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인구는 거의 80억에 도달했고 가까운 시일내에 100억 돌파도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문제는 지구가 이 모든 걸 부양할 만큼 그리 크지 않고 인간은 개체수가 본래 가장 적어야할 최상위 포식자라는 점이다. 이런 무리한 부양을 위해 인간은 현재 태양이 매일 제공하는 에너지를 사용할 능력이 부족하자 과거 지구가 축적한 에너지인 화석에너지를 이용했고 자연순환 이상의 질소고정을 하여 식량을 증대했다. 그리고 나머지 동물군과 식물군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여기에 식량작물과 가축들을 배치하여 지구상의 생물에너지 대부분을 자신의 식량에너지로 삼고 있다. 현재 지구상의 동물군의 무게는 인간자체와 인간에게 에너지를 직접 제공하는 가축이 99%를 차지한다. 나머지는 수만 많고 적은 개체수를 간신히 유지하며 에너지와 자원을 인간에게 모두 빼앗기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형태의 식량증대 방법은 지구 환경과 식량이 되는 동물에 엄청난 고통을 가하는 윤리적 문제를 가져왔다. 책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자연순환에서 농경순환 그리고 산업화와 화석에너지를 식량으로 변환하는 산업화된 순환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한다. 그리고 책 '값싼 음식의 실제가격'은 우리가 실제 먹는 수많은 식물, 동물음식이 사실 화석연료와 보조금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이 환경에 가하는 부담과 보조금으로 인한 가격이므로 실제로는 엄청나게 비싼 가격을 초래하는 것임을 밝힌다. 규격화되지 않았거나 약간의 손상이 있기에 상품화되지 않고 버려지는 음식도 엄청나다. 그리고 반대쪽에서는 그것이 없어 굶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에서는 69년을 기점으로 인간이 개체수가 늘어나고 풍요로워지면서 반대로 얼마나 지구가 끔찍해졌는지를 수치로 담담하게 제시한다. '고기로 태어나서'를 한국의 책으로 작가 자신이 닭, 돼지, 소, 양계, 식용개를 다루는 축산업계에 직접 취업하며 겪은 동물들의 끔찍한 삶을 가감없이 드러낸책이며, 피터싱어의 '동물 해방'은 공리주의에 입각하여 쾌락과 동물을 충분히 겪는 동물의 이익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함을 주장하는 책이다. 

 이 책들은 매우 설득력이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하고 환경과 윤리적 문제에 대한 영감을 준다. 하지만 해결은 매우 어렵다. 상당수의 인간이 자신의 잡식동물로서의 본능을 포기하고 채식으로 돌아서거나 아니면 감당이 가능할 정도로 인구의 수를 줄여야 한다. 그러나 이중 어느 것도 인간의 본능에 부합하지 않는다. 인간은 열량이 높은 육류를 선호하고 갈망하며, 환경이 좋아져 경제성장이 되면 충분히 번식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다. 때문에 육식의 포기는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실제로도 그래왔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등장한 세포배양육은 이런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가능성을 갖고 있다. 세포배양육은 글자 그대고 동물의 세포를 배양하여 식용이 가능한 고기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기술은 10년정도 전에 실체를 조금씩 드러냈지만 당시만 해도 무척 비쌌다. 세포배양육이 모습을 드러냈을때 치킨 너겟단가가 500g당 무려 120만 달러였다. 그야말로 요리사가 살 떨며 조리할만한 가격이었는데 2019년엔 그 가격이 500g당 1000달러 선으로 크게 내려갔다. 치킨 너겟 개당 가격 50달러 수준인 셈이다. 아직은 치킨 너겟 한 개당 한화 5-6만원 수준으로 비싼 수준이지만 가격이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은 시간 문제이며 재생에너지의 가격이 화석에너지의 가격보다 싸진 것처럼 배양육의 가격이 재래식 축산육의 가격보다 내려가는 날도 가까운 시일내에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언급한 것처럼 세포배양육은 재래식 축산업이 야기하는 환경파괴의 문제와 동물에 대한 윤리적 문제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 현재 축산업은 전 세계가 배출하는 온실가스량의 무려 14%를 배출한다. 그리고 이는 축산업계의 반발로 제법 보수적으로 추정한 수치다. 이 온실가스의 총량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량과 선박, 기차, 비행기에서 내뿜는 온실가스의 배출량을 상회한다. 재래식 축산업은 인간이 배출하는 온실 가스중 이산화 탄소의 9%, 메탄의 37%, 아산화 질소의 65%를 차지한다. 재래식 축산업중 온실가스 배출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은 소다. 이는 소개 네 개의 위를 통해 음식을 발효하기 때문이고 그 과정에서 메탄가스가 대량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소는 메탄가스 배출기계나 다름이 없는데 500kg의 소가 무려 100kg의 메탄가스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재래식 축산업은 가성비가 매우 떨어진다는 약점도 지닌다. 소고기 450g을 얻기 위해서는 사료가 2.7kg이 필요하며 돼지고기 500g을 위해서는 사료 1.6kg, 닭고기 500g을 위해서는 사료 900g 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사료는 굶주리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이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현재의 축산업은 부유한 국가 시민의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국가사람들을 부양하지 않는 것에 식량체계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재래식 축산업은 식량 뿐만 아니라 상당한 양의 토지와 물을 소모한다. 매우 밀도 높은 공장식 축산업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구상의 가축수가 엄청난 만큼 상당한 양의 토지와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래식 축산업은 그 대상인 가축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온다. 생물은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태어나며 그를 위한 본능과 그것이 충족될 때 갖는 기쁨이 있다. 하지만 공장식 축산업은 그 모든 것을 박탈한다. 소는 더이상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풀을 뜯을 수 없으며 돼지는 흙목욕을 하지 못하며 심지어 뒤를 돌아보지도 못할만큼 좁은 공간에 갇혀 그 스트레스로 다른 돼지의 꼬리를 물어뜯는다. 닭은 발톱으로 땅을 긁을 수 없으며 날개짓조차 하지 못한다. 이들 모두는 인간을 위해 새끼와 자신의 고기, 우유나, 달걀 등을 착취당하며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음을 맞게된다. 이는 상당한 윤리적 문제를 일으켰다. 물론 식물이 아닌 동물의 하나로서 인간은 지구상의 다른 생명을 자신의 에너지원으로 바꾸어 생명을 유지할수 밖에 없으며 이는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이는 윤리의 영역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의 축산행위가 윤리의 영역이 되는 것은 인간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생존을 유지할수 있는 다른 방안과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인간은 채식을 통해서도 충분한 단백질과 다른 영양분을 얻을 수 있으며 육식을 포기하지 않더라도 지금처럼 광범위한 극도의 고통을 주는 형태를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 

 세포배양육은 이런 문제를 모두 해결한다. 세포배양육이 재래식 축산업을 대체할 경우 같은 고기를 생산하는데 에너지의 45%, 온실가스 배출의 96% 토지사용이 99% 물 사용량이 96%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 무척이나 인상적인 수치다. 또한 고기를 만들어내는데 동물의 본능의 박탈과 고통의 증가, 죽음이 없기에 윤리적 문제도 제기되지 않는다. 

 여기에 몇 가지 장점이 더 있다. 제공되는 고기가 매우 안전하고 친환경적이라는 것이다. 자연상태이건 축산업이건 동물은 외부환경에 노출되며 이로 인해 기생이 발생하거나 세균에 고기가 오염된다. 우리는 도축 및 유통과정에서의 위생강화와 조리과정에서 충분한 열을 통해 고기를 요리함으로써 이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으며 이로 인해 가끔 식중독등의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세포배양육은 무균환경에서 배양되기에 유통과정에서의 관리만 잘 이뤄지면 매우 안전한 고기가 공급된다. 공장식 축산업에서 알게모르게 들어가게 되는 환경호르몬이나 항생제등의 문제에서도 자유롭다. 

 세포배양육이 제공할만한 또 다른 장점은 식량 위기의 극복이다. 기존 축산업은 상당한 식량자원과 수자원을 소모한다. 때문에 지금처럼 계속 인구가 늘어나고 기후위기가 닥칠 경우 충분한 인구 부양력을 가질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공장식 밀집 사육으로 인한 잦은 질병의 발생도 문제다. 또한 근본적으로 기존의 축산업은 수많은 기술발전에도 불구하고 해당 지역의 기후에 크게 의존한다. 실제로 세계적 축산 국가는 미국이나, 호주, 유럽, 아시아 지역 등 동물사육에 적합한 온대기후지역이다. 건조지역이나 한대, 열대지역에서 채산성있는 축산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공장이나 다름 없는 실내 건물에서의 세포 배양은 이런 나라도 기술만 충분하다면 세계적 축산국으로 변모시킬수 있다. 

 세포배양육은 기술적으로 3가지 요소를 갖는다. 세포, 배양액, 바이오 리액터다. 세포는 동물의 세포로 보통 동물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생체검사를 통해 얻는다. 배양육 업계는 최근 여러 종의 동물세포를 보관하고 있는 기관이나 업체로부터 안정적으로 세포를 공급받고 있기도 하다. 세포배양은 기본적으로 세포분열을 통해 고기를 얻는데 문제는 세포가 자연상태에서 보통 50회만 분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충분한 단백질과 항산화제 보충 배양액을 이용하면 이 횟수를 10회정도 더 늘릴 수 있으며 좀 더 증식하는 특정 종류의 동물 세포군의 세포 사용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고 있다. 

 배양액은 현재 각 회사마다 비밀로 붙이고 있는 부분이다. 동물의 세포는 당연히 다르기에 소, 돼재, 오리, 닭의 세포에 적합한 배양액은 각각 다르다. 특히, 조류의 세포보다는 포유류의 세포가 더 민감하기에 고도의 기술을 적용한 배양액이 필요하다. 초기 배양액은 소의 태아 혈청을 사용했지만 가격이 4컵 정도에 1150달러정도로 매우 비싸다. 지금은 기술개발로 배양액의 가격이 업체마다 다르긴 하지만 리터당 1-5달러 정도로 저렴해졌다. 600리터 정도의 배양액이면 닭 1500마리 정도의 고기 생산이 가능하다.

 바이오리액터는 배양액 안에서 세포가 헤엄치며 자라는데 필요한 환경을 구현한 기계장치다. 바이오 리액터는 산소와 영양분이 고르게 분포하도록 휘젓는 제트기류를 꾸준히 발생시키며 그 강도가 세포의 성장을 방해하지는 않을 정도로 적당히 조정된다. 바이오리액터는 일정 온도와 PH를 유지하며 산소의 농도와 영양도의 농도를 꾸준히 감지하며 관리한다. 

 세포배양육은 이런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넘어야 할 한계도 존재한다. 우선 기술적 개선이다. 현재 세포 배양육은 근육조직을 배양한 것이다. 하지만 재래식 축산업은 이 근육과 지방이 적절히 혼합된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고기의 맛과 풍미는 지방이 좌우한다. 사실 지방이 없다면 소나, 돼지, 닭, 오리의 맛은 구분이 어려울 정도다. 때문에 고기로서의 경쟁력은 지방이 좌우한다고 볼 수 있는데 아직 배양육은 근육조직과는 다르게 지방세포부분에서는 연구가 미흡하다.

 다른 장벽은 사회적 편견과 재래식 축산업계의 반발이다. 재래식 축산업계는 세포 배양육이 가격경쟁력과 품질경쟁력을 갖출 경우 그 어떤 카드도 갖고 있지 못하게 된다. 윤리적 문제와 환경파괴라는 치명적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은 각국의 정부에 강한 압박과 로비를 가하고 있으며 세포배양육을 고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저자는 축산업이 발달한 미국에서 이런 강한 압박을 겪었는데 상대적로 환경파괴 문제에 민감한 유럽이나 식량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아시아에서는 큰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고기에 대한 전통적 생각도 넘어야할 문제다. 세포배양육이라는 명칭 자체는 그 고기가 갖는 친환경성과 안전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고기처럼 여겨져 강한 거부감을 갖게 한다. 특히, 세포배양육을 장기섭취했을 경우 인체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에 대한 연구도 전무한 것이 사실이다. 

 재밌는 가능성은 세포배양육이 특정 종교의 계율로 인한 음식문화를 바꿀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돼지 고기를 금기시하며 힌두교에서는 소를 금기시한다. 전통 유대 율법에 기반한 코셔시장 규모는 연간 240억달러수준이며, 무슬림 율법 식단인 할랄은 시장 규모가 무려 1조6천억 달러에 달한다. 이 종교들의 계율에선 돼지고기를 금기시한다. 하지만 세포배양육을 통해 만들어진 돼지 고기 역시 기존의 돼지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들의 종교지도자들이 이것을 허용한다면 그야말로 수천년만에 이들의 식생활에 지각변동이 생겨날 것이다.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에서도 고기의 허용을 금지한다. 생명을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을 죽이지 않는 세포배양육을 불교의 승려가 거부할 이유는 마땅지 않다. 이 부분에서도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인간은 세포 배양육으로 만든 다양한 고기를 즐기며 과거 동물을 잔인하게 도축하고 무리하게 개체수를 불려 지구 환경을 파괴했던 야만스러운 시절을 과거의 일로만 회상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축산업의 농장이 차지했던 자리는 숲으로 돌아가 자신의 에너지를 빼앗겼던 다른 생물들이 다시 차지하게 될 것이며 생겨난 숲은 탄소를 흡수해 지구온난화를 조금이나마 막아줄 것이다. 비건이라는 선의로 시작된 좋은 용어도 사라지게 될 것이고 오직 건강상의 이유로만 채식을 즐기는 소수의 사람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런날이 머지 않아 올것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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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2-02-22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포배양육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었는데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아 갑니다. 특히 지방세포부분에서 연구가 미흡해서 재래식 축산업의 고기와 맛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어서 빨리 기술이 발달할 날이 오면 좋겠네요!

닷슈 2022-02-22 21:20   좋아요 1 | URL
저도 그날이 빨리 오길 기다립니다.
 
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
피터 B. 골든 지음, 이주엽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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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한국만 봐도, 고조선은 그렇다쳐도 패자인 고구려, 백제, 가야의 역사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세계사로 시선을 넓힌다면 승자를 유럽 쪽일 것이고 거기서도 정주세계, 즉 체계적 농경문화를 구축하고 여기서 산업화로의 성공적 이행까지 거둔 쪽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지금도 세계를 지배하며 우리 역시 그 중 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교역과 선진기술의 흐름이 육상에서 해양으로 향하고, 화약으로 인해 기마병이 무력화되기 전까지 세계 역사의 중심축중 하나는 분명이 유목세계였다. 그리고 지구의 유목세계는 지리적으로 중앙아시아로 실크로드가 지나는 지역이다. 책은 이런 중앙아시아에서 어떤 민족과 나라가 흥망성쇠롤 거듭했는지 서술한다. 두껍지 않은 책에 여러 나라들과 민족, 종교, 인물, 사건등이 나열되어 좀처럼 읽기 쉽진 않았다. 하지만 무척 흥미로웠고 이부분에 대해 관심만 많지 접해본적은 없는 지라 많이 배우기도 했다.

 책에서 언급하는 중앙아시아는 지금의 -탄으로 끝나는 나라들이 밀집한 지역으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키즈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북부, 중국 신장과 내몽골, 몽골과 만주지역, 남시베리아, 러시아 서부와 흑해 일대다. 이곳은 건조기후지역으로 유목에 적합한 목초지가 펼쳐져 있고 수목과 산맥이 없어 동서방향으로 이동이 용이하다. 하지만 건조하고 기후가 혹독하여 농경엔 부적합하여 인구밀도가 높지 않다. 중앙아시아에 등장한 나라들은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책을 다읽고 나니 상당한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국가나 민족개념보다는 씨족이나 부족연합체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이들은 정주국가에 비해 신분개념이 다소 희박하여 칸으로 옹립하여도 동등한 일원 중 가장 고귀한 대표정도로 여겼다. 승계도 형제승계였으므로 정주국가의 농경왕조에 비해 평등해보이지만 체계가 쉽게 흔들리고 내부나 외부세력에 의해 내분에 휩싸이기 쉽다는 약점이 있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칸 이라는 명칭의 사용이다. 둘째는 개방성과 포용성이다. 확장하는 시점에서는 정주국가나 다른 유목민을 철저히 파괴하고 살해하지만 점령하고 나서는 현지인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확장하고 나면 현지 언어나 문화 종교를 잘 받아들이는 편이며 세월이 지나면 오히려 그곳에 융화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지리적 여건상 상업적 능력도 매우 우수했으며 다언어적 환경이었고 학문과 문화를 잘 융합하여 발전시키기도 했다. 종교의 경우 이슬람이 침투한 후에는 다소 경직된 모습을 보인다. 셋째는 연쇄효과다. 로마제국의 멸망 요인으로 훈족에 의한 게르만족의 침투를 꼽는다. 유목부족들은 자신들끼리의 정복과, 정주국가를 멸망시키거나 혹은 정주국가에 의해 토벌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곤 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세력을 밀어내기도 하며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여 다른 세력을 만들어내어 세계사를 흔들곤 했다. 


1. 유목민의 출현

기원전 1만에서 8천년 세계인구는 1천만이었고 이중 50만이 중앙아시아에 거주했다. 기원전 3천년기 인구가 늘면서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 관개 농경이 등장하고 수공계, 야금에 종사하는 인구가 도시를 형성했다. 이들은 지구라트를 통해 알수 있는 것처럼 제도화된 종교도 발전시켰으며 초기 문자도 발전시켰다. 기원전 2천년기 지나친 경작과 재앙적 기후변화로 이 지역은 쇠퇴했고, 기원전 1천년기 이란계 민족이 흑해초원과 중앙아시아와 더 북방쪽으로 이주했다. 유목민에겐 말이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이 없는데 말의 사육은 기원전 4800년경에 시작됐다. 3700년경 말을 타기 시작했고 2000년경 일부 자급자족형 농민이 목축에 의존하며 스텝의 목초지로 계절이동을 하며 우리가 아는 유목민이 탄생하게 된다. 기원전 2천년기 스텝의 목축민 일부가 기마민족으로 발전하였고 기원전 2000년 전차가 처음 등장하여 중동과 중국으로 전파된다. 이어 나무와 동물의 힘줄을 이용한 복합궁이 발명되었는데 복합궁은 작으면서도 강하여 말위에서 모든 방향으로의 사격이 가능했다. 철제무기와 복합궁, 말이 결합되며 탄생한 강력한 기마 유목민은 주변에 대한 약탈이 가능해졌으며 이로 인해 세계사는 격변하게 된다. 

 유목민은 마구잡이 사회같지만 실제로를 매우 고도화된 사회였으며 신중하고 계획되고 방어된 경로를 이용해서 목초지로 이동했다. 이들은 노동집약적이지 않았고 큰 인구의 규모가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유목은 가업으로 4-5가구가 함께 야영했고 대개 이들은 친족이었다. 보통 5인의 인구부양을 위해 대략 100마리 정도의 가축이 필요했다. 유목민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경우 농경민이 되기도 했는데 유목사회에서 이는 신분의 추락을 의미했다. 유목민은 전쟁만 한 것 같지만 사실 상업적 교역과 문명의 전파자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잉여물을 정주세걔의 식량, 물, 무기와 교환하였고 일부는 큰 부를 축적했다. 

 유목민은 정주세계와 교류 및 교역하며 집단을 대변할 필요성이 생겨났는데 이 과정에서 정치조직이 생겨났다. 유목민은 씨족 연합 기반으로 종종 연합했으며 대개 정치적으로 가장 강력한 부족의 명칭을 전체의 명칭으로 채택했다. 하지만 유목민은 대개의 경우 비국가적 부족 연합 상태였으며 오직 정주세계의 부를 탈취하거나 외부 침입이 있을 경우 집결하여 국가를 건설했다. 유목민은 많은 비용을 초래하는 정주국가의 정복을 좀처럼 하지 않았다. 다만 성공적으로 하게 되는 경우 매우 강한 지배 왕조를 탄생시켰고 이 왕조는 신속히 제국 유지를 위해 정주제국을 모방하였고 휘하 유목민도 정주민으로 변모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은 실크로드 세계의 중심 연결 고리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은 당연히 이 교역로를 보호했다. 교역로는 몽골 고비사막, 신장 타클라마칸 사막, 투르크의 카라쿰 사막등을 경유해 매우 혹독한 환경이었다. 유목민은 단순 전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발명품인 현악기와 바지도 정주세계에 전파했으며 유목 세계 여성들의 전투참여는 아마존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신화 원형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 고대유목국가들

고대의 중앙아시아의 주인은 이란계 주민이었다. 이들은 유목민의 특성보다는 정주인이었고 오아시스 인근에 정착도시를 세웠다. 그래서 고 투르크어에서 도시를 의미하는 칸트는 이란어에서 차용되었다. 사마르칸트가 그 예다. 기원전 3000-2500년 전후 인도-유럽어 공동체가 해체하며 퍼지게된다. 토하라인이 기원전 3천년기 후반에서 2천년기 초반 신장에 도달했고, 인도-이란인이 동쪽으로 이주해 시베리아, 몽골, 신장, 북파키스탄에 도달한다. 인도-이란인은 기원전 2000년경 남아시아 인도어 사용 주민과 중앙아시아 이란어 사용인으로 분화한다. 기원전 3-4세기에 투르크계 민족이 나타나며 이란계를 몰아내고 본격적 유목시대를 연다. 

 오아시스와 강유역에 정착했던 이란계 주민들은 우즈벡 지역에서 소그디아인과 화라즘인으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박트리아인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이들의 국가는 키루스 2세가 중앙아시아를 침공하며 복속된다. 이 지역은 알렉산더의 원정 이전까지 페르시아 제국의 지방령이 되며 페르시아의 통치아래 이란권 중앙아시아는 서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장거리 교역 네트워크 연결을 한다. 

 기원전 3세기 그 유명한 흉노가 나타난다. 그 유래는 알기 어렵다. 기원전 215년 진은 흉노의 선우 두만을 북으로 몰아내며 이들을 혼란에 빠트린다. 당시 흉노는 월지에 복속상태였으므로 두만은 맏아들 묵특을 볼모로 보낸다. 이후 두만이 월지를 침공하고 묵특은 탈출해 원한관계인 아버지를 죽이고 묵특 선우가 된다. 세를 불린 흉노로 인해 진을 이은 한은 기원전 198년 화친 조약을 맺는다. 왕실공주와 상당량의 비단, 직물, 음식을 제공해야했다. 흉노는 그 대가로 중국천자와 대등한 관계를 맺고 침공을 하지 않았다. 

 기원전 162년 노상 선우가 월지의 왕을 죽이고 월지를 서로 몰아낸다. 이로 인해 월지 이란계 유목민은 박트리아와 이란으로 이동하게 된다. 세가 역전되어 한무제가 기원전 127년에서 119년 중앙아시아를 침공한다. 한은 101년 페르가나를 정복해 목표로 하던 한혈마를 확보하고 중앙아시아를 안정화시켜 실크로드가 안정된다. 그 덕에 간헐적으로 도착하던 비단이 지중해세계에 안정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흉노는 기원전 72-71년 계속 패배한다. 중국은 흉노를 분열시켜 흉노는 남과 북으로 갈린다. 북흉노는 중국의 압박으로 서진해 강거로 이주한다. 이들은 선우가 살해되자 강거에서 훈이라는 이름으로 부족명을 개편한다. 남흉노는 한에 복속되었고 한 멸망후에는 선비, 강계 국가에 흡수된다. 

 서부에는 쿠샨과 훈이 부상한다. 쿠샨은 전성기에 박트리아, 동이란, 동서 투르키스탄, 파키스탄 일대를 지배했다. 이들은 중앙아시아 교차로에 위치해 여러 문화를 융합했다. 조로아스터교, 토착중교, 불교과 공존했고 예술은 사실적 표현과 , 곡선미의 인도양식, 정형화한 이란 양식을 종합해 간다라 미술을 탄생시킨다. 쿠샨은 관개로 농업을 발전시켰고, 상업도 발전했으며 대상으로 중앙아시아와 인도 항구바다를 연결했다. 불교 순례와 국제무역도 동시 장려한다. 

 쿠샨은 사산왕조에 230-270년경 멸망한다. 그리고 쿠샨의 빈자리를 채운게 훈족이다. 흉노계인 이들은 소수의 지배집단이 카자흐로 진출해 다른 부족과 합류하여 생겨났다. 훈은 중앙아시아 부족의 압박으로 375년 불가강을 건너 알란과 고트족을 격파한다. 그리고 이에 놀란 게르만 족이 로마영내로 이동하게 된다. 훈의 왕 아틸라는 440년 헝가리와 인접 지역의 게르만 슬라브, 기타 민족의 지배자로 부상한다. 아틸라는 로마제국의 변경을 약탈하였지만 실제 로마 정복이 목적은 아니었다. 다른 유목국가가 그렇듯 위협을 통한 공물 약탈이 주목적이었다. 훈의 공포는 서구 사회에 깊게 남았으나 사실 중대한 위협은 아니었다. 


3. 돌궐의 등장

 중국에서는 한나라가 나라의 기반을 만든 왕조로 평가된다. 오죽하면 중국인이 한족일까. 그리고 유목국가의 전범 같은 국가가 바로 돌궐이다. 흉노와 한이 멸망한 공백기에 중앙아시아에는 북중국의 탁발과 몽골 초원의 아바르, 쿠샨땅의 헤프탈이 등장한다. 탁발은 이후 중국식으로 북위로 개명한다. 아바르와 북위는 전쟁을 하는데 이 때문에 유목민이 서진하게 되어 내륙아시아 초원을 이란계에서 투르크인으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이 혼란에 돌궐이 부상한다.

 다른 유목민들이 그렇듯 돌궐도 암늑대와 적에게 전멸당한 한 부족의 유일한 생존자를 조상으로 둔다. 546년 돌궐 수령 부민이 아바르를 도와 철륵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세를 키워 아바르를 정복한다. 돌궐은 유라이사를 횡단하는 최초의 대제국을 세우는데 중국북부와 만주, 흑해에 이르는 영역이었다. 돌궐은 교역로를 확보하고 비잔틴과 외교하기도 한다. 

 유목국가가 그렇듯 이들은 제국을 세우면 영역을 나뉘는데 마치 유목민들이 부족이 연합해도 자기 고유 영역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 실제 돌궐은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뉜다. 기원한 지역인 동부가 서부에 비해 지위가 더 높았다. 돌궐 역시 유목전통으로 형제승계를 하였는데 삼촌들이 모두 물러나면 맏형의 아들에게 지위가 돌아갔다. 

 자연 내분이 일어났고 481년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돌궐에 첩자를 보내 분열시킨다. 하지만 수는 무리한 베트남, 고구려 침공으로 내부 반란이 일어나 붕괴하고 이 내부반란은 동돌궐이 돕는다. 이 후 등장한 당은 동돌궐의 힐리 카칸이 계속 침공하자 그에게 공물을 바치면서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 거기에 초원에 폭설과 서리가 수년간 지속되어 630년 당은 힐리 카칸을 생포하여 사망시킨다. 동돌궐은 이렇게 멸망하여 무려 100만이 당에 투항하고 당은 이들을 잘 융화하여 북방 변경에 정착시키고 자원으로 사용한다. 부족장은 중국식 칭호와 관직을 받았고 당태종은 이들을 무인으로 잘 활용한다. 이를 기반으로 640년 당태종은 신장의 고창을 정복한다. 그리고 659년 서돌궐마저도 당에 무릎을 꿇는다. 당은 중앙아시아를 장악해 아프간 일부와 이란 변경까지 진출한다. 

 하지만 당이 쇠퇴하자 동서돌궐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돌궐 제 2제국이 설립한다. 돌궐은 칸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돌궐의 카간은 하늘이 내린 존재로 피를 흘리면 안되는 존재였다. 그래서 돌궐은 칸은 살해하게 되는 경우 교살한다. 외튀겐 고지대와 오르콘 강 유역등 자신들의 기원 지역을 신성시하였고 여기를 지배하는게 칸의 정치적 정통성 확보에 중요하다. 이런 식의 전통의 이후 유목 국가에도 계승된다. 이들은 매우 강력하고 기동성있는 군대를 바탕으로 오래 번영했지만 결국 광대하면서도 다양한 민족을 지배하는데 드는 비용이 막대하였고 내부가 항상 불안하였기에 742년 결국 멸망하고 만다. 

 

4. 공백기 이슬람의 침투

 지금도 있는 위구르인이 이 때 등장하여 744년 돌궐과 당의 공백기에 몽골초원, 신장, 인근 시베리아를 아우르는 위구르 카간국을 수립한다. 755년 위구르는 안녹산의 난으로 당이 도움을 요청하자 난을 진압해주고 당의 수도 장안을 약탈한다. 위구르는 돌궐과 다르게 소드드인과 중국인의 도움으로 수도를 건설하였고, 757년 오르콘 강 유역에 수도 오르두 발릭을 건설한다. 

 9세기 전반은 격동기였다. 중국은 쇠퇴했고, 티베트도 친불교파와 반불교파로 나뉘어 싸웠다. 위구르도 금새 내부분쟁이 일어났고 외부적으로는 티베트, 카를룩, 키르키즈와 싸웠다. 위구르 부족은 이 혼란에서 중국 변경으로 두주하여 신장과 간쑤에 소규모 국가를 세우고 토착민을 위구르화한다. 

 키르키즈는 중앙아시아 여타 유목 제국과는 다르게 오르콘강과 셀렝게 강 유역을 국가의 중심부로 삼지 않았다. 그들은 힘을 떨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근거지인 예니셰이 강으로 돌아갔으며 중동 중국과의 무역 관계에만 만족했다. 권력의 공백기에 등장한 것이 거란이다. 거란은 북중국과 만주에 요를 건국한다. 그리고 10-11세기에 이르면 인종적으로 몽골어 사용 유목민이 몽골초원에서 투르크계 언어 사용 유목민의 수를 앞지르기 시작한다. 

 안녹산의 난으로 중국이 중앙아시아에서 철수하고 탈라스 전투에서도 주변 부족의 배신으로 이슬람이 승리한다. 그 결과 중앙아시아로 이슬람이 침투하는 기회가 열린다. 이슬람교는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서 지배종교가 된다. 트란스옥시아나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거의 일치한다. 오랜 기간 사용되던 아람어가 아랍어로 대체되었고 중앙아시아의 이란어 사용 도시민 다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이 지역을 오랜 기간 지배하던 소그드인과 화라즘인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것을 경제적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언급한 위구르 제국의 부상은 다시 민족 이동을 불러왔다. 투르크계 부족들이 이란-이슬람권 트란스옥시아나까지 밀려나가 일부는 흑해까지 밀려났다. 

 하자르 카간국은 서돌궐 아시나 혈통으로 북코카서스와 우크라이나, 남러시아 초원지대에 국가를 건설했다. 하자르인은 우크라이나의 불가르 족을 격파했는데 이 때 불가르 인들의 일부가 679년 발칸으로 이주하여 토착 슬라브인을 정복하고 동화하여 지금의 불가리아인으로 발전한다. 하자르 카간국은 이 지역에서 중세 최대의 상업지가 된다. 발트해-북유럽삼림지대-카스피해-볼가강을 지배하여 이슬람의 무역 경로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하자르 칸국은 비잔틴과 자주 동맹관계를 맺고 통혼한다.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와 정치경제적으로 교류했고 강성하여 볼가강 하류 그들의 수도 아틸에는 무려 25개 피지배민족 상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사만왕조는 우마미야 왕조 시기 이슬람으로 개종한 지방 영주의 후예들로 9세기 초 트란스옥시아나의 지배세력이 된다. 사만왕조는 초원의 투르크계 유목민을 약탈 공격하여 군사노예로 삼는다. 사만왕조는 이들의 전투력에 반해 군사노예 학교를 설립하여 이를 아예 사업화한다. 하자르 칸국과 사만왕조는 당시 노예의 주 공급자였다. 이들은 전쟁포로나 동유럽 삼림, 농겨지대의 슬라브족을 노예로 삼았는데 이들을 이슬람 세계의 강자 압바스 왕조에 공급했다.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특정 정파와 민족에 휘둘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이들을 선호했다. 투르크계 민족들은 인내력과 전투력도 매우 우수했다. 아랍세계는 이 전투노예들은 처음에는 굴람 나중에는 맘루크라 부르게 된다. 굴람들은 특수부대에 편입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힘을 키운 이들이 나중에 압바스 왕조를 뒤집게 된다. 

 1005년 카라한 왕조가 사만왕조를 정복한다. 이들은 대부분 수니파 이슬람교도로 돌궐칸의 정치 전통을 계승해 국가를 왕족의 공동소유물로 보고 승계권이 돌고, 분할통치를 한다. 카라한 왕조는 투르크-이슬람 문화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슬람 색채의 문학을 가졌고 많은 수의 투르크계 유목민이 중앙아시아 농경지대로 이주한다. 그 결과 투르크어가 공동어가 된다. 


5. 몽골 제국

13세기 초 중앙아시아에는 신생 화라즘, 요의 후예가 세운 카라 키타이, 금, 셀주크 제국 4개의 나라가 있었다. 몽골은 12세기 몽골지역의 여러 부족 연합중 하나에 불과했다. 서구에서는 몽골인을 타타르인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타타르인은 초기 몽골의 적이었다. 실제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타타르인에게 독살당한다. 칭기즈칸은 1189년 몽골 칸이 되고 1196년 타타르 격파 1206년 전 세계의 황제를 의미하는 칭지즈칸으로 추대된다. 그는 1209년 서하를 속국으로 삼고 1211년 금을 침공하여 1215년 대도를 함락한다. 1216-18년에는 카라 키타이 1219년 화라즘, 1220년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함락한다. 1223년 루스를 격파하고 귀환길에 볼가 불가르를 침공했으며 1226년 서하를 정복하고 칭기즈칸은 사망한다. 

 칭기즈칸은 네 아들은 두었는데 첫째는 아버지보다 이미 먼저 사망하였고 셋째 우구데이가 대칸으로 추대된다. 각 형제는 울루스(백성, 토지)와 군대를 물려받았고 이들은 대 몽골국 내 작은 국가를 이루었다. 전통에 따라 맏아들이 부친의 땅에서 가장 먼곳을 물려받아 주치의 아들 바투와 오르다가 킵차크와 서시베리아 지역을 상속한다. 바투는 볼가강 유역에 수도 사라이를 건설한다. 우구데이는 북신장과 남시베리아, 이르티시를 상속하고 몽골초원 중앙부에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한다. 

 몽골은 확장을 지속하여 1241년 킵차크인과 루스공국을 복속하고 폴란드와 헝가리도 일시 점령한다. 하지만 우구데이가 사망하여 철수한다. 유럽인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우구데이 사망후 대칸경쟁이 벌어지고 여기서 툴루이 가문이 승리해 뭉케가 자리를 이어 정복을 계속한다. 뭉케의 뒤를 이은 퀼라이는 이란, 이라크, 소아이아 대부분을 정복하지만 맘루크인이 이들을 저지한다. 

 쿠빌라이는 새 수도인 대도를 건설하고 국가명을 원으로 개명한다. 1279년 중국 정복을 완수하고 1270년 일본도 침공한다. 칭기즈칸은 네 아들 주치, 차가다이, 우구데이, 툴루이를 두었는데 주치는 14명 차가다이는 8명 우구데이는 7명 툴루이는 10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은 각가 자기의 울루스를 두었고 권력투쟁에 참여해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다. 뭉케는 우구데이 사후 대칸 경쟁에서 우구데이, 차가다이 일족을 숙청한다. 여기서 주치와 툴루이 연합이 이뤄졌지만 이들의 연합도 이후 와해된다. 

 쿠빌라이는 제국의 다언어 환경으로 인해 모든 언어를 표기할수 있는 언어의 개발에 착수한다. 1269년 티베트 승려 파스파에게 이를 개발하게 하여 파스파 문자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쿠빌라이의 노력과는 달리 이 알파벳은 널리 퍼지지 못한다. 파스파문자는 한글창제에도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있다. 

 원은 동과 서를 모두 연결하여 역사상 매우 안전하고 평화로운 문화, 교역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를 통한 정보교환으로 각지의 지식인과 상인들은 더 넓은 시야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얻게 된다. 원의 정복은 역시 민족의 이동을 불러왔는데 원의 팽창으로 밀려난 주변부 투르크인의 일파는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핵심세력이 되었고, 타이계 주민들은 버마 왕국으로 이주하여 변동을 일으킨다. 

 원의 몽골인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정복민과 동화되어갔다. 몽골인들은 의도적으로 투르크계 유목민을 재편하여 부족을 해체한 후 자신들의 군대에 편입시켰는데 그 결과 오랜 기간 유지되던 이들의 혈연 기반 부족전통이 와해되고 이후 자신들이 새로운 부족을 편성하는 경우 자신들의 혈통보다는 칭기스 계열의 혈통을 리더로 삼거나 유력인사를 집단명으로 사용하게 된다. 

 차가다이 울루스가 혼란상태에 빠지자 티무르가 등극한다. 그는 제국내 극심한 분열을 이용하여 1370년 실권자가 된다. 다만 그는 스스로 칸에 오르지 않고 칭기즈 일족을 꼭두각시로 하고 자신이 실질 통치한다. 티무르 제국은 유목민을 정착시키는데 그 결과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현대 우즈벡 민족의 형성에 주 역할을 한다. 티무르제국은 오스만을 격파하고 술탄마저 잡는등 위용을 과시한다. 티무르는 1404년 명정복을 위해 출정하나 가는 동중 1405년 사망한다. 명으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1420년 칸 계승 분쟁, 가뭄, 전염병으로 주치 울루스의 해체도 가속화한다. 1443-1466년 크림반도, 볼가강 중류, 하류 아스트라한에 새로운 칸국들이 수립된다. 1368년 원이 멸망하자 초원으로 돌아간 몽골인들은 오이라트를 세운다. 오이라트는 서몽골, 신장, 이르티슈강 유역을 지배했다. 그들은 1449년 만주 및 중국까지 세력을 뻗여 명황제를 사로잡아 무려 1년가 생포한다. 주치 울루스의 또 다른 일족인 자니백과 기레이는 오이라트에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스스로를 우즈벡-카작인으로 칭했는데 이들은 나중에 슬라브계 자유민 코사크를 지칭하게 된다. 이들은 수천단위로 지금의 발바슈호와 천산산맥 사이에 정착하여 오늘날의 카자흐인을 형성한다. 

 

6. 정주제국의 압박

16세기에 이르자 환경이 급변한다. 정주왕국은 화기를 개발하여 유목민을 강력한 기마부대를 무력화하는 수단을 갖게 된다. 또한 세계의 무역과 문화, 정보의 흐름이 기존 유라시아 육상로에서 해양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유목민족들은 이와 같은 시대변화에 민감하지 못했다. 16세기 중앙아시아는 여러 정주제국에 둘러싸인다. 사파비 왕조는 이란을 정복하고 시아파이슬람을 국교로 한다. 1550년 모스크바 대공국이 볼가강 유역의 주치 울루스 계열 국가를 정복한다. 

 16세기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은 그리스 정교회와 몽골 지배자로부터 정통성을 부여 받고 다른 루스 공국들을 복속한다. 1552년 이반 4세는 카잔 칸국을 정복하고 1556년 아스트라한 칸국을 정복한다. 이반 4세는 비잔틴 황제와 몽골의 칸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으며 자신의 정복활동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성전처럼 묘사하였다. 러시아는 무슬림 타타르인들은 정교회로 광범위하게 개종하였고 타타르 귀족들은 등용되고 귀족화하여 러시아에 급속히 동화되었다. 이를 거부한 이들은 상인이나 이슬람 성직자인 울라마가 된다. 

 1500-1900년까지 러시아는 하루 130제곱km의 영토를 획득한다. 시베리아 지역엔 이렇다할 정치적 장애물이 이 시기엔 없었고 마침 시베리아 토착민들이 천연두와 여러 질병으로 떼죽음을 당하여 무주공산 상태였다. 러시아는 1638년 태평양에 도달하고 1640년 오호츠크를 건설한다. 러시아의 전진은 청과 충돌하고나서여 멈추게 된다. 

 이 시기 한 시대를 풍미하던 몽골은 부침이 심해진다. 이들의 분열은 심했는데 종교인 불교가 결집요인이 된다. 다얀 칸의 후손 알탄 칸이 동몽골을 부흥시키고 중국, 티베트, 오이라트와 전쟁을 한다. 북경근처까지 진격하여 명과 평화조약을 맺었고 명은 이들을 막기 위해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만리장성을 축조한다. 이시기부터 몽골에서 칭기즈 일족과 불교는 일체화하여 서로를 강화한다. 이 불교는 티베트 불교인데 칸들은 티베트 불교 승려들에 의해 이전 칸들의 환생으로 선포되며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반면 몽골은 티베트에서 달라이 라마의 패권을 보장했다. 

 

7. 근대 세계의 완성

17세기는 소빙기로 기근이 어이져 경기가 침체하고 인구는 감소하며 정치적 혼란이 찾아온다. 글로벌 위기로 세계무역의 패턴이 변화했는데 해상무역 그리고 육상무역의 방향 변화다. 유럽의 해양무역으로 이시기 육상교육이 크게 쇠퇴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방향이 바뀌었을뿐 규모자체는 크게 줄지 않았다. 기존 동서방향의 육상 교역은 남북방향으로 바뀌었다. 말과 노예 무역이 여전히 중시되었고 무굴제국은 연간 10만 마리의 말을 수입할 정도였다. 

 동오이라트는 준가르 제국을 건설한다. 정주세계에 위협을 가하는 사실상 마지막 중앙아시아 제국이라 할수 있다. 동오이라트의 지배자는 칭기즈의 후예가 아니어 칸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1670년 왕자 갈단이 티베트 유학길에 올라 달라이 라마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보슉트 칸이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 준가르는 청과 러시아를 이용했는데 청은 준가르가 몽골인을 통제하고 그 대가로 교역권을 제공했으며 러시아 역시 준가르에 교역권을 주었다. 하지만 1696년 청의 강희제가 40만 대군으로 준가르의 갈단군을 대파한다. 이에 준가르가 티베트를 약탈하자 청은 1720년 티베트를 편입하고 1757년 청은 준가르를 점령한다. 

 이후 중앙아시아에는 이전 보다 세가 매우 작은 칸 국인 부하라 칸국, 히바칸국, 코칸드 칸국이 생겨난다. 하지만 부하르는 1868년 러시아의 보호국, 히바칸국은 1873년 러시아 보호국, 코칸드 칸국은 1876년 러시아에 병합된다. 러이사는 국경을 이란, 아프간까지 확대하고 무려 2천만의 무슬림을 보유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내몽골에는 많은 중국인이 유입된다. 몽골 전역에서 중국 상인이 경제를 지배하고 문화적, 경제적 착취로 몽골과 중국사이에는 적대감이 생겨난다. 티베트 불교는 몽골인의 정체성 유지에 기여한다. 고비 사막 이북의 몽골 왕공들은 러시아를 중국견제로 이용한다. 이슬람화한 신장은 문화 종교의 현저한 차이로 청에 융화되지 않는다. 청은 1884년 흔들리는 와중에서도 신장을 지방으로 승격시키고 지배를 강화한다. 

 러시아의 예상과는 다르게 카자흐 유목민은 러시아, 기독교화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분열시키려 민주주의, 근대화 유입을 차닪한다. 신무기 공급도, 이를 막기 위해 심지어 징집도 하지 않았다. 거기에 현지 보수층과 손잡아 공중위생시설에 종교개념까지 붙여 이를 개선하지 않았다. 후진성의 영속화였다. 러시아는 현지를 자원수탈로만 바라보고 저항을 무력화했다. 그리고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다른 서구 열강처럼 이 지역의 종교, 씨족, 부족에 따라 민족 분류를 하였다. 이는 매우 작위적이었고 러시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1890년 러시아는 대규모 식민화로 이지역에 무려 100만의 러시아인을 이주시킨다. 20세기 들어 세계적 면화수요가 폭증하며 전통적 면화재배지역이었던 중앙아시아는 대표적 면화재배지역이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단일작물에 의존하게되어 경제적으로 취약해지고 수자원이 고갈되었다. 거기에 산업화로 전통장인과 공예가들이 몰락한다. 

 1920-40년 카자흐스탄, 투르크멘,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한다. 1929년 타직이, 1936년 키르키즈가 공화국이 된다. 이들은 과거 왕족 중심이었으나 소련에 의해 민족국가가 되었고 심지어 정체성도 갖게 되었다. 1970년대가 되어서 소련은 중앙아시아 공화국의 현지민들에게 통치권을 이양하기 시작한다. 

 1924년 동투르키스탄의 지식인들은 타슈켄트에서 모임을 갖고 위구르라는 명칭을 부활시킨다. 위구르 민족주위를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1944년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설립하나 1949년 중국이 이를 해체하고 다시 신장으로 삼는다. 중국은 1960-70년대 신장으로 중국인을 대거 이주시켜 현재 위구르인 850만 중국인 750만 수준이다.

 내몽골의 지도자는 중국과 함께 일본군과 함께 싸워 자치권 획득을 노렸다. 하지만 실패하고 현재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중국은 1919-20년 외몽골을 차지하나 1921년 혁명가 수흐 바토르가 독립권을 찾았다. 1924년 군주제를 폐지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운다. 그리고 2차대전후 몽골은 독립이 확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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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교육의 불편한 진실 - 환상에 사로잡힌
박제원 지음 / EBS BOOKS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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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 개정교육과정부터 한국 교육은 혁신교육의 흐름과 더불어 지식위주의 수업과 교육과정, 학력관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 흐름은 학생중심의 수업과 배우는 과정, 그리고 주제통합형 수업, 통합교육과정, 프로젝트 수업 등을 중시한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과거에 비해 지식에 대해 소홀히 하는 느낌이는 드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인터넷의 대두와 더불어 인공지능까지 떠오르며 지식은 좀 홀대받는 느낌이다. 

 저자는 이런 분위기를 파고들어 최근의 한국 미래교육이 학습의 가장 중심인 지식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책을 펴냈다. 특히나 혁신 교육이 전통적 지식 중심 수업을 도외시 하고 이를 중요시하는 교육계의 한 주장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교육정책을 펴나간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는다. 

 개인적으로 혁신교육과 미래교육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어 이를 추종하는 책들이 대세인 가운데 반론을 제기하는 책을 봐서 신박하게 보았다. 우선 저자는 전국적으로 진보교육감이 당선되며 혁신교육이 도입된 가운데 지식교육을 도외시 한 나머지 학력이 떨어졌음을 제시한다. 자료는 PISA에서 측정한 시험이다. 그리고 문해력의 감소와 사교육비의 증가도 문제로 제시했다. 보면서 약간 설득력에서 회의적이었는데 우선 학력 같은 경우 감소폭이 그리 크지 않았다. 2010년대부터 제시한 학력 수준은 10년초반에 낮았다고 15년즘을 향하면 상승하고 이후 다시 2020년을 향하며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하락수준이 10년초반과 비슷해 크게 낮아졌다고 보기 어려웠다. 당시는 오히려 보수교육이 일제고사를 실행하던 시점이었는데 그 때와 비슷한것이 낮은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또한 학력의 경우 전통적 학력과 혁신교육의 학력은 개념자체가 매우 다르다. 보수쪽에선 지식위주의 객관식 시험점수를 학력으로 보는데 혁신교육은 역량 중심으로 실제 문제해결력, 학생의 학업이나 문제해결 의지, 협동능력, 자기주도성을 복합적으로 학력으로 본다. PISA 시험문제에 대해서 잘 모르나 이것이 낮다고 학력이 낮다는 것은 전통적 관점을 것이다. 그리고 문해력의 감소도 그렇다. 문해력이 낮아지는 것은 전세계적 문제인데 이는 스마트폰과 영상의 범람때문이다. 물론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더 낮아졌으니 이 문제를 교육계에 책임지울순 있겠다. 하지만 한국이 더 디지털화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청소년이 더 디지털 환경에 노출되기 쉽다는 것도 고려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교육 부분인데 실제 통계자료상 사교육비가 혁신교육 도입이후 증가했다. 저자는 이를 학력의 하락으로 인한 보충으로 보고있지만 2010년대 2만달러에서 2020년 3만달러로 국민소득 자체가 증가한 점, 그리고 이 시기 4차산업혁명에 대한 사회적 이슈가 커지며 코딩이나 드론 등 미래교육 방향으로 새로운 사교육 시장이 생성한 점도 고려했어야 한다. 이를 혁신교육의 책임만으로 지우기엔 역시 설득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학력관과 더불어 혁신 교육은 지식을 도외시 하지 않는다. 다만 구성주의에 입각해 지식을 학생이 스스로, 협력하여 경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생성하는 것을 중시한다. 외부주입보단 덜 효울적이겠지만 그 방식을 선호한다. 이러한 수업이 효율이 떨어지고 지식의 체계성을 쌓는데는 다소 약점이 있다고 볼순 있겠다. 하지만 혁신 교육 역시 이 모든 것에 기반에 기초기본지식이 있음을 인정하며 실제 목표에서도 기초바닥으로 항상 설정하고 있다. 혁신교육이 목표로 삼는 역량은 매우 복합적이고 상황맥락적이기에 실제 측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장기적 관찰과 향상과정을 꾸준히 전문적으로 행해야 할 것이고 실제 평가기록도 이런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능력주의가 많은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역량의 측정과 그를 위한 교육과정과 수업, 평가의 일체화는 이런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다소 떨궈줄 것으로 생각된다.

 책은 혁신교육에 대한 비판외에도 학습과학에 근거한 학습 전략을 제시하는데 이 부분은 좋았다. 학습전략으로 9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로 정보가 작업기억에 오래 유지되도록 실질적인 용량을 늘려주는 것으로 청킹 전략을 제시한다. 둘째로는 작업기억에서 인지과부하가 생기지 않도록 교사가 교육내용을 짧게 여러 개의 단위로 나눠 가르치면 효과적이라고 한다. 셋째는 정보를 장기기억으로 옮기는 되뇌기 전략이다. 단순 반복과 장기기억에 저장한 지식을 다른 것과 관련짓는 전략, 정보를 공동범주에 묶어 재구조화하는 방법이 있다. 넷째는 장기기억에서 정보가 잘 인출되게 적절한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 다섯 째는 시청각 자료와 스토리 텔링, 여섯째는 충분한 휴식주기, 일곱번째는 디자인 씽킹, 여덟번째는 융합적으로 사고하기, 마지막은 학교에 예술교육늘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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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민 - 어리다고 견뎌야 할 말은 없습니다
아거 지음, 최진영 그림 / 창비교육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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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어도 2010년대 이전까지 한국의 학생들은 고교를 졸업하기전까지 일종의 유예와 예속에 가까운 상태로 살아왔다. 스포츠머리와 단발머리외엔 허용이 되지 않았고, 옷도 교복만 가능하며, 학교와 학원, 공부외에 다른 생각과 행동에 대한 자유는 사실상 없었다. 모든 것이 공부와 너의 미래를 위하여란 이름하에 희생되어 왔던 것인데 학생들도 이를 내면화하며 살아왔고 어른이 되어서도 학교와 비슷한 억압적 사회에서 이를 재현해왔다. 

 이런 억압과 예속을 위한 폭력은 학교에 만연했다. 학생을 인격적 존재로 대우하는 존중어는 언감생심이었고 폭력이 당연시 되었으며 학교에 학생을 위한 민주적 공간은 없었다. 자신들의 대표도 회장이란 대표성보단 학급담임의 대리 성격을 띠는 반장이란 이름으로 선출되었고 후보도 학업과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만 입후보가 가능했다. 90년대 중반부터 학생에게 존중어를 사용하란 명령이 적어도 서울에서는 교육청에서 내려온듯 한데, 그 때 이를 두고 많은 문제점을 열거하던 고교 윤리 선생님이 생각난다. 폭력은 정말 많았다. 너무 일상적으로 맞아와 많은 것들이 생각나지 않지만 충격적이던 폭력 두 가지가 아직도 생각난다. 하나는 초등 1학년때 무려 15개나 되는 반중에 하나에 들어가 모르는 아이들 사이에 낯설어하다 쉬는 시간에 만난 유치원 친구를 보고 반가와 따라 들어갔다 그반 담임에게 따귀를 맞은 일이다. 이유는 뭐, 남의 반에 함부러 들어가서다. 다른 하나는 중학교 2학년 때 개교기념일에 동네를 거닐며 집 근처 중학교를 지나가는 중이었는데 마침 체육수업을 하던 그 학교 중학교 선생이 나를 불러세운 일이었다. 평일 오전에 학생으로 보이는 녀석이 학교에 없으니 뭔가 문제가 있는 아이로 나를 보았던 듯하다. 개교기념일이고 학교까지 말하여 이렇다할 트집이 없자 그는 왜 수업중에 학교를 지나가냐며 다른 중학생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내 옆머리를 잡아당겼다. 물론 매우 수치스러웠다. 지금같으면 고발 감이다. 

 하여튼 책 '어린 시민'의 저자는 우리가 민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진정한 시민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아이들을 어릴적 부터 마땅히 생각과 언행에 자유를 갖고 인권을 존중받으며 이를 펼칠수 있는 민주적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 무척 당연한데 가정과 학교 및 사회는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학교나 가정에서 아이는 흔히 말을 잘 들어야하는 존재로 취급받는다.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졸업식이나 입학식에서 소감을 말 할때 공부를 잘 하거나 어른이나 선생님 말씀을 잘 듣겠다고 말하는데 이렇게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나라가 세계적으로 드물지 않을까 싶다. 유럽이나 미국의 아이라면 내가 좋아하는걸 하고 싶다거나 재밌게 지내거나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을까. 하여튼 아이의 의견을 묵살하여 이렇게 존엄성을 무시하는 이유는 아이들의 순종과 복종을 원하고 아이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며, 아이를 생각과 인격이 없는 소유물로 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이런 모든 행위를 아이를 위하여란 말로 포장하고는 하는데 이 위하여에 정작 아이 본인의 의사가 빠져 있다는게 문제다. 즉, 언제든지 어른들의 입맛과 생각을 위해 아이들을 다루게 되기 쉽다. 

 저자는 책에서 체벌에 대해서도 당연히 반대한다. 저자는 악몽같은 체벌을 겪었는데 저자는 원래 남앞에 나서서 뭔가를 하고 조직하여 행동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고교시절 저자는 부학생회장이었는데 회장과 더불어 학생들의 서명을 받아 일요일 자율학생 폐지를 학교장에 건의했다. 학교장은 젠틀하게 회장과 부회장을 맞이했고, 분위기도 훈훈하여 저자는 기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월요일이 되자 방송으로 회장과 더불어 호명이 되었고, 교무실에 도착하자 네 까짓게 뭐냐라는 교사의 말과 함께 폭행이 이뤄졌다고 한다. 아마 회장은 공부를 잘하거나 집이 잘 살았는지 폭행은 저자의 몫이었다고 한다. 

 체벌은 즉각적이고 문제를 바로 해결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부작용이 훨씬 더 많다. 학생이든 가정의 부모든, 교사든 체벌은 갈등상황을 힘으로 해결하여 민주주의의 문제해결 방식인 대화를 통한 갈등조절의 기회를 상실하게 한다. 오히려 성인이 되어 힘에 의한 해결을 선호하는 계기를 주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체벌은 맞을 짓이 있다는 생각을 때리는 사람이나 맞는 사람, 보는 사람에게 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체벌은 맞은 사람에게 폭력의 상흔을 정신에 영구히 남기며 그로 인해 폭력이 향후 재생산하는 악순환을 불러온다. 맞아본 사람이 더 잘 때리게 되는 법이다. 

 저자는 아이들의 노동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한국의 사용자들은 최저임금을 잘 안지키고 편법을 쓰는 걸로 유명하지만 그 대상이 성인이 아니고 학생이면 더 심하다. 그냥 노동한 것에 대해서 계약한대로 법적으로 규정된대로 급여를 주면 되는데 꼭 돈을 왜 버냐고 물어보며, 그리고 공부하지 않고 저녁에 돈을 버는 학생을 문제아 취급한다. 한국의 근로기준법은 15세 이상에게 노동을 허락하면서도 18세 이하에겐 누구나 노동을 하는 경우 부모나 후견인의 동의를 받게 한다. 저자는 이를 학생을 보호하기 보다는 청소년을 예속의 존재로 보는 또 하나의 시선으로 파악한다. 

 책은 작년에 읽은 '어린이라는 세계'와 더불어 학생을 보는 시각을 잡아주는 좋은 책이다. 어린이라는 세계가 좀 더 어린 아이들의 눈과, 그것에 대한 존중과 이해, 동심을 불러일으켜준다면 이번 책은 어린이를 하나의 시민이자 시민으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으로 보고 이에 대한 생각을 고취시켜주는 책이다. 좋은 책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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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생각하며 읽었던 리뷰네오 ~~ 닷슈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닷슈 2022-03-10 23: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미니님도 축하드려요.

서니데이 2022-03-08 1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닷슈 2022-03-10 23: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그레이스 2022-03-08 19: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닷슈 2022-03-10 23:25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축하드립니다.

이하라 2022-03-08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닷슈 2022-03-10 23:2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하라님.

강나루 2022-03-09 0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오늘 투표하는 거 아시지요^^

닷슈 2022-03-10 23:26   좋아요 2 | URL
사전투표를 이미 했었죠. 나루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포노 사피엔스를 위한 진로 교육 - 진학과 직업에 몰입된 진로 교육 벗어나기
김덕년.유미라.허은숙 지음 / 교육과실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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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마트폰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 포노 사피엔스. 특이한 양상과 변동성이 큰 미래를 살아갈 이들을 위한 색다른 진로교육 필요하다는 취지로 나온 책이다. 

 책은 먼저 포노사피엔스의 특징을 살핀다.

 우선 순간성인데 포노사피엔스는 워낙 모든게 빨리 변하는 세상에 살다보니 판단을 위해 깊게 숙고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짧은 시간에 행동하고 결정한다. 한우물을 파기보다는 세상은 즐길것과 할 것이 많다. 다음은 무경계성이다. 시공간의 구분이 분명치 않고 메타버스의 등장으로 이런 변화를 더욱 커지고 있다. 마지막은 개체성으로 네트워크로 어느때보다 타인과 연결성이 높아졌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은 매우 개별적이고 파편적이다. 다만 모든 기준이 자기 자신으로 여기서 시작해 원하는 관계나 집단을 형성하고 그 파급력을 키운다. 

 이런 포노사피엔스에게 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도 제시한다. 책에서는 이들에게 나 자신이 존엄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이것은 과거처럼 좋은 대학이라는 특정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해나가는 과정 자체를 중시해주는 것을 말한다. 또한 호기심을 갖고 이를 발견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과 바로 지금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책은 진로교육이 특정 직업에 대한 생각을 갖기 보다는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자기 이해나 자아 정체성등에 대한 파악이 최근엔 중시된다. 그래서 최근의 진로교육은 자아 이해와 타인과의 의사소통 능력에 기초한 사회적 역량을 기르고 진로목표에 따라 자신의 진로를 창의적으로 설계하고, 준비하는 역량이 된다.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었는데(저자가 3명인걸 보니 한 장씩 나누어 쓴듯 하다) 1장이 언급한 이론적 내용이고 나머지 두 장은 교사들이 진로교육과정에서 겪은 실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진로교육같지 않고 상담이나 학생 이해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는데 최근의 방향이 그러하니 이런 내용이 실리는 것이 맞다고 본다. 

 책 제목과는 다르게 포노 사피엔스에 대한 구체적인 것 보다는 그냥 최근 아이들과의 소통과 상담, 이해과정이어서 얻고자 하는 내용면에서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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