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누군가가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놀라서 돌아보자 누군가가 고개를 숙이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충격이라도 받은 듯 찡그린 표정이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소?" 목소리가 물었다.
"즐기고 있는 중인데요."
"즐기고 있는 중이라고! 실례지만 뭘 즐기고 있소? 어쨌든 내가일으켜주겠소. 내 팔을 잡으시오. 저쪽으로 갑시다."
"나는 정확하게 그가 하라는 대로 했다. 로마에서 돌아온 뽈 에마뉘엘 선생(그렇다, 그였다)은 여행이라는 새로운 수훈으로 이마를월계관으로 장식한 사람답게 전보다 더 관대해진 것 같았다. - P315

"일행에게 데려다주겠소." 방을 가로질러 가면서 그가 말했다.
"일행이 없는데요."
"혼자는 아니잖소?"
"혼자예요. 선생님."
"여기 올 때 아무도 같이 오지 않았단 말이오?"
"아니요, 선생님. 존 선생님께서 데려다주셨어요."
"물론, 존 선생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왔겠죠?"
"아니요, 존 선생님하고만 왔는데요."
"그러면 그 사람이 저 그림을 보라고 했단 말이오?"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찾아낸 거예요."
그 순간 뽈 선생은 머리를 까마귀 털처럼 짧게 쳤든지 아니면 머리털을 뻣뻣하게 곤두세운 것 같았다. 이제 그를 간파한
나는 침착한 태도로 그를 약올리는 게 약
간은 재미있어졌다. - P316


"섬사람은 정말 대담하다니까!" 그가 소리를 질렀다. "영국 여자들은 정말 이상해!"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선생님?"
"문제냐고! 어떻게 젊은 여자가 감히 남자처럼 침착하고 냉정하게 앉아서 저 그림을 볼 수 있단 말이오?"
"흉한 그림이긴 하지만 왜 보면 안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군요."
"좋소! 좋아!" 더이상 말하지 마시오. 그렇지만 혼자 여기 있어선 안되오."
"하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같이 온 사람, 그러니까 일행이 없을 때는 어떡하죠? 그럴 때는 혼자 있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든 그게무슨 차이가 있어요? 누구도 절 간섭하지 않는데요."
"조용히 하고 저기 앉으시오!" 그는 유난히 어두운 구석에 의자를 쾅 하고 놓으며 말했다. 아주 처량한 일련의 ‘그림들‘ 앞이었다.
"하지만 선생님...….."
"하지만 선생, 앉아서 꼼짝 마시오. 내 말 알아듣겠소? 당신을 찾으러 사람이 올 때까지, 아니면 내가 허락할 때까지 꼼짝 말고 여기에 있어야 하오."


*아놔...! 열받네 진짜
대체 자기가 뭔데 있으라마라 허락을 하네마네... 조용히 하라는 둥
저는 의자를 쾅 놓고 사람을 묻지도 않고 팔을 끌고가서 엉뚱한 그림을 보라마라
존 선생이 데려다줬다는데 대체 자기가 뭐라고 저러는지... 선생이라는 작자가..
근데 한없이 관대하게 대하려 애쓰는 루시도 이해가 안되고 열불이 나는건 마찬가지! 그 시대에선 여자 혼자 에스코트하는 남자 없이 외출하는 것이 용납이 안됐다해도 그럼 뽈 선생 자긴 루시와 무슨 관계인데 저러는지 원!
인신공격성 발언을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는 젤 기분나쁜 캐릭터다!
- P316


다시 교실로 들어가보니 뽈 선생이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떤 학생이 잘 들리지 않게 우물우물 대답해서 기분이 상한 것이었다. 그 학생과 다른 학생들은 울고있었으며, 그는 얼굴이 거의 납빛이 되어 교단에서 소리를 지르고있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나타나자 그는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이 학생들의 선생이란 말이죠? 당신이 숙녀에게 걸맞은 행동을 가르친다고 공언할 수 있소? 이 학생들에게,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짓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국어를 목구멍 속에서 억누르고 이 사이로 잘게 썰어 짓이겨도 된다고 부추겼소? 이게 겸손이오? 난 그 정도 바보는 아니오. 이건 겸손을 가장한 사악한 사이비감정, 악의 후손이나 조상이란 말이오. 이렇게 점잖은 체하고 거드름 피우고, 이렇게 가식적이고 역겹게 고집을 부리는 1반 학생들에게 굴복하느니, 그들을 모두 쓸어담아 숙녀인 척하는 여선생에게맡기고 난 3반의 어린 학생들에게 ABC나 가르치겠소."
이런 말에 내가 뭐라고 대꾸할 수 있었겠는가?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가 내 침묵을 눈감아주기만을 바랐다. 폭풍이 다시 몰아치기 시작했다.
- P376


"내 질문에 아무 대답도 안 하시겠다? 우쭐대는 책꽂이, 초록모직 천을 깐 책상,
 쓰레기 같은 화분받침, 액자와 지도 같은 잡동사니와 외국인 보조 선생이 있는 이 거만한 1반 교실에서는 그렇게들생각하는 모양인데, 세상에! 이곳에서는 문학 선생 말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멋진 것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로군! 이건 틀림없이 ‘대영제국‘에서 직수입한 새로운 사상인 것 같군. 섬나라의 무례한 교만의 분위기가 나는 걸 보니 그래."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른 선생이 야단을 칠 때는 눈물 한방울흘리지 않던 1반 학생들이 에마뉘엘 선생의 무절제한 격노 앞에서는 모두 눈사람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용기를 내 앉아서 바느질을 시작했다.

*아주 명예훼손으로 고소감이네!
읽다 짜증폭발... - P377


교실을 떠나면서 그는 다시 한번 내 책상 앞에 멈추어 섰다.
"그런데 당신 편지는?" 그가 물었다. 이번에는 그다지 사나운 어조가 아니었다. 이
"아직 읽지 않았어요, 선생님."
"아! 너무 좋아서 당장 읽기 아깝다는 말씀이시군. 내가 어렸을때 아주 잘 익은 복숭아를 아꼈던 것처럼 그 편지를 아끼는 거요?"
그의 추측은 거의 정확했고, 내 뺨이 후끈 달아오르는 바람에 진실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즐거운 순간을 갖자고 자기 자신과 약속했구려." 그가 말했다.
"편지를 읽는 것 말이오. 혼자 있을 때 편지를 뜯어보겠군. 그렇지않소? 아! 웃음으로 답하고 있군. 좋소! 너무 못되게 굴어서는 안되겠지 ‘젊음도 한때니까. ‘"


*이러니까 진짜 정신병자 같네!
대답하지도 말아야 해..
근데 왠지 뽈 선생과..?

- P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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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개 비어 있는 그 큰 방에 사람이 있으면 보이기도 전에 느껴졌다. 움직이는 소리나 숨소리나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서가 아니었다. 완전히 ‘비어 있지‘ 않고 ‘고독‘이 감돌지 않아서였다. ‘천사의 침대"라는 시적인 이름이 붙은 하얀 침대들은 한눈에 보이도록놓여 있었다. 아무도 자고 있지 않아 모두 비어 있었다. 조심스럽게서랍 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한쪽으로 살짝 비켜서자 늘어진커튼이 시야를 가리지 않아 눈앞이 훤히 보였다. 이제 내 침대와화장대와 그 위에 있는 자물쇠 달린 반짇고리와 잠가둔 서랍장이보였다.

이런, 단정한 숄을 걸치고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나이트캡을 쓴자그마하고 통통하고 어머니 같은 풍채의 누군가가 화장대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보이기로는 친절하게도 ‘소지품"을‘정리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반짇고리의 뚜껑과 맨 윗서랍이 열렸다. 그 아래 서랍들도 공평하게 차례차례 열려 있었다. 그 속의 모든 물건들은 꺼내져 펼쳐졌고, 작은 상자마다 모조리 뚜껑이 열리고 종이 한장 한장까지 공개되었다. 그 솜씨는 가히 아름답다고 할만큼 능란했고, 조사를 할 때 보이는 조심성은 가히 모범적이라 할만했다. 베끄 부인은 정말이지 별처럼 "서두르지도 쉬지도 않고 "
일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은밀히 기쁨을 느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내가 남자였다면 베끄 부인은 내 눈에 어린 호감을 보았을 것이다. 그녀는 하는 일마다 아주 솜씨 좋게, 말끔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해냈다. - P182


어떤 사람들의 동작은 서투르고 부정확해짜증이 나지만 그녀의 동작은 깔끔해서 만족스러웠다. 한마디로 나는 매료된 채 서 있었다. 그러나 이 마법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니까, 뒤로 물러나야 했다. 물건을 뒤지던 그녀가 뒤돌아 나를 발견하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그녀와 나는 이 갑작스러운 충돌로 즉시 서로에 대해 완벽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상투적인 예의는 사라지고 가면이 벗겨졌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눈을, 그녀는 내 눈을 들여다보아야 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시는 함께 일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 재앙을 일으켜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는 화가 나지도않았을뿐더러 그녀를 떠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만큼 가벼운 멍에를 씌우고 끌기 쉬운 마차를 끌게 하는 고용주도 없었다.
그녀의 원칙을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근본적으로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의 체제가 내게 해를 끼친 것도 없었다. 그녀는 만족할때까지 그 체제로 날 요리하겠지만 나올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화가 나지도 않았을뿐더러‘ 를 읽으며 내가 너무 화가 났는데,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엾은 루시, 그러나 의연한 루시. - P183

교실에 도착해 얼마나 웃었던가. 정원에서 그녀가 존 선생을 본게 확실하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으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의심 많은 사람이 자신의 상상으로 꾸며낸 이야기에 오도되어 벌이는 소동은 정말이지 우스웠다. 그러나 웃음이 사라지자 일종의 분노가 밀려왔고, 그것은 씁쓸함으로 이어졌다. 돌에 맞인 므리바의 물이 분출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날 저녁 약 한시간가량 나를 사로잡았던 내면의 동요만큼 이상하고도 모순된 감정은 처음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쓰라림과 웃음, 불같은 분노와 슬픔이 공존했다.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베끄부인이 나를 불신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녀의 불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복잡하고 불안한 생각이 밀려와 마음의 평화가 깨졌다. 하지만 결국 그런 동요는 가라앉
았고 다음 날 나는 다시 루시 스노우로 되
돌아왔다.

*루시의 쓰라린 분노와 씁쓸함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어 글을 읽으며 함께 울었다.
아아...루시 스노우...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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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딸을 키우다보면 언젠가 세상에 혼자 남겨질지도 모르는 아이에대한 걱정이 찾아올 때가 있다. 안쓰러움과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은짠이가 지금 아이의 모습 그대로 세상에 던져진다고 상상하기 때문일것이다. 그럴 때마다 기차 안에서 만난 어떤 엄마가 딸에게 해주던 말을떠올린다.

"터널이 무섭지. 하지만 그거 알아? 무서워도 용감해져야 해. 그리고그것도 알아? 터널을 다 지나가면 반드시 다시 빛이 나와."


*이러한 생각은 ... 흠..
자식이 여럿이어도 마찬가지일듯하다.
용감하게 잘 헤쳐나가길 바라며, 늘 지켜보고 있다!
이러면 엄마가 더 무서워! 할까봐 안보는 척해본다.
- P145

돌이켜보면 파콘의 가족들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 며느리에게좋은 곳을 보여주고 맛있는 것을 먹여주기 위해 여기저기 많이도돌아다녔다. 한국으로 돌아와 태국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똠얌꿍과 쏨땀, 그리고 파타야와 닉쿤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은 태국을 친근하게 느끼면서도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몇 가지관광지로서의 이미지와 생활 다큐 속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 외엔 사실상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기에, 내가 가족의 일원으로 태국을 방문했던이야기를 들려주면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했다.


*상상초월 더위로 고생스런 기억이 많이 남은 방콕과 파타야 여행~~~
저렴하게 실컷 먹을수 있는 과일과 거부감없이 맛있었던 음식.... 그리고 뾰족번쩍했던 사원들...
지나고보니 그 기억들도 그립고 소중하다. 엄마 칠순여행이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있었다. - P259

<내 이름은 깐야짠>

‘짠이‘라는 애칭은 ‘예쁜 달‘이라는 뜻의 태국 이름 ‘깐야짠‘에서 따온것으로 파콘의 할머니가 지어주셨다. 파콘이 한국에서 외국인 사위이고내가 태국에서 외국인 며느리인 것과 달리, 짠이는 양쪽 나라에서 모두
‘우리 손주‘였다. - P283

국제결혼의 시작은 도전이고 사랑이었지만, 이렇게 긴 시간 인생의행로가 바뀔 줄은 몰랐다. 어떤 상황들은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에 딸려오는 상황들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결혼을 앞두고 타지에서 살면 겪게 될지 모르는 어려움과 외로움이엄습해, 문득 잠에서 벌떡 깨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 직전 쿤퍼가파콘을 통해 내게 전해준 메시지는 내 마음을 온기로 채워주었다.

"우리가 유진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사랑하듯이유진의 가족도 파콘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 P288

당분간 나는 한국에서 엄마 아빠의 시간들을 기록하며 함께 지낼것이다. 함께 지내는 동안 많이 추억하고 기록하고 싶다. 그리고 또언젠가는 태국에서 지내며 태국 가족들과의 시간을 이야기할 날이올 것이다. 만남과 이별은 늘 나를 찾아왔고, 살아 있는 한 이야기는계속되었으므로,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계속 응원할게요 ~~~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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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예로 들어보자. 아가시는 이 순간 헛간 교실 바로 밖에서 헤엄치고 있는 모든 물고기, 그중 한 마리를 바다에서 건져올려 껍질을 벗겨보면 신이 보낸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발견하게될 거라고 했다. "인간의 육체적 본성이..… 어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 인간이 얼마나 낮은 곳까지 내려갈 수 있고 도덕적으로 얼마나 졸렬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가시가 충격적이라고 느낄 만큼 인간과 유사한 어류의 골격 구조(작은 머리, 척추골, 갈비뼈를 닮은 돌출 가시)는 ‘인간‘에 대한 경고였다. 어류는 인간이 자신의 저열한 충동들에 저항하지 못하면 어디까지 미
끄러져 내려갈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비늘 덮인 존재였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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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것>

한때 인생이 시트콤 같다고 생각한 적 있어. 스스로 떠올린 생각은 아니고 내가 겪었던 일을 하소연하듯 몇 차례 들려주었더니친구가 네 인생은 꼭 시트콤 같네, 라고 말했던 것이다. 네가 경험했다는 일들,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경우도 더러 있는데 솔직히 좀재밌고 기막혀. 전반적으로 기구한 느낌? 그리고 왠지 끝맛이 씁쓸해 뭔가를 영영 잃어버리거나 망한 것 같은 엔딩이라서.
내가 한 이야기들이 그렇다고?
응, 그리고 듣다보니 네가 상황을 그렇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해.
상황을 그렇게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 P213

이후로 나는 억울하거나 원통한 처지에 놓일 때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짜고짜 우는소리를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어. 그러면 친구는 킥킥 웃거나 아이고, 어쩜 좋니 하는 탄식을 번갈아 내뱉으며 귀기울여주었다.
순전히 듣기만 한 것은 아니고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널거나 쪼그려앉아 발톱을 깎거나 어쨌든 자기 할일을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었어. 기나긴 넋두리 끝에 내가 시무룩하게 가라앉으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제 좀 후련해? 하고 물었고 내가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면 그래, 다 지나갈 거야, 그런 게 인생이야, 하고 말했다.
그런 게 인생이야?
그런 게 인생이야.
그렇게 말해주던 친구는 이제 내 곁에 없다. 서울이 아닌 이국의 도시로 멀리 떠났다거나 세상을 등진 것은 아니고 어느 날부터인가 내 전화는 물론이고 메시지에도 일절 응답을 하지 않았지. - P214

삼년전 나는 수형과 친구에게 거의 동시에 절교를 당했다고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이 아주 가까워졌고, 내게거리를 두기로 어떤 협약 같은 걸 맺었으리라 여겼다. 망할 놈들. - P217

 한번은 삼일교 근처 바위에 나란히 앉아 쉴 때였다. 그날 내가 반년 넘게 붙들고 있던 장편소설을아무래도 포기해야겠다며 울먹이자 수형은 내 어깨를 감싸안고등을 토닥여주었다.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기도, 그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문지르기도 했지. 그렇게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둘이서 일렁이는 물결만 바라다보던 날들. 그러다가 나는 이따금수형이 친구라고 언급하는 이가 내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는사실을 알게 되었다.
와, 세상 좁네.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 P221

그런 상태로 삼 년이나 흐른 지금, 둘에게 실제로 벌어진 일을들었을 때 나는 내심 당황했다. 대체 친구는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끊어냈던 것일까. 곰곰이 되짚어봐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수형에게도 말했다시피 친구와 나의 우정은 알고 지낸 세월에 비해 그리 깊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고등학생 시절 내내 같은 무리에 속해 있었으나 거의 성소수자 동아리 같은 모임이었다.
가장 교류가 적은 축에 속했다. 내게 친구는 언제나 친한 친구의친구일 뿐이었고 친구에게 나 역시도 그랬다.  - P223

그렇지만 수형이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아, 이걸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친구는 재작년 여름에 프랑스에서 불의의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스크립터 겸 조감독으로 참여한 영화 촬영현장에서였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친구는 스태프들의 만류에도불구하고 산책을 나갔다가 발을 헛디뎌 에트르타의 절벽 아래로굴러떨어졌다. 날이갠뒤 해양경찰대가 몇날 며칠을 수색했으나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고.빈관의 덮개를 어루만지며 친구의 어머니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고 한다. 가까운 친인척들만 참석한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고. 나는 이런 소식을 장례가 끝나고 반년이 지나서야 듣게 되었다.
이걸 말해야 할까.
왠지 모르게 망설여졌다. 나만 입을 다물면 수형이 친구의 죽음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으니까.  - P225

또 시작이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생각했다. 눈을 반짝이며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수형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형은 예전부터 자신이 친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내게 이런 식으로 털어놓곤 했다. 열렬히 고백하다시피 했지. 누가물어보기나 했어? 그동안 잊고 지냈는데 너도 참 한결같구나…………그러면서 나는 수형에게 친구의 죽음을 털어놓기가 이제 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당초 말해줄 작정도 아니었지만 그것이자의가 아니라 타의의 영역으로 넘어갔다는 기분에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친구에 대한 수형의 애정이 변함없다는 것을-혹은 더 깊어졌는
지도 모른다는 것을-알게 된 지금, 내가 친
구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건 그저 수형을 난
데없이 상처입히는 일, 충격과 비탄에 빠뜨
리는 일, 울부짖게 만드는 일, 그 외에 어떤
의미도 아닌 듯했으니까. - P235

모르는 게 약이야, 수형아.
속뜻은 달라졌지만 나는 친구의 죽음을 함구하기로 다시 한번마음먹었다. 그러면서 수형이 들려준 이야기 중 친구가 시지프관해 한 말을 떠올렸다. ‘형벌 속에서 영원토록 사느니 벼랑에 몸을 던지겠다‘는 말. 폭우 속에서 에트르타의 절벽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친구의 모습이 절로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혹시사고가 아닐 수도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친구가 자살을 할 만한결정적 이유를 나는 알지 못했다.  - P236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면서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앞만 보며 걸었고 수형도 그리했으리라 여겼다. 헤어지기 직전에우리는 손을 흔들면서 잘 가라고,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그런 말만 했다. - P241

 전부 듣고 나서는 후련하냐고 묻거나 그런 게 인생이니뭐니 같은 충고는하지 않았고, 대체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럴 때 친구의 미소는 꼭 이 세상 것이 아닌듯했는데 그래, 이 세상 것은 아니지. 아니고말고, 하면서 나는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내가 이렇게 보고 있는데, 느낄 수 있는데, 나를 위로하는
데, 어찌하여 이 세상 것이 아닌가. 이 세상 것이지.하게 되었다. 갈수록 그리 믿게 되었다. 그러자 수형에게도 친구는 이와 비슷한 존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한 존재가 비단 우리에게만 주어진 은총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END.


*마지막편이어서 그런건지 알수 없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거 같다. 나머지 단편들도 다 좋았다. 퀴어소설이라는 인식을 거의 하지않고 자연스럽게 읽혀서,
그래서 한 편, 한 편 놀라운 작품이었다고 ..
박선우 작가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게 될 것같은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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