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갑은 외환위기 때 이혼했다. 정부는 외국은행에서 달러를 꾸어다가 구제금융을 풀었지만 중소기업들은 부도의 쓰나미에 쓸려나갔다. 연매출 십육억 정도를 올리던 이춘갑의 구두공장은 초기에 무너졌다. 어음은 연쇄부도로 꽝이 되었고 유통업자들이 잠적하자 물건은 묶였고 판매 대금은 증발했다. 영업 이윤은 전망이 전무했는데 은행은 신규 대출을 중단했다. -<저녁 내기 장기> - P93
이춘갑은 오개남과사흘째장기를 두고 있었다. 오개남은 겨우내 오리털 파카에 등산화를 신고 귀덮개가 달린 털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장기판에 모이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대개 비슷했다. 이춘갑은 오개남과 통성명했지만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고, 오개남도 마찬가지였다. - P96
오개남은 1·4후퇴 이후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태어났다. 남쪽에서 태어났으므로 남쪽을 열어젖히라고 이름을 개이라고 했다는데, 뜬구름 같은 소리였다. ‘개남‘은 ‘야‘와 마찬가지였다. 일이 없는 날 공원에서 장기를 둘 때도 장기판 사람들은다들 이름이 없었지만 장기를 두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 P102
이춘갑은 부도난 지 이년만에 채무를 면책받았다. 부도난어음으로는 만기가 다가오는 어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닥쳐오는 부도는 지나간 부도 속에 잠복해 있었고 영남의 부도가 호남의 부도에 포개져서 부도는 파도로 밀려왔는데, 법원은 잇단 부도들의 상관관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법원은 이춘갑의 채무 변제 과정이 신의 성실의 원칙에 부합된다고 인정하고 면책을 허가했다. - P105
휴먼타운 오피스텔 일층에 점포를 계약할 때 이춘갑은 권리금 일억을 깔았다. 모아둔 돈이 있어서 가게를 얻은 것이 아니라. 돈이 갑자기 생겨서 가게를 얻을 생각을 했다. ‘갑자기‘라기보다는 저절로 그렇게 되어지는구나 싶었다. 전 아내가 이혼 위자료 명목으로 받은 아파트를 처분해서 매매가의 반액을 온라인으로 보내왔다. 이혼한 지 오 년이 지났는데도 전 아내는 전에 쓰던 통장 번호를 알고 있었다. - P112
이준갑은 다섯시 삼십분에 제생병원 영안실에 도착했다. 시간이 일러서 영안실은 썰렁했다. 영정사진 속의 전 아내는 앞머리 한 가닥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와 있고, 시선은 사진틀 밖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날려서, 영정 속에 바람이 부는 듯했다. 빈소에 김영자의 새 남편은 보이지 않았고, 아들은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이춘갑은 흰 봉투에 십만원을 넣고 겉봉에 "왕생, 이춘갑‘이라고 썼다. 이춘갑은 봉투를 부의함에 넣고영정 앞으로 나가서 두번절했다. 맞절을 할 상주가 없는 것이다행으로 여겨졌다. 김영자의 남동생 내외가이춘갑을 알아보았다. - P119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으려니까 삼 년 전 잘라낸 자리에 다시 용종이 돋아나지는 않았을지 싶어서 불안하기도 했는데, 마취에서 깨어나는 한두 시간 동안 나를 ‘보호해줄 사람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병원에 전화해서 내가 일흔 살이 넘기는 했지만 아직도 멀쩡하니까 보호자 없이 검사받게 해달라고 떼를썼다.
_안 됩니다. 우리 병원 규칙입니다. 그게 뭐가 어렵습니까. 요즘 알바로 그거 하는 사람들 많아요. 라고 병원 직원은 말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내 아파트에 와서 청소해주는 도우미 여자에게 ‘보호자‘ 역할을 부탁했다.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 P124
나은희의 편지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발송되어서 나의 전직장인 오션블루에 도착했고, 비서실 직원이 나의 주소로 우송했다. 꼽아보니 나은희가 미국으로 간 것은 사십 년 전인데, 구석기시대처럼 오래된 과거로 느껴졌다. 시간이 지워진 자리에 세종로, 덕수궁 돌담길의 추위와 그 거리에서 함께 먹던 뜨거운 우동 국물이 떠올랐다. 나은희는 서울에서 종합병원 응급실 간호사로 일하다가 연봉이 더 많은 미국 병원에 취직해서 이민 갔다. -<대장 내시경 검사> 중에서 - P127
_사십년만에 처음편지해서 아들 취직 부탁하는 꼴이 되어서 염치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이제 이렇게 떼를써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동안 윤수씨나 저나 서로 소식 전하고 살 처지가 아니었지요. 지나고 나니까 편안해지네요. 라고 나은희는 편지에 썼다. - P129
대장 내시경 검사는 일 년에 한 번 하는 종합검진 프로그램의선택 사항이었다. 종합검진은 매년 12월에 했는데, 검진 때가다가오면 나는 밀린 일들을 서둘러 처리했다. 검진 결과 암 같은난치병의 중증 진단을 받게 되는 경우에 대비하려는 심사였는데,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되었다. - P135
나는 식당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저절로그렇게 되었다. 식당 문 오른쪽 자리에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모여 앉아있었고, 월롱동은 그 자리에 있었다. 월롱동은 뒷모습만 보였다. 나는 사람들 틈으로 뒷모습만 보고도 나의 전처, 월롱동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떤 특징이 그런 식별을 가능케 하는지는 알 수없었으나, 전처 월롱동은 확실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나간세월의 돌이킬 수 없는 갈등과 불화가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앉아 있는 그 모습은 익숙한 만큼 낯설었다. 월 거스를 수없는 그 시간의 무게를 모두 깔고 앉듯이 문상객들 틈에 앉아 있었다. 남의 뒷모습이 마음속에 새겨진 듯이 익숙하게 느껴지는사태는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월롱동도 내가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까, 월롱동도 알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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