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록소를 가진 엽록체는 빛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만드는 공장입니다. 빛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바꾼다는 것은 동물인 인간이 보면 정말 굉장한 일이죠. 빛을 사냥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쓴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 이유로 녹색은 생명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 P204

식물에서 가장 다채로운 색을 내는 부분은 꽃과 열매입니다.
꽃과 열매는 그저 눈에 띄기 위해 알록달록한 색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색은 흔히 유혹의 색이죠. 꽃의 수정이나 씨앗의이동을 도와줄 곤충이나 동물을 유혹하기 위해 화려한 색을 가집니다. 수레국화, 큰제비고깔 같은 푸른색과 벌노랑이, 유채꽃 같은 노란색은 벌이 좋아하는 색입니다. 석산이나 참나리처럼 붉은계열의 색은 나비가 좋아하는 색이지요. 벌과 달리 나비는 붉은색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새들도 붉은색을 좋아하는데요. 그래서동박새가 빨간 동백꽃의 수정을 돕는 것이죠. 가을 열매들이 붉은색을 많이 띠는 이유 중 하나는 붉은색이 잎의 초록색과 대비되는 색이기도 하지만,
눈이 오는 겨울에도 눈에 띄어 새들의 먹이가되어 씨앗을 퍼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P205

실제로 큰 참나무 한그루는 1년 동안 약 15만 리터, 하루에 약411리터의 물을 방출한다고 합니다. 411리터의 물이 잎을 통해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정말 장관일 겁니다. 이런 현상을 ‘증산작용‘이라고 합니다. 이 작용은 잎에 있는 작은 구멍인 기공에서 일어나는데, 기공을 통해서 물뿐만 아니라 산소와 이산화탄소도 이동합니다.  - P213

햇빛이 너무 강해 온도가 높아지고 건조해지면 오히려 식물은 기공을 닫아버립니다. 과도한 수분 손실은 식물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구온난화가 식물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기의 온도가 몇도 상승하는 것이 인간이 느끼기엔 미미한 듯 보여도 식물의 기공개폐에 크게 관여할 수 있습니다. 식물의 증산작용이 억제되면 공기 중의 수분이 줄어들어 대기의 습도를 변화시키고 점진적으로는 지구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식물의 작은 구멍이 닫히는 것이 지구에 큰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죠. - P217

그런데 식물학자들이 www를 새롭게 제시했습니다. 바로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입니다. 이는 식물과 식물 뿌리에 붙은 수많은 근균, 즉 곰팡이들이 연결되어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속 곰팡이가 인터넷 같은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죠. 일반적으로 식물과땅속 곰팡이는 공생하며 식물은 곰팡이에게 탄소를, 곰팡이는 식물에게 질소 같은 영양분을 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동시에 이곰팡이들은 식물과 식물을 연결하는 연락책으로서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환경 변화나 외부 침략자들에 대한 경고,
주변에 어떤 식물이 있는지 등의 정보를 전달합니다. - P231

우리가 쉽게 보는 식물 중에 마음을 짠하게 하는 식물은 또 있습니다. 월드컵공원, 남이섬, 담양 등에서 멋진 가로수길을 이루고 있는 메타세쿼이아입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등지에서도 사랑받는 식물입니다. 원산지는 중국이고, 측백나무과, 메타세쿼이아속에 속하는 유일한 종입니다. 메타세쿼이아도은행나무나 소철처럼 겉씨식물로 속씨식물보다 오래된 원시적인 식물입니다. 메타세쿼이아속의 종들이 더 있었지만 이들도 진화의 수순을 밟아 모두 멸종하였고, 메타세쿼이아 한 종만 살아남았습니다. 야생 메타세쿼이아는 심각한 벌채로 개체 수가 줄어들어 현재 야생에서는 멸종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 P241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은행나무, 소철, 메타세쿼이아를 그토록 흔하고 쉽게 볼 수 있는데, 자연 속에서는 희소한 존재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늘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서 흔하다 여기고 소중함을 잊게 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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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수녀원의 정식명칭은 ‘성녀 마가레트 수녀원‘이다. 교구청의 김요한 주교가 이름을 지었다. 마가레트 수녀는 12세기라인강 언덕의 자연동굴안에 들어 있던 피에타 수녀원 소속이었다. 아들의 사체를 무릎에 얹고 죄 없는 세상을 간구하던 마리아의 기도를 이어가는 것이 그 수녀원의 서원이자 일과였다. 
-<저만치 혼자서> 중에서 - P215

도라지꽃 하얀색의 먼 저쪽에서 삶이 죽음에 스며 있다는 늙은 수녀의 환상은 죽음 안에 신생을 약속하신 하느님의 뜻을 벗어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다가 김요한 주교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신학생 시절에 기숙사 뒷산에 도라지는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김요한 주교는 그 하얀색을 떠올렸다. 하얀색이 아니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색이었다. 색은 멀리서 흔들리면서 다가왔다.
색은 보이지 않는 강물처럼 시간과 공간을 흘러서 사람의 시선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자진하고 있었다. 김요한 주교는 도라지꽃에 대한 늙은 수녀의 환상에 대해서 아무런 사목 지침을내놓지 않았다. 김요한 주교는 젊은 부제들에게 말했다.
_주보에 실린 [도라지꽃 속으로]는 글이 맑더군. 글이 아니라 물이야. 다들 읽어봐. - P222

손안나 수녀는 도라지수녀원에 들어올 때 여든 살이었다. 들어오던 날 손안나 수녀는 차에서 내려서 부축받지 않고 마당을걸어왔다. 걸어올 때, 손안나 수녀는 아무런 중량이 없이 땅을스치는 것 같았다. 몸이 마르고 키가 작아져서 수도복이 헐렁했다. 검버섯이 얼굴을 덮었고 두 볼에 살이 빠져서 입술이 벌어졌다. 손안나 수녀는 이가 빠진 입을 늘 손으로 가렸고, 묵언했다.
손안나 수녀는 서른 살에 종신서원하고 미군 기지촌 성당과 시립병원,보건소, 급식소, 탁아소에서 일했다. 성당을 청소했고,
고아원과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다. - P225

맑고 서늘한 날에 손안나 수녀의 정신은 온전했다. 지나간 시간의 기억들이 고이거나 옥죄지 않아서 마음이 마르고 가벼웠다. 지나간 시간들은 스쳐가기는 했으나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은 다시 앞으로 펼쳐져 있는 듯했는데, 그 앞쪽의 시간을 건너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 날, 손안나 수녀는 지팡이 없이 수녀원 뜰을 산책했다.  - P229

고해성사와 주일 아침 일곱시 미사를 마치고, 장분도 신부는도라지수녀원으로 향했다. 마을에서 도라지수녀원까지는 조개무덤 앞을 지나는 소나무 숲길이 이어져 있었다. 장분도 신부는자전거를 타고 갔다. 조개 무덤 앞을 지날 때, 장분도 신부는 자전거에서 내려서 조개 무덤을 향해 성호를 긋고 두 손을 모았다. - P234

김루시아 수녀와 손안나 수녀는 둘 다 불면증이 깊었다. 몸이 살아서 병을 감당해내고 있었다. 병이라기보다는 시간이었다. 새벽까지 의식은 물러가지 않았고, 그 속으로 어둠이 번져서 잠과 깸은 구분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잠과 깸이 겉돌았고 벽시계가 재깍거리면서 그어둠을 찔렀다. 김루시아 수녀가 사무실 직원에게 부탁해서 벽시계를 떼어냈다. 어둠 속에서 비상호출벨 불빛 두 개가 깜박거렸다. 늪에서 잠들었던 가창오리들이 갑자기 깨어나서 날아올랐다. - P236

그것이 새어나온 아침에 김루시아 수녀는, 아, 짧게 비명을삼키면서 자리에서 몸을 꼬부렸다. 얼굴에 홍조가 올라왔다. 옆침대의 손안나 수녀는 냄새를 맡고 돌아누웠다. 돌아누워주는것이 예절이라는 것을 손안나 수녀는 알았고, 김루시아 수녀도손안나 수녀가 베푸는 예절을 알고 있었다. 김루시아 수녀는 대소변을 지린 속옷을 세탁부에게 주지 않고 손수 빨았다. 김루시아 수녀는 빨랫감을 비닐백에 넣고 복도 벽에 의지해서 목욕실로 갔다. 거기서 김루시아 수녀는 몸을 씻었다. 몸이 남 같아서,
자신의 몸이 젊었을 때 나환자촌에서 씻겨주던 환자들의 몸처럼 느껴졌다. 몸과, 그 몸을 씻기는 또다른 몸이 서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김루시아 수녀는 거기서 속옷을 빨았다. 더럽혀진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입는 편의를 김루시아 수녀는 배우지 못했다.
- P241

김루시아 수녀는 독방을 쓴 지 두 달 만에 죽었다. 부활 주간의 첫째 날이었다. 김루시아 수녀는 아침에 복도 바닥에 쓰러진사체로 발견되었다. 환자복 차림이었고 옷이 젖어 있었다. 침대에 오물이 묻어 있었고 빨랫줄에는 L자 속옷이 널려 있었다. 새벽에 대변을 지려 목욕실로 가서 몸을 씻고 속옷을 빨아서 뒷마당 빨랫줄에 널고 다시 병실로 돌아오다가 복도에서 쓰러진 것이었다. - P247

김루시아 수녀를 묻은 오후에 장분도 신부는 손안나 수녀의알아들을 수 없는 죄를 고백받고 사하여주었다. 저녁에 장신부는 자전거를 타고 어촌마을로 돌아갔다. 썰물의 갯벌에서 석양이 퍼덕였다. 조개 무덤 앞을 지날 때장분도 신부는 자전거에서내려 성호를 그었다. 밤에 김요한 주교가 장분도 신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김요한 주교는,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라고 말했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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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각시투구꽃의 비밀>에도 등장했지만, 투구꽃 종류들은 대표적인 맹독성 식물입니다. 조금만 먹어도 혈압이 떨어지고 사망에 이를수 있습니다. 이런 투구꽃 종류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자라며, 늦여름과 가을에는꺾어두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우아한꽃을 피웁니다. 아름다운 만큼 치명적인식물이죠. - P157

우리나라 산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독초는 천남성입니다. 예전에 사약을 만들 때 투구꽃과 함께 천남성을 사용했습니다. 가을이면 다닥다닥 붙어 열리는 붉은 열매와 그 아래 튼튼하고 굵은 뿌리를 보고 인삼으로 착각하여 중독사고가 발생하곤 합니다. 천남성을 먹으면 마비증세와 언어장애를 일으킵니다.
천남성의 푸르고 깨끗한 잎 때문에 가벼운 사고들이 발생하기도합니다. 천남성은 독성이 강해 벌레들이 잘 먹지 않기 때문에 가시나 털을 만들 필요가 없어 크고 넓은 잎을 마음껏 펼치며 삽니다. - P158

그렇다면 독성 식물에게는 그들을 쉽게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이 있을까요? 정답은 ‘아니요‘입니다. 버섯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초, 독버섯이라고 모습이나 색깔이 화려하다, 벌레가 꼬이지 않는다 같은 말이 있지만 사실 과학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식물은 곤충이나 동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또는 경쟁 식물들의 성장을 저해하기 위해 독을 가집니다. 다른 생물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 식물이 이런 생화학물질을 만들고 사용하는 것을 타감작용 이라고 합니다. 식물의 독은 식물의 성장, 발달, 번식에 필수요소는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비장의 무기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요. - P159

도시 재생, 지역 활성화 과정에서 지가와 임대료가 상승하여기존 주민과 상인이 내몰리게 되는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합니다. 이 현상은 최근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 여러 곳에서 화두가 되고 있지요. 최악의 젠트리피케이션은 지역 특색을잃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밀려나는 원주민, 새롭게 터를 잡은 이들까지 파산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곳은 한정되어 있고 경쟁은 불가피합니다. 이런 변화의 과정을조화롭게 해결하고, 더불어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식물의 세계에서 그 지혜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 P165

서양에서는 강한 향과매운맛을 가진 육계나무 껍질을 ‘중국 시나몬‘이라고 부르고, 단맛이 나 커피에 주로 사용하는 스리랑카 시나몬을  ‘실론 시나몬‘이라고 구분합니다. 우리가 흔히 ‘계피‘라 부르는 것은 대부분 중국 시나몬입니다.
우리나라 야생에도 녹나무속에 속하는 종들이 자랍니다. 대표적으로 녹나무가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를 보면토토로가 이 나무에서 살고 있지요. 녹나무 껍질은 계피로 이용하진 않지만, 이 나무에서는 계피 향과 비슷한 독특한 향이 납니다. 녹나무가 자라는 남쪽 지역에서는 그 향을 즐기기 위해 차를만들어 마시기도 합니다. 이처럼 녹나무과 식물들은 모두 그들만의 화학물질인 피토케미컬phytochemicals)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독특한 향을 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월계수, 아보카도, 생강나무 같은 종들도 모두 녹나무과에 속합니다. 녹나무과 식물이 향을 내는 이유 중 하나는 잎이나 줄기를 공격하는 해충을 쫓기 위해서입니다. - P174

그런데 왜소나무 아래에 다른 큰 식물들이 자라지 못할까요? 이는 소나무가 만들어 내뿜는 화학물질이 다른 식물의 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입니다. 이 화학물질이 바로 피톤치드
phytoncide입니다. 피톤치드라는 말은 파이토phyto, 즉 ‘식물의‘라는 뜻과 사이드cide, ‘죽이다‘라는 뜻이 합쳐진 말로 ‘식물을 죽이는‘이란 뜻입니다. 식물에서나오는 화학물질이 다른 생물을 죽이는 데 사용된다는 의미입니다. 피톤치드는 역설적이게도 사람에게는 이로운 물질입니다.  - P177

사실 수국과 수국백당같이 인간의 손에 의해 모습이 바뀐 식물들은 우리 주변에 흔합니다. 꽃집이나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겹꽃 가운데는 자생종, 즉 지구에 자연적으로 나타나 살아가고 있는 야생종이 아닌 경우가 많은데요. 야생에서홑꽃잎으로 살아온식물을 인간이 아름답게 느끼도록 겹꽃잎으로 바꾼 것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장미입니다. 우리가 보는 장미는 무수히 많은꽃잎이 겹겹이 겹쳐져 있지만 장미의 야생종 중 하나로 볼 수 있는 찔레는 다섯 개의 꽃잎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네이션도 마찬가집니다. 이런 원예종들로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꽃점을쳐보기도 하는데 꽃잎을 다 뜯고 나면 그 안에 암술과 수술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암술과 수술마저도 사람이 꽃잎으로 만들어버렸거나 예쁜 부분이 아니어서 없애버린 것이죠.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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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화기 내부 습도는 65~70퍼센트 사이다. 부화기는 전자동 기러기 엉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알들은 야생에서 엄마기러기가 엉덩이 아래에 품은 것과 똑같은 상태로 유지돼야하니까.
말이 쉽지 사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기러기 엉덩이는정교한 창조물이라서 적정한 온도와 습도로 이루어진 독특한 분위기를 낸다. 기계 안에서 부화가 성공하려면 전체적인 매개 변수를 온종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정확한 습도다. 습도가 너무 낮으면 알 내부의 막이 말라서조직이 가죽처럼 질겨진다. - P10

이프로젝트에는 많은 것이 걸려 있다. 아홉 마리 기러기의 목숨뿐 아니라, 비용이나 내 일의 성공 여부도 달려 있다.
기러기들은 이른바 ‘데이터 로거‘라는 것을 등에 지고 다닐 예정이다. 데이터 로거는 성냥갑만 한 측정 기구인데, 온갖 데이터를 기록한다. 이 측정 데이터의 도움을 받아 비행역학과 기체역학, 현재 대기 상황에 관해 정확하게 진술할수 있다.
이 일에 성공한다면, 몇 년 또는 몇 십 년 후에는 새와 기타 동물들이 있는 세계 여러 곳의 기류와 풍속 데이터를 얻는 일이 가능하다. 이 귀중한 정보들은 위성을 통해 자동으로 모이고, 평가를 위해 지상으로 보내질 것이다. 기상관측에서 이런 정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데, 안 그러면 지상 관측소에서 측정한 데이터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 P12

왜 하필 내가 아빠 기러기가 되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행글라이더를 조종했고, 얼마 전에는 초경량비행기 면허를 땄다. 연구소에서 누가 이 프로젝트를 맡을 것인지 문제가 되었을때, 내가 기러기 양육을 담당한다는 결정이 일찌감치 내려졌다. 모든 게 예정대로 이루어진다면, 몇 주 후에 기러기들과 함께 날것이다!
책임감과 긴장감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 P13

물건이나 사람이 부화 전후에 기러기의 인식에 새겨지는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런 과정을 ‘각인‘이라고 한다.
각인에는 소리와 외관이 중요하지만 냄새도 한몫한다. 얼마 전에 입던 티셔츠를 부화기 안에 넣었다. 신던 양말도 괜찮았을 테지만, 태어나기 전부터 새끼 기러기들을 괴롭히고싶지는 않았다. - P16

사태가 심각해진다. 아침 일곱시에 전화기가 울린다. 전화를 건 연구소 사육사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하다.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데, 그녀가 하는 말이 들린다. "알 하나가 부화하기 시작했어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이제 모험을 시작할 수 있다. - P20

새장들 뒤편, 연구소 뒤쪽의 드넓은 풀밭에는 소박한 캠핑카가 외롭게 서있다. 숲과 바로 연결되는 곳이다. 다음 몇주 동안 나는 그곳에서 기러기들과 살 것이다. 자그마한 우리 기러기 가족을 위한 도시 근교의 단독주택, 새로 꾸민 아이들 방이다. 버킹엄 궁전이 아니라 더킹엄 궁전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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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갑은 외환위기 때 이혼했다. 정부는 외국은행에서 달러를 꾸어다가 구제금융을 풀었지만 중소기업들은 부도의 쓰나미에
쓸려나갔다. 연매출 십육억 정도를 올리던 이춘갑의 구두공장은 초기에 무너졌다. 어음은 연쇄부도로 꽝이 되었고 유통업자들이 잠적하자 물건은 묶였고 판매 대금은 증발했다. 영업 이윤은 전망이 전무했는데 은행은 신규 대출을 중단했다. -<저녁 내기 장기> - P93

이춘갑은 오개남과사흘째장기를 두고 있었다. 오개남은 겨우내 오리털 파카에 등산화를 신고 귀덮개가 달린 털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장기판에 모이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대개 비슷했다. 이춘갑은 오개남과 통성명했지만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고, 오개남도 마찬가지였다. - P96

오개남은 1·4후퇴 이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태어났다.
남쪽에서 태어났으므로 남쪽을 열어젖히라고 이름을 개이라고 했다는데, 뜬구름 같은 소리였다. ‘개남‘은 ‘야‘와 마찬가지였다. 일이 없는 날 공원에서 장기를 둘 때도 장기판 사람들은다들 이름이 없었지만 장기를 두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 P102

이춘갑은 부도난 지 이년만에 채무를 면책받았다. 부도난어음으로는 만기가 다가오는 어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닥쳐오는 부도는 지나간 부도 속에 잠복해 있었고 영남의 부도가 호남의 부도에 포개져서 부도는 파도로 밀려왔는데, 법원은 잇단 부도들의 상관관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법원은 이춘갑의 채무 변제 과정이 신의 성실의 원칙에 부합된다고 인정하고 면책을 허가했다.  - P105

휴먼타운 오피스텔 일층에 점포를 계약할 때 이춘갑은 권리금 일억을 깔았다. 모아둔 돈이 있어서 가게를 얻은 것이 아니라. 돈이 갑자기 생겨서 가게를 얻을 생각을 했다. ‘갑자기‘라기보다는 저절로 그렇게 되어지는구나 싶었다.
전 아내가 이혼 위자료 명목으로 받은 아파트를 처분해서 매매가의 반액을 온라인으로 보내왔다. 이혼한 지 오 년이 지났는데도 전 아내는 전에 쓰던 통장 번호를 알고 있었다. - P112

이준갑은 다섯시 삼십분에 제생병원 영안실에 도착했다. 시간이 일러서 영안실은 썰렁했다. 영정사진 속의 전 아내는 앞머리 한 가닥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와 있고, 시선은 사진틀 밖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날려서, 영정 속에 바람이 부는 듯했다. 빈소에 김영자의 새 남편은 보이지 않았고, 아들은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이춘갑은 흰 봉투에 십만원을 넣고 겉봉에 "왕생, 이춘갑‘이라고 썼다. 이춘갑은 봉투를 부의함에 넣고영정 앞으로 나가서 두번절했다. 맞절을 할 상주가 없는 것이다행으로 여겨졌다. 김영자의 남동생 내외가이춘갑을 알아보았다. - P119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으려니까 삼 년 전 잘라낸 자리에 다시 용종이 돋아나지는 않았을지 싶어서 불안하기도 했는데, 마취에서 깨어나는 한두 시간 동안 나를 ‘보호해줄 사람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병원에 전화해서 내가 일흔 살이 넘기는 했지만 아직도 멀쩡하니까 보호자 없이 검사받게 해달라고 떼를썼다.

_안 됩니다. 우리 병원 규칙입니다. 그게 뭐가 어렵습니까.
요즘 알바로 그거 하는 사람들 많아요.
라고 병원 직원은 말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내 아파트에 와서 청소해주는 도우미 여자에게 ‘보호자‘ 역할을 부탁했다.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 P124

나은희의 편지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발송되어서 나의 전직장인 오션블루에 도착했고, 비서실 직원이 나의 주소로 우송했다. 꼽아보니 나은희가 미국으로 간 것은 사십 년 전인데, 구석기시대처럼 오래된 과거로 느껴졌다. 시간이 지워진 자리에 세종로, 덕수궁 돌담길의 추위와 그 거리에서 함께 먹던 뜨거운 우동 국물이 떠올랐다.
나은희는 서울에서 종합병원 응급실 간호사로 일하다가 연봉이 더 많은 미국 병원에 취직해서 이민 갔다. -<대장 내시경 검사> 중에서 - P127

_사십년만에 처음편지해서 아들 취직 부탁하는 꼴이 되어서 염치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이제 이렇게 떼를써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동안 윤수씨나 저나 서로 소식 전하고 살 처지가 아니었지요. 지나고 나니까 편안해지네요.
라고 나은희는 편지에 썼다. - P129

대장 내시경 검사는 일 년에 한 번 하는 종합검진 프로그램의선택 사항이었다. 종합검진은 매년 12월에 했는데, 검진 때가다가오면 나는 밀린 일들을 서둘러 처리했다. 검진 결과 암 같은난치병의 중증 진단을 받게 되는 경우에 대비하려는 심사였는데,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되었다. - P135

나는 식당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저절로그렇게 되었다.
식당 문 오른쪽 자리에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모여 앉아있었고, 월롱동은 그 자리에 있었다. 월롱동은 뒷모습만 보였다.
나는 사람들 틈으로 뒷모습만 보고도 나의 전처, 월롱동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떤 특징이 그런 식별을 가능케 하는지는 알 수없었으나, 전처 월롱동은 확실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나간세월의 돌이킬 수 없는 갈등과 불화가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앉아 있는 그 모습은 익숙한 만큼 낯설었다. 월 거스를 수없는 그 시간의 무게를 모두 깔고 앉듯이 문상객들 틈에 앉아 있었다. 남의 뒷모습이 마음속에 새겨진 듯이 익숙하게 느껴지는사태는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월롱동도 내가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까, 월롱동도 알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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