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모습:
최근에 윌리엄의 실험실 조교가 윌리엄을 ‘아인슈타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윌리엄은 그걸 정말로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윌리엄이 아인슈타인처럼 생겼다고는 전혀 생각하지않지만, 그 젊은 여자가 말하는 게 뭔지는 알 것 같다. 윌리엄의콧수염은 회색이 섞인 흰색으로 풍성하지만 잘 손질되어 있고,머리칼도 숱이 많고 흰색이다. 커트를 했는데, 일부 머리칼은 삐죽삐죽 뻗쳤다. 그는 키가 크고 옷을 아주 잘 입는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아인슈타인은 묘하게 광적인 인상을 풍기지만 윌리엄은 그렇지 않다. 윌리엄의 얼굴에는 보통 유쾌한 표정이 고집스럽고 폐쇄적으로 떠올라 있지만, 아주 드물게 한 번씩은 고개를뒤로 젖히고 진짜로 껄껄 웃는다. 나는 그런 모습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그의 눈은 갈색이고 한결같이 크다. 모든 사람이 나이를 먹은 뒤에도 큰 눈을 유지하지는 않지만, 윌리엄은 그렇다. - P11

그러다 어느순간 윌리엄이 나를 쳐다보더니 "버튼,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이있어" 하고 말했다. 그가 몸을 잠시 앞으로 숙였다. "요즘 한밤중에 끔찍한 공포를 느껴.
윌리엄이 나를 과거의 애칭으로 부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그가 이 순간 여기 존재한다는 의미인데, 그는 그렇지 않을 때가많기에 나는 윌리엄이 그렇게 부르면 늘 가슴이 뭉클하다.
내가 말했다. "악몽을 꾼다는 거야?"
그는 내 말을 생각해보는 것처럼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더니대답했다. "아니. 깨어 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 어둠 속에서뭔가가 나를 찾아와." 그가 덧붙였다. "이런 경험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정말 무서워, 루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무서워."
윌리엄은 다시 몸을 앞으로 숙이고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 P17

"필" 내가 말했다. "이것만 물어볼게. 요즘은 밤에 어때? 그러니까, 당신이 느낀다던 악몽 같은 공포 말이야."
그리고 윌리엄의 목소리에서 나는 그것이 그가 내게 전화한이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 루시." 그가 말했다. "지난밤에도 그랬어-새벽 세시쯤이었을 거야. 캐서린에 대한 것이었는데, 정말로 이상했어.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러니까 캐서린이 거기 서성이고 있는 것 같았어." 윌리엄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했다. 약을 먹어야 할까봐. 정말로 점점 더 힘들어져." 그가 덧붙였다. "캐서린이 나하고 같이 있는 느낌이야. 그러니까, 캐서린의 존재감이 느껴져. 그건・・・그건 정말 좋지 않아, 루시."
"오 필리." 내가 말했다. "어쩜 좋아. 정말 힘들겠다."
우리는 잠시 좀더 이야기를 나누었고, 전화를 끊었다. - P43

내 남편은 그해 이른 여름에 병에 걸렸고, 11월에 죽었다. 그결혼이 윌리엄과의 결혼과는 아주 달랐다는 점 외에는 그것이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하지만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다. 내 남편의 이름은 데이비드에이브럼슨이었고, 그는-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저 그였다! 우리는 우리는 정말로서로에게 잘 맞는 상대였고, 이런 표현은 정말로 진부한것 같지만-오, 지금은 더 말할 수 없다. - P45

도시에 있는 장례식장에서 열린 데이비드의 장례식-당시에도, 지금도 내게는 흐릿할 뿐이다-에서 베카가 내게 속삭인 말이 기억난다. "아빠도 여기 와서 같이 앉고 싶어했어요.‘
"아빠가 그렇게 말했어?" 내가 그애를 돌아보며 물었고, 그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한 윌리엄, 나는 생각했다.

불쌍한 윌리엄. - P47

그렇게 새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소 빠르게 연이어서, 윌리엄에게 두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먼저 몇 가지 더 말해두
겠다. - P48

나는 눈알을 굴렸고, 물론 그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오 필, 제발 그만. 출생증명서를 조작하진 않아. 캐서린은 아이를 낳았던 거야!"
"좀더 조사해봐야겠어." 윌리엄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소리 내서 말했다. "이 바보야. 캐서린은 아이를 하나 더낳았다니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묘하게 말이 되는 것 같았다. - P71

우리는 그날 밤 저녁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스토랑은 오래되고 편안해 보이는 곳이었고 연중 그 시기에는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어서, 우리는 안쪽 깊숙이 들어가 앉아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나는 기분이 영 착잡했다. 한때 남편이었던 이 남자 때문에 영착잡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에스텔과브리짓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리 딸들에 대해 조금 이야기했다. 그는 에스텔이 떠난 것을 크리시와 베카에게 자기가 직접 알려야 하는지 물었고,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윌리엄이 빵 한 조각을 집으면서 "내가 태어나기 전에캐서린이 낳은 아이가 있었어" 하고 말했고, 나는 "그건 알아"
하고 답했다. - P93

내가 그 자리에서 함께 어울리는 건 믿을 수 없을 만큼 쉬운일이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벗어난 한순간 같았고, 우리 넷은 가족이었을 때 만들어진 지난날의리듬 속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나는 긴장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이것도 내가 하려는 말의 일부다. 나머지 세 사람도 그런 것같았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그럴 수 있는지 놀라웠다. 나는 세사람 모두를 보았고, 그들의 얼굴은 행복에 젖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 이혼한 부부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일이 쉬운건 아닐텐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한편으론 부럽네. 만약 남편과 이혼했다고 가정해봐도 ...
아이들과 함께 만난다고 해도 이런 분위기와 감정은 가지지 못할거란걸 확실히 알겠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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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가 나를 평양호텔 로비까지 데려다주었다. 로비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고도 헤어지기 아쉬워 서로 손을 잡은 채 시간을 마냥 흘려보냈다. "고모가 곧 또 올게. 다음에 평양 오면 더 많이 이야기하자. 선화랑 계속 붙어 있을 테니까." 선화는 몇 번이나 안녕이라고 인사하면서 문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내가 선화를 호텔 바깥까지 배웅하기로 했다. 선화를 쫓아내듯이 돌려보냈다. 선화는 아빠와 함께 걸음을 떼면서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이것이 선화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 P134

가족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동시에 큰 책임감이 밀려왔다. 언젠가 어머니가 몸져눕는다면, 어머니에게 치매가온다면 어떨까. 어머니의 생애 마지막 순간들이 어떨지는 오롯이나에게 달려 있었다. 나의 감정, 나의 도량 그리고 나의 경제력에달려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완벽하게 간호하려는 어머니를 보조하면서내 삶은 이미 파탄 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여력이 없었다. 언제쯤이면 혼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가족에게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또다시 죄책감에 시달렸다. - P139

아버지는 "왜 못 죽게 해. 이런 몸이 됐는데 어째서 죽으면안 돼"냐며 나를 몰아붙였다.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를 설득할 만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조금 흥분해서 심각한 얼굴로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으면 영희가 아버지! 하고 부를 사람이 없잖아.
그럼 내가 쓸쓸해. 영희 아버지는 하나뿐인데, 다른 사람은 될 수없는데. 아버지가 죽으면 내가 곤란해. 그러니까 영희를 위해 조금만 더 힘내요." 잠시 생각하던 나는 아버지를 향해 필사적으로호소했다.
"그렇구나, 알았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울었다. 수년간의 스트레스를 단번에 분출하는 듯한 소리였다. 나도 함께 소리 높여 울었다.
나는 그때부터 아버지의 침대 옆에 올라가 낮잠을 잤다. 자기곁에 눕는 마흔 넘은 딸을 보면서 아버지는 다시없을 만큼 기뻐했다. 더 이상 죽여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 P144

사방에서 빵빵 총소리가 들리니까. 제주 아낙들이 많이 죽었어. 학교 운동장에다 강제로 끌어내서 일렬로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두두두. 끔찍하지.
.
• <수프와 이데올로기> 중에서

어머니가 입원 중인 병실 침대에 누워 제주4.3사건의 체험을이야기했다. 이때 어머니는 돌연 생생하게 1947년 3월 1일 관덕정에서 목격한 내용, 1948년 4월 3일 이후 마을에서 일어난 살육의현장, 잔혹하게 살해당한 자신의 큰아버지와 그 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제주4.3사건의 생존자임을 알리며 <수프와이데올로기>가 시작된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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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봄, 나는 어쩐지 긴장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거실에 있다가 ‘지금밖에 없다!‘ 직감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말까지 꼬여버렸다.
"세 명 전부 보내서 후회해?" 갑자기 물어보자 침묵이 흘렸다. 될 대로 되라지 생각한 순간,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미 가버린 건 별수 없다 싶지만, 그, 가서………… 가지 않았으면 더 좋았으려나 그렇게는 생각하지." 내 귀를 의심하면서 신중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타임캡슐을 타고 북송 사업이 활발했던 무렵으로 돌아가서 목차를 훑는 듯한 표정이었다. - P92

지아버지의 솔직함에 놀랐다. 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줘서 고마웠다. 아버지, 그리고 활동가로서 금지했던 문장을 꺼낸 이유는나를 향한 신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딸에게 약해진 나머지 마에 흘린 것이었을까. 촬영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죄송하고 또 고마웠다. 이걸로 영화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 P92

그날의 아버지는 조금 이상했다. 여태껏 결코 입에 올린 적 없던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아버지는 <디어 평양>의 클라이맥스에서 내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도록 허락하면서 한국에 시집가도 되니까 그저 상대만 찾으라고 말한다. 자신은 생애 마지막까지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하겠지만, 딸은 별개이니 자유롭게 살라고 한다.
실은 오빠들의 ‘귀국‘에 대해 후회하는 장면부터 나의 국적 변경을 허락하는 장면까지 모두 같은 날 찍은 영상이다. 그다음 날, 나는 예정대로 도쿄로 돌아갔다.
일주일 후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고,
일련의 대화는 아버지와 내가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 P93

<디어 평양>을 공개하자 조총련은 나에게 사과문을 쓰도록강요했고, 이를 무시하자 북한 입국을 금지했다. 2005년 방북을마지막으로 나는 가족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2009년에는 이 우스꽝스러운 ‘처벌‘을 내리는 조직에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심정으로 <굿바이, 평양>을 공개했다. 부모님이 인생을 바친 조직의판단으로 가족은 또 한 번 이산가족이 되었다. 어머니는 "벌칙 게임도 아니고, 한심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살던 어머니에게 항의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딸의 영화 때문에 그때까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과 소원해진 어머니에게 죄송했다.
- P95

"영희가 정한 길, 쭈욱 가면 돼." 아버지가 말했다. 거짓말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쭈욱이라는 말이 아버지다웠다. 갑자기 아버지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가슴을 크게 부풀려 어깨를 흔들면서격렬하게 숨을 내쉬었다. 목숨 걸고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입힐 옷을 들고 병실에 도착했다. 간호사들도 들어왔다. 아버지의 숨은 더욱 거칠어져갔다. 상반신을 공중으로 밀어 올리듯 들숨을 쉬고, 떠오른 머리와 등을 침대에 격렬하게 떨어뜨리며 날숨을 뱉었다. 아버지는 이를 여러 번 반복하다천천히 단계를 거치듯이 숨을 거두었다. 인간은 이렇게 죽어가는것이라고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계속 잡고 있던 아버지의 손이 ㅊ가워졌다. 얼굴도 목덜미도 차가워졌다. 차가워도 괜찮으니까 골에 들어가지 말고 영원히 이대로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103

평양에서 나고 자란 조카 선화가 내 분신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선화와 나 둘 다 어린 시절 상실감을 겪었기때문이었다. 다섯 살 때 엄마를 잃은 선화의 슬픔과 외로움을 내가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여섯 살 때 세오빠와 헤어지면서 당연한 존재였던 가족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경험은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본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행동했지만, 어린 선화에게 엄마의 죽음은 커다란 상처가 됐을 것이다. - P113

선화는 둘째 건화 오빠의 딸이다. 건화 오빠는 첫 번째 아내와이혼하면서 지성, 지홍 두 아들을 데려왔고, 선화의 엄마인 정정순 씨와 재혼했다. 선화에게는 이복형제가 둘 있는 셈이다. 정순씨는 초혼에서 이미 두 아들을 얻은 오빠와 결혼하며 전처가 낳은아이들을 친자식처럼 돌봤다. 형 지성이는 아직 젖먹이였던 동생을 소중히 키워준 새엄마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다. 어린 동생과 자신을 두고 떠난 친모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새엄마에 대한 믿음으로 덮어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 P114

선화가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정순씨가 복통을 호소했다. 아파트 근처에 있던 진료소에서 위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처방약을복용하던 중이었다. 며칠이 지나 다시 복통을 호소한 정순 씨가 출혈을 하며 쓰러져 큰 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날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자궁외임신이었다. - P115

새엄마 혜경씨가 노래를 부르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는
듯했다. 아버지는 열다섯 때 제주도에서 헤어진 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 할머니를, 세 오빠들은 오사카에살면서 물자 공급에 여념이 없는 어머니를 올케언니들은 친정어머니를, 선화의 이복형제인 지성과 지홍은 자신을 두고 떠나간 친모와 그 이후 자신들을 키워준 정순 씨를, 선화도 다섯 살 때 사망한 친모 정순 씨를 이 얼마나 보편적인 노래인가.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불리면 좋겠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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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이미 일흔넷이었으므로 고희연이라고 주장하기는다소 애매했지만, 부모님에게는 소정의 목적이 있었다. 오빠들뿐만 아니라 지방 도시에 사는 먼 친척들까지 평양으로 불러 모아성대한 잔치를 여는 것이었다. 칠순 잔치는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이평양으로 갈 통행 허가증을 얻기 위한 ‘공식‘ 사유였다. 정년퇴직후 조총련 오사카 본부의 간부가 된 아버지는 칠순 잔치를 당신이건강할 때 해야 할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했다. 6.25 전쟁 전에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갔다가 차별과 빈곤을 견디지 못하고, 북송 사업으로 북에 넘어간 친구들도 초대해야 한다며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 P70

아버지는 북송 사업의 선봉대 역할을 자처했다. 북을 지지하는 조총련과 한국을 지지하는 민단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동포 사회에서 격렬한 사상투쟁을 벌인 활동가였다. 자신이 가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미화해서 타인에게 이주를 추천하는 무모함을 혁명적 임무라고 믿고 수행했던 것이다. 자기 자식들 손에까지 편도 표를 들려서 북한에 보낸 몇 년 후, 그 나라에 방문해서야 누구보다 북송 사업의 실태를 잘 알게 된 사람이었다. 후회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뿐더러 용서받을 수 없다는 자각도 있었을 것이다. 세 아들들과 가족들이 ‘인질‘이 되고야 말았으니 그 체제에 순응하며 살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훈장을 달고 활짝 웃는 부모님의 얼굴이 피에로 같다고 생각하며 나도 웃었다. - P71

2001년 1월, 미국 뉴욕의 뉴스쿨대학교 대학원 미디어연구학과에 입학한 나는 가족이 모두 모이는 평양의 일상을 촬영하기 위해 가을 학기 휴학 절차를 밟았다. 9월말에 뉴욕에서 오사카로 날아가, 10월에는 조총련의 가족 방문 투어로 부모님과 북한을 방문해 평양에서 몇 주를 보낸 다음, 일단 일본으로 돌아갔다 연내에대학원으로 복학할 예정이었다.
머릿속은 온통 촬영 생각으로 가득했다. 세 오빠와 그 가족들을 촬영할 때 무엇을 어떻게 조심해야 폐를 끼치지 않을지 상상력을 동원해, 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상정하고 촬영 과정을시뮬레이션했다. 그런 가운데 전 세계를 경악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 P74

"안녕, 영희.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 파일이 학생비자 신청을위해 대사관에 제출할 서류예요. 불안하겠지만 정신 바짝 차려요.
당신은 우리 대학원의 정식 학생이고, 어떠한 정치적 상황에서도학생의 배울 권리를 지키는 것이 대학의 의무입니다. 만약 미국에오기 위한 비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우리가 직접 주일 미국대사관에 요청할 거예요. 이 건에 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우리에게 맡겨요. 가족을 만나러 간다면서요. 여행 잘해요!"
나고 자란 일본에서도 이렇게 따뜻한 격려를 받은 적은 없었다. 대통령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닌 대범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 P80

2001년 10월, 드디어 아버지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온 가족이 평양에 모였다. 평양에 사는 오빠들과 친척들뿐만 아니라 지방도시에 사는 먼 친척에 지인까지 찾아왔다. 명목상 세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마련한 자리였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100명을초청한 옥류관 행사 비용 25만 엔은 부모님이 지불했다. - P85

드문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어른들이 그렇게본심과 명분 사이를 오가지 않을까. 본심 속에도 명분이 있고 명분도 본심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다면체라 여러 측면으로 둘러싸여 있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비범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평범해 보여도 인간이란 그러한 생명체인 것이다. 훈장을 단 아버지를보면 잠옷 차림의 아버지가 떠오르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혁명을 외치는 아버지도 평범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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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부 기관의 검열을 거쳐 일본 부모님 손에도착한 오빠들의 편지에는 ‘영광스러운 조국과 경애하는 김일성수령님의 사랑 아래 면학에 힘쓰고 있습니다‘라는 추상적인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빠들의 진심을 들을 방법은 없었다.
언젠가 평양에 방문했을 때 오빠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총련 간부 자녀 합숙소에서 다른 평양시민에 비해 대우를받았어?"
"하루에 계란 하나는 먹었나? 그 당시로 치면 파격적인 대우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배가고파 쓰러질 것 같아서 공부가 눈에 안 들어왔다. 하루 종일 먹을 거 생각만 했지."
건화 오빠가 오사카 사투리로 대답했다. 북한 주민들의 식생활은 더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귀국자‘들은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원주민‘을 따라갈 수 없다고 했다. "영희였으면 한 달도 못 버티지." 진심인 듯 농담인 듯 오빠들의 웃음이 퍼져나갔다. 나는 그 상황이 웃지 못할 코미디 같아서 그만 할말을 잃었다.


---1960년대에 북한주민들이 굶고 있었던건 이해한다 해도 아직도 굶고 있는건 이해를 해야하는건지...연일 쏘아대는 미사일은 북한주민들의 고혈이 아닐런지! - P34

‘조선인 부락‘이라 불리며 가난한 거리의 대명사였던 이카이노에서 자라면서도 오빠들과 나는 데미그라스소스라든가 햄버그같은 요리에 익숙했다. 집에서 양식을 먹을 때는 포크와 나이프를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란 오빠들이 북한의 식생활을 견딜 수있을 리 만무했다. 특히 북송당시 열네 살이었던 셋째 오빠 건민은 매운 음식을 싫어해서 김치는 입에도 대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런 사실을 그 당시에는 모르셨을테지... - P35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월급만 가지고는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량 배급으로 배를 채우는 건 어림도 없는일이었다. 북한 주민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돈을 마련하고 물물교환을 하고 친척에게 의지하고 연줄을 써서 살아남았다. 절도와 사기도 횡행하는 가운데, 북에 친척도 연출도 없는 귀국자는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가족이 전부 북으로 건너가 일본과 연이 끊긴 귀국자는 실로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 P40

아이들을 북에 보냈다고 후회할 여유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세 아들이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졸업한 다음에 건강히 일할 수
있도록,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가족들이 웃는 얼굴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겠노라 다짐했다. 손주들이 태어나자 어머니의 결심은 신념이 되고, 다시 집념이 되었다. 무언가에 쓴 것처럼 소포를 보내고 북을방문하는 어머니에 아버지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 P41

오로지 3층 내 방에서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방에는 교과서말고는 북과 관련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빠들 사진도 북에서 받아온 선물도 장식하지 않았다. 벽에는 뉴욕 지하철노선도를 붙이고 책장에는 해외문학, 일본문학, 한국문학, 잡지, 연극, 영화 관련 서적들을 채워 넣었다. 음악은 대부분 재즈, 클래식, 샹송, 영화음악, 팝송 등 서양음악이었고 일본과 한국 가요도 있었다.
2층에 올라가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압감이 들었고, 3층 내방에 도착하면 마치 공산권의 감시 체제를 뚫고 자본주의국가에당도한 기분이었다. 나는 2층 복도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베를린장벽‘이라 명명하고 2층을 동독, 3층을 서독이라 불렀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들도 그 이름에 찬성했다. 당시 우리 중 누구도 베를린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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