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천천히 차를 몰며 어떤 생각을 곱씹었다. 간밤에 나는 차고를 살펴보지않았다. 가이거의 시신이 사라졌지만 굳이 찾아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개입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시신을 처리하는 좋은 방법은 일단 차고로 끌고 가서 가이거의 차에 싣고 로스앤젤레스 곳곳에 널린 호젓한 골짜기에 내다버리는 것이다. 며칠 또는 몇주 동안 발견되지 않을 테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가이거의 차 열쇠가 있어야 하고 범인이 두 명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색범위를 대폭 줄일 수 있다. 시신이 사라졌을 때 가이거의 열쇠는 모두 내 주머니 속에 있었으니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미처 차고 안을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다. 차고는 문을 내리고 맹꽁이자물쇠를 채워놓은데다, 내가 차고 앞을 지나는 순간 울타리너머에서 뭔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 P78

나는 브로디에게 다가가서 자동권총을 그의 옆구리에 들이대고 그의 주머니에서 콜트 권총을 끄집어냈다. 이제 밖으로 드러난 권총은 모두 내가 차지했다. 전부 주머니에 집어넣은 다음 브로디에게 한 손을내밀었다.
"내놔."
그가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겁먹은 눈빛이다. 그는윗주머니에서 두꺼운 봉투를 꺼내 건넸다. 봉투 안에는 현상한 원판과유광사진 다섯 장이 들어 있었다.
"정말 이게 다야?"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봉투를 윗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 P107

누군가가 말했다. "브로디?"
브로디가 대답했지만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두 발의 총성이빠르게 이어졌는데 소리가 좀 답답했다. 총구를 브로디의 몸에 들이대고 쏴버린 모양이다. 그가 앞으로 쓰러지며 문짝에 부딪쳤고 그의 체중때문에 문이 쿵 닫혀버렸다. 그는 문짝 가장자리를 따라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의 두 발이 카펫을 뒤로 밀어냈다. 왼손이 손잡이를 놓치는 바람에 팔이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머리는 여전히 문틈에 낀 상태였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손은 아직도 콜트 권총을 움켜쥐고 있었다. - P117

"싸움은 관두는게 좋을걸. 넌 쓸데없이 힘만 낭비해서 탈이야."
그래도 그는 싸우고 싶어했다. 사출기로 쏘아올린 전투기처럼 돌진하여 다이빙
태클로 내 무릎을 노렸다. 나는 옆으로 살짝 피하면서그의 목을 붙잡아 겨드랑이에 끼었다. 그가 발에 힘을 주고 힘차게 땅을 긁으면서 두 손으로 내 급소를 공격했다. 나는 그의 몸을 빙글 돌리며 더 높이 들어올렸다.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움켜쥐고 오른쪽 골반을 그에게 밀어붙이며 잠시나마 무게 균형을 유지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뒤엉킨 채 길바닥을 긁어대고 헐떡거리며 안간힘을 쓰는 우리 모습은 마치 기괴한 두 마리 짐승 같았다. - P122

가이거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사라졌던 중국 태피스트리 두 점을 엑스자 모양으로 겹쳐 피투성이 중국풍 상의를 가려놓았다. 엑스자밑에는 검은색 파자마를 입은 두 다리가 가지런히 놓인 채 뻣뻣하게굳어 있었다. 두 발에는 두툼한 펠트 밑창이 달린 중국식 슬리퍼를 신겼다. 엑스자 위로는 두 팔을 올려 손목을 교차시킨 후 손바닥이 아래로 가도록 두 손을 어깨에 걸쳐두고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아두었다. 입은 다물었는데 찰리 채 콧수염이 가짜 수염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두 눈을 감겼지만 완전히 감기지는 않은 상태였다. 유리 의안이 불빛을받아 희미하게 반짝거리며 나에게 윙크를 던지는 듯했다.
나는 시신을 건드리지 않았다. 아주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보나마나얼음처럼 차갑고 널빤지처럼 뻣뻣하겠지. - P125

이튿날 아침, 달걀과 베이컨을 먹으며 조간신문 세 부를 모두 읽어보았다. 이번 사건에 대한 신문기사는 여느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진실에 접근했다. 화성과 토성 사이의 거리랄까. 셋 중 어떤 신문도 ‘리도잔교 자동차 자살 사건‘의 운전자 오웬 테일러를 ‘로럴 캐니언 이국풍방갈로 살인사건‘에 결부시키지 않았다. 어떤 신문도 스턴우드 가족이나 버니 올즈나 내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오웬 테일러는 ‘어느 부잣집 운전사‘였다. 할리우드 경찰서의 크론재거 반장이 관할구역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두 건을 해결한 공로를 독차지했는데, 두 사건의 발단은 가이거라는 사람이 할리우드 대로에 위치한 서점 뒷방에서 통신사업을 하다가 수익금을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브로디가 가이거를 사살했고 그 보복으로 캐럴 런드그런이 브로디를 사살했다. 경찰이 캐럴 런드그런을 구금했다. 런드그런은 범행을 자백했다. - P144

그것으로 용건이 끝났다. 우리는 작별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웃 커피숍 냄새가 검댕과 함께 날아들었지만 시장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무실에 둔 술병을 꺼내 한 잔 마시며 자긍심의 파도에 몸을 맡겼다. - P154

이제 나만 남았다. 나는 살인 사건을 덮어두고 스물네 시간 동안 증거물을 은닉했지만 체포되지 않았고 머지않아 오백 달러짜리 수표지 받게 되었다. 이럴 때는 그저 술이나 한 잔 더 마시고 이 모든 난장판을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 현명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제일 현명한 행동이련만 뜬금없이 에디 마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때 라스올린다스에 들를 테니 얘기 좀 하자고 했다. 정말이지 내가 이렇게 현명한 놈이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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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문장>

1
10월 중순 어느 날 오전 열한시경, 태양은 보이지 않고 한결 뚜렷해진 언덕들이 폭우를 예고했다. 나는 담청색 양복에 암청색 와이셔츠를받쳐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장식용 손수건을 꽂고, 발목에 암청색 수를놓은 검은색 모직 양말과 검은색 단화를 신고 있었다. 이렇게 깨끗하고단정한 차림새에 면도까지 한데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으니 누가 좀 알아줬으면 싶었다. 그야말로 말쑥한 사설탐정의 모범답안 아닌가. 사백만 달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 P7

집사는 내가 흠뻑 젖은 잎사귀에 얼굴을 얻어맞지 않고 무사히 지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고, 얼마 후 우리는 밀림 한복판, 둥근 지붕 바로 밑의 빈터에 이르렀다. 육각형 판석을 깔아놓은 이 공간에는 낡아빠진 빨간색 터키 양탄자 한 장이 있고, 그 양탄자 위에는 활체어 하나가 있고, 누가 보아도 죽을병에 걸린 듯한 노인이 그 휠체어에 앉아서 다가오는 우리를 쳐다보았는데, 그 검은 눈동자 속에서 정열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아까 현관 벽난로 선반 위의 초상화 속에서 보았던 칠흑처럼 새까맣고 직선적인 눈빛만은 그대로였다. 나머지 얼굴은 납으로 만든 가면 같다. 핏기없는 입술, 뾰족한 코,움푹 꺼진 관자놀이, 바깥쪽으로 벌어진 귓불, 모두가 임박한 죽음을 말해준다. - P12

"장군님이 원하신다면 가이거라는 놈을 쫓아드릴 수 있습니다. 정체가 뭐든, 어떤 일을 하는 놈이든 저한테 주실 수고비 말고도 돈이 조금 더 들겠죠 물론 그래봤자 장군님께는 아무 소득도 없습니다. 돈으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그놈들은 벌써 장군님을 호구 명단에 올렸으니까요" - P20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금발 여자를 향해 모자를 살짝 기울인 후 남자를 따라 나갔다. 그는 오른발에 닿을락 말락 하게 지팡이를 살짝살짝흔들며 서쪽으로 걸어갔다. 그를 따라가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의 외투는 지나치게 화려한 말 등덮개를 재단하여 만든 것인데 어깨가 너무넓어 목이 셀러리 줄기처럼 가늘어 보였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통이 기우뚱기우뚱 흔들렸다. 우리는 한 블록 반쯤 그렇게 걸었다. 하일랜드 애비뉴에서 신호등에 걸렸을 때 그의 곁에 나란히 서서 내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가 무심코 나를 돌아봤다가 갑자기 매섭게 곁눈질을 하고는 재빨리 외면했다. 녹색 불이 켜지자 우리는 하일랜드 애비뉴를 건너 한 블록 더 걸어갔다. 그가 긴 다리로 보폭을 넓혀 걷는 바람에 길모퉁이에 도착할 무렵에는 내가 20미터 가까이 뒤처졌다. - P33

오 분이 지나갔다. 그는 더 버티지 못했다. 배짱이 부족한 유형이다. 성냥을 긋고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희미한 그림자가 잔디밭을 밟으며 건너편 나무로 슬그머니 걸어갔다. 그러더니 보행로로 빠져나와 지팡이를 흔들고 휘파람을 불며
곧장내 쪽으로 걸어왔다. 휘파람이 덜덜 떨려 듣기가 거북했다. 나는 캄캄한 밤하늘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는 3미터쯤 앞으로 지나가면서도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제 안전하니까.  물건을 버렸으니까.
나는 그가 시야를 벗어날 때까지 지켜보다가 라바바 한복판의 보행로를 따라 올라가 세번째 서양노송나무의 가지를 젖혀보았다. 포장한책을 꺼내 겨드랑이에 끼고 그 자리를 떠났다. 아무도 고함을 지르지않았다. - P35

물론 무엇이 들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묵직한 고급 장정본으로,질 좋은 종이에 수작업으로 조판하여 인쇄상태도 훌륭하다. 곳곳에 예술 흉내를 내는 사진이 지면을 가득 채웠다. 사진도 본문도 차마 입에담을 수 없는 쓰레기다. 새 책은 아니다. 앞쪽 면지에 날짜가 줄줄이 찍혔다. 빌려주는 책. 공들인 음란물을 취급하는 도서 대여점.
나는 책을 도로 싸서 좌석 뒤에 감춰두었다. 대로변에서 공공연하게이런 장사를 하다니, 뒷배가 든든한 것이 분명하다. 나는 차 안에 앉아담배연기로 내 몸을 괴롭히면서 빗소리를 들으며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했다. - P39

내가 산울타리의 빈틈을 지나서 정문을 가린 모퉁이를 돌아 달려갈 때쯤 가이거의 은신처는 다시 완벽한적막에휩싸였다.
문에는쇠고리를 입에 문 사자 모양의 노커가 있었다.손을 내밀어 쇠고리를 붙잡았다. 바로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집안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길고 거칠게 한숨을 내쉬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러더니 뭔가 털썩 쓰러지는 듯한 작은 소리가 났다. 그다음에는 집안에서 황급히 달려가는 발소리,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 P43

나는 카멘에게서 눈을 떼고 가이거를 돌아보았다. 그는 양탄자의 술너머 방바닥에 등을 대고 쓰러져 있었고, 그 뒤로는 토템 기둥처럼 생긴 물건이 있었다. 옆모습이 독수리처럼 생겼는데 크고 둥근 눈알은 카메라 렌즈였다. 렌즈는 의자에 앉아 있는 벌거벗은 여자를 겨냥하고 있었다. 토템 기능의 측면에는 검게 변색된 플래시 전구가 달렸다. 가이거는 두툼한 펠트 밑창이 달린 중국식 슬리퍼를 신었고, 밑에는 검은색공단 파자마를 위에는 수놓은 중국식 상의를 입었는데 상의 앞부분이온통 피투성이였다. 나를 바라보며 밝게 빛나는 유리 의안이 온몸에서유일하게 살아 있는 듯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내가 충성을 들었던 세발 가운데 한 발도 빗나가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확실히 숨이 끊어진 뒤였다. - P46

제일 먼저 눈에 띈 변화는 벽에 걸렸던 비단 자수품 몇 점이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갈색 회벽에 빈자리가한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들어가서 다른 전등을 켰다. 토템 기둥을 살펴보았다. 기둥 밑에, 중국 양탄자 가장자리 너머 맨바닥에 다른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아까는 없었던 물건이다. 가이거의 시신이 있던 곳이다. 가이거의 시신이 사라져버렸다. - P51

올즈가 턱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는 사람이었나?"
"그래요. 스턴우드 댁 운전사. 어제 그 집에서 바로 저 차를 닦는 걸봤소." - P62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칸막이 문이 30센티미터쯤열렸다. 키 크고 잘생긴 흑발 청년이 가죽조끼 차림으로 내다보는데 안색이 창백하고 입을 앙다문 표정이다. 청년이 나를 보더니 황급히 문을닫았지만 나는 이미 칸막이 안에 여기저기 널린 나무상자들을 봐버린뒤였다. 상자마다 신문지를 깔고 책을 얼기설기 담아놓았다. 새로 산듯한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상자를 바삐 옮겼다. 가이거의 상품들을 내보내는 모양이었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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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문장들을 중심으로 작가가 들려주는 젊은시절의 나날들을 읽고 있자니, 그와 가까워진듯 친근하게 다가오는데...
그런데 문장 하나하나가 왜 이리 사무치는지...
나이가 더 들어 읽어서 더 좋은가보다.
나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내가 지금에서야 알게 된 감정들을 어떻게 작가는 그 젊은 나이에 다 알고 있었던 것일까 싶어서 마음이 아려온다.
그래서 이 작가는 나에게 끝없이 작품으로 말을 걸수 있는 거겠지.

암튼 나와 코드가 잘 맞는다니까......!^^

할 일이 많지 않았으므로 나는 하루종일 뒹굴뒹굴 책이나 읽으면서 보내는 일이 많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책을읽다보면 하루가 저물었다. 아무리 책을 천천히 읽어도 언제나시간이 남았다. 그렇게 느릿느릿 책을 읽었는데도, 그렇게 많은책을 읽었는데도 창 밖을 보면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으니 그게너무나 신기했다. 그 당시에도 신기했고 지금도 신기하기만 하다. 흐르지 않는다면 세월이 흐르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으로하루종일 시간을 두고 책을 읽기만 했었다.
- P80


 ‘君不見‘  이라는 그 세 마디는 결국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사실이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아이처럼 두 주먹 불끈 쥐고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얘기였지만,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없었다.
‘君不見‘  세 마디로 시작한 장진주는 ‘만고수‘ 세 마디로 끝난다. 한꺼번에 3백 잔의 술을 마시고 이백이 잊고자 한 ‘만고의 시름‘은 누구도 하늘이 낸 자신의 재주를 알아주지 않는다는점이었다. ‘君不見 ‘君不見‘  아무리 소리쳐도 그 사실은 변하지않는다. 한꺼번에 3백 잔을 들이켤 재주가 없어 동해안까지 가야만 했지만, 그곳에서 내가 결국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일은 바로그 일이 아닐까 한다. - P85

그 며칠 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도 못했는데 사촌형에게서전화가 걸려왔다. 조카가 죽었다는 얘기였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나보다 훨씬더 건강했던 아이였는데…… 육군병원 뒤쪽영안실 마당으로는 비스듬한 아침 햇살이 군데군데 꽂혀 있었다.
더없이 적막한 곳이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둘이서만 빈소를지키던 사촌형 부부는 내가 들어가자 나를 부둥켜안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일제히 들리는 매미소리보다 훨씬 더 큰 울음소리였다. - P89

우리가 잊고자 애쓰는 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저도 아직 잊지 못하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 속에 쌓아두면서 왜 그때는 그렇게 가혹하게 소리쳐야만 했을까? 그러고 보면 결국 이시바시 히데노가 남긴 많은 하이쿠 중, 이 시가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도 가혹한 일이다. 여섯 살짜리 무남독녀 그 딸아이에게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이 시가 쓰라렸을 텐데. - P91

귀를 울릴 듯 매미소리가 들리다가 일제히 울음을 그치는 그 순간, 앞으로 찾아올 그 모든 슬픔의 시간이 단단하게 압축된, 빈
공간이 찾아온다. 겪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잊지못하는 순간이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고 잊으라고 소리쳤지만, 정작 나만은 아직도 그 절대적인 공허와 그 절대적인 충만의 순간을잊지 못하겠다. 시간은 흘러가고 슬픔은 오랫동안 지속된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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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보자면 20대 초반의 나는 시간의 흐름을 견딜 만큼 강한 몸을 지니지 못했다. 그런이유가 왜 이런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래서나는 소설가가 됐다. - P55

회사에서 소설을 쓰면 좋은 점은? 역시 회사 책상 앞에 앉아 회사 노트에다가 회사 볼펜으로 소설을 쓸 수 있으며 다 쓰게 되면회사 봉투에 넣어 회사의 비용으로 문학잡지사에 투고할 수 있다는 점이겠다. 그저 상상할 뿐이지만, 마루야마 겐지가 불안감이감도는 회사 책상에앉아난생처음으로 소설을 쓰는 그 광경은애잔하기만 하다. 이건 고시 공부하듯이 절에 들어가 벼랑 끝에매달린 심정으로 소설을 쓰는 차원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식의소설 쓰기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 P56

지루한 봄과 여름을 견디려고 쓴 소설로 나 역시 큰 상금을 받게 됐다. 뭐, 첫 소설로 엄청난 인세를 벌어들인 톨킨, 롤링, 에코,
로이 등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주머니에는 1,800만원짜리 수가 들어 있었다. 양재에서 안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주머니 속의 수표가 여간 신경쓰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1,800만원짜리 수표를 주머니에 넣고 지하철을타거나 길을 걸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런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 P61

성실한 직장인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아침에 출근하느라 지하철을 탈 때면 나는 늘 경이로움을 느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일자리가 있기에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할수 있단 말인가! 가끔은 숙취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한 3년 가까이 나는 그런 경이로움을 잃지 않았다. 그 3년동안 나는 세상에는 이다지도 많은 직업이 있는데, 다른 일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글을 써야만 하는가라는 문제로 고민했었다.
아마도 소설을 거의 쓰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할 일이 많지 않아서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이 있었던 모양이다. - P63

퇴근한 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매일 써내려갔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썼을 때쯤이었다. 컴퓨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밤하늘이 보였다. 문득, 고독해졌다. ‘나는 지금소설을 쓰고 있다. 오직 그 문장에만 해당하는 일을 나는 하고있었다. 그 소설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그 소설로 인해 내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그 문장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는 치유됐다.  - P66

‘벽‘이란 병이 될 정도로 어떤 대상에 빠져 사는 것. 그게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이라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역시 사람답게살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잘산다. 힘들고어렵고 지칠수록 마음은 점점 더 행복해진다.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이번에는 과연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여러 모로 문제가 많은 인간이다.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하고 싫은 마음을 얼굴에 표시내는종류의 인간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 나는 한없이 견딜 수 있다.
매번 더이상 할 수 없다고 두 손을 들 때까지 글을 쓰고 난 뒤에도 한 번 더 고쳐본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그때 내 존재는 가장 빛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요. 그렇게 빛나는 존재로, 또 제가 좋아하는 작가로 계속 계속 재미난 글 써 주세요!!! - P68

도착지점인 온정각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관절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눈은 젤리 상태가됐고 비닐이 벗 겨진 양말은 축축하게 젖은 상태로 얼어가고 있었다. 나는 온정각 쪽의 길을 몰라 하마터면 인민군의 막사로 돌격할 뻔했는데,
다행히 화들짝 놀란 보초병들의 제지로 그 일을 피할 수 있었다.
가까스로 간신히, 겨우 등의 부사에 해당하는 자세로 어쨌든 결승점에 들어가고 난 뒤에야 나는 끼고 갔던 장갑 한 짝을 삼일포가는 길 어딘가에 흘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내가 독일에서사온 털장갑이었다. 눈송이가 떨어지는 온정리 야외 온천에 누워나는 독일에서 남한을 거쳐 북한 어딘가에 떨어진 그 빨간 털장갑의 기이한 운명을 한동안 생각했다. - P75

그럴 줄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대학을 졸업하고도 그렇게 할 일이 없을 줄은 몰랐다. 대기업에 응시한다고 해도 뽑아줄리 만무했건만, 그런 꿈은커녕 취직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위인이었던지라 조금 난감하긴 했다.  - P78

그 다음날 오후였던가, 제비꽃 줄기는 점점 기울기 시작하더니 결국 완전히 쓰러지고 말았다. 제비꽃이 완전히 죽어가는 동안,
 대학까지 졸업한 내가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어떤 힘이 제비꽃의 가느다란 줄기를 꼿꼿하게 세우는 것일까? 어떤 힘이 있어 나는 살아가고 있는것일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날 밤, 내 머릿속에는뒷산에 꽂아두고 온 모종삽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비스듬하게땅에 꽂혀 있을 모종삽, 그 모종삽처럼 살아오는 동안, 내가 어딘가에 비스듬하게 꽂아두고 온 것들. 원래 나를 살아가게 만들었던 것들. 그런 것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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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빠를 그 전해에는 엄마를 마지막으로 본 뒤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은 낯선 사람 같았고,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은 내 세상의 많은 부분과 무관하게 느껴졌다. 나는 정말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두려운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바턴 집안의 식구들, 우리 다섯명-줄곧 그랬듯 정상적이지 않은 이 하나의 구조물로 내 머리 위에 떠 있고, 심지어 다 끝날 때까지 나는 그것이 거기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아빠가 돌아가셨을때 오빠와 언니가 어땠는지,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올랐던 당혹감이 자꾸 생각났다. 우리 다섯 식구가 정말로 건강하지 않은 가족으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우리의 뿌리가 서로의 가슴을 얼마나 끈질기게 칭칭 감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남편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가족들을 좋아하지도 않았잖아." 그 뒤로 나는 더더욱 두려워졌다. - P194

지금의 내 남편은 시카고 교외에서 자랐다. 그도 극심한 가난속에서 자랐다. 이따금 집안에서도 코트를 입어야 할 정도로 집이 무척 추웠다. 그의 어머니는 정신병원을 드나들었다. "엄마는미쳐 있었어." 남편이 내게 말한다. "엄마는 우리 중 누구도 사랑했던 것 같지 않아. 엄마한텐 그게 불가능했을 거야." 그는 학년때 친구의 첼로를 쳤고, 그뒤로 첼로에 뛰어난 지능을 보였다.
내 남편은 어른이 된 뒤로 줄곧 전문 첼로 연주자로 활동해왔고지금은 이 도시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이다. 그의 옷은큼지막하고 호탕하다.
그는 내가 만드는 음식은 뭐든 좋아한다. - P201

엄마는 그날 병원에서 내가 오빠나 언니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지금 네 인생을 봐. 너는 묵묵히 네 길을 가서 ・・・・・・ 원하는걸 이뤘잖아." 그 말은 아마 내가 이미 냉혹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 말은 아마 진심이었겠지만, 엄마가 진짜 무슨 뜻으로한 말인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 P205

블루밍데일이 우리에게 집과 같은 이유는 이것이다. 아이들이자란 집을 떠나온 뒤로 나는 아파트를 옮길 때마다 아이들이 와서 지낼 별도의 침실을 꼭 꾸며두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딸들은 내 집에 와서 지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캐시 나이슬리도 나처럼 했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절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다른 여자들의 경우를 봐도, 아이들이 그들의 집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절대 비난하지 않고 내 아이들도 비난하지 않지만, 가슴 미어진다.  - P210

어느 늦은 여름날, 내가 아이들 아빠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그는 출근한 뒤였고, 나는 늘 제 아빠 곁에 머물렀던 베카를 보러 갔다. 그가 우리의 딸들을 병원으로 데려온, 그리고 자기 자식이 없는 그 여자와 결혼하기 전의 일이다. 나는 모퉁이 가게에갔다가 이른 아침이었다 계산대 위쪽의 작은 텔레비전으로비행기가 월드트레이드센터를 들이받는 장면을 보았다. 나는 얼른 아파트로 돌아가 텔레비전을 켰고, 베카는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내가 사온 것을 내려놓으려고 부엌으로 갔을 때 베카가 "엄마!"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두번째 비행기가 두번째빌딩을 들이받고 있었고, 베카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내가 달려갔을 때 아이는 완전히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 P214

나는 늘 그 순간을 떠올린다. 그리고생각 한다. 그 아이의 유년기가 끝난 건그때였다고. 죽은 사람들, 연기, 이 도시와 이 나라에 가득 퍼진공포, 그 이후 세계적으로 일어난 참혹한 사건들. 하지만 나는그날에 대해 떠올릴때내 딸만 생각한다. 그전에도, 그후에도그 아이가 그런 목소리로 외친 것은 들은 적이 없다. 엄마. - P215

요즘 나는 가을에 우리의 작은 집을 둘러싼농장에서 해가 지던 장면을 이따금 떠올린다. 어디를 봐도 지평선이 보여, 내가한 바퀴 빙 돌면 지평선도한 바퀴 원을 그렸다. 해는 등뒤에서지고, 눈앞에 펼쳐진 하늘은 그 아름다운 변신을 멈출 수 없다는듯 은은한 분홍빛을 자아내다 슬며시 푸른 기운을 띤다. 이윽고지는 해에 가장 가까운 땅이 한 줄 오렌지색 선을 그리는 지평선을 배경으로 어두워지다 거의 컴컴해진다. 하지만 돌아서면 땅은 여전히 부드러운 형체를 희미하게 드러내며 몇 그루 나무와흙을 갈아엎고 간작 식물을 심은 고요한 들판을 보여주고, 하늘은 머뭇거리다, 머뭇거리다 마침내 완전히 어두워진다. 그런 순간에는 영혼도 조용히 지켜볼 것만 같다.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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