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조금씩 아껴가며 읽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느낌이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갈수록 감정이 고조되면서 멈출수가 없게 된 것이다.
페이지를 다 기억하고 싶어서 열심히 남겨본다.



세라 페인이 말했다. 자신의 글에 약점이 보이면 독자가 알아내기 전에 정면으로 맞서서 결연히 고쳐야 해요. 자신의 권위가서는 게 그 지점이에요. 가르친다는 행위에서 오는 피로가 얼굴에 가득 내려앉았던 그 강의 시간 중 하나에서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 엄마가 사랑한다는 말을 절대 할 수 없을 거라는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 P157

남편이 그날 말고도 나를 보러 왔었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내가 기억하는 건 그날이라 내가 쓰는 것도 그날에 대해서다. 이건 내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야기는 할 수가 없다.
우리를 지나쳤던 숱한 늪지와 풀밭과 신선한 공기와 눅눅한 공기 나는 그런 순간들을 쥐고 있을 수도 없지만 다른 사람들 보라고 펼쳐 보일 수도 없다. 하지만 이 말은 할 수 있다. 엄마가 옳았다. 내 결혼에 문제가 생겼다. 내 딸들이 각각 열아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아이들의 아버지를 떠났고, 우리는 둘 다 재혼했다. 우리가 결혼해서 같이 살 때보다 내가 그를 더 사랑한다고 느끼는 날도 있지만, 그건 생각만이니 쉬운 것이다. - P171

그가 나를 보러 병원에 온 그날, 우리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않았다. 아마 그의 아버지가 스위스 은행 계좌에 그의 앞으로 적지 않은 돈을 남겨둔 사실을 알게 된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의할아버지가 전쟁 때 돈을 많이 벌어 스위스 은행에 적지 않은 돈을 맡겨두었는데, 윌리엄이 서른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 돈이 갑자기 그의 것이 된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나중에, 집에 돌아간뒤에 알았다. 윌리엄은 그 돈이 어떤 돈이고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며 기분이 묘해졌을 것이고, 그는 자기 감정을 쉽게 말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니 나와 함께 침대에 그냥 누워 있었을 것이다. - P172

제러미.
나는 제러미가 게이였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그가 아팠던 것도 몰랐었다. 그렇게 안 보였어, 남편이 말했다. 제러미는 그런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어. 이제 그는 가고없다-그는 죽었다. 내가 입원해 있던 동안에 죽었다. 나는 끊임없이 울음이 나왔다. 흐느껴 우는 조용한 울음이었다. 내가 건물 앞 계단에 앉아 있으면 베카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이따금 크리시는 내 옆에 앉아 내 어깨를 제 작은 팔로 감싸안아주었다. - P177

하지만 엄마가 몸져누웠다. 이번에는 내가 시카고에 있는 병원에 가서 엄마의 침대 발치에 앉게 되었다. 나는 엄마가 내게준 것을 엄마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내 곁을 지킨 그 며칠 동안잠도 자지 않고 주의깊게 돌봐준 엄마의 그 한결같음을 돌려주고 싶었다.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아빠가 나를 반겨주었다. 내가도와주러 온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이 낯선 사람의 눈빛에서읽지 못했다면 나는 아빠를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빠는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내가 느꼈던-어쩌면아빠가 느꼈던 분노는 그게 어떤 것이었건 간에 더는 우리와연관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 동안아빠에게 느꼈던 역겨움도 이제는 남아 있지 않았다. 병원에 있는 아빠는 죽어가는 아내를 둔 늙은 남자일 뿐이었다.  - P189

"그만 가주면 좋겠구나." 엄마는 조용히 말했는데, 목소리에화난 기색은 없었다. 나는 엄마의 목소리에서 단호함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더럭 겁이 났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지금 떠나면 다시는 엄마를 볼 수없을 거예요. 우리가 같이 지내면서 힘들기는 했지만 나보고 가라고 하지 말아요. 엄마를 다시 볼 수 없다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 P190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알았어요. 엄마. 그렇게 할게요. 내일 가면 돼요?"
엄마가 나를 쳐다보았는데 그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엄마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러더니 엄마가 조그맣게 말했다. "지금가줄래, 얘야, 제발."
"오, 엄마ㆍㆍㆍㆍㆍㆍ"
엄마가 조그맣게 말했다. "위즐, 제발."
"엄마가 보고 싶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데 울음이 터지려했다. 나는 엄마도 견디기 힘들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 엄마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렇겠지."
나는 허리를 굽히고 엄마의 머리에 키스했는데, 엄마는 병이든 뒤로 침대에만 누워 있어 머리카락이 엉켜 있었다. 나는 돌아서서 내 물건을 챙겼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밖으로나가려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주춤주춤 발걸음을 옮겼다. "엄마, 사랑해요!" 내가 소리쳤다. 나는복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엄마 침대 가까이에 서 있었기 때문에, 분명 엄마는 내 말을 들었을 것이다. 나는 기다렸다. 대답도,
어떤 소리도 없었다. 나는 엄마가 내 말을 들었을 거라고 혼잣말을 한다. 나는 여러 번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그렇게 해왔다. - P191

아빠는 장례식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이해했다. 이해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올 사람들이 있을텐데요." 내가 말했다. "엄마한테 바느질 일을 맡긴 사람들도 있었고, 올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아빠는 고개를 젓기만 했다. 장례식은 없을 거라고, 아빠가 말했다.
정말로 엄마의 장례식은 없었다.
이듬해 아빠가 폐렴으로 돌아가셨을 때도 장례식은 없었다.
오빠가 아빠를 병원에 모셔가려고 했지만 아빠는 못하게 했다. - P192

나는 아빠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야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아빠를 보았고, 긴 세월 가보지 않은 그 집에 머물렀다. 나는 그 집이 그 집의 냄새가 그 집의 작은 크기가 무서웠고, 아빠는 몹시 아프고 엄마는 없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가버린 것이다!
"아빠" 내가 침대 위 아빠 옆에 앉아 말했다. "아빠, 오, 아빠,
미안해요." 나는 그 말을 하고 또 했다. "아빠, 아빠, 정말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빠." 그러자 아빠가 내 손을 꼭 쥐었는데, 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피부는 아주 얇았다. 아빠가말했다. "루시, 너는 늘 착한 아이였어. 늘 참으로 착했지." 아빠가 내게 이 말을 했던건 확실하다. 이건 확실하지 않지만, 그때언니는 방에 없었을 것이다. 아빠는 그날 밤에 돌아가셨다. 새벽세시였으니 다음날 아주 이른 아침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편이더 맞겠다. 아빠 옆에는 나 혼자였고, 그 갑작스러운 침묵의 소리가 들린 순간 나는 일어서서 아빠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빠, 그만해요! 그만해요. 아빠!" - P19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2-11-03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껴 읽기!

스트라우트 작가의 매력
에 빠지셨군요.

왠지 브레이크 걸 수 없
는 그 느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은하수 2022-11-03 17:10   좋아요 2 | URL
네~~^^
이제 다 읽어가는데... 넘 아까워요
뭔가 이야기가 계속돼도 될거 같은..
그런 느낌이예요
우리의 삶이 계속되듯이요^^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 - P60

‘벽‘이란 병이 될 정도로 어떤 대상에 빠져 사는 것. 그게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이라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역시 사람답게살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잘산다. 힘들고어렵고 지칠수록 마음은 점점 더 행복해진다.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이번에는 과연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여러 모로 문제가 많은 인간이다.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하고 싫은 마음을 얼굴에 표시내는종류의 인간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 나는 한없이 견딜 수 있다.
매번 더이상 할 수 없다고 두 손을 들 때까지 글을 쓰고 난 뒤에도 한 번 더 고쳐본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그때 내 존재는 가장 빛이 나기 때문이다. - P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제 나는 서른다섯 살이 됐다. 앞으로 살 인생은 이미 산 인생과 똑같은 것일까? 깊은 밤, 가끔 누워서 창문으로 스며드는 불빛을 바라보노라면 모든 게 불분명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살아온 절반의 인생도 흐릿해질 때가 많다. 하물며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란. - P17

나도 어려서 그 일을 모두 봤다. 어머니가 건강하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른다.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의 바로 그 문장을 쓸 때, 비록 자기는 울지 않은 것처럼 짐짓 아버지 얘기만 했지만 이덕무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덕무의 어머니 반남박씨가 돌아가신 것은 이덕무의 나이 스물세살이 되던 1765년의 일이다. 모친상을 당하여서는 수질상복을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짚에 삼 껍질을 감은 둥근 테)과 요대를 풀지 않고 조석으로 슬피 우니 이웃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귀를 가렸다고 연암 박지원은 벗 이덕무를 기리는 글에 썼다.  - P22

하지만 집에 돌아와 다시 앉혔더니 고분고분히 앉는 것이었다.
조금 달려보니 소리를 지르고 연신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봤다. 얼굴로와 부딪히는 바람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내친 김에멀리까지. 그러니까 우리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논둑길까지 달렸다. 정말 아름다운 여름이었다. 햇살을 받은 이파리들은 초록색그늘을 우리 머리 위에 드리웠고 바람에 따라 그 그늘이 조금씩자리를 바꿨다. 금방이라도 초록색 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나무 그늘 아래를 달리면서 나는 "열무와 나의 두번째 여름이다"라고 혼자 말해봤다. 첫번째 여름을 열무는 누워서 보냈고 두번째 여름에는 아빠와 자전거를 타고 초록색 그늘 아래를 달렸다. 세번째 여름은 또 어떨 것인가? 지금 내가 가진 기대 중 가장 큰 기대는 그런 모습이었다. - P25

고향을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하는 신세가 된 나 역시 그처럼유배됐다고 생각했다. 매일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출퇴근하다보니 바닷가에 나와 앉아 물을 그리워하는 눈을 거둬 물고기를 들여다보며 『현산어보』를 쓰는 정약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현산어보』란, 그 책에 등장하는 각종 물고기들의 생김새와 생태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뭘 그리워했던 것일까? 나처럼 화려한 서울의 일을? 혹은 앞으로 자신이 할 일들을? 혹시흑산도에 갇힌 몸이 아니라 자유로운 자신의 영혼을? - P27

유배 16년 동안, 겨우 몇 권의 책만 낸 정약전 그가 뭍이 아니라 아우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그 그리움을 잊으려고 물고기들을 하염없이 바라봤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마지막으로집을 떠나고서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사랑은 물과 같은 것인가. 그 큰사랑이 내리내리 아래로만 흘러간다. 그런 줄도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라 집을 떠나고 어린 새들은 날개를퍼덕여 날아가는 것이다. - P29

봄을 기다릴 때, 내가 읽는 책들은 주로 시집들이다. 봄에 읽는시의 원형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당시다. 시인들이란 모자란 것,
짧은 것, 작은 것들에 관심이 많은 자들이니 계절로는 덧없이 지나가는 봄과 가을을 지켜보는 눈이 남다르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가을에 당시를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을에는 뭔가를기다릴 일이 없으니까 책을 들여다보는 일은 없는 것이다. 당시라면 내게는 임창순 선생의 [당시정해]다. 소리내 읽다 보면 입에서 향기가 날 것 같다. 세상 살아가는 데 그런 향기 입에 담고 친구와 술 마시는 일보다 윗길인 일이 없다. - P35

아마도 같은 해 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 전화를 걸어소설가 김소진 선배가 암으로 죽었으니 문상가자고 말했다. 절대로 가면 안돼!‘라는 문장이 온몸으로 육박해왔다. 왜 가면 안되는데?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그 느낌에 반항하듯 나는 장례식장을 찾아 책 날개에 실린 사진을 확대해놓은 영정에 두 번 절한뒤,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간 앓았다.  - P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디어 이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오, 하고 속으로 외쳤다.
설명을 읽으니, 그는 감옥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고, 아이들은아버지에게 자기들을 먹어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아버지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아이들은 그에게_오, 행복하게, 행복하게 자기들을 먹으라고 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도 알고 있겠구나, 하고.
그 조각가 말이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조각상이 표현한 것을 글로 쓴 그 시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 P103

세라 페인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자, 그럼 이렇게 말씀드려볼게요. 제가 픽션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려낸 그 여자가 그남자를 고령의 노인네라고 일컬으면서 그의 아내가 점성술 차트로 나라를 다스린다고 말했다면, 나라면・・・・・. " 그녀는 고개를 단호하게 까딱한 뒤 뜸을 들였다. "나라면, 나라는 사람은, 세라 페인은 이 나라의 시민인 나라면, 내가 만들어낸 그 여자가 그를 아주 쉽게 말하고 다닌다고 말하겠어요."
뉴욕의 독자들은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지만, 그들은 그녀가말한 것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았다. - P114

"내 말을 잘 들어요. 깊이 새겨들어요. 당신이 쓰고 있는 이것. 당신이 쓰고 싶어하는 이것." 그녀가 몸을다시 앞으로 숙이며 손가락으로 내가 보여준 그 글을 톡톡 두드렸다. "이건 아주 좋아요. 발표할 수 있을 거예요. 잘 들어요. 가난과 학대를 결합한 것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을 쫓아다닐 거예요. ‘학대‘라니, 정말 바보 같은 단어 아닌가요. 아주 상투적이고바보 같은 단어예요. 사람들은 학대 없는 가난도 있다고 말할 거예요. 그래도 당신은 절대 아무 반응도 하지 말아요. 자기 글을절대 방어하지 말아요. 이건 사랑에 대한 이야기고, 그건 당신도 알 거예요. ...... - P124

비키 언니가 그날 나를 찾으러 소리를 지르며 학교 운동장에왔는데, 그날이 등교일이었는지, 비키가 어째서 나하고 같이 있지 않았는지 그건 잘 모른다. 그저 기억나는 건 비키의 비명소리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웃음소리뿐이다. 아빠가 트럭을 몰고시내 중심가를 돌면서 오빠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오빠는내가 그 바구니에서 봤던 큰 하이힐을 신고 티셔츠 위에 브래지어를 한 채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목에는 모조 진주 목걸이가걸려 있었고, 얼굴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빠는트럭을 몰고 오빠 옆을 따라가면서 오빠가 빌어먹을 동성애자라는 건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내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었고, 내가 동생이었음에도 비키의 손을잡고 집까지 함께 걸어왔다. 집에 있던 엄마가 우리를 보고 말했다. 오빠가 엄마의 옷을 입고 돌아다녔는데, 그건 혐오스러운 일이라 아빠가 오빠를 혼낼 테니 비키보고 소리 좀 그만 지르라고했다. 그래서 나는 비키와 함께 들판으로 나가 날이 저물고 우리집보다 어둠이 더 무서워질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 P137

내가 어렸을 때 익숙하게 듣던 목소리로 엄마가 말했다. "루시바턴, 못된 계집애 같으니, 너한테 우리가 쓰레기라는 말을 들으러 내가 이 나라를 가로질러 여기까지 날아온 게 아니야. 우리는 이 나라로 건너온 최초의 사람들이었어, 루시 바턴, 내 조상과 네 아빠의 조상 모두. 너한테 우리가 쓰레기라는 말을 들으러내가 이 나라를 가로질러 여기까지 날아온 게 아니라고. 그들은선량하고 점잖은 사람들이었어. 그들은 매사추세츠 주 프로빈스타운의 해안에 닿았고, 물고기를 잡는 정착민이었어. 우리는 이나라에 정착했고, 나중에 선하고 용맹한 사람들은 중서부로 건너갔지. 우리는 그런 사람이야. 너는 그런 사람이라고. 그 사실을절대 잊어서는 안 돼."
내가 대답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잊지 않을게요." 그러고는 말했다. "안 잊어요. 미안해요, 엄마 미안해요."
- P14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22-11-03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이름은 루시 바턴 읽으시는 군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책 중에 아직까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에요!

은하수 2022-11-03 12:0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잘 읽고 있습니다. 술술 잘 읽히지는 않는데 장면장면을 하나하나 연상하며 읽게 되는 글들이 많아서 참 좋아요
완독해 보겠습니다
 

내가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우리는 차고에서 살았다. 차고는 그바로 옆집에 살던 종조부 소유였는데, 그 차고에서는 임시로 만든 개수대에서 똑똑 떨어지는 찬물만 쓸 수 있었다. 벽에 못을박아 고정시킨 단열재는 분홍색 솜사탕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유리섬유라 손을 베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어리둥절했고, 종종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렇게 예쁜 분홍색에 손을 댈 수 없다니,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걸 ‘유리‘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어리둥절했다. 우리가 매순간 그 수수께끼 같은예쁜 분홍색의 위험한 유리섬유를 바로 옆에 두고 살았다는 사실이 내 머릿속을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차지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신기할 정도다.  - P31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아주 이상했고 말할 때의 목소리는너무 컸던 것 같다. 대중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내가 잘 모르는 평범한 유머에는 어색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나는 반어라는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고, 사람들은 그 사실에 어리둥절해했다. 내가 남편 윌리엄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가 정말로 내 안에 있는 뭔가를 이해한다고느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내가 2학년 때 수강한 생물학 수업의 실험조교였는데, 그에게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관이 있었다.  - P38

"제러미, 가끔 여기 서 있으면 내가 정말로
뉴욕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요. 내가 여기 서서 생각을 한다는 거,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요? 내가! 바로 내가 뉴욕이라는도시에 살고 있다니요!"
그러자 그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스쳤는데 너무 순식간에너무도 무심결에 정말로 혐오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도시 사람들이 완전한 지방 출신들에게 느끼는 혐오감의 깊이를 내가 아직 깨닫지 못했을 때였다. - P50

나는 분리되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를 사랑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의 방문을 우리 둘만의 개인적인 시간으로 만든다는 것. 엄마의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에 나는 엄마가 병실에서 나간 것을 알았다. 의사는 맥박을 재려고 내 손목을 잡았고, 날마다 그러듯 흉터를 확인하기 위해 내환자복을 살며시 걷어올렸다. 그의 손가락은 굵고 아름다웠다.
나는 보석이 박히지 않은 결혼 금반지가 반짝거리는 그의 손이내 흉터 부위를 지그시 누르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는 내가 통증을 느끼는지 보려고 내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가 눈썹을치키며 아픈지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흉터는 잘 아물고있었다. "잘 아물고 있네요." 그가 말했고, 내가 "네, 알아요" 하고 말했다. 그 말에 다른 의미-내가 계속 아픈 건 흉터 때문이아니라는 의미가 담긴 거 같아 우리는 가만히 웃었다. 그 웃음이 그 어떤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인정이라는 사실, 내가 말하려는것은 그것이다. 나는 그뒤로도 늘 이남자를 기억했고, 여러 해 동안 그 병원에 그의 이름 앞으로 돈을 지불했다. - P70

헤일리 선생님에 관해 기억하는 또 한 가지는 선생님이 우리에게 인디언에 대해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그때까지 나는 우리가 속임수를 써서 그들의 땅을 빼앗았고, 그래서 블랙 호크가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몰랐었다. 백인이 인디언에게 위스키를준 사실도, 백인이 인디언의 옥수수밭에서 인디언 여자들을 죽인 사실도 몰랐었다. 나는 헤일리 선생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블랙 호크에게도 사랑을 느꼈고, 이들이 용감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는 블랙 호크가 붙잡힌 뒤 이 도시 저 도시 끌려다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 P85

마침내 나는 그 안으로 다시 밀어넣어졌다. 이번에는 클릭 소리가 제대로 났고, 작고 빨간 불빛이 깜박였다. 그들이 목에서튜브를 빼내자 나는 복도로 내보내졌다. 나는 그 순간의 기억을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엄마가 거기, 병원의 깊은 지하 어두운 대기실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피곤한지 어깨가 살짝 처져 있었지만, 세상의 모든 인내심을 발휘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엄마." 내가 조그맣게 불렀고, 엄마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여기있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쉽진 않았어." 엄마가 대답했다. "하지만 나한테도 혀가 달렸으니 그걸 썼지." - P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