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강윤희가 가장 외로운 순간은 자신이 왜 그토록 완전한 피임을 원하는지 백은호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였다. 백아영이 성조숙증 확진을 받았을 때도, 틱 증상이 생겼을 때도 아무도 자신만큼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강윤희는 생각했다. 강윤희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 한가운데서 혼자서만 노를 젓고 혼자서만 책임지며 혼자서만 비난받는 것 같았다.


---<눈으로 만든 사람> 중에서 - P115

그때 유정이 붙든 생각은 하나였다.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타인으로부터도 자신으로부터도 스스로를 지킬 수없다는 것이었다. 삼십 년 전의 시간들도, 일 년 전부터 시작된 새로운 상황도 유정은 더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유정은 받아들여야 했다. 그동안 전전해온 육아 우울증과 부모 치료와 부부상담과 만성적인 정신질환들이 아니라 어려서 받은 성학대.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 <내게 내가 나일 그때> 중에서 - P258

제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였어요.
몸안의 모든 수분, 모든 피를 빼내고, 모든 습기를 말리고, 비틀고, 보이지 않는 입자가 될 때까지 갈고 갈아서, 완전히 부수어서,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없애버리는 것. 몸을 없애는 것. 이 지긋지긋한 몸을 없애는 것. 이해받지 못하는 몸을 없애는 것. 유정이 오랫동안 원해온 것은 그것이었다. - P269

반병의 와인만으로도, 뜻하지 않은 장소와 불현듯 살아난 말이 기폭제가 되어서, 유정 자신도 예상치 못한 어느 날에, 폭풍 뒤에 남는 압도적인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어느 날에, 아주 오랫동안 유정을 파먹던 그 마음을 실행할 수도 있다는 걸 유정은 알았다. - P269

그런 순간엔 자신이 아끼던 어떤 것도 자신을 붙잡아주지 못할 거라는 걸 유정은 알고 있었다. 때마다 손질해 쓰던 캄포도마도, 손이 자주 가던 아이섀도도, 드물게 마음에 들어서 SNS에 올려둔 자신의 모습도, 당장이라도 쓰고 싶어서 마음을 부풀게 했던 다음의, 그다음의 소설들도, 소은이 스케치북에 적어준 사랑한다는 말조차도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걸, 그 순간에 언제든 질 수도 있다는 걸 유정은 알고 있었다. - P269

알고 있어서, 유정은 계속, 계속, 소리조차 나오지 않아서, 계속, 가슴을 쳤다. 유태도, 흡연 부스도, 어떤 것도 이젠 보이지가 않은 채로 서 있는 것인지, 무릎이 꺾인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없는 채로, 계속, 가슴만 내리찍었을 뿐인데, 찍어버렸을 뿐인데.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찍어버렸을 뿐인데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리면서 눈앞이, 달려오려는 유태의 모습을 밀어버리면서 차 한 대가, 유정의 앞으로 다가와 유정을 낚아채 실었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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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씨를 떠올리면 나는 언젠가 그녀가 소화기를 사야겠다고 하던게 생각난다. 진아씨와 많은 날 여러 얘기를 나누었지만 이상하게도 진아씨 하면 그때가 떠오른다. 휴대폰 화면을 밀어올리면서 진아씨는 투척형 소화기로 살까 스프레이형 소화기로 살까 물었다. 식탁에는 견과류 껍데기가 흩어져 있었다. 욕실 거울 위에 붙어 있던 동그란 시계. 변기 안에 떠 있던 참외 씨 하나. 그건 진아씨한테서 나온 것일까. 진아씨 남편한테서 나온 것일까.
진아씨 아이한테서 나온 것일까?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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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H와 대화를 나누고 한 달쯤 지난 후부터 나는 초등학교 입학식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전에 나는 몇 번이나 민선 선배에 대해 글을 쓰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리 애를 써도 완성할 수가 없었다. 선배의 표정과 몸짓,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 모두
그토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도 이야기는 방향을 찾지못하고 이리저리 흩어지기만 했다. H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이 이야기의 한편에 인희가 있다는 걸 비로소 알아차렸다.
그리고 인희에 대해 쓰기 시작하자 잊고 있던 이름들이 하나둘 기억 위로 떠올랐다. - P167

긴 시간 동안 이 해변은 내게 쓰라린 장소로 남아 있었다.
오래전 민선 선배는 이 모래밭에 "사랑해!!"라고 썼다. 그때 난 열여덟 살이었고, 선배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 장면은 내 인생에서 뼈아픈 실패를 뜻했고, 떠올릴 때마다 쓰라린 좌절을 안겨 주었다. 난 선배를 원망했었다. 과녁을 맞힐 수도 있었을
그 말을 환한 햇살 아래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 그래서 더이상 무엇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선배를 원망하고 원망했다. - P167

하지만 이 글의 후반부를 쓰고 매만지는 동안 나는 그 장면이 더 이상 내게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 그 장면은 여전히 슬픔을 주긴 했지만, 실패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 P167

나는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교복을 입은 선배의 웃음 가득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그건 내가 원하던 사랑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던 사랑은 다른 사랑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녀의 말과 몸짓은 그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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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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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느끼는 거지만... 줄리언 반스는 나와 안 맞는다는 것. 너무 심심하고 밋밋하고 재미가 없어. ㅠ.ㅠ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도 엘리자베스 핀치의 삶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긴 타인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아쉽지 않다. 앞으로 이 작가 책은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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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11-2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나쁘진 않은데 안 맞는 작가예요.

은하수 2024-11-26 21:49   좋아요 1 | URL
전 벌써 몇 권째인지 몰라요 ㅠ
앞으론 굳이 찾아 읽진 않을 거 같아요^^
 

이렇게 표현해 보자. 나는 강의실에서, 파티(그녀는 파티에서 늘 일찍 자리를 떴다) 때 건너편에서, 수많은 점심 식사 자리에서 EF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나의 친구였고,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의 존재와 모범 때문에 나의 뇌는 기어를 바꾸었고, 나는 자극을 받아 세계 이해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나는 그녀가 다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을 공책들을 읽었고, 그녀가 나에게 남긴 책의 모든 연필 자국을 살폈다. - P289

하지만 아마 이 모든 만남과 대화, 그리고 그것에 대한 나의 기억- 기억도 결국은 상상력의 기능 가운데 하나다- 은 수사학의 비유와 같고 과거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살아 있는 비유지만, 어쨌든 비유.
아마도 내가 엘리자베스 핀치를 ‘알고‘ 또 ‘이해하는‘ 것은 율리아누스 황제를 ‘알고‘ 또 ‘이해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깨달았으니, 멈출 때가 되었다. - P290

그녀 자신은 어떤 것도 운에 맡기는 일이 거의 없었음에도, 내 생각으로는, 나에게 자신의 문학적 찌꺼기에 대한 책임을 넘김으로써 재미있는 방식으로 바로 그 일을 했다. "재미있는 방식으로"ㅡ그래, 그녀에게는 아이러니를 멋지게 구사하는 재치가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P291

그녀가 반쯤 지워버린 자취를 좇을 에너지나 관심이 나에게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운이었다. 또 내가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책‘을 재구축할 시도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것도 운이었다. 내가 그녀의 삶을 재구축할 시도를 하느냐 마느냐- 그녀는 예상도 하지 못했을 텐데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운이, 우연이 자기뜻대로 하게 놓아두는 것. 나는 지금까지 쓴 것을 서랍에 넣어두고, 어쩌면 그 옆에 EF의 공책들도 놓아둘 것이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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