가 붙는다.
아이고ㅠㅠ
하긴 역주가 없으면 읽어나가는데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내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날이 올거라곤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그 방대한 양에 질리고 이렇게 시작부터 역주가 줄줄이 따라오는 책은 읽으면서도 이해가 쉽지 않을 거란걸 생각하기 때문인데...책을 펼치는 순간 또 작가의 생각이랄지 사상이랄지가 주루룩 이어지면... 여기부터 읽을까 말까 고민하며 고비를 넘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음사에서 이번에 완간된 13권 세트의 장정은 읽기 욕구를 마구 표출하도록 유혹?한다. 넘 이쁘잖아요~~
소장욕구도 뿜뿜~~~!
사실 책을 읽어보기로 하자 도전을 마음먹게된 계기는 따로 있는데, 바로 이 책을 먼저 읽고 계셨던 이웃 친구님들의 쉽게 쓴? 리뷰를 여러편 보았기 때문이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책을 보고 마음에 와닿는 리뷰를 읽다보니, 이 방대한 책을 보고 내가 모든 내용을 기억하는건 사실상 불가능하니 나에게 와닿는 내용만 기록으로 남기며 읽어나가면 되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고.
그래서 소심하게 일단 1 권을 먼저 질러버렸다.
오늘부터 대장정이 시작된 느낌!
끝까지 가보자.


날이 너무 추워 집에 있을까 하다가,
집 근처 카페에 나가보기로 했다. 카페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며 그 곳에서 이 책을 읽고 있을 나를 떠올려본다.


작년에 거의 35 년을 살아왔던 아파트를 탈출하고 이사온 우리집... 이름하여 전원주택! 근데 겨울은... 넘 춥다!
난방비, 전기요금(태양열 발전도 함에도 불구하고) 정말 장난 아니게 많~~이 나온다.
차라리 커피값 쓰고 나가는 것이 낫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이르다.
카페도 따뜻하게 데워질 시간이 필요하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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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 -‘다하다‘-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
겠다ㅡ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
다. - P19

가끔 내 집에 묵으러 오는 아들들에게 그
사람과의 관계를 감추지 않았다. 그와의
 관계를 수월하게 유지하기 위해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아들들에게도 일러두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집에 와도 되는지 알기 위해 미리 전화를 걸어주었고,
A가 온다는 연락이 있으면 집에 있다가도 서둘러 돌아갔다. 이렇게 주변을 정리해두었기 때문에 최소한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어렸을 적에 불장난 같은 연애사건을 부모에게 숨겼듯이 아이들에게도 이번 일을 비밀로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물론 아이들에게 판단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부모와 자식은 육체적으로 너무도 가까우면서도 완벽하게 금지되어 있어서, 서로의 성적 본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무척 불편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엄마의 알 수 없는 침묵과 멍한 시선 속에 드러나는 육체적 욕망을 자연스럽게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은 그런 순간에 빠져 있는 엄마를 늙은 수고양이를 따라다니는 발정난 암고양이쯤으로 생각할 뿐이다."


*<마리 끌레르> 지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젊은이들은 이혼했거나 별거 중인 어머니가 연애를 하는 것에 대해 가차없이
비난하고 있다. 한 소녀는 원망에 가득찬
말투로 "엄마의 애인은 엄마가 허황된 꿈만 꾸게 만들어요." 라고 주장했다. 하지
만 외로운 엄마에게 그보다 더 위안이 되는
일이 있을까?(원주)

- P22

그 사람과 사귀는 동안에는 클래식 음악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가요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갖지 않았을 감상적인 곡조와 가사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런 노래들은 솔직하고 거리감 없이 열정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말해주었다. 실비 바르탕이 노래한 <사람아, 그건 운명이야>를 들으면서 사랑의 열정은 나만이 겪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대중가요는 그 당시 내 생활의 일부였고, 내가 사는 방식을 정당화시켜주었다.


*단순한 열정에 빠진 문학교수는 예전처럼 바흐를 듣거나 사르트르를 읽지
않고 유행가와 영화에 공감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다. 부르디외의 견해에 따른다면 문화소외계층이 도무지 진입할 수 없는 취향영역이 음악이다. 다시 말해
신분상승과 더불어 취미, 의상, 입맛 등이 바뀌지만 음악에 대한 감수성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작가는 전남편
의 권유로 가까스로 바흐를 듣게 되었지만
연인에게 버림받자 <마태수난곡>보다는 실비 바르탕의 노래에 절감하게 된다.
---(옮긴이의 말 ) 중에서

~~~난 개인적으로 미술이 더 그렇던데...

- P23

그 사람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은 내게 많은 제약을 강요했다.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보낼 수도 없고, 선물을 할 수도 없었다.
그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사람이 한가할 때나 겨우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별로 불평하지 않았다. - P31

그 사람의 전화만 기다리며 고통을 겪는 일이 너무 끔찍해서그와 헤어지기를 원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사람과 헤어지는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아무것도기대하지 않으며 사는 나날들이 되풀이되겠지. 나는 결국 어떤대가를 치르더라도, 그사람에게 다른 여자, 아니 여러 여자가있다고 하더라도(그의 곁에 있는 여자가 한 명일 경우 내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 사람과의 만남을 계속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는 걸 예감하면서도, 지금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생각
했다.
- P39

그 사람은 6개월 전 프랑스를 떠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새벽 두시면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없었다. 온몸이 아팠다.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고통은 도처에 있었다. 차라리방에 강도라도 들어와 나를죽여주었으면 싶었다. 낮 동안에는 버려졌다는 상실감에 사로잡혀 하는 일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무슨 일이든 하려고 노력했다(상실감에 사로잡힌다는 말은 내게우울증에 빠지거나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 P45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A가 떠난 지 두달쯤지난 후부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A와의 관계에 관련된 것들은 무엇이든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 P52

어느덧 4월이다. 이제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곧바로A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한다거나 영화를본다거나 외식을 하는 등 ‘일상의 작은 기쁨을 누려보겠다는생각에도 거부감을 덜 느끼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열정의 시간을 살고 있다(잠에서 깨어나도 더이상 A 생각을 하지않는다고 공언하게 될 언젠가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사람이 예전처럼 그렇게 내 일상을 집요하게 차지하고 있지는않다. - P57

전쟁이 터지고 첫번째 맞는 일요일 저녁, 전화벨이 울렸다.
A의 목소리였다. 잠시 동안 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나는 울먹이며 그 사람의 이름만 되풀이해 불렀다. 그 사람도 "나야, 나라고 하는 말만 천천히 반복했다. 그는 당장 나를 만나고 싶다며택시를 타고 오겠다고 했다. 그 사람이 도착하기 전까지 30분 정도
의 여유가 있었다. - P63

그 사람은 "당신, 나에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그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 P66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
나 긴 드례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
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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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올여름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


*아니 에르노 처음 읽는 책
다른 책으로 이어지길 기대하며 읽기 시작해본다.
김환기 화백 전시회 가는 차 안에서 읽으려
한다. 중편 정도 분량이라 금방 읽을 수 있을 듯!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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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15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완독 하셨을 것 같습니다

전시화 가는 자동차 이동중에 독서는
눈, 시력에 좋지 않은뎅 ^^

은하수 2022-12-15 09:32   좋아요 1 | URL
네^^ 완독했어요
눈에는 확실히 안좋아요 점점 떨어지는 시력 때문에 아주 슬프죠 ㅠㅠ
너무 짧아서 아껴 읽으려고 부득불 집 올때까지 참았어요^^
 


<첫문장>
올여름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 (P7)


*아니 에르노 처음 읽는 책
다음책으로 이어질수 있길 기대하며 읽기 시작.
이따 화가 김환기 전시회 보러 서울가며 읽을 생각이다.
금방 읽을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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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끄 부인은 그 다섯통의 편지에 호감을 가진 것 같았다. 내게서편지를 빌려간(그렇게 정중한 작은 여인에 대해서는 정중한 단어를써줘야 한다) 후 어느날, 생각에 잠겨 차분하게 나를 뜯어보고 있는 그녀의 눈길을 포착했다. 약간 혼란스러워하지만 악의는 없는눈길이었다. 수업과 수업 사이의 짧은 휴식시간에 학생들이 약 십오분의 휴식을 즐기러 운동장으로 나간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와 나 단둘이 1반 교실에 남아 있었다. 눈길이 마주치자 그녀의마음속에 있던 말의 일부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영국인들에겐 굉장히 놀라운 면이 있다니까." 그녀가 말했다.
"어떤 면에서요, 부인?"
그녀는 "어떤 면"이라는 말을 영어로 되풀이하더니 작게 웃음을터뜨렸다.
"어떤 면‘이라고 물었는데, 글쎄, 잘 모르겠지만 영국인들은 우정이나 사랑, 그 모든 것에 대해 나름의 견해가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적어도 그 견해를 감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일어나 다부진 망아지 같은 모습으로 나가면서 그녀가 덧붙인 말이었다.


*루시가 아무리 호의적으로 표현해놨어도-물론 베끄부인의 행동을 살짝 비꼬고 있지만, 난 아무래도 싫은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너그러운 영국인의 미덕이랄까... ^^
- P72

"그러니 내가 바라는 것은,"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앞으로는제발 내 편지를 가만히 내버려둬달라는 거예요."

아아! 이제는 그녀가 읽은 그런 편지가 더이상 오지 않으리라는사실이 다시 떠오르자 무언가가 눈 속으로 밀려들어와 눈앞이 흐려지고, 교실과 정원과 겨울의 빛나는 태양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나는 마지막 편지를 읽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근사한 강의 강둑에머물렀고, 그럴 때면 강물이 튀어 내 입술에 활기가 돌게도 해주었는데, 이제 그 강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풍부한 물줄기는 내 작은 오두막과 황량하게 메마른 모래벌판을 남겨둔 채저 멀리 흘러가고 있었다. 그 변화는 올바르고 지당하고 자연스러워 한마디 항의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라인강을, 나일강을 사랑했다. 나의 갠지스강을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강들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 신기루처럼 사라진게 슬펐다. 나는 금욕적이기는 했지만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눈물이 흘러내려 손과 책상을 적셨다. 나는 잠깐 엉엉 울었다.
- P73

그러나 곧 자신을 타일렀다. "지금 애도하고 있는 이 ‘희망‘은 고통받았고, 또 나를 몹시 고통스럽게 했어. 사라질 시간이 될 때까지죽지 않았지. 그렇게 미적대며 내게 고통을 주었으니 이 ‘희망‘의죽음을 환영해야만 해."
나는 ‘희망‘의 죽음을 환영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사실은 긴 고통으로 인해 인내가 습관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마침내 나는 죽은
‘희망‘의 눈을 아주 침착하게 감기고 얼굴을 덮어준 뒤 사지를 가지런히 매만져주었다.
그러나 그 편지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두어야만 했다. 그런 상실을 체험한 사람들은 황급히 기념물들을 모아 멀찌감치 치우고 자물쇠로 채워놓기 마련
이다. 회한이 날카롭게 되살아나 매순간 가
슴을 찌른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 P74

어느 한가한 휴일 오후(그 목요일), 마침내 처분하려고 보물을둔 곳에 갔을 때 나는 다시 누군가가 편지를 만진 것을 알고서 이번에는 몹시 불쾌해졌다. 사실 편지 뭉치는 그대로 있었지만, 편지를 묶은 리본이 풀렸다가 다시 묶여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서랍을 열어보았다는 다른 표시들도 있었다.
이건 좀 너무한다 싶었다. 베끄 부인은 신중한 사람으로, 이세상 누구보다 머리가 좋고 판단이 명확할 뿐 아니라 사리분별이 뛰어났다. 그녀가 내 상자 속의 내용물을 아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견딜 만했다. 몰래 남의 뒤를 캐긴 했지만, 그녀는 사물을올바르게 판단했고, 왜곡하지 않고 이해했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정보를 감히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내게는 더없이 신성한 편지들을 자신의 친구와 함께 읽고 즐거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럴 가능성은 높아 보였고, 그녀가 비밀을 털어놓은 상대가 누군지도 짐작이 갔다.
어제 저녁 그녀의 친척인 뽈 에마뉘엘 선생이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는 꺼내지 않을 문제들을 그와 상의하곤 했다. 
- P74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이상한 집의 어느 구석에 숨겨두어야 안전하고 비밀이 보장될까? 어디에 두어야열쇠 자물쇠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P75

이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나는 기숙사 창가에 앉아 있었다.
맑고 추운 오후였다. 이미 지고 있는 겨울 해가 ‘금지된 오솔길‘의관목 위에서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배나무 고목, 수녀 유령의 전설이 서린 배나무가 헐벗은 채 드리아드처럼 뼈대를 길게드러내고서, 회색빛의 여윈 모습으로 서 있었다. 고독한 사람에게종종 떠오르는 기상천외한 생각이 한가지 떠올랐다. 나는 보닛을쓰고 외투를 입고 털목도리를 두르고는 시내로 나갔다. - P75

내가 원하는 것은 납땜을 할 수 있는 철제상자나 마개를 닫아밀봉할 수 있는 두꺼운 유리병이었다. 나는 잡동사니들 중에서 그런유리병을 발견하고는 그걸 샀다.
그러고는 편지들을 조그맣게 말아 기름 먹인 비단으로 싼 다음노끈으로 묶어서 병 안에 넣고 늙은 유대인 고물상인에게 마개를닫고 공기가 새지 않도록 밀봉해달라고 했다. 내 지시를 따르면서도 그는 서리처럼 하얀 속눈썹 아래로 의심스럽다는 듯 힐끔힐끔나를 보았다. 뭔가 사악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 모든 일을 지켜보면서 내 마음속에는 쓸쓸한 느낌이 기쁨이 아닌 슬프고 외로운 만족감이 스며들었다. 
- P76

일곱시에 달이 떴다. 일곱시 반이 되자 학생과 선생들은 공부가한창이었고, 베끄 부인은 어머니와 자식들과 함께 식당에 있었고통학생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로진도 복도를 떠나 사방이 고요해졌다. 나는 숄을 걸치고 밀봉된 병을 들고 몰래 1반 교실을 거쳐 밖으로 빠져나가 정자를 지나 ‘금지된 오솔길‘로 갔다.
배나무 므두셀라는 오솔길 끝, 내가 늘 앉던 자리 근처에 있었다. 그 회색빛 나무는 야트막한 덤불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 모두셀라는 고목이지만 여전히 단단했다. 주위의 무성한 담쟁이와 덩굴에 약간 가려져 있었지만 뿌리 근처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거기에 내 보물을 감출 생각이었다. 그러나 보물만 감출 생각은 아니고 슬픔도 함께 묻을 작정이었
다. 얼마 전 날 울린 슬픔에 수의를 입혀 매
장할 생각이었다.


*정말 대단한 의지력의 소유자다!

- P76

만일 인생이 전쟁이라면 나는 혼자 그 전쟁을 치러야 할 운명인것처럼 보였다. 겨울을 지낸 숙소, 식량과 사료가 다 떨어지고 없는막사를 이제 어떻게 부수고 떠날까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 그런 변화를 위해서는 운명과 다시 한번 전면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나는결전을 벌일 각오는 있었다. 신은 너무 가난해서 잃을 것이 없는나를 승자로 점지하실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떤 방법이 있을까? 

*역시 예상대로 여길 떠날 생각이구나!
너무 가련해서 한숨만 나오네...

- P78

"포세뜨가에서 나와서 우리와 함께 살아요. 베끄 부인보다 아빠가 월급을 훨씬 더 많이 줄 거예요."
홈 씨는 내가 딸의 말상대가 되면 훌륭한 보수, 즉 현재 내 월급의 세배를 주마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지금보다 더 가난하고 더돈이 없고 앞으로 더 어렵게 살 형편이더라도 거절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직업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선생이 될 수 있고또 개인 지도를 할 수도 있지만, 가정교사가 되거나 말상대가 되는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어떤 훌륭한 집안의 가정교사가 되느니 차라리 하녀가 되어 질긴 장갑을 사서 끼고 침실과 층계를 쓸고난로와 자물쇠를 청소하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그 편이 더 마음편하고 독립적이었다. 말상대가 되느니 차라리 셔츠를 만들다 굶어 죽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나는 어떤 빛나는 숙녀의 그림자, 바송삐에르 양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루시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난 과연 어떻게 했을까 하고.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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