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로서는 절대 알지 못했을 작품을 읽게 된 거다. 참 감사한 일이다!










1
이 반석 위에서
잘난 체하는 건 좋지 않지만, 애초의 내 계획은 완벽했다. 나는 미주리주의 오자크 호수에서 열리는 크로스오버페스티벌을 취재하는 일을 맡았다. 
중서부의 외진 곳에 있는한 야외 행사장에서 사흘 동안 정상급의 크리스천 밴드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이들이 모이는 행사였다.  - P11

오르는 길은 멀고 가팔랐다. 꼭대기에는 뒷마당의 데크같은 게 설치되어 있었다. 데크는 계곡 쪽으로 삐져나와 그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 전망을 제공했다. 아이들이 마치 여우원숭이들처럼 난간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양해를 구하며 가장자리까지 다가갔다. 바로 밑은절벽이었다. 어두울 무렵이었는데, 갑자기 더 어두워지더니아주 캄캄해졌다. 무대 양쪽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 P70

핀으로 뚫은 구멍으로 새어나오는 것 같은 작은 불빛들이 나타나 통로를 따라 움직였다. 어렸을 때 우리도 크리스마스이브에 교회에서 이런 촛불 의식을 하곤 했다.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부터 불을 밝히고, 점점 가운데로 번져 들어오는 것이다. 촛불은 기하급수적으로 번지는데, 그 효과는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마지막에 가면 절반의 사람들이 나머지 절반이 들고 있는 초에 불을 붙이면서 마치 누군가가 스위치를 올린 것처럼 보인다. 지금도 딱 그랬다. - P71

구름이 걷히면서 밝은 별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의 나무들에는 온통 반딧불이 천지였고, 내 앞과 저 멀리아래에는 타오르는 촛불들의 작은 불꽃 수만 개가 카펫처럼펼쳐져 있었다. 나는 점멸하는 불빛들로 가득한 어둠의 영토안에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 P71

물론 나는 뉘른베르크*를 떠올렸다. 하지만 거기 있었던 동안의 대부분은 데리어스, 제이크, 조시, 법, 리터, 그리고 피위에 대해 생각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이들, 내가 사랑하게 된 이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데리어스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말은 내가 여기에 쓴 내용 가운데 가장 진실한 말일 것이다. 그들은 미쳤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했다.

*뉘른베르크: 신성로마제국 시대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도시이자 독일 중앙부에 위치한 도시라 나치가 전당대회 개최지로 활용했다. 대형 군중 집
회들이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 P71

그리고 나로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그 일의 완전무결한 숭고함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안다는것과, 만약 그것이 진실이었을 때 그걸 믿을 수 있을 정도로당신이 견고하다는 건 다른 이야기다. 저 아래 계곡에서 빛나고 있는 불빛들 가운데 여섯 개는 그들의 것이었다. - P72

2
연기 속에 잠긴 두 발
1995년 4월 21일 아침, 내 형 워드(엘스워드의 애칭)는 켄터키주 렉싱턴에 있는 한 차고에서 마이크를 입에 갖다댔고, "죽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는 말 그대로, 감전당했다.  - P74

형과 형네 밴드 무비고어스는 내가 학교를 다니고 있는 테네시에서 콘서트를 하기 위해 시카고에서 오는 길이었고, 리허설을 위해 렉싱턴에 하루 머물렀다. 형은 불과 이틀 전에 내게전화를 걸어 혹시 콘서트에서 듣고 싶은 노래가 있는지 물었다. 나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만났을 때 내게 들려줬던 신곡을 불러달라고 했다. 우리의 휴가는 늘 같은 식으로 끝났다.
둘이 늦게까지 술을 마시면서 각자 만든 새 곡들을 서로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형제끼리 화음을 맞추다보면 생물학적으로 뭔가 충족감을 느끼게 된다.  - P74

내가 신청한 이즈 잇올 오버 Is It All Over>는 무비고어스의 전형적인 곡들과는 좀 달랐다. 그 곡은 밴드가 자신들의주특기로 발전시킨 중독성 강한 팝록에 비하면 단순하고 진지했다. 이 변화는 다른 밴드 멤버들에게 여전히 익숙하지않았고, 워드가 첫 소절 "다 끝난 건가? 난 신문을 훑어보고 있어 / 그 여자를 대신할 누군가를 찾기 위해"을 부르면서 밴드를 이끌어나가던 순간, 갑자기 전기가 흘러 형의몸을 관통했다.  - P75

전기는 형이 쥐고 있던 마이크를 자석화시켜작지만 강력한 미사일처럼 형의 가슴에 달라붙게 하고, 기타의 첫 번째 줄과 프랫을 형의 손바닥에 화인처럼 찍어놓고,형의 심장을 멈춰 세웠다. 형은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갔고, 죽어가기 시작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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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관식을 거행하려고 합니다.」 목사가 읊조렸다. ‘모두 모여 주세요. 이젠 끝나 버린 너무나 특별했던 삶에 대해마지막으로 잠깐 생각하며 서로 손을 잡으셔도 좋겠네요」상여꾼들이 관을 들어 대기 중인 무덤 위로 옮겼다. 몇 안되는 사람들이 동그랗게 서서 하관을 지켜보았다. - P182

그때 갑자기 음악이 흘러나왔다. 노래였다. 동요 말이다.
버스바퀴가 돌아요, 뱅뱅뱅
뱅뱅뱅
뱅뱅뱅
버스바퀴가 돌아요, 뱅뱅뱅
하루 종일.
소리가 가늘고 쨍하게 울려서 처음에는 휴대 전화 벨소리인가 싶었다. 조문객들은 두리번거리며 누구 전화인지, 누가 민망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했다. 아이린 로스가 놀라서 앞으로 나섰다. 데이미언 쿠퍼가 무덤에서 가장 가까이 서있었다. 그가 경악과 분노의 중간 어디쯤 되는 표정으로 무덤 가장자리를 넘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아래를 가리키며 그레이스 러벨에게 뭔가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알아차렸다.
노래가 무덤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관속이었다. - P183

네 명의 상여꾼은 소리가 멀어지길 바라며 관을 마저 내려야 할지 아니면 다시 올려서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섬뜩하도록 부적절한이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망자를 묻어도 될까? 관 속에 든 디지털 녹음기 아니면 라디오가 노랫소리의 진원지인 게 이제는 누가 봐도 분명했다. 만약 다이애나 쿠퍼가 예컨대 마호가니처럼 좀 더 전통적인 소재를 선택했더라면 우리 귀에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망자는 땅속에 묻혀 편히 잠들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배터리가 다 되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엮인 고리버들 가지
사이로 가사가 새어 나왔다. 그걸 피할 도리가 없었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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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인 밤 모호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난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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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처음 만나는 파스칼 키냐르인데 하필 제목이 <성적인 밤>이라 나도 좀 당황스럽긴 했다. 그저께 밤에 앞 부분 그림들을 보고 에세이도 읽었는데 온전히 그림의 이해를 돕는 설명이려니 하고 읽었다가 생각보다 문장이 어려워 또 놀랐다. 다시 정신차리고 읽어나가야함을 알게 되었다. 야하고 잔인하고  섬뜩하고 기묘한 그림들이 잔뜩인데다 책의 판형도 가로로 긴 책이고 표지도 속지도 검은 색(어둠이 바탕이자 근원이라는 키냐르의 지론에 따른 것)이라서 엄청 집중하며 그림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데 그림들이 다 예사롭지 않고 또 많은 수의 그림들이 어찌나 에로틱하고 에로틱하고 에로틱한지..... 집중해서 들여다볼 수 밖에 없도록 구성이 되어 있는데 - 에로틱한 그림에 자연스럽게 끌리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않을까! - 이 난감함을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아무리 이건 예술이야! 생각해도 안된다는 한계를 수없이 경험했다. 그런데도 몰입이 되었다. 아.... 이것은 설명이 필요없는 감정이다. 다분히 철학적이고, 선형적이며 일방향성인 삶과 죽음이라는 명제를 글과 그림으로 보여주는 키냐르의 세계에 동화되면서 몰입할 수 있는 몇 시간이었다는 것이 지나고 보니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핸드폰과 핸드폰 속의 영상들에서 완벽히 멀어져 있었다. 삶과 죽음,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을 포착한 회화 작품들을 보면서 저절로 아득해지는 감정들을 주체하기 힘들어지는데 이런 감정은 그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낀다(쉬운 문장들만은 아니어서 더 그랬다!). 에로틱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만 가득했다면 한 권의 춘화도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의 그림일지라도. 




탈장르적인 글쓰기를 구사했던 파스칼 키냐르는 자신의 문학 안에 회화, 음악, 춤 등 다른 예술 장르를 끌어들였다. 특히 회화에 대한 키냐르의 관심은 "사유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라고 하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으로 귀결이 된다. 이 책은 총 27개의 장章으로 구성이 되어있고 각 장의 주제도 다양하다. 성경과 신화와 상징의 세계를 이루는 제목들이 다수이다. 가령 디도와 아이네이아스(디도 여왕과 트로이 왕자 아이네이아스의 사랑의 장면에서도 그렇고, 장 뤼스탱의 작품인 <세 명의 등장인물>에서도 부모의 원초적 결합에서 밀려나 질투심에 불타는 아이가 함께 등장한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질투심하다니... 이 얼마나 생경한 감정인지...), 아브라함의 형제인 롯과 롯의 정자를 훔치는 그의 딸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 놀리 메 탄게레(5장,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마리 마들렌과 놀리 메 탄게레, "나를 만지지 마라"라고 명령하는 예수님을 형상화한 그림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그림을 형상화한 8장 잠과 꿈, 지옥과 야수들, 관음증, 나르스와 베누스, 중국의 원초적 장면들을 그린 회화가 여러 장에 걸쳐 펼쳐진다! 또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를 형상화한 너무도 아름다운 그림들이 쉬지 않고 등장한다. 눈에 익은 그림들도 있지만 대부분 생소하거나 기괴하거나 끔찍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너무 아름다워서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키냐르의 문장을 읽으며 공감하게 되고 이러한 그림들을 보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넘어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는 글이 함께 하니 부끄럽던? 마음이 조금 상쇄가 된다. 키냐르의 글이 있어 가능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비록 그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 지라도. 그럼에도 도저히 이해 안되는 그림들도 있다. 사실 이렇게 많은 외설적인 그림들이 이렇게 많은 빈도로 그려진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일까? 서양화를 감상함에 있어 신화와 성경을 알지 못하면 그 그림이 내포한 상징과 은유를 다 이해하긴 어렵다는 것이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이 책을 오픈 된 장소에서 펼쳐 놓고 읽는 건 작품의 수준과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자신있게 펼쳐 놓고 보려면 보통 용기로는 힘들다~~^^ 아니 난 불가능했다. 어제 오전에 수영 끝나고 도서관에서 다 읽을 수 있겠지 싶어 책을 미리 챙겨갔다. 도서관 갔더니 다행히 사람이 그닥 많지 않았다. 그래서 책을 펼쳐 놓고 읽고 감상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는 건 또 좀 곤란하겠단 생각이 들어 적당히 책장을 살짝 들기도 하고 다른 책으로 가리기도 하면서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남들이 보면 오해할? 야릇한 그림들이 계속 나오고 또 나오고... 아, 정말 계속해서 나오는 거다. 거기다 책장이 모두 검은색이니 그림들이 얼마나 더 도드라져 보이겠냔 말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눈 밝은 사람이 찰나의 순간으로 본다 할 지라도 에로틱한 그림을 알아볼 거 같았다. 빨리 읽고 바로 반납(대출반납기계엔 반납이 안되고 붉은색으로 책 앞 표지 귀퉁이에'19세미만구독불가'라 붙어있고 '안내데스크에서만 대출/반납이 가능합니다'하고 스티커도 붙어있다.) 하고 올 요량이었는데 낭패였다. 설상가상 같은 테이블 한 자리 건너 새로 남자분이 들어와 책을 펼쳐 놓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고 대각선으로 건너에도 열공하는 또 남자분.... 이젠 정말 안되겠다. 과감히 책을 덮고 일어나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 소녀>, 앤서니 호로위츠의 <중요한 건 살인> 두 권을 빌려서 집으로 왔다.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아, 얼굴 화끈거려 혼났네. 





   밤의 침묵 속 그 심중 바닥을 헤아릴 때면 희열 속에 우릴 만들어냈을 그 초라한 상들이 떠올라 부끄러워진다.

   내가 수태되었던 밤, 나는 거기 없었다.

   당신보다 앞서 있는 날을 목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p11)



   우리 시대에 너무 자주 사용되는 "원초적 장면"(scene primitive)이라는 표현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여자의 교미에서 파생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데, 분명 이 표현에는 지나친 것이 있다. 아직 수태되지 않아 이 교미는 불가피하게 그들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성적인 밤"(nuit sexuelle), 그러니까 '성교의 밤'이라는 표현을 선호해야 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불안한 영혼에게는 최초의 형상화가 문제가 아니라 선행하는 밤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상력의 근원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서는, 태생동물성과 잠이 성욕을 주문한다. (p101)




   자크 라캉은 지옥을 모든 사람이 꿈꾸는 것을 전시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환각이 지옥을 오게 한다. 지옥을 구현할 방도를 찾는다. 욕망의 저 맨 밑바닥에는 피학 취미(마조히즘)가 있다. 관능 저 맨 밑바닥에서는 능동적이지 않으려는, 자지러지고, 흐물흐물 녹고, 완전히 소멸되고 싶은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이 인다. 피학 취미는 욕망을 더 강화한다. 욕망으로 고통받는 자처럼 살아가는 주체를 "마조히스트", 그러니까 피학대 음란증 환자라 부른다. 이들에게는 천국보다 욕망이다. 차분한 가라앉음보다 살아 있다는 감정이다. 무성 혹은 중성 상태의 복된 행복 속에 잠이 들고, 잠이 들자마자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행복보다 실존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 (13장 야수들, 관련그림: 디르크 바우츠, <영벌받은 자들의 전락>,1470. p118)




   죽음과 최초의 생은 너무나 기이하게 둘 다 완전히 깜깜하다.

   세 개의 밤(자궁, 천상, 하계) 뒤에 제 4의 밤이 있다. 수태한 밤 뒤에, 낮과 지상의 밤 뒤에, 죽음의 밤 뒤에 진짜 밤이 있다. 밤의 밤, 비생물적인 밤. 생 이전의 밤, 존재 이전의 밤, 빅뱅 이전의 밤이 있다. 

   시간의 밤, 우주 저 바닥의 허무, 별다른 소명도 없이, 그저 공허를 만들며, 불타는, 과도하게 검은 밤.

   화석의 밤.

   과거의 밤 저 밑바닥에는 저 옛날의 밤이 있다.

   거기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비방향성의, 비관련성의, 비존재성의 밤이다.(p255)




   비가시적 장면의 마지막 특징을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 전적으로 우울한 것이라 이를 아직까지 말하지 않고 빼놓았다. 이성애를 통해 해후하는 것은 비로소 하나가 된 두 개의 절반이 아니다. 서로 보완되는 두 개의 성기가 아니다. 서로를 탐사하는 두 불완전체이다. 영영 알 길 없는 차원 속을 "함께 가는"(라틴어로는, co-ire)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다. 그들은 원초적 차원 속을 배회한다. 결국 항상 좌초되고 마는 결합, 결국 항상 떨어져나오는 사지, 결국 항상 서로에게서 빠져나오는 음문과 페니스. 결국 항상 서로 마주보는 강가에서 다시 만나는 두 존재. 그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믿고 있으나 ㅡ 물론 실제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ㅡ 같은 나체에서 출발해 그 언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에 같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두 강기슭에 서 있다. 너무 힘들어 멀리 떨어진 강기슭. 그들은 서로 귀를 기울인다.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서로 끼워진다. 떤다. 눈을 감는다. 다 보는 것은 아니다. ... 인생은 너무 짧다. 인생은 너무 짧지만, 인생의 저 안쪽 바닥에서 밤이 꾸물거리며 지체하고 았다. 인간은 그렇게 죽는다. 사이펀 효과가 시간을 지배하고 있다. 커다란 수면 아래로 흡입되는 것이다. 지상 그 이전에 있던 커다란 수면 아래로. (p266~272)





그림과 글을 함께 놓고 읽을 땐 그나마 이해가 되는 거 같았는데 오늘 글만 다시 읽어보니 이 문장들이 어떤 그림과 함께였는지 기억도 안 나고 어렵게 느껴진다. 하루 지났을 뿐인데... 미술관에서 이런 그림들을 전시한다면 도저히 못 볼 거 같다. 하지도 않겠지만. 그래서 책으로 나온 걸까? 하하하... 그렇지만 그 그림이 그려진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면서 글을 읽었던 시간은 나에게 완벽한 몰입을 선사해 주었다. 어설프게 미술관 다녀온 것보다 훨씬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겠다.(이 책은 혼자 있을 때 봐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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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오기傳 - 활자 곰국 끓이는 여자
김미옥 지음 / 이유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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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하고 웃음이 배어 나오는데 그 속에 분명 서글픔과 진한 페이소스가 서려있다. 울다가 웃다가 안타까워하면서 어느 새 다 읽어버렸다. 한 순간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1 년에 800권의 책을 읽는다니 정말 존경스럽다. 덕분에 읽을 책, 듣고 싶은 음반이 잔뜩 생겨 버렸다. 그래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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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8-29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작가님 존경스러워요~~

은하수 2024-08-29 16:03   좋아요 2 | URL
읽고나니 엄청 자극이 되더라구요.
읽고 싶은 책도 많고 듣고 싶은 음악도 많았는데
저랑 묘하게 겹치는 음악이 많아서 깜놀했지 뭐예요~~^^

희선 2024-08-30 0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상 잠깐 보니, 글을 쓰게 되고는 한해에 370권 본다고 합니다 그래도 많이 보는 거네요 저는 책을 보고 안 썼을 때 300권 넘게 보기도 했는데, 2024년은 어느 해보다 책을 못 본 해가 될 듯합니다


희선

은하수 2024-08-30 05:14   좋아요 1 | URL
300권, 370권... 희선님도 작가님도 정말 대단하네요!
전 200권 정도 읽으니 리뷰 쓰기가 안되더라구요. ㅠㅠ
천천히 읽기가 필요한 나이가 됐나봐요^^
 

기묘한 낙관주의자의 죽음

술자리에서 지인의 소식을 들었다. 가족들이 부고도 없이 조용히 처리한 걸 보니 자살이 아니었겠느냐는 얘기였다. 그는 쾌활했고 유머 감각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족이 있었다.
학부 시절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에 대한 리포트를 쓴적이 있다. 그는 자살을 단순한 개인적 행위가 아닌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이라 설명했다. 이기적, 이타적, 아노미적 자살이 기억났다. 그중 
아노미는 상당히 흥미를 끌었는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이 주류사회 탈락으로 택한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과연 그런가? - P261

한나 아렌트의 「우리 망명자들이란 글을 읽고 있다. 최근 디아스포라에 대한 책을 중점적으로 읽다가 만난 글이다. 많은 유대인이 살아남아 중산층의 위치에 오르고 명랑쾌활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살하는 현상에 대한 분석 글이었다. 내가 얼마 전 읽은 단편 소설집 『주기율표』의 저자 프리모 레비도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P262

한나 아렌트의 글을 보자.

우리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나눈 후 집으로 가서 가스를 틀어놓거나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기묘한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우리가 선언한 쾌활함이 죽음을 곧바로 받아들일 듯한 위험스러움과 표리일체임을 그들은 증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생명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며 죽음이 최대의 공포라는 확신 아래 자랐는데, 생명보다 지고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되고 희생자가 되었다. - P262

아렌트는 망명 유대인의 자살 충동을 분석하며
그들은 싸우고 저항하는 대신에 친구와 친척의 죽음
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어깨의 짐을 벗었다고 쾌활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도 어깨의 짐을 벗게 되길 원하게 되고 실제로 자살한다고 했다. - P263

‘기묘한 낙관주의자‘, ‘자기본위의 죽음‘. 낯설지 않다.
「우리 망명자들이란 글은 「파리야로서의 유대인이란평론집에 실려 있다. ‘파리야‘는 차별받는 자란 뜻이다. 파리야가 핵심이다. 이 차별받고 억압당하는 자들이 죽음에이르는 과정은 특별하지 않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것. 견고한 절망. 이것은 사회 적응의 문제가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우리는 무지해서 살아남았다‘고 했다. 인간을 믿을수 없다는 것. 어제 당신을 향해 웃던 친구들, 친절한 이웃들이 갑자기 등을 돌릴 때 세계는 무너지는 것이다. - P263

다시 나의 지인으로 돌아간다. 내가 아는 그는 우리나라의 엘리트층에 속하고 재력도 있다. 쾌활하고 유머감각이 있으며 열린 사고를 갖고 있어 후배들도 좋아했다. 대체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코로나로 그의 사업이 힘들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그는 늘 웃고 있었다. - P263

거리에 ‘기묘한 낙관주의자‘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누군가의 자살 소식을 들을 때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문득 두려워진다. 
사는 게 전쟁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전시에 자살하지 않는다고 한다. 절대 고독의 죽음. 그 대척점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수 있을까?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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