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제 몸은 점점 그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명준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실감이 났다. 몸이죽기로 결정하면 그가 계속 살아갈 방법은 없었다. 과연 몸이 죽기로 결정하는 순간을 자신이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 사흘 동안.
명준에게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불안했기에 그는 친구들에게 전화와 문자로 자신이 백신을 맞았다는 사실을 떠벌렸다. 부작용으로 죽는 건 어쩔 수 없겠으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고 싶지는않았다. 혼자 살기 시작한 지도 이제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런 식의 외로움은 처음이었다. 태어날 때 엄마가 필요했던 것처럼, 죽을 때도 누군가 필요한 것일까? 기쁨으로 탄생을 확인해준 사람처럼, 슬픔으로 죽음을 확인해줄 사람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음은 인식이끊어지는 순간까지 유예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살아 있는것이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 - P133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뭔가를 쓰는 듯하더니 노래를 흥얼거렸다. 모르는 노래였는데도 첫 소절을 듣자마자 명준은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엄마 없는 아이는 사랑도 없으니까말없이, 그저 말없이 바람 노래 들어보네."
명준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서 그 노래를 고스란히 다 들었다. 그해 봄, 그의 엄마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진단이 떨어지고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자신을 지나쳐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으니 명준은 부모의 사랑을 잔뜩 받고 성장한 운좋은 아이였다. 갑자기 엄마가 죽는다면, 또는 아빠가 죽는다면,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엄마가죽는다는 현실에 직면하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좋은 생각, 더나은 상상을 해보는 것뿐이었다. 그즈음 그는 쫓기듯 병실을 나와엘리베이터를 가득 메운, 환자복을 입고 링거병을 든 사람들과 피곤에 지친 얼굴의 젊은 레지던트와 무엇이 못마땅한지 잔뜩 낮을찌푸린 할아버지 사이에 끼어 일층으로 내려간 뒤, 회전문을 나서자마자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엄마 없는 아이들> 중에서 - P145

그래, 바로 그 배야.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로 가는 여객선. 난생처음 그렇게 오랫동안
배를 탄 거였는데 출항 직후부터 멀미가 나기 시작하더라. 한잠도 못 잘 정도로 고생했어. 속이 울렁거려서 누워 있을 수가 없었거든. 식당으로 가서 밤새 탁자에 몸을 기댄 채 둥근창밖만 내다봤지. 거기에는 그저 어둠뿐이었어. 세상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그저 캄캄한 밤바다. 그런데 가만히 바라보노라니까그 어둠 속에도 수평선이 있어서 어둠과 어둠이 그 수평선을 가운데 두고 서로 뒤섞이는 거였어. 제주로 가는 길에 대한 기억이라면 그것뿐이야. 캄캄한 밤바다, 경계를 무너뜨리며 서로 뒤섞이는 두 개의 어둠.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중에서 - P1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 인물이 모였을 때는 대체로 은하가 고른 노래가 흘렀는데, 다양한 장르의 음악 사이로 몇 가지 요소가 느슨하게 이어졌다가 흩어지기를반복했다. 이를테면,
비밀을 품은 방정식이 적힌 티셔츠
조각을 모아 완성한 홈 케이크
가족의 굴레
첩보원과 스파이
과로와 불안
쌍둥이
슈퍼 파워와 스판덱스 슈트
신들의 섬
심장마비와 부활

그리고
리메이크, 리부트, 스핀오프
-작가의 말 중에서
그리고 하나 더
샛노란 간판이 달린 디저트 카페
조각을 모아 완성한 홈 케이크는 샛노란 간판이 달린 카페에서 산거니까...

성지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실은 김 감독이 하는 말보다 그녀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 신경이 쓰였다. 이런우연이 다 있나 싶었다. 마침본관에서 음료를 받아 온 기운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 점부터 언급했다. - P258

엉덩이까지 넉넉하게 덮는 길이에 적당한 두께로 더 없이 편하면서도 천재의 필체로 휘갈겨 쓴 듯한 방정식이 프린팅되어 독특한 멋이 있는 그 티셔츠는 성지가 가장 즐겨 입는 옷이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 알 수 없어답답해하던 것이기도 했다. 누군가 그 부분의 기억을 말끔히 지운 것처럼 샀는지 선물로 받았는지조차 특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티셔츠의 라벨에는 브랜드가 적혀 있지 않았다. 스타일리스트도 어느 회사 제품인지 감이 오지않는다고 해서 지금껏 막연히 빈티지 제품이겠거니 추측하던 옷이었다. 그랬건만 김 감독이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굳이 차이점을 꼽자면 자주 입어 물이 빠진 것 때문에성지 쪽 티셔츠 색감이 바래 있다는 것뿐이었다. - P259

캐릭터 설정을하던 즈음 접한 영화 속에서 성지가 구급대원을 연기하는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성지의 인터뷰를 찾아보고는 삼십대에 들어서면서 배우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애썼다고 고백하는 덤덤하게도 단단하게도 보이는 모습에 이 사람이다 싶었다. <사막의 연인> 리부트 버전의 영화 예고편에서 스판덱스 슈트를 입은 성지를 보고는운명을 느꼈다. 혼자 앞서 나가서 민망하지만 달리 표현할단어가 없다고 김 감독은 말했다. - P262

‘케이크도 마음에 들어야 될 텐데."
은하가 샛노란 상자를 열자 여덟 조각을 이어서 하나의 원을 만든 케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민주는 어떤 종류를 원하는지 물어봤을 때 티라미수인지 생크림 쪽인지 대답을 망설였던 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준비해준 거냐며 감탄했다.
은하는 겸연쩍은 미소를 짓더니 "그 영향도 있고, 나도 의지를 다지려고"라고 대답했다. - P2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까만 단발에 권태와 장난기가 동시에 읽히는 묘한 표정, 마구 휘갈겨 쓴 듯한 방정식이 적힌 낡은 티셔츠를 입은그녀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영화 포스터를 통해 한동안 자주 보았던 것이다. 그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고 여겼던 그녀를 영상으로 접하자 비로소 직접 알고 지내던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 닥쳐!"라는 대사를 내뱉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는 의구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은하는 그녀의 이름을 단박에 떠올리지는 못했다. - P194

화면 속 영화 평론가는 그녀가 맡은 역을 올 한 해 영화속에 등장한 인물 중 최고의 신스틸러로 꼽았다. 스판덱스슈트를 입고 폼 잡는 히어로들 사이에서 늘어진 티셔츠 차림으로 농담을 던지며 세상을 구하는 새로운 영웅의 모습을 오랜 무명의 설움 끝에 빛을 보게 된 성지의 연기를 놓치지 말라며 연신 찬사를 보냈다. - P195

"영화 평론가가 올해 최고의 신스틸러라고 하던데? 그 영화에서 네가 입고 나온 티셔츠에 적혀 있는 방정식, 거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사람들이 되게 궁금해한다면서?" 은하가방금 전에 검색한 내용을 떠올리며 묻자 성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응. 그 안에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거든" 하고 말했다.
"와, 우주의 비밀이 씌어져 있는 줄은 몰랐네." 은하가 웃었다.
‘그것만 잘 풀면 언제든 다른 차원으로 점프할 수가 있거든 영화 보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짐작 갈 거야. 보고서 주변에도 홍보 좀 많이 해줘."
"그럼, 꼭 볼게." - P1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영미는 미디어로 접한 장국영의 영화와 노래에 매료되어 그 가치를 재평가하고 장국영을 단순한
‘스타‘에서 ‘예술가‘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전통적인 남성상에 대한 관념이 무너지면서 장국영의 다양한 매력이 더욱 주목 받게 되었고, 당시의 보수적인사회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많은 작품이 새롭게조명되었다. 이들은 그 시절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던 장국영과 그의 작품이 가진 가치를 이제라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후영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장국영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주체적 자아의식‘의 메시지를 ‘장국영 정신‘으로 이름 짓고 이를 지속적으로 계승해야 할 가치로 받아들였다. 나아가 이러한 ‘장국영 정신‘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는 ‘계승자‘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를 실천해가고 있었다. - P127

꺼거가 영화배우로서 또 가수로서 거둔 많은성과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는 선배로서, 동료로서, 친구로서 많은 사람을 사랑했고, 그들의 든든한후원자가 되어주었다. 늘 우아했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완벽주의자였지만 겸손했고, 자존심이 강했지만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저물어가는 홍콩의영화 산업을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러면서도 자신의외연을 넓히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 P128

春夏秋冬核根好,你若尙在场 봄 여름 가을겨울이 얼마나 좋을까, 그대가 여전히 함께한다면 - P153

그리고 감히 생각한다. 앞으로 다시 10년, 20년이 흘러도 우리의 보물찾기는 계속될 거라고. 누군가는 꺼거를 잊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새롭게 꺼거를 기억하리라. 꺼거에 대한 팬들의 사랑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 P1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 차례야, 어서와."
내가 시디 케이스를 열지 못하고 있으니까옆에 서 있던 언니가 "내가 가져다줄게" 하고시디를 가지고 갔어.
"아이고, 이건 내가 가지고 가지."
그 옆에 있던 아저씨가 한숨인지 놀라움인지모를 감탄사를 내뱉으며 내 선물을 가지고 갔어.
"어!"
오빠와 난 그렇게 마주 섰어. 우리 사이에 어느누구도. 그 어떤 것도 없이, 그렇게 마주하게 된거야. 열심히 사인을 하는 오빠의 모습이 꿈을 꾸는 듯, 영화를 보는 듯 그랬어. 고개를 들고 내게 사인한 시디 재킷을 건네면서 웃어주는 오빠에게 나는 불쑥 손을 내밀었어. 근데 그만 손이 부딪혀 재킷이 떨어져 버렸어. 앗!!! 악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디 재킷을 받는것도 잊어버린거야. 어쩜 좋아. 근데 고개를 든 오빠는 더욱더 환하게, 크게 웃고 있었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아줬어. 내 손을... - P42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경호원들이 나타나더니 눈이 부시게 하얀 슈트를 갖춰 입은 꺼거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사람 등뒤에서 빛이 난다는 게 무엇인지 처음 알았다. 순정만화에나 나올 법한 그 뽀얗고 환한 후광이 실제로존재한다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꺼거가 입은 흰 슈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말 그대로 콩깍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꺄악!" - P50

수업이 끝나고 우르르 몰려 나가는 무리에 섞여 밖으로 나왔다. 봄을 맞은 베이징의 하늘은 맑았고 봄바람이 따스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아이들을 밀쳐내며 신문과 잡지를 파는 가판대로 향했다.
그런데 굳이 가까이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난히 검은색이 많이 칠해진 신문의 헤드라인.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쓴 ‘장국영‘ 세 글자가엄청난 크기로 클로즈업됐다.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울지 않아도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장국영,
이 이름 하나로 그해 참 많은 사람이 울었다. - P65

주룽에서 홍콩섬으로 넘어오는 페리에서 저 멀리 만다린오리엔탈호텔이 보일 때면, 이제는 적응을할 만도 한데 여지없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곤 했다. 아무렇지 않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도 불쑥불쑥 예고 없이 호텔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나도모르게 흠칫 놀라게 된다.
하루는 큰맘 먹고 만다린오리엔탈호텔 피트니스센터가 있는 24층으로 올라갔다. 터질 것처럼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24층에 도착했지만, 차마엘리베이터 앞에서 두어발 이상을 내딛지 못하고그저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다 다시 내려왔다. 아직은..… 어쩔 수 없나 보다. - P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