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로 긴 타원의 섬 지도가 화면에 떠올랐다. 1948년 미군 기록물이라는 자막 위로, 해안선에서부터 오 킬로미터를 표시하는 경계선이 두드러진 굵기로 그어져 있었다. 한라산을 포함하는 그 안쪽 지역을 소개하며, 해당지를 통행하는 자를 폭도로 간주해 이유 불문 사살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자막으로 이어졌다. 놀라울 만큼 노이즈 없이 선명한 흑백 무성 영상이 뒤따라 들어왔다. 초가지붕들이 불탔다. 검은 연기가 불꽃과 함께 하늘로 치솟았다. 검이 장착된 장총을 멘 옅은 색 제복의 병사들이 현무암 밭담을 뛰어넘었다. - P161

흑백사진 석 장이 차례로 화면을 채우고 
사라졌다. 해송 숲 가운데 흰옷 입은 남자 넷이 서 있었다. 철모를 쓴 군인 넷이 그들에게 과녁 조끼를 입히고 있었다. 네 쌍의 모습이 측면에서 클로즈업되어 차려 자세로 서 있는 청년들의 콧날과 인중,
턱과 목을 잇는 앳된 선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카메라에 가장 가까워 얼굴이 크게 보이는 청년의 입술은 긴장한 듯 다물렸고, 막침을 삼킨 듯 목의 얇은 피부 아래 성대가 튀어나왔다.
다음 사진에서 청년들은 과녁 옷을 입고 한 명씩 소나무에 묶여 있었다. 사진의 화각이 좀전보다 넓어져, 오 미터가 채 안 되는 거리에서 엎드려 쏴 자세로 과녁을 겨눈 병사들이 화면 안으로 들어 왔다. - P163

마지막사진에서 청년들의 몸은 비틀려 있었다. 끈으로 묶인 허리 위쪽 상체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턱이 들리고 고개가 젖혀졌다. 무릎이 오그라졌다. 입이 벌어졌다. - P164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이상 알 수 없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 P317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 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 P317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그 아이들을 생각하다 집을 나선 밤이었어. 태풍이 올 리 없는 10월이었는데 돌풍이 숲을 지나가고 있었어. 달을 삼켰다 뱉으며 구름들이 달리고, 별들이 쏟아질 듯 무더기로 빛나고, 모든 나무들이 뽑힐 듯 몸부림쳤어. 가지들이 불같이 일어서 날리고 점퍼 속으로 풍선처럼 부푸는 바람이 거의 내 몸을 들어올리려고 했어.
한 발씩 힘껏 땅을 디디고 그 바람을 가르며 걷던 한순간 생각했어. 그들이 왔구나. - P318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거나 실제로 미쳤을 거야.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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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 - 전쟁 속 인간의 얼굴을 기록한 남자 클래식 클라우드 34
김경훈 지음 / arte(아르테)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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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사랑했던 세계 최고의 전쟁 사진가인 로버트 카파. 그는 자신의 발로 전쟁터로 직접 나아갔고 모든 것을 목격하였고 자신만의 언어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작열하는 포탄과 자욱한 연기, 쏟아지는 총탄에 쓰러져 가는, 고통받는 평범한 사람들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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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한강 작가의 책을 읽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1
결정結晶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벌판의 한쪽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처럼 조금씩 다른 키에, 철길 침목 정도의 굵기를 가진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침목처럼 곧지 않고 조금씩 기울거나 휘어 있어서, 마치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 P9

묘지가 여기 있었나, 나는 생각했다.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우듬지가 잘린 단면마다 소금 결정 같은 눈송이들이 내려앉은 검은 나무들과 그 뒤로 엎드린 봉분들 사이를 나는 걸었다.  - P9

문득 발을 멈춘 것은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 아래로 자작자작 물이 밟혔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어느 틈에 발등까지 물이 차올랐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은 바다였다. 지금 밀물이 밀려오는 거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물었다.
왜 이런 데다 무덤을 쓴 거야?
점점 빠르게 바다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날마다 이렇게 밀물이 들었다 나가고 있었던 건가? 아래쪽 무덤들은 봉분만 남고 뼈들이 쓸려가버린 것 아닌가? - P10

그 꿈을 꾼 것은 2014년 여름, 내가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낸 지 두 달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 그후 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그 꿈의 의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 도시에 대한 꿈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빠르고 직관적이었던 그 결론은 내오해였거나 너무 단순한 이해였는지도 모른다고 처음 생각한 것은 지난여름이었다.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이란 2014년 5월에 출간된 《소년이 온다》를 말하는 건가 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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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X김경훈, arte

‘세계 최고의 전쟁 사진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 로버트 카파였지만 그의 동생 코넬 카파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카파는 실제로는 전쟁사진가War Photographer가 아닌 평화를 담는 사진가Peace Photographer였습니다. 그의 사진들은 전쟁이 아니라 거기에 연루되었던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들입니다.˝


사진 찍기를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유심히 사진 들여다보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로버트 파카의 일대기를 그린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카파는 군인이 아니지만 그가 거쳐온 전쟁은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과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일전쟁과 이스라엘 중동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등이었다.

20세기 가장 잔인했으며 야만적인 전쟁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의 여러 모습들이 보여준 광기, 폭력, 아픔, 위험 등 여러 감정을을 날 것 그대로 생생하게 사진으로 캡쳐해 내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386쪽)

수많은 전쟁터를 누구보다 가장 먼저 달려가 사진을 남겼지만, 카파가 아마추어 사진가에게 남기고 싶었던 말은 ˝(피사체가 되는)사람들을 사랑할 것, 그리고 그것을 그들이 알게 할 것.˝이었다고 한다.


작가이자 절친이었던 존 스타인벡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카파는 자신이 사진으로 전쟁을 기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쟁의 본질은 감정적이고 복잡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파는 그러한 감정이 표현된 전쟁의 양상을 사진에 담아냈다. ...... 그에게 카메라는 인간의 감정을 포착하여 보여주는 도구였다.˝(388쪽)

그의 사진의 저변에는 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즐거운 독서를 깨는 큰! ˝옥의 티˝
나만 그런가? 싶기도 한데 아...정말 너무 많이 눈에 띄는 맞춤법 오류 들. 들. 들. 들
이건 뭐 너무 많아서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한 페이지에 한 개 정도는 기본으로 눈에 띈다.
아르테 클래식클라우드 책값은 점점 오르던데 교정 안함? 진심 궁금하다!



카파는 때로는 전쟁을 영웅들의 서사로, 때로는 시니컬한 시선으로, 때로는 전쟁이 주는 파괴를, 때로는 그 속에 감춰진 인간의 얼굴을, 때로는 적의 얼굴마저도 인간의 시각으로 보고 사진으로기록했다.

그가 수많은 사진 속에서 보여주었던 이야기는 진실 그 자체였으며 사진 속의 인물들은 모두 현실 속의 인물들이었다. 카파는 직접 모든 것을 목격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카파가 사진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매우 불편한 진실이었으며 카파 역시 그러한 불편한 현실의 한가운데 발을 딛지 않고서는 그러한 불편한 진실을 사진 속에 담을 수 없었다. - P384

카파의 인생을 훑어보면 그의 삶은 극단으로 나누어진 명암에의해 균형을 잃은 불안정한 인생이었다. 따라서 모범적인 위인전의 이야기가 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수많은 전설을 남긴 이 사진가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사람들의 평가는 언제나 둘로 나누어졌다. 한쪽은 그를 전설 속의 인물로 만들어 그에게 신화를 부여했고, 또 다른 한쪽은 그의 삶에 점철된 불안정과 모순을 찾아 그에게 거짓과 허풍과 속임수의 꼬리표를 붙이기도 했다. - P388

지금도 끝나지 않고 있는<쓰러지는 병사>에 대한 진실 공방은 어쩌면 그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두 개의 평행 축으로 나누어진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냉철하게 사실을 보도해야 하는 보도사진가였으나 역설적으로 로버트 카파라는 허구의 인물이 되었던 카파는 이러한 아이러니를 그대로 보여주는 자신의 인생의 감독이자 배우였다. - 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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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연옥편 30곡~
28곡에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로마시인 스타티우스는 마침내 연옥의 일곱째 둘레를 벗어나
천국의 입구에 도달한다.
30곡에서는 아버지처럼 믿고 의지하였으며 지옥과 연옥의 안내자와 보호자임을 자처하였던 베르길리우스가 소임을 다하고 떠나가게 되었다.
단테는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 하였는데
베아트리체의 책망의 말에 부끄러워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한다.

그러니까 베아트리체는 단테를 참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꿈이나 다른 방법으로 영감에 호소˝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고, 그가 너무도 아래로 떨어졌기에 그에게 길 잃은 다른 사람들(지옥의 죄인들)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지옥의 입구(림보)에 있는 단테가 추앙하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눈물로 호소하였는데 이제 단테가 올바른 참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 목적은 이룬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단테는 잃어버린 선善의 기억을 새롭게 해주는
에우노에 강의 물을 마심으로써 천국에 오를 준비가 다 되었다.

《신곡》 연옥 편 33곡 읽기 완료!

이제 천국PARADISO 편만 남았다.


예전에 본 적 있듯이, 날이 샐 무렵
동녘이 완전히 장밋빛으로 물들고
나머지 하늘은 아름답고 청명한데,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의 얼굴이
희미한 안개 때문에 흐려져 눈으로
한참 동안 바라볼 수 있었던 것처럼, - P698

그렇게 천사들의 손에 의해 위로
날아올랐다가 수레의 안과 밖으로
다시 떨어지는 꽃들의 구름 속에서

하얀 베일에 올리브 가지를 두르고
초록색 웃옷 아래에 생생한 불꽃색의
옷을 입은 여인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의 앞에 있을 때면 떨면서
놀라움에 쇠진해지던 나의 영혼은
벌써 오래전부터 그렇지 않았는데,

미처 눈으로 알아보기도 전에
그녀에게서 나오는 신비로운 힘으로
오래된 사랑의 거대한 능력을 느꼈다. - P699

내가 어린 시절을 벗어나기도 전에
이미 나를 꿰뚫었던 그 강렬한 힘이
나의 눈을 뒤흔들자마자, 곧바로 나는

마치 어린애가 무섭거나 슬플 때면
자기 엄마에게 달려가는 것처럼
믿음직한 왼쪽으로 내 몸을 돌렸고,

베르길리우스께 <떨리지 않는 피는 제게
한방울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옛 불꽃의
흔적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려 하였는데,

베르길리우스는 우리를 떠나 물러가시니,
더없이 인자하신 아버지 베르길리우스,
내 구원을 위해 의지했던 베르길리우스여, - P701

옛날의 어머니가 잃어버린 모든 것도
이슬로 씻었던 나의 뺨들이 눈물로
얼룩지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으리라.

「단테, 베르길리우스가 떠났다
아직은 울지 마오, 아직은 울지 마오.
다른 칼로 울어야 할 테니까.」 - P701

그를 돌이키려고 꿈이나 다른 방법으로
영감에 호소하는 것도 소용없었으니,
그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오!

너무나도 아래로 떨어졌기에, 그에게는
길 잃은 사람들28을 보여 주는 것 외에
어떤 수단도 구원에 미치지 못했지요.

그 때문에 나는 죽은 자들의 입구29를
방문했고, 그를 이곳까지 인도해 주었던
사람30에게 울면서 부탁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눈물을 흘려야 하는 어떠한
참회의 대가도 전혀 없이 레테의
강을 건너고 또 그 물을 마신다면,

하느님의 높으신 뜻이 깨질 것입니다.」

28 지옥의 죄인들을 가리킨다
29 림보
30 베르길리우스
- P706

「그대는 잠시 동안 이 숲에 머물다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저 로마23에서
나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악하게 사는 세상에 도움이 되도록
이제 저 수레를 잘 보고, 그대가 본 것을
저 세상으로 돌아가 글로 쓰도록 해요.」

그렇게 베아트리체는 말했고, 완전히
그 명령에 따를 생각에 나는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눈과 마음을 향했다.

23 천국을 가리킨다 - P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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