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 P154
7. 현실이 일종의 스펙터클이 되어가고 있다는 주장은 깜짝 놀랄만큼 지역성을 띠고 있다. 이런 주장은 이 세계의 부유한 곳, 그것도 뉴스가 오락으로 뒤바뀌어 버린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극소수 교육받은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습관을 보편화하고 있는 셈이다. - P162
세계를 바라보는 이들의 방식은 원숙하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서, ‘현대적인 것‘의 주된 획득물이자 진지한 논쟁과 토론을 제공하는 정당 기반의 전통적 정치 형태를 분쇄하는 데 필요한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을 일종의 구경꾼으로 보는 것이 바로 이들의 방식이다. 전혀 진지하지 않을 뿐더러 괴팍하기 그지없는 이들의 방식으로 보자면, 이 세계에는 현실적인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 P163
그렇지만 타인의 고통을 그저 쳐다만 보는 구경꾼으로 존재하거나, 구경꾼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미덥지 않은 특권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는 부유한 나라들이 이곳저곳에 있다는 식으로 이 세계를 구별하는 것도 우스꽝스러운 일이리라. 마찬가지로 전쟁, 엄청난 불의, 테러리즘 등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아는바가 아무것도 없는 뉴스 소비자들의 사고방식에 근거해 타인의 고통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일반화하는 것도 우스꽝스럽다. 자신들이 텔레비전 상에서 보는 것들에 전혀 단련되어 있지 못한 텔레비전 시청자들도 수십 억이 넘는다. 이런 사람들은 현실에 선심을 베푸는 호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 P163
현대성의 시민들,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폭력의 소비자들, 전쟁터에 직접 가보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그 참상을 세세히 말하는 데 정통한 사람들은 진실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비웃도록 단련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좀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온갖 일을 다하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위험에서 멀리 떨어져 의자에 앉은 채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실제로 전쟁 지역에 가서 증인이 되어 왔던 사람들의 노력을 ‘전쟁 관광‘이라고 비웃는 행위는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일인데, 전쟁 사진을 일종의 가식으로서 보는 논의들에서 심심찮게 볼수 있는 광경이기도 하다. - P164
이런 정서를 지닌 사람들은 전쟁의 모습을 담은 이미지에 관심을 갖는 것은 천박하거나 저급한 흥미라고, 즉 상업적인 병적행위라고 주장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포위되어 있을 당시의 사라예보에서는 폭격의 와중이나 저격수의 총탄이 빗발치는 와중에서도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을 호통치는 사라예보 주민들의 고함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은 목에 두른 장비때문에 쉽게 눈에 띄었다. "시체들 사진을 찍으려고 포탄이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요?" - P164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자주는 아니었지만, 때때로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은 그렇게 하기도 했다. 폭격의 와중이나 저격수의 총탄이 빗발치는 와중에 거리에 나와 있는 사진작가는 [사진에 담으려고 자신이 좇고 있는 민간인들만큼이나 살해될위험에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이 훌륭한 기사거리를 찾겠다는 일념만으로 당시의 포위 현장을 보도하려는 용기를 냈고, 그러기를 갈망했던 것도 아니었다. - P165
사라예보의 상황을 보도하고 있던 사진작가들 중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던 대부분의 사진작가들은 전투가 지속되던 와중에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사라예보 주민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참화가 사진으로 기록되기를 원했다."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재현되는 데에 관심을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뭔가 "유일무이한 것"으로 보여지기를 원한다. - P165
1994년 초, 포위 상태에 놓여 있던 사라예보에서 일 년 이상 거주해 왔던 영국의 포토저널리즘 작가 폴 로우는 절반 이상이 파괴되어 버린 어느미술관을 빌려 자신이 찍어 왔던 사진들을 전시했다. 이때 그는 몇 년 전 자신이 소말리아에서 찍었던 사진들도 함께 전시했다. 그 당시까지도 파괴되어 가고 있던 자신들의 도시를 찍은 새로운 사진을 간절히 보고싶어 했던 사라예보 주민들은 소말리아의 사진들이 포함된 데에 적잖이 언짢아했다. 로우는 소말리아의 사진들을 포함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전문 사진작가이며, 그저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는 두 개의 작품을 전시했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 P165
사라예보 주민들로서도 언짢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타인들의 고통과 나란히 보여준다는 것은, 사라예보가 겪은 수난을 그저 [잔악 행위의] 또 다른사례일 뿐이라고 일축하면서, 양자의 고통을 비교하는 것(어느 지옥이 더욱 나쁜가?)이었다. 사라예보 주민들은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잔악 행위는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잔악 행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반발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라예보 주민들의 분노에는 인종주의의 기미가 엿보였다. 그들은 보스니아인들이 유럽인이라는 점을 이방인 친구들에게 쉴새없이 지적해댔다. 그렇지만 이 전시회에 체첸이나 코소보, 또는 그밖에 다른 나라들의 민간인들이 겪은 잔악 행위의 사진이 포함됐더라도 사라예보 주민들은 반발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 - P166
9. ... ...이 사진 속의 죽은 병사들은 놀랄 만큼 살아 있는 것들에 무관심하다.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들, 자신들을 보고 있는 사람들, 즉 우리에게 말이다. 그렇지만 왜 그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인가를 꼭 들려줘야만 하는 것일까? [그들이 말해준다 해도]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수 없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전쟁이 벌어지던 바로 그때에 포화 속에 갇혔으나 운 좋게도 주변 사람들을 쓰러뜨린 죽음에서 벗어난 모든 군인들, 모든 언론인들, 모든 부역 노동자들, 독자적인 모든 관찰자들이 절절히 공감하는 바가 바로 이점이다. "그리고 그들이 옳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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