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잉글랜드 수녀
늦은 오후, 해가 기울고 있었다. 마당의 나무 그림자 모습이 달라졌다. 저멀리 암소가 음매 울고 작은 종이 딸랑거렸다. 이따금 농장의 마차가 뒤뚱거리며 지나가면 먼지가 자욱하게 날렸다. 푸른 셔츠를 입은일꾼들이 삽을 어깨에 짊어지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부드러운 공기 속파리떼가 사람들의 얼굴 앞에서 정신없이 춤을 췄다. 모든 것들 위로잔잔하게 동요가 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가라앉았다. 숨을 죽이고 휴식을 구할 밤을 예감하면서.

메리 E. 윌킨스 프리먼(1852~1930) - P39

이러한 낮시간의 잔잔한 소란스러움은 루이자 엘리스에게도 찾아왔다. 그녀는 오후 내내 응접실 창가에 앉아 평온하게 바느질을 했다. 이제 바느질감을 단정하게 개고 바늘을 조심스럽게 꽂은 뒤 골무와 실,가위와 함께 바구니에 넣었다. 오래 쓰고 늘 만지작거려서 인성의 일부가 된 이 소박한 여성 물품을 루이자는 평생 하나라도 딴 데 잘못 놓아 본
기억이 없었다. - P39

루이자는 움직임이 느리고 조용했다. 차를 끓이는 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하지만 다 끓이고 나면 귀한 손님에게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치 훌륭하게 차려냈다. 작은 정사각형 식탁이 정확히 주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고, 가장자리의 꽃무늬가 반짝이는 빳빳하게 풀먹인 리넨식탁보가 깔려 있었다. 루이자는 차 쟁반에 다마스크 냅킨을 깔고, 그위에 티스푼이 가득 담긴 컷글라스 텀블러와 은제 크림 용기 도자기로된 설탕 그릇, 분홍색 도자기 찻잔과 받침 한 세트를 놓아두었다. 루이자는 매일 도자기 그릇을 사용했는데, 동네에서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걸 두고 이웃들이 수군거렸다. 그들은 평소에는 투박한 토기를 식탁에 올리고 좋은 도자기 세트는 거실 장에 고이 모셔두었다. 하물며 루이자 엘리스가 그들보다 부자거나 신분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루이자는 도자기 그릇을 썼다.  - P40

자기가 제대로 들은 건지, 결혼의 언약을 깬다면 조에게 끔찍한 상처를 안기게 되는 건 아닌지 아직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루이자는 자신의 의중을 먼저 드러내지 않고그를 한번 떠보고 싶었다. 그 일은 성공적이었고,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그녀만큼이나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기를 꺼려했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 P55

그녀는 릴리 다이어의 이름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에게 무슨 불만이있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한 가지 방식으로 너무 오래 살아왔기 때문에 갑자기 생활이 바뀌는 게 겁이 난다고만 했다.
"난 겁이 나지는 않아, 루이자." 대깃이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싶긴 해. 물론 당신이 결혼하고 싶어한다면 나는 죽는 날까지 당신에게 충실할 거야. 그건 꼭 알아줬으드면 해."
"알아." 그녀가 말했다. - P55

그날 밤 두 사람은 만나온 긴 시간 중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하게 헤어졌다. 손을 마주잡고 문간에 서니 회한에 찬 기억들이 마지막으로 한꺼번에 밀려왔다.
"참, 우리가 결국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렇지, 루이자?" 조가 말했다.
루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분하던 얼굴이 살짝 떨렸다.
"내게 부탁할 일 있으면 언제라도 얘기해." 그가 말했다. "당신을 영영 잊지 못할 거야, 루이자." 그러고는 그녀에게 입을 맞춘 뒤 걸어나갔다. - P55

그날 밤 홀로 남은 루이자는 스스로도 영문을 잘 모르는 채로 조금 울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 자신의 영지를 강탈당할까 두려움에 떨다가 그것이 확실히 자신의 것임을 알게 된 여왕 같은 기
분이 들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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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단편집이다!

푸른 들판을 걷다

모두 식사를 마무리해 달라고, 식탁을 뒤로 밀어 춤출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안내가 나온다. 연회장에서 우르르 나온 사람들이 화장실이나 바에 가거나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간다. 사제는 지금 돌아갈 수도 있다. 그가 작별 인사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만큼 덜 취한 사람을 찾아서 악수를 나누면 된다. 집으로 돌아가면 난로에 불을 피울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할 일은 돌아가서 성냥으로 불을 붙이는 것밖에 없다.
잠이 그를 끌어당길 테고 하루가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춤이 시작될 때까지 남아야만 한다. 그는 기다렸다가 춤을 보고나서 갈 생각이다. - P50

첫 곡은 느린 왈츠, 「평생이 춤을 출 수 있을까요? Could I Havethis Dance for the Rest of My Life?」이다. 신랑이 신부를 플로어로 이끌다가 드레스 자락이 신부의 구두 뒤꿈치에 걸린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몸을 숙여 드레스 자락을 매만진다. 베일을 벗었기 때문에 목뒤가 그대로 드러난다. 목을 가리는 것은 진주 목걸이밖에 없다. - P50

신부가 몸을 펴자 잭슨이 그녀를 끌어안는다.
그녀는 기꺼이 따라간다. 약혼반지의 다이아몬드가 빛을 머금는다. 그녀의 남편이 플로어를 돌자 흰 구두가 그 길을 그대로뒤따른다. 두 사람이 한 바퀴 돌고 또 한 바퀴 돌자 신랑의 동생이 메이드오브아너*와 함께 나온다. 그의 발이 가벼워 보인다. 베스트맨은 연설에 서툴지 몰라도 춤은 잘 춘다. 신랑 들러리가 신부 들러리와 같이 나온다. 그들은 수줍음이 많고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확신이 없어 보인다. 왈츠가 세 곡 끝나고 음악이 멈추자 베스트맨이 형에게 신부와 춤을 춰도 되는지 묻는다. 신랑이 동생을 본다. 롤러는 댄스플로어 가장자리에서 신랑과 시선을 맞추려고 애쓴다. 사제는 롤러가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내버려두기 어려우리라는사실을 깨닫는다. 신랑이 머뭇거리다가 그러라고 하고, 곧 신부와 메이드오브아너가 자리를 바꾼다.

*메이드오브아너: 신부 측 대표 들러리 - P51

밴드가 속도를 올려 스텝이 빠른 곡을 연주한다. 베스트맨이 자이브를 추기 시작한다. 몇 년 전에 자이브 대회에서 우승했던 그는 솜씨를 뽐낼 생각이다. 그가 팔을 들자 신부가 그 밑을 지나 뒤쪽으로 나오지만 그가 원하는 것보다 너무 느리다. 그가 신
부를 밀어 빙글빙글 돌리더니 자신은 반대로 돌려고
하다가 신부의 손을 놓친다. 그 대신 진주 목걸이가
손에 잡히고, 그가 제자리에서 돌면서 목걸이가
끊어진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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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
1
어느 6월 저녁, 여덟시 무렵이 되자 나무둥치로는 아직 희미하게 반짝이는 밝은 햇빛이 아른거렸지만 숲은 이미 어둑한 그늘에 잠겼다. 어린 소녀가 암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터벅거리는 걸음에 행동이 굼떠 화를 돋우기도 하지만 어쨌든 소녀에게는 소중한 동무였다.
둘은 사그라지지 않은 빛에서도 멀어져 숲속 깊이 들어갔는데, 둘 다워낙 익숙한 길이라 앞이 보이든 말든 상관없었다.

세라 오언 주잇(1849~1909)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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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4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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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치카의 삶도, 스페이드의 여왕의 안나의 삶도 실제 삶의 한 단면이라 해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공감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녀들이 선택한 삶, 인내하는 삶, 그리고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 애쓰는 자세를 보면서 삶을 다르게 보려는 시각의 위대함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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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드의 여왕
무르와 안나 표도로브나의 나이 차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이 세상 시계 장치의 톱니바퀴가 낡은 것인지,
삭아버린 것인지, 시간은 점점 빠르게 굴러가고 심방세동을 겪기도 하는데, 이렇게 기울어가는 시간의 움직임을 따르는 삼십 년이 예순과 아흔 사이에 자리잡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안나 표도로브나는 빠르게 했던 일들을 점점 느리게 하고 있고,
그 대신에 잠을 자는 데 더 적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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