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시가 지난 후의 기숙사 문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여간 공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경건 점수가 모자라면 졸업하는 데 지장이 있을 거라는 식의 협박성 잔소리를 들어야 하고, 장문의 사유서와 각서를 함께 써서 제출해야 했다. 그의 애인은 그 사실을 잘알고 있기 때문에 되도록 빨리 돌려보내려고 하지만 부길은 그런 애인의 노력을 무시했다. 그녀는 억지로 등을 떠밀다시피 하며 그의 손에 택시비를 쥐여주었다. 그 돈은 택시비를 하고도 남는 액수였다. 그런 방법으로 여자는 자주 그에게 용돈을 주었다. 책 사서봐. 하고 말하기도 하고 보다 직접적으로, 용돈 없지? 하고 묻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남자는 머뭇거리면서도 결국 그걸 받았다. 마치 내키지 않으면서도 그의 어머니가 내미는 돈봉투를 어쩔 수 없이 받았던 것처럼. - P259

형식이 내용에 끼치는 영향은 무시되어선 안 된다. 대체로 행동은 의식의 사주를 받지만, 의식이 행동에 의해 결정되는 수도 종종 있다. - P259

반복된 행동은 의식의 방향을 틀기도 한다. 이런 관계가 남자의 정신에 표나지 않은 굴욕감 같은 것을 심어주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똑같은 유형으로 만나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연인들은 오누이처럼 만나고, 어떤 연인들은 친구처럼 산다. 부녀처럼, 또는 모자처럼 지내는 연인도 없지 않다. 애초에 설정된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 P260

박부길은 여자 앞에서 늘 너무 조급했다. 불안하고 초조해했다.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 이성을 잃고 흥분하는 일이 잦았다. 그 흥분은 대개 자기 가슴속에서 자체 생산된 것이었다. 흥분하는 사람은 상황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기능을 잃어버린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흥분해 있는 가슴만을 본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도무지 배려하려 하지 않는다. 그럴 여유가 없다. 연인앞에서 연인은 똑바로 서야 하는데, 그는 그러지 못했다. 이 관계는 불안하다. 그래서 사고가 생긴다. - P260

그는 최교수의 쾌활한 웃음, 그 웃음이 품고 있는 일종의 건강과 여유 앞에서 설명할 수 없는 치욕을 느꼈다. 그 치욕의 내용은 질투였을까? 그는 그 교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왜 그 교수를 싫어했을까?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그 교수가 가지고 있기때문이 아니었을까. 
싫어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부러워한다는 뜻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가장 비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사람이 가장 크게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저절로 알게 되지 않던가. - P296

어쨌거나 그 순간에 그가 느낀 것은 치욕이었다. 그녀는 그를 치욕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순간에 그는 그렇게 느꼈다. 그 사실은 부정될 수 없었다. 그녀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부터 그의 강박은 엉뚱한 사념에 편집적으로 매달렸다. - P297

 그의 얼굴 표정은 그녀가 뒤에서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것은 거의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아, 얼굴은 왜 그렇게 단순해서 내부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일까. 어떤 교수와 ‘노닥거리느라 한 시간 동안 기다리게 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거기다가 그녀는 교수가 자기를 전부터 유난히 예뻐했다는 말도 했다. 그 말은 그의 불타오르는 감정에 기름을 부었다. 그녀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때 그의 내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미 이성이 아니었으므로, 최소한의 분별과 판단을 주도할 이성은그의 내부에서 쫓겨나고 없었다. - P297

이해할 수 있을까. 이 경우 한없이 가파르고 말할 수 없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마련인 폐쇄적인 남자의 강박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그 가파름. 그 극단적 의식이 뚫어내는 변칙적인 공격성의 음침한 쥐구멍을...... - P298

생각이 한쪽으로 몰리면 다른 출구들이 닫혀버린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밀고 나가게 되는 절박한 상황이 있다. 그곳 말고는 달리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갈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내달리게 되는. 그리하여 도무지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상식은 선 위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안전하다. 그러나 그 선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상식 밖에서는 상식에게 호소할 수 없다. 그곳에서는 파격이 상식이 된다.
 편집적인 생각은 편집적인 길을 뚫는다. 그런 일이 발생하려는 순간에도 자각이 아주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렴풋하지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또는 하려 한다는) 걸 인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힘을 막으려는 희미한 반동도 일어나기는 한다. 그런 뜻에서 술꾼들이 경험하는 ‘필름이 끊어지는‘ 상태와 이것은 다르다. 여기서는 필름이 돌아간다. 단지 필름을 중지시키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문제다. 길이 아닌 곳을 향해 몸을 던지는 난처한 상황을 빤히 목도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바로 절망이다. - P298

나의 사랑은 그런 식이었다. 사랑은 평화를 향해 가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말은 사랑하는 사람이 감정의 상태에 얽매여선 안 된다는 뜻을 함축하는 것 같다. 감정은 도무지 평화의 상태를 지향하는 법이 없으므로. 그러나 나의 사랑은 평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사랑은 너무 아슬아슬하고 가학적이었다. 그랬다. 나는 사랑을 전쟁처럼 하고 있었다. (「그런 사랑」, 산문집 『이정표』, 209쪽)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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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잘치르세요종단‘
이 짧은 문장은 기억될 가치가 있다. 이 문장은 몇 가지 사실을시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 하나는 이 너무나 평범하고 지극히일상적인 것 같은 인사말이 그때로서는 가장 시급한 통신수단이었던 전보용지에 적혀 배달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는 무슨 큰 시험을 치를 일이 있었던가. 이를테면 사법고시나 외무고시 같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이 전보를 받은 것은 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앞두고 있을 때였다. 그는 그때 도서관에서 반납받은 도서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전보가 왔다고 알려준 사람은 룸메이트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는 그 전갈을 받고 무의식적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보았는데, 시간은 저녁 여덟시를 지나고 있었다. - P246

요즘은 축하 전보라는 것도 생기고 하여 사정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전보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뜻밖의 변고나 불길함의 사신처럼 인식되었다. 전보로 알려야 할 정도의 시급한 일은 대개 좋지 않은 일인 경우가 많았다. 박부길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보가 왔다는 소식은 그를 당황하게 했다. 문득 그는 누군가 구체적으로는 어머니의 변고를 예감했었다. 설마하니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식의 장난기가 묻어나는 전보를 보내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너무나 뜻밖이어서 전보용지를 받아 읽으면서도 잘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 P247

믿어지지 않음, 이야말로 감격의 조건이다. 믿어지지 않았다는것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의 뜻밖의 실현은 사람을 감격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붙이기에 충분하다. 감격의 요인은 실현된 일의 내용(크거나 중요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실현된 형식에 있다. 갑작스러움과 의외성이 우리를 감격시킨다. 결코 경망스러운 편이 아닌 그녀가 그런 식의 사사로운 인사말을 전보라는 수단을 동원해서 알린 이 의외의 사건은 무엇을시사하는가. 그녀는 그를 감격시키려고 했던 것일까?음.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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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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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 정유정
역시 정유정.. 가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구나
감탄하며 읽었다.
인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서사를 쌓아나가는 과정이 탄탄하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전개가 되어서 책장이 넘어가는게 아깝게 느껴졌다.

‘롤라‘라고 하는 가상의 공간에서 체험하는 세상이
영원한 천국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하지만 그곳이 천국은 아닐지라도 삶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 싶은 사람들에게 가상의 공간으로서의 천국은 일상화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완전한 행복》에 이은 욕망 3부작의 두번째 작품이니 마지막 완결편도 빠른 시일 내에 출간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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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가 나가던 날, 큰아버지는 그를 앞장세웠다. 그는 다른 친척들과 함께 상여 뒤를 따라 장지까지 갔다. 모두들 숙연한 얼굴이었고, 이상스럽게 조용했다. 곡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슬픈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없었다. - P80

큰아버지가 그의 손에 삽을 쥐여주었다. 그는 처음 겪는 일이었고, 당연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흙을 퍼서 관 위에 뿌리라는 주문을 받고 나서 그는 조금 멈칫거렸다. 사람들은 삥 둘러서서 그가 행동하기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야릇한 눈길들 속에서그는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자신이, 적어도 그 순간, 거기 모인 사람들에 의해서, 매우 특별한 존재로 구별되고 있다는 인식이 그것이었다. 그는 그들과 달랐다. 그들은 그와 달랐다. 적어도 그들의
표정은 그렇게 선언하고 있었다. 너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네가 아니다...... 살아가면서 그가 종종 경험하곤 했던, 세계로부터 이탈되어 나가는 듯한 걷잡을 길 없는 소외감이 그때 처음으로 그를 찾아왔다. - P80

그는 온몸을 빠르게 관통하는 전율에 사로잡혀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계를 상대로 맞서 있는 한 왜소한 개체의 외로움이 그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에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조용히 떨어졌다. 그 한 방울의 눈물을 타고 몸속의 기가 모조리 순식간에 빠져나가버렸다. 그는 맥없이 자리에 쓰러졌다. 필시 사람들은 오해했다.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고, 감정을 누르며 코를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또 애써 소리 죽인 이런 말도 들렸다.
"불쌍한 것...... 다 알고 있었던가보지………
"그러게나. 이제 저 아이를 어쩔꼬......" - P81

물론 오만이다. 모든 오만의 기본적인 정서는 슬픔과 울분, 또는 슬픈 울분이고 그 뿌리는 좌절감임을 나는 안다. 키가 작아 포도를 따먹을 수 없을 때 어떤 여우는 ‘저 포도는 시다‘라고 말하며 돌아선다. 다른 여우는 ‘포도 따위는 저열한 족속들이나 따먹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돌아선다. 돌아서는 행위는 같지만, 두 경우의 동기는 미묘하게 다르다. - P131

아마도 나는 후자의 여우 편이었으리라. 세상과 나는 맞지 않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너무 추월해버렸기 때문이라는 편집증적인 생각의 한가운데서 좌절감과 울분이 뒤섞인 오만의 안쓰러운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증거도 있다. 가난과 외로움과 근거 없는 적대감의 나날. 그것들은 그 시절 내 삶의 목록이었다. 내 삶의 전부였다. 그것 말고는 달리 가진 것이 없었다. 
아, 빚도 재산이라고 한다면 그런 뜻에서 그것들은 나의 재산이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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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너무 흔하고 친근했다. 어느 집에서 초상이 나면 마을전체가 떠들썩했다. 따라 죽지 못한 후손들의 육체에 씌워진 성긴 의상과 그들의 곡소리만 아니라면, 분주하고 왁자지껄한 모습이 흡사 잔칫집이나 한가지였다. 실제로 어린아이들 눈에는 혼인집과 초상집이 잘 구별되지 않았다. 상여가 마을을 빠져나갈 때 그긴 만장과 사람의 행렬은 아이들을 매혹시켰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야단맞으면서도 그 상여의 행렬을 따라가곤 했다. 죽음은 어떤 걱정도 주지 않았다. 어린 박부길에겐 더욱 그랬다. 삶이 그런것처럼 죽음도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 - P68

뒤란의 남자가 마침내 죽었다. 감나무가 밤새 내린 서리를 맞고빨갛게 익은 감을 서너 개씩 떨어뜨리던 가을날 아침이었다. 어느날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난 박부길이 가만가만 뒤뜰로 돌아갈 때만 해도, 그는 떨어진 감을 주울 생각만 했고, 뒤란에 무슨 일이 벌어져 있으리라는 상상 같은 것은 할 수가 없었다. 박부길씨는 그날의 기억을 더듬는 대목에서 또 몹시 망설였다. - P68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겁니다. 뒤채의 방문이 열려 있고, 몸이 반쯤 문지방을 넘어온 채로 그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땅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습니다. 피는 땅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서로 엉겨붙어 웅크리고 있었지요. 나는 보았습니다. 피는 그의 오른쪽 손목에서 나오고있었습니다. 그의 다른 쪽 손에 들린 것은 어이없게도 손톱깎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숨막히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손톱깎이는.......
왜냐하면 그 손톱깎이는 큰아버지의 책상서랍에 넣어져 있었는데, 그가 그 전날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부길이는 참 착하구나."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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