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것>
한때 인생이 시트콤 같다고 생각한 적 있어. 스스로 떠올린 생각은 아니고 내가 겪었던 일을 하소연하듯 몇 차례 들려주었더니친구가 네 인생은 꼭 시트콤 같네, 라고 말했던 것이다. 네가 경험했다는 일들,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경우도 더러 있는데 솔직히 좀재밌고 기막혀. 전반적으로 기구한 느낌? 그리고 왠지 끝맛이 씁쓸해 뭔가를 영영 잃어버리거나 망한 것 같은 엔딩이라서. 내가 한 이야기들이 그렇다고? 응, 그리고 듣다보니 네가 상황을 그렇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해. 상황을 그렇게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 P213
이후로 나는 억울하거나 원통한 처지에 놓일 때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짜고짜 우는소리를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어. 그러면 친구는 킥킥 웃거나 아이고, 어쩜 좋니 하는 탄식을 번갈아 내뱉으며 귀기울여주었다. 순전히 듣기만 한 것은 아니고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널거나 쪼그려앉아 발톱을 깎거나 어쨌든 자기 할일을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었어. 기나긴 넋두리 끝에 내가 시무룩하게 가라앉으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제 좀 후련해? 하고 물었고 내가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면 그래, 다 지나갈 거야, 그런 게 인생이야, 하고 말했다. 그런 게 인생이야? 그런 게 인생이야. 그렇게 말해주던 친구는 이제 내 곁에 없다. 서울이 아닌 이국의 도시로 멀리 떠났다거나 세상을 등진 것은 아니고 어느 날부터인가 내 전화는 물론이고 메시지에도 일절 응답을 하지 않았지. - P214
삼년전 나는 수형과 친구에게 거의 동시에 절교를 당했다고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이 아주 가까워졌고, 내게거리를 두기로 어떤 협약 같은 걸 맺었으리라 여겼다. 망할 놈들. - P217
한번은 삼일교 근처 바위에 나란히 앉아 쉴 때였다. 그날 내가 반년 넘게 붙들고 있던 장편소설을아무래도 포기해야겠다며 울먹이자 수형은 내 어깨를 감싸안고등을 토닥여주었다.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기도, 그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문지르기도 했지. 그렇게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둘이서 일렁이는 물결만 바라다보던 날들. 그러다가 나는 이따금수형이 친구라고 언급하는 이가 내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는사실을 알게 되었다. 와, 세상 좁네.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 P221
그런 상태로 삼 년이나 흐른 지금, 둘에게 실제로 벌어진 일을들었을 때 나는 내심 당황했다. 대체 친구는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끊어냈던 것일까. 곰곰이 되짚어봐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수형에게도 말했다시피 친구와 나의 우정은 알고 지낸 세월에 비해 그리 깊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고등학생 시절 내내 같은 무리에 속해 있었으나 거의 성소수자 동아리 같은 모임이었다. 가장 교류가 적은 축에 속했다. 내게 친구는 언제나 친한 친구의친구일 뿐이었고 친구에게 나 역시도 그랬다. - P223
그렇지만 수형이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아, 이걸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친구는 재작년 여름에 프랑스에서 불의의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스크립터 겸 조감독으로 참여한 영화 촬영현장에서였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친구는 스태프들의 만류에도불구하고 산책을 나갔다가 발을 헛디뎌 에트르타의 절벽 아래로굴러떨어졌다. 날이갠뒤 해양경찰대가 몇날 며칠을 수색했으나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고.빈관의 덮개를 어루만지며 친구의 어머니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고 한다. 가까운 친인척들만 참석한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고. 나는 이런 소식을 장례가 끝나고 반년이 지나서야 듣게 되었다. 이걸 말해야 할까. 왠지 모르게 망설여졌다. 나만 입을 다물면 수형이 친구의 죽음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으니까. - P225
또 시작이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생각했다. 눈을 반짝이며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수형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형은 예전부터 자신이 친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내게 이런 식으로 털어놓곤 했다. 열렬히 고백하다시피 했지. 누가물어보기나 했어? 그동안 잊고 지냈는데 너도 참 한결같구나…………그러면서 나는 수형에게 친구의 죽음을 털어놓기가 이제 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당초 말해줄 작정도 아니었지만 그것이자의가 아니라 타의의 영역으로 넘어갔다는 기분에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친구에 대한 수형의 애정이 변함없다는 것을-혹은 더 깊어졌는 지도 모른다는 것을-알게 된 지금, 내가 친 구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건 그저 수형을 난 데없이 상처입히는 일, 충격과 비탄에 빠뜨 리는 일, 울부짖게 만드는 일, 그 외에 어떤 의미도 아닌 듯했으니까. - P235
모르는 게 약이야, 수형아. 속뜻은 달라졌지만 나는 친구의 죽음을 함구하기로 다시 한번마음먹었다. 그러면서 수형이 들려준 이야기 중 친구가 시지프관해 한 말을 떠올렸다. ‘형벌 속에서 영원토록 사느니 벼랑에 몸을 던지겠다‘는 말. 폭우 속에서 에트르타의 절벽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친구의 모습이 절로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혹시사고가 아닐 수도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친구가 자살을 할 만한결정적 이유를 나는 알지 못했다. - P236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면서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앞만 보며 걸었고 수형도 그리했으리라 여겼다. 헤어지기 직전에우리는 손을 흔들면서 잘 가라고,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그런 말만 했다. - P241
전부 듣고 나서는 후련하냐고 묻거나 그런 게 인생이니뭐니 같은 충고는하지 않았고, 대체로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럴 때 친구의 미소는 꼭 이 세상 것이 아닌듯했는데 그래, 이 세상 것은 아니지. 아니고말고, 하면서 나는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내가 이렇게 보고 있는데, 느낄 수 있는데, 나를 위로하는 데, 어찌하여 이 세상 것이 아닌가. 이 세상 것이지.하게 되었다. 갈수록 그리 믿게 되었다. 그러자 수형에게도 친구는 이와 비슷한 존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한 존재가 비단 우리에게만 주어진 은총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END.
*마지막편이어서 그런건지 알수 없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거 같다. 나머지 단편들도 다 좋았다. 퀴어소설이라는 인식을 거의 하지않고 자연스럽게 읽혀서, 그래서 한 편, 한 편 놀라운 작품이었다고 .. 박선우 작가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게 될 것같은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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