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스탕스
이우 지음 / 몽상가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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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저자의 이름에서 조선의 왕자를 생각했다. 본명일까?

좀 놀라운 건 이 책이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2018년에 초판이 나왔고, 지금까지 3쇄가 나왔다. 조금 더 놀라운 건, 그렇게 쇄를 거듭할 때마다 다듬고 살을 붙여 개정판을 냈다는 것. 물론 쇄를 거듭하는 책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리커버로는 나와도 여간해서 개정판을 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난 책에 애정이 남아 있을까? 책을 쓸 때 별의별 고생을 다해 썼다면 다시 쳐다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설혹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책을 보고 대대적으로 손을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겠지만, 예전에 개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을 것 같다. 개정판을 냈다고 책이 잘 팔릴 거란 보장도 못 하고. 그러니 애써 외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쇄를 거듭할 때마다 그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고, 지금까지 세 번의 작가의 말을 썼다. (모르긴 해도 근성 있는 작가인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이 작품이 지난 초판이 나온 이래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의 문학 권력자 내지는 유수한 문학상을 주관하는 어느 출판사나 기관으로부터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빼어나고 훌륭한 작품이 어떻게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신인문학상을 비롯한 여타의 문학상은 출판된 지 1년 안의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줄로 안다. 그것도 장편이 아닌 단편에. 그것이 맞는다면 이 작품이 무슨 무슨 문학상을 받을 일은 과거에도 없지만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나는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반면 뭔가 모를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은 소위 말하는 제도권을 벗어나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 얼마나 레지스탕스적 아닌가?


세상의 모든 작가들 대부분은 문청의 시절을 지난다. 그도 그럴 것이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망은 보통은 그 시기 전후로 갖게 되니까. 그러므로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름하여 성장 문학 한 둘은 쓰기 마련이다. 이 작품의 저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젊은 날에 젊음을 모른다고 노래했던 지금은 중년이 되어버린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젊었을 때 나는 막상 이런 장르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동의할지 모르지만, 이런 작품은 하나같이 우울한 방황과 허무, 섹스, 일탈 뭐 이런 것들로 대표되기도 하니까. 내 삶 자체가 꿀꿀하고 허무한데 굳이 이런 책을 읽어 더 꿀꿀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성장 문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데미안'도 나는 지금까지 두 번쯤 읽었지만 왜 이 작품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수긍은 할 수 있지만 강한 이펙트 같은 건 없지 않나.


이 작품 역시 '데미안'의 그림자가 짙다. 실제로 '데미안'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기도 했다. 좁은 소견이지만 이문열의 일련의 작품도 생각이 났다. (이를테면 '젊은 날의 초상'이나 '사람의 아들' 같은.) 하긴 이쪽 장르의 작품들은 데미안의 사생아들 아닌가. 그러니 이 작품을 젊었을 때 읽었다면 비웃었을지 모른다. 왜 그 시절엔 조금만 뭐가 보여도 모방이니, 아류니 하면서 아는 척 조소하기 좋아하지 않는가. 문학의 'ㅁ'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머리만 커져 모든 게 시큰둥하고 만만하게 보였던 게지. 마치 이 작품의 화자 기윤처럼.


그런데 이 나이 되어 이 작품을 읽으니 오히려 좋았다. 작가가 철학과 역사와 문학을 기반으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썼을지 알 것 같다. 이 작품의 밑 작업만 4년이 걸렸다니 알만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난 이 작품을 다 읽었을 때 뭔가 모를 허전함과 숙연함마저 느꼈다. 왜 가끔 좋은 작품을 읽으면 이 작품 이후에 무슨 책을 읽을지 막막함이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건 여간해서 잘 체험되지 않는데 아주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갖기도 했다. 바꿔 말하면, 난 어쩌면 이 작품 이후에 다른 책들이 나의 의식에 틈입해 오는 것을 쉽게 허락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단 생각도 든다.


문장이 좋다. 그렇다고 뼈를 때리고, 가슴을 후비는 뭐 그런 문장이어서 좋았다는 게 아니다. 그런 문장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뭔가 쉽게 잊히면 안 될 것 같은 문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밑줄이라도 거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어디서 멈춰야 할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따라 해 보고 싶은 문장이었다. 그리고 인물이다. 공감이 간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나 형제보단 친구가 더 중요해진다. 특히 상급학교 진학을 두고 부모와 갈등을 겪으면 더 그렇다. 부모는 가급적 자식이 배경이 되어줄 만한 학교를 진학해 주길 바라지만 기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철이 없어서 이 세상이 학연, 지연 등으로 엮여져 있다는 걸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더구나 대입도 아니고 고입을 재수한다고? 그건 기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지방의 이류쯤 되는 학교에 지원해 다니게 된다. 어떤 학교가 되든 어차피 한 시절 대충 때우다 가는 곳이다.


하지만 학교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된다. 흔히 일진이란 불리는 불량서클에 발을 들여놓은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거기서 일진의 수장인 상민와 친해진 건 따분한 학교생활에 활력이 되고 권력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이를 경계하게 만드는 건 이인자인 관석이다. 그는 알게 모르게 기윤이 상민과 친해지는 것을 방해한다. 상민은 이런 권력의 역학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영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다 결국 기윤이 일진에서 떨려 나가는 사건을 맞이하는데, 그건 어처구니없게도 상민이 보다 좋은 신발을 신었다는 것에서 발생한다. 한마디로 기윤은 거기에도 엄연한 질서와 조직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즈음 <데미안>에서 화자인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소개를 하듯, 기윤은 민재를 소개한다. 민재는 기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전학생으로 오면서 이들의 만남은 시작된다. 하지만 기윤에게 민재는 처음부터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부잣집 도련님에,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인 한마디로 재수 없는 타입이었다. (사춘기는 열등감을 이런 식으로 표출할 줄 아는 탁월한 시기이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잘나가는 아이가 왜 이런 지방 소도시 그것도 일류도 아닌 이류 학교에 전학을 왔을까? 특이한 건, 민재는 특별히 친구를 사귀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 늘 책을 가까이하며 홀로의 자유를 고독과 맞바꾼 아이였다. 민재와 가까워지게 된 건, 기윤이 상민이 패거리에서 쫓겨나자 점심시간이면 급식실에서 만나는 것이 불편해서다. 상민을 피해 도서실에 가면 늘 민재는 혼자 책을 읽고 있다.


그렇게 가까워진 민재는 알면 알수록 새로웠고 여느 아이와 달랐다. 이미 그 나이에 깊은 사랑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고, 독서 편력을 쌓기도 했다. 덕분에 기윤은 덩달아 책을 읽고 민재와 가까워지게 된다.


사실 민재를 가장 적확하게 보여준 사건이 몇 개가 있는데, 하나는 학교에 학생과 교사 간의 어떤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가 보여준 행동이었다. 그럴 경우 일반 아이들이라면 세를 결집해서 데모를 하거나 업무를 마비시키고, 고작 기물을 파손하는 정도겠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건 그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때 민재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학생들 편에 서는데 이른바 프랑스 대혁명 때를 모방하여 학교 측에 몇 개의 반박문을 써서 대자보를 붙이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것이 레지스탕스를 연상케 해 한동안 회자가 되기도 한다.


또 하나는, 그는 문학을 사랑해 시인이 되기를 바랐지만 좌절하고 부모가 바라는 대로 의대에 어렵지 않게 합격한다. 하지만 부모가 바라는 자신은 거기 까지라며 등록을 하지 않은 채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을 계획을 세운다. 그는 떠나기 전 기윤에게 선물처럼 자신이 타던 오토바이와 쓴 많은 시중 100편을 추려 기윤에게 맡긴다. 너무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아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시에 큰 제목이 없다. 나중에 혹시 시집을 낸다면 제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기윤이 민재가 잘 떠나려니 했는데 뜻밖에도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 민재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슬펐지만 기윤은 민재의 장례가 끝난 후 그를 위해 시집을 출판하기로 한다. 결국 이 책의 제목 레지스탕스는 민재의 시집의 제목인 동시에 그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나는 한동안 기운이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기윤에게 그토록 울림을 줬던 민재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것으로 끝이 난다고?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충격적이면서 동시에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이내 그를 인정하기로 했다. 민재는 민재로서 민재답게 살다 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스무 살도 채 살지 않은 민재에게 함부로 연민을 갖는 건 오히려 그를 욕되게 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단 얼마나 자기답게 값지게 살았냐가 아닌가. 그는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자신이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 봤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희곡도 써서 자신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는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래서 신은 그렇게 민재를 일찍 데려갔나 보다. 결국 신도 인정한 삶 아닌가.


그런데 이 책은 기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 지나 동창회에 참석했다 우연히 잊고 있었던 민재를 회상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물론 작가의 그런 설정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겠지만, 나라면 민재 같은 친구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보다 몇 보는 앞서 가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해 주는 친구를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외톨이가 될 위기에서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준 친구다. 그런데 기윤은 지난 10년 동안 민재를 잊고 남과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걸 그때야 비로소 자각했던 것이다. 왜 그런 설정이 필요했을까?


우리의 삶은 기윤과 얼마나 다른가? 나이 들수록 몇 살에 죽더라도 사는 동안 아프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게 대부분의 바람 아닌가? 우리도 기윤이 같이 느끼고 생각하며 나이 들지 않았나? 상민이의 세계를 누구는 동경하기도 하고 누구는 비판하기도 하지만, 우린 어느덧 남들만큼 살자는 게 삶의 모토가 되어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고, 뒤처지고 소외당하는 걸 못 견뎌하지 않았는가? 우린 그런 삶에 마땅히 저항할 필요가 있는데도 오히려 끌어안고 살고 있다. 기윤이 민재를 떠올리는 순간 가슴을 쥐어짜듯 괴로워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어쩌면 독자에게도 기윤이처럼 깨어날 시간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더불어 소설은 어때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여러 의견이 많을 수 있겠지. 그것은 옳고 그름으로 얘기되어 지지 않는다. 이런 소설이 있는가 하면, 저런 소설이 있다. 한동안 치유와 위로를 주는 소설이 유행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강세다. 하지만 역시 궁극의 소설은 이렇게 잠자고 있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당신은 지금 잘 살고 있느냐고 물어봐 주는 소설이 정말 좋은 소설 아닐까?


이우 작가는 이 책에서 그런 말을 한다. 소설가는 발표한 작품과 무관하게, 처음 문학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을 때의 순수함으로 사유하고, 탐구하고, 집필하는 존재라고. 작품을 출간해서 소설가가 아니라, 문학에 헌신하여 살아가고 있기에 소설가라고 했다.


올해도 어느덧 한 달여 밖에 남지 않았다. 올해가 마감될 때까지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을까? 작년엔 천명관의 발견이 좋았는데, 올해는 이 책이다 싶다.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 될 것 같다. 또한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다.

남은 한 달도 잘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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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11-23 13: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우 작가 youtube에 자기 채널도 운영하고 있어요. 흥미로운 작가이지요.

stella.K 2024-11-23 18:15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한번 들어가 봐야하겠네요. 흥미로운 작가 맞는 것 같습니다. 똑똑한 거 같고요. ㅋ

니르바나 2024-11-23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이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라니까 급땡기네요.ㅎㅎ
한달밖에 남지 않은 2024년도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stella.K 2024-11-23 18:20   좋아요 1 | URL
니르바나님은 안 읽으셔도 되지않을까요? 더 좋은 책 읽으시잖아요.ㅎㅎ 그래도 뭐 젊은 작가들 응원 차원에서 읽으시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ㅎ
세월 참 빠르죠? 니르바나님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물감 2024-11-26 2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데미안>을 포함해 이런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비교적 건강하시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전에 누군가에게도 그랬었는데, 방황하는 사람만이 헤세를 찾고 읽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저 또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서 이런 장르들에 많은 위로를 얻었어요. 하지만 반대로 건강한 사람들처럼 나도 시큰둥했으면 좋겠다고 누누히 생각했고요. 그래도 별다섯 주신걸보니 정말 잘쓴 책인가봅니다 ㅎㅎ

stella.K 2024-11-27 13:39   좋아요 2 | URL
앗, 그런가요? 사실 이런 장르 답을 주진 안 잖아요. 니가 답을 찾아라는 식이죠. 어찌보면 겸손한 것 같고 어찌보면 무책임한 것 같고. 이 작가에 대한 평이 좋더군요. 이 책 독일에도 팔려 나가고 나름 잘 나가는 작가더군요. 자기는 매년 장편 한 권씩 낼거라는데 그 패기도 맘에 들고. 당분간 지켜보고 싶은 작가예요. 기회되면 함 읽어 보시길! (사실 민재 죽는데 눈물이 찔끔.. 나이 드니까 눈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일단 안구건조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듯요. 😆 )

고양이라디오 2024-11-27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먼가 흥미로운 작가와 흥미로운 책이로군요! 찜해놓고 갑니다ㅎ

페크pek0501 2024-11-29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작가를 발견하는 것이 우리 같은 사람에겐 큰 기쁨이지요. 저도 맘에 드는 작가를 만나면 그의 모든 작품을 읽고 싶어지곤 해요. 전작 읽기를 하고 싶지만 우리의 인생이 짧은지라 시작하게 되진 않더라고요. 그래도 몇몇 작품을 읽으려고는 합니다. 확실히 각자 독서 취향이 있어요.

stella.K 2024-11-29 21:14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맛에 책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도 이 작가 다 보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주요작은 좀 보려고요.
마침 중고샵에도 있더라구요.^^

2024-11-30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30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03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첸을 멀리하라 - 불가능한 사랑
수잔네 아벨 지음, 김동언 옮김 / 뒤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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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단순히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 줄 알았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전쟁 직후의 인간 군상과 이루어질 수 없는 인종 간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생각해 보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많지만 이렇게 전쟁 이후를 보여주는 소설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물론 찾아보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제목이 독특하다. 그레첸을 멀리하라니. 무슨 말인가 했더니, 2차 대전 직후 독일은 아직 자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외국인 병사들과 흥청망청 술렁거리는 문화가 팽배했다. 그래서 그 외국 병사들에게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종의 그들만이 통하는 은어 같은 지침을 하달한 것으로 한마디로 독일 여자를 조심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마음껏 자유를 누렸다. 아마도 그레첸은 독일 여성을 지칭하는 일종의 대명사 같은 이름인듯하다. 우리나라에 순희나 영희가 여자 이름의 대명사인 것처럼.

그렇다고 전후의 모든 독일 여성이 다 성적으로 문란했던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 그레타는 순결했다. 전쟁 중 여성들이 어떻게 착취 당하고 소모되는지 아는 가족들은 아직 어린 그레타를 보호하기 위해 일찌감치 남자아이처럼 머리를 짧게 해 사람들의 의심을 피했다. 그런 그레타가 미국의 흑인 병사 밥 쿠퍼를 만난 건 우연 마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전장에 보내고 너무 오랜 나날 그리워하던 그레타가 밥 쿠퍼를 의지했던 건 당연했을 것이다. 처음엔 그저 인간적인 호기심과 연민 뭐 그런 이끌림으로 가까워지고, 결국 자연스럽게 살을 섞고 딸 마리까지 낳았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마리는 애초부터 환영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적어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고 상황은 역전된다.

그렇게 그리워했던 다정한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전쟁 후유증을 겪는지 전같지가 않다. 가족들에게 까칠하게 대하고, 그렇게 사랑했던 딸 그레타가 미국 양놈 그것도 깜둥이와 놀아나더니 급기야 족보에도 없는 딸까지 낳았다고 대놓고 혐오한다. 결국 집에서 마리를 안전하게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레타는 마리를 어느 가톨릭 아동보호단체에 맡기게 되지만 자식을 버린 죄책감과 사라진 밥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으로 정신병원과 교도소를 번갈아 드나드는 신세가 된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그레타가 병원에 있을 때 알게 된 몬테라스란 의사와 정식으로 결혼도 하고 아들 톰을 낳고 그럭저럭 안정적인 삶을 살지만 마음속엔 늘 잃어버린 딸과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밥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과 죄책감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나이 들어 80대 중반의 노인이 된다. 하지만 편안히 죽을 일만 남을 줄 알았던 그녀에게 치매가 왔다. 하지만 그때까지 아들 톰은 엄마가 그런 어려운 삶을 살았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평소 그다지 좋은 모자관계는 아니었으니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과거를 안 이상 톰은 엄마가 기억을 더 잃기 전에 물음표로 남아 있는 엄마의 연인과 이제까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엄마의 딸이자 피부색이 다른 누나를 찾기로 결심한다. 이 소설은 그런 톰의 여정을 그레타의 과거와 톰의 현재를 번갈아 가며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새삼 제일 먼저 깨달은 건, 전쟁 후의 상황은 어느 나라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나라만 다르다 뿐 등장인물을 우리 식 이름으로 바꿔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전쟁이 끝나면 곧 안정을 찾을 것 같지만 그때부터 새로운 문제와 고통이 시작된다. 그런데 소설은 소설인가 보다. 흑인 병사와 독일 소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리고 있으니. 물론 그런 사랑이 없으란 법은 없겠지만 현실은 그보다 몇 배는 더 혹독하고 참혹하지 않을까.

전쟁 직후 흥청망청 댔다는 건, 단순히 전쟁이 끝난 것을 안도하고 축하하기 위한 것마는 아니라는 것쯤 독자는 알 것이다. 그것은 집단 스트레스를 광적이면서도 극단적인 방법으로 풀어 내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인종끼리 피와 살을 섞어 태어난 제3의 인종을 보통 혼혈아라고 하지만 그들이 또 어떻게 자신의 부모와 나라로부터 버림을 당했을지 알 수가 없다. 아마 그래서도 그레첸을 멀리하라는 뜻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이 책이 쓰인 건, TV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일했던 저자가 우연한 기회에 입양의 문제를 다루다가, 전쟁이 끝난 직후 10년 동안 브라운 베이비 즉 그레타와 밥처럼 서로 다른 인종에게서 태어난 혼혈 아이를 해외 입양시켰던 사례를 처음 접하고 충격을 받아쓴 것이라고 한다. 책에선 이것을 '브라운 베이비 플랜'이라 하여 국가적 프로젝트로 실시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해외 입양이라면 그 비슷한 일은 우리나라도 있었다. 전쟁 직후와 산아제한이 없던 시절 가난해 아이를 키울 수 없어 해외입양을 보내야 했던 시절이 있지 않은가. 두 나라 다 아이의 행복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과연 그들이 행복했을까? (거기에 우리나라는 인종의 문제는 빠져 있다.)

또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은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들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당장 떠오르는 나라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전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그야말로 모든 사활을 걸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전쟁이 끝나면 그 나라 국민들이 감당해야 할 상처와 트라우마는 실로 재앙적 수준이 될 것이다. 또한 그건 승전국이나 패전국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승리했다고 좋아하고, 패했다고 슬퍼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라의 지도자는 샴페인을 터뜨릴지 몰라도 전쟁의 상처를 떠안는 건 국민의 몫이다. 그런 가운데 제2, 제3의 그레타와 마리는 또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올지 상상할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독일에서는 혼혈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낸 사례는 있지만 '브라운 베이비 플랜'이란 공식 명칭을 달고 시행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건 소설의 사실적 묘사를 위해 저자가 자의적으로 지어낸 명칭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또 그런 만큼 이 책은 소설임에도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실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소설이 순수 허구만을 다루는 장르는 아닌지라 사실을 각색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가히 가슴을 울리는 문제작이란 생각이 든다. 특히 그레타가 마리를 잃고 생일 때마다 썼던 편지 부분을 읽는데,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간혹 우는 적은 있어도 책 보고는 여간해서 울지 않는 내가 이 책을 보고는 눈물이 났다.

답장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어미의 마음이 어떨까. 우리 역시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고 그 생모들은 얼마나 많은 편지를 썼을까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세상이 좋아져 그 나라나 이 나라나 그렇게 헤어진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일도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도 만나는 것이 못 만나는 것에 턱없이 낮을 것이다. 도대체 이 아픈 인간의 역사는 언제 누구에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래도 소설이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걸 보면 그건 모르긴 해도 저자가 대중을 의식한 결과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솔직히 약간은 동화적인 느낌도 들어 나 개인적으론 그게 왠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참고로 톰은 저자의 페르소나다.

이 책을 번역한 김동언 번역가는 이런 말을 '옮긴이의 말'에서 남겼다. 무릇 소설이란 현실과 맞서는 장르이며,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장르임은 여전히 유효하다. 더욱이 시대와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야말로 우리 소설의 전통이며 미덕이라고 했다. 저자는 이 미덕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잘 구현해 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전쟁 후를 생각하라고 지금의 전쟁국에 촉구하는 것도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세기 때 전쟁의 후유증은 오늘날에도 지문처럼 남아 아직도 인간을 괴롭히고 있다. 모르긴 해도 그 후유증은 다음 세기에도 계속 이어질 것 같다. 그렇지 않더라도 역사가 기억하겠지. 또 오늘날의 전쟁은 훗날 어떻게 사람을 괴롭힐지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나라들은 부디 지금이라도 전쟁을 중단해 주길 이 지면을 통해 촉구한다. (알 리없겠지만.ㅜ)


#뒤란 #그레첸을 멀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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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24-10-31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 전쟁은 악입니다.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전쟁
이를테면 십자군 전쟁 포함해서 모두 악한 행위일 뿐입니다.
역사이래 남의 것을 무력으로 빼앗는 살인 강도짓을
이념으로 포장하여 전쟁이라고 할 뿐이니까요.
전쟁은 별의 별 사건의 총집합이니 이야기 거리가 많아 문학, 예술의 소재가 되어
작품으로 남아 사람들에게 회자되지만
총,칼을 맞는 것이 나, 또는 가족에게 해당되는 사건이라면
다만 끔찍한 행위로 몸과 마음에 절대적인 흉터로 남을테니까요.
같잖은 이유를 대고 국방의 의무를 피해 군대도 가지 않은 인간이
쉽게 내뱉는 전쟁이야기는 너무나 한심합니다.
전쟁은 아이들의 장난감 전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 마지막에 써주신 글,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나라들은 부디 지금이라도 전쟁을 중단해 주길 이 지면을 통해 촉구한다는 말씀에 니르바나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stella.K 2024-11-01 11:17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분명 이 지구 어디에선가는 반전운동을 하는 곳도 있을텐데 그런 소리는 안 들리고 온통 전쟁의 소리만 들리네요. 러시아에 북한군을 파병했다는데 같이 싸우지 말고 이참에 자기 살 길이나 찾아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다소 황당한 생각도 해 봅니다. 싸우는 것도 기운이 있어야 싸우지 않겠습니까? ㅋ
이책은 전후에 여성이 어떠한 삶을 살게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종의 페미니즘 문학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지내시죠? 제가 글을 넘 뜸하게 올리니 니르바나님 안부도 잘 못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종종 올려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ㅎ 오늘은 잘 지내시는 걸로..!^^

레삭매냐 2024-11-01 2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첸을 멀리하라>

리뷰를 카피해서 정독하고 나니
더 읽어 보고 싶어지네요.

2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 상황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과거
의 상처들을 보듬는 이야기 -

근데 분량이 어마무시하네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stella.K 2024-11-01 21:07   좋아요 1 | URL
그래도 가독성은 좋은 편입니다.
매냐님이라면 일주일이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레이스 2024-11-01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우스트에 나오는데,,, 그가 사랑했던 어린 여성이고 나중에 사랑때문에 모친과 오빠가 죽고 영아살해죄로 사형당하잖아요?!
혹시 그 그레첸일까요?

stella.K 2024-11-01 22:32   좋아요 1 | URL
아, 그런가요?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파우스트 읽긴 했는데 워낙 오래 전에 읽은데다가
뭔 내용인지도 모르고 꾸역꾸역 읽어서 누가 나오는지도 몰랐습니다.
아, 이거 아는 척하고 쓰는 게 아니었는데 어쩌죠? ㅎㅎ
암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그거 말고도 약간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그레타니, 톰, 밥, 제인 등 미국식 이름인 것 같더라구요.
그레첸은 독일식 이름인 것 같긴한데. 작가가 왜 이름을 하나 같이
그렇게 썼을까? 뭐 그런 생각을 잠시하며 읽었습니다.
게다가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전 말미에 이를 때까지 그레타를 그레첸으로
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의 다 읽을 때쯤 왜 그레첸을 그레타로 부르지?
했더니 제가 착각을 했더군요. 아놔~;;

그레이스 2024-11-01 22:34   좋아요 1 | URL
ㅎㅎ
그레트헨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레첸이라고도 하던데,,, 어쨌든 제 짐작이예요.
파우스트의 그레첸이 제일 의미에 가깝지 않을까 해서요 ^^

yamoo 2024-11-02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전에 스텔라 님 리뷰 보고 좋아요 눌렀다가. 글이 길어서 지금 다시 정독했어요. 이거 재밌을 거 같아요. 전쟁 영화나 소설 좋아하는데, 쓰신 내용 보니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새로운 얘기는 아니지만 구매 버튼을 누르기 직전 이 소설의 분량을 보고 취소했어요...ㅋㅋ 이거 벽돌책 부류네요..^^;;

stella.K 2024-11-02 10:19   좋아요 0 | URL
아, 이런ᆢ 야무님답지 않으십니다. 전쟁 얘기 좋아하시면 당연 사셔야죠. ㅎㅎ 벽돌책이어도 가독성이 좋습니다. 잘 읽힐 겁니다. 나중에 중고샵에 넘어오면 그때 한 번 사 보세요.^^

페크pek0501 2024-11-12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보니 제가 최근에 읽었던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이란 책이 떠오릅니다. 그 책 역시 제2차세계대전을 다루었으니 전쟁 소설이라 할 수 있어요. 그때를 회상하며 쓴 글인데, 작가가 마치 감정 개입 없이 태연하게? 쓴 글로 읽힙니다. 그래도 독자는 끔찍하고 참혹함을 느끼게 됩니다.
전쟁은 승자가 없다고 하죠. 양 국가가 손실을 발생시킬 뿐인, 어리석은 짓이죠.

stella.K 2024-11-13 20:47   좋아요 0 | URL
그래서 나라든, 단체든 지도자를 잘 만나야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푸틴도 그렇고 트럼프도 그렇고 나라를 위한 나라가 아니라
전쟁은 정말 백해무익한건데 언제까지 하려고 드는지 모르겠어요.
<제5도살장>은 좀 독특한 작품인가 봅니다. 함 읽어보면 좋을텐데
언제 읽을런지 모르겠습니다. ㅠ
 
점퍼 생각학교 클클문고
고정욱 지음 / 생각학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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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다 살다 이 나이에 청소년 도서를 다 읽어 본다. 청소년 시절을 보낸 지가 언젠데. 물론 나도 그 시절 책을 안 읽은 건 아니다. 하지만 주로 고전을 청소년 눈높이에 맞춘 것이나 아니면 일반 책을 기웃거렸을 뿐 청소년 문학이라고 하는 장르는 읽은 기억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책이 나에겐 처음으로 읽는 청소년 문학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 때는 청소년 문학이 지금처럼 다양하지도 않았고 장르로도 인정받지도 못했다. (어쩌면 성장 문학을 청소년 문학과 혼용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은 좀 다르지 않나?) 게다가 내가 쓸데없이 고차원이어서 있어도 유치하다고 안 읽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이제 와 있는 이 책은 완전 내 스타일이다. 글씨도 크고, 2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것이 읽는데 부담도 없다. 스토리도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교훈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껏 난 뭐 때문에 이마에 내 천(川) 자를 그리며 힘들게 ㅜ책을 읽어왔는지 모르겠단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말하지만 가끔은 어렵고 힘든 책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쉽고 편한 책만 읽으면 독서에 힘이 붙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책은 역사와 교육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나 할까.

이 책의 주인공 박창식은 정말로 행운의 아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시간 여행을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창식이 행운의 아이가 될 만큼 똑똑하고 착하고 심성 바른 아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사춘기 아이답게 뭔가의 불만과 반항기가 가득하다. 한창 친구가 좋을 나이인데도 별로 또래와 어울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결정적인 건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내부 고발자가 되어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그것을 술로 풀고 엄마와도 이혼한 상태다. 그러니 그 영향이 고스란히 창식에게로 간다. 그나마 할머니가 유일한 위로가 되어주지만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머니께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

그날도 아버지와 싸우고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1928년에 와 있다. 그것도 북한의 평안도 정주다. 얼마나 황당할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자신의 신분이 오산중학교 학생이라는 정도. 하지만 그는 현재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정주이라니! 물론 원래 학교가 정주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북한은 싫지만 그렇게 되고 보니 김소월과 백석 그리고 이중섭이 창식과 동기가 되어있다. 와, 이건 웬 행운인가? (아무리 허구하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사람을 무려 세 사람이나 친구로 만나다니! 놀라웠던 건, 나는 위의 세 분이 같은 학교 동기동창이란 걸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게다가 이승훈 선생이 교장이고, 김억 선생이 문학 동아리 지도교사다. 이 정도면 그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가히 상상이 갈 만도 하다. 그 학교를 졸업했거나 현재 다니고 있는 학생은 어깨에 힘을 줘도 무방하겠구나 싶다.

그때는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거의 10년을 바라보는 시점이기도 하다. 재밌는 건 창식이 친구들과 함께 이웃 여학교 학생들과 미팅을 하기도 하는데 그 험악한 시절에도 낭만은 있었구나 싶다. 그래도 험한 시절은 험한 시절이다. 말순이 창식과 짝이 되고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말순이 언니로부터 전보를 받는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 다쳐서 위독한 상태니 급히 오라는 것이다. 즉 말순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다친 것이다. 창식은 얼떨결에 말순이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하고 거기서 민족 독립의 열망과 긴급함을 목도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주인공 박창식을 어떻게 창조해낸 것일까. 사실 박창식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다. 저자는 이야기 말미에 <오산학교 백 년사>란 책에 박창식을 짧게 언급해 놓았다. 그러니까 거기서 힌트를 얻어 이 이야기를 구상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구성이며, 인물 캐릭터까지 정말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다. (사실 '오산학교 백 년사'는 일반 서점에선 없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국립 중앙도서관이나 일부 대학 도서관엔 있다고 한다. 이런 책은 일반에도 많이 알려지면 좋지 않을까?)

영어에 '세렌디피티(serendipity)'란 단어가 있다. (같은 제목의 영화로 유명해진 단어다.) 완전한 우연으로부터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의미 한한다. 이 단어는 창식에게도 독자인 나에게도 둘 다 적용되는 단어는 아닐까 싶다. 창식은 분명 1928년을 경험해 본 이상 그때를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달라졌을 거다. 무엇보다 그림에 관심 있는 창식으로선 당대 유명한 화가 이중섭을 만났다는 건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나라가 중요하다고 100번을 외치면 뭐 하겠는가? 한 번의 경험이 확실하지. 물론 어느 누구도 시간 여행은 할 수 없겠지만 책을 통해 우리는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창식은 그 뾰족하고 반항기 가득한 성격이 다듬어지고 한층 어른스러워진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창식이만 하는 건 아니다. 물론 우리도 창식이처럼 시간 여행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설혹 가능하다고 해도 권할만한 일은 아닐 것 같다. 어쩌면 그 경험은 해로울 수도 있을 것 같다. 현재와 과거를 인지하는 능력이 붕괴되면서 미쳐버리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타임 슬립은 타임 슬립이고, 오히려 현실을 열심히 살면 그런 세렌디피티의 기적은 우연을 가장해서 오지 않을까.

이 책은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구성을 통해 (보통은 시나리오는 과학이라고 해서 이 점이 강조되기도 하는데 소설도 역시 그렇다.) 읽는 맛이 좋다. 독자가 이럴진대 저자도 소위 쓰는 손맛을 느끼지 않았을까. 저자는 유명한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의 작가로도 유명한데 급관심이 간다. 기회 있는 대로 한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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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10-11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스텔라님도 곧바로 청소년문학을 읽으셨군요. 이 리뷰 읽다보니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생각이 나는 건 왜일까요. 과거 유명인들과 조우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겹쳤나봐요 ㅋㅋ

stella.K 2024-10-11 20:17   좋아요 1 | URL
ㅎㅎ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 나긴하죠?
그래도 우리나라고 오산학교 3인방의 청소년 시절을
다뤘다는 점에서 저는 이 작품에 별 반 개는 더 주고 싶습니다. ㅋㅋ
한마디로 구성이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요.
간간히 아이다운 유머러스한 문장도 좋고.^^

푸른기침 2024-10-11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살다 살다 이 나이에 <청소년 도서를 읽고 쓴 생각 글>을 읽게 되는군요.

좋은 영어 단어와 그와 얽힌 영화도 얻어 가고, 제가 살짝 쿵 좋아하는 백석, 이중섭 이름도 발음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계절이 오는 어귀 쯤이라 생각했는데,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계절의 한 복판에 와 있네요.

아침 저녁, 쌀쌀하지만, 이쁜 하늘이 보이는 요즘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맘껏 시간을 즐기시기를...
이만, 꾸벅~~~~~

stella.K 2024-10-11 20:20   좋아요 0 | URL
저 3인방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겠죠?
영어 단어 좋으셨습니까? 저도 이 단어 생각하고 좋았습니다. ㅋ

정말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있죠?
푸른기침도 감기걸려 기침하시마시고 늘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또 뵙게되길!^^

니르바나 2024-10-11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점퍼 재미있게 읽으셨군요.
그런데 오산학교는 평양이 아니라 평안북도 정주에 있었고,
이승훈은 오산학교 교장이 아니고 설립자입니다.
검색해보면 우리가 잘 아는 조만식, 유영모, 홍명희 선생이 교장을 지내셨고,
함석헌이 오산 학교에서 유영모 선생을 만났습니다.
오산학교는 우리가 잘 아는 인물들이 교사와 학생으로 있었던 민족의 학교 였습니다.

stella.K 2024-10-11 21:17   좋아요 1 | URL
ㅎㅎ맞아요! 정주! 이번에도 니르바나님의 예리함을 피해가지 못했네요.
북한하면 평양 아니면 함경도를 떠올리는지라 무의식적으로 이러네요 ㅠㅠ
근데 이 책에선 이승훈을 교장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알고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땐 설립자가 교장도하지 않았을까요?
암튼 검색이라도 하고 쓸 걸 스스로 무식이 탄로나게 만들고 큰 일 났습니다.ㅠ ㅎㅎ

니르바나 2024-10-12 02:20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제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정말입니다)
다만 제 서재에 있는 마이페이퍼 첫째 카테고리에 있는 私淑(사숙)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유영모 선생님을 나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지내다보니 남강 이승훈-다석 유영모-함석헌 선생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편이라 이 분들에 대해 여러권의 책을 읽다보니 알게 된 사실입니다.
민족지사들이 모이는 학교라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 폐교된 오산학교다 보니 남강 이승훈 선생이 사이사이 교장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죠.
니르바나가 짧은 안목으로 검열한다고 생각마시고 그냥 스텔라님 글에 댓글을 재미있게 단다고 귀엽게 봐주세요.ㅎㅎ

stella.K 2024-10-12 09:51   좋아요 1 | URL
아이고, 감히 제가 어떻게 니르바나님을 귀엽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릴 일이죠. 실수하더라도 그냥 넘어가지 마시고 꼭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될 것 아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24-10-15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정욱 작가의 동화를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주 특별한 우리 형‘, 같은...
저도 동화책이나 청소년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 기회가 닿는 대로 읽어 볼 생각을 합니다.
청소년 책이 괜찮은 책이 많더라고요. 정채봉 작가의 책도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두루두루 읽어 보고 싶은데 한정된 시간만 남다 보니 마음만 앞서고 있네요. 그래도 알라딘에 들어와 제가 읽지 못한 책에 대한 리뷰를 볼 수 있어 좋습니다.^^

stella.K 2024-10-15 19:39   좋아요 0 | URL
고정욱 작가의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이 있었나요?
저는 워낙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가 워낙 유명해서 다른 건 대충봤어요.
그러게요. 저는 전에 청소년 문학 문제 많다는 말을 들어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도 읽어보니까 재밌더라구요.
인물 설정할 때 도움이될 것 같기도해요.
고정욱 작가 노련하고 영리한 작가라는 생각이들었어요.
전 이날까지 정채봉 작가의 책은 유명하다는 것만 알지 읽어 볼 생각도
안하고 있었어요.ㅠ 유명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텐데 말이죠.
TV는 딱 중2의 IQ에 맞춰있다잖아요. 그래야 모든 연령계층의
사람을 커버할 수 있다고 하던데 책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하더라구요.
특별히 어려운 책을 읽을 양이 아니라면요. 저도 점점 그쪽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싶기도해요. ㅎ

레삭매냐 2024-10-30 07: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 번의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
매우 격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책이었군요.
잘 쓰인 책이라고 하니 호기심
만발이네요.

쓰는 손맛, 작가에 대한 찬사네요.

stella.K 2024-10-30 15:01   좋아요 1 | URL
혹시 읽게된다면 그냥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읽어주세요. 어른의 눈높이라면 약간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ㅎ 그래도 작가가 소월과 백석과 중섭의 청소년 시절을 그렸다는 건 높이 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yamoo 2024-11-02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정욱 작가에게 실제로 작문 수업인가 들은 적이 있어요. 학부때요. 키가 무척 작은데, 목발을 짚고 다녀서(두 다리가 없는 듯) 정말 충격적인 만남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당시 학부 2학년 때였는데...이 분을 몰랐을 때였고, 동화작가로만 자기를 소개하시더라구요. 깐깐하기 이를 데 없었고, 자신감에 찬 수업...목소리도 카랑카랑 했던 기억이 있는데....아직도 건재하시군요!

stella.K 2024-11-02 10:26   좋아요 0 | URL
아, 만나 보신 적이 있으시군요. 소아마비를 앓으셔서 다리가 안 좋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지금까지 책 내신 거 보면 무척 열심히 사시는 분 같더군요. 어떠실지 감히 상상이...!^^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일본서점대상 수상기념 리커버)
황보름 지음 / 클레이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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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프레임이 천천히 돌아가는 착한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소설 쓰기가 읽기 보다 쉽지 않은데 서점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잘 풀어 나갔다고 생각한다. 읽으면서 나의 과거에 두고 온 서점 출입기도 떠올리게 돼서 나름 가슴 따뜻한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독서는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지만 본격적으로 서점을 출입하기 시작한 건 중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였다. 그전엔 학교 앞 문구점에 어린 문고를 낱권으로 팔아 굳이 서점까지 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 시절 내가 살던 동네 시장 근처에 서점이 두 곳이 있었다. 서점은 특별한 인테리어나 장식이 거의 없이 책들을 무조건 천장까지 높이 쌓아 놓고 팔았다. 손님들이 자주 찾는 베스트셀러는 가까이에 두고, 없을 것 같은데 있는 책은 주인이 사다리나 의자를 놓고 올라가 뽑아 주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가끔 책과 책 사이에 낀 책을 뽑다가 실수로 책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머리나 손목 또는 발목을 다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주인은 안 아픈 건지 아픈데 참고 있는 건지 알 수는 없는 표정으로 책을 손님에게 넘겨준다. 그런 걸 보면 난 가끔 무슨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책을 넘기다 손을 베였다는 건 잘 믿기지 않지만 책한테 두들겨 맞는 건 너무 이해가 간다. 요즘은 그런 광경은 헌책방이나 가면 볼 수 있으려나?


학교 시험이 끝나거나 주말이면 난 습관처럼 서점에 들르곤 했으니 결국 서점 두 곳 중 하나가 나의 단골 서점이 되었다. 서점 주인아저씨는 풍채가 좋고 후덕한 인상으로 조카 대하듯 나를 편안히 맞아 주었다. 서고같이 단조롭기는 했지만 매장이 좀 큰 편이었다. 책을 사면 손님이 괜찮다고 하기 전까지는 무조건 책표지를 서점 로고가 찍힌 포장지로 싸 주는 것이 관례였다. 일종의 서비스다. 바로 그 틈을 타 주인아저씨와 책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때 아저씨는 한비자를 비롯해 동양 고전에 심취해 있었고, 독서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아저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낮에 서점을 가니 아저씨가 자작을 하고 계셨다. 아저씨는 나를 보자마자 "한잔해."했다. 난 당연 거절했고 아저씨 역시 진짜 권할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어서 와의 다른 인사는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렇게 이물 없이 나를 대해주셨던 서점 아저씨가 생각이 난다.


그렇게 나의 단골 서점과의 인연은 거의 10년 가까이 이어졌던 것 같다. 그동안 서점은 한 번의 이사를 해 더 넓은 매장과 그에 걸맞은 인테리어를 갖추기도 했다. 하지만 난 그 10년 중 2, 3년은 안 다녔던 때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동네가 있는 구(區)에 지하철역에까지 큰 서점들이 거의 경쟁적으로 생겼다. (전에 큰 서점은 종로나 광화문에 있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큰 서점에 가면 그만큼 책 구경을 더 많이 할 수 있으니 발길이 멀어진 것이다.


그러다 오랜만에 들렀는데 아저씨는 여전히 계셨고 특별히 오랜만에 왔다고 환영해 주는 법도 없었다. 그냥 지난번에 오고 또다시 와준 조카 대하듯 여전히 서글서글하게 대해 주셨다. 난 그게 좋았고, 어쩌면 아저씨는 내가 발길이 뜸해질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 단골은 일순간 멀어질 수는 있어도 결국 돌아오는 게 단골이란 걸 아저씨는 알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이 폐업을 했다. 그곳이 서점이었다는 흔적만 아직 남아 있지 그 많던 책들과 주인아저씨와 가끔 보던 주인아줌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나마 그 흔적도 조만간 사라질 운명이었다. 난 좀 놀랐다. 그럴 것 같으면 미리 언질이라도 해 주실 일이지 갑자기 이게 뭔가, 비록 나이는 어려도 단골인데 내가 그렇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나 섭섭했다. 하지만 이내 아쉬운 생각을 거두었다. 내가 한동안 안 다닐 때도 말하고 안 다닌 건 아니지 않는가. 이것 역시 평소 아저씨의 스타일의 하나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모르긴 해도 그동안 아저씨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힘드셨을 것이다. 그렇게 대형서점들이 잇달아 오픈을 하는데 그런 동네 서점이 무엇으로 버틸 수 있었을까. 책을 좋아하면 책만 읽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책이 좋아 서점을 꿈꾸기도 하지만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책을 더 못 읽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도 한때 막연하게 서점을 꿈꾼 적이 있었는데 그 말 듣고 꿈을 접었다. 그 아저씨도 그러지 않았을까. 이제 해 볼 건 다 해 봤으니 책이나 원 없이 읽어보자며 그만둔 것은 아닐까. 난 그저 아저씨의 무사안일만을 기원했다. 살아오면서 느끼는 거지만 인연이란 언제 맺어져서 언제 헤어지는지 모르게 헤어지는 게 인연인 것 같다. 인연이 있다면


뭐든 크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위용을 자랑했던 대형서점도 권불십년일까. 가히 서점 거리라고 해도 무방할 그 대로변의 큰 서점들이 10년을 못 버티고 문을 닫거나 축소 경영을 했다. 책 안 읽는 민족으로 유명한 나라에 그렇게 경쟁적으로 큰 서점을 연다고 해서 책 읽는 민족이 될 리가 없고, 무엇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아무래도 인터넷 서점 앞에 맥을 못 췄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 큰 서점들이 온라인으로 전환한 것이 아닐까. 변화에 대처하는 종만이 살아남는다고 하지 않던가. 대형서점들이 온라인 서점의 등장을 예측하지 못했을 거라고 보지 않는다.


확실히 인터넷 서점은 매력적이긴 했다. 그 매력에 대해선 여기에 구구하게 쓰지 않아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잘 알고 있을 테니 생략한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책을 구매한다는 것만 아니라 더 정확히는 그와 연계되는 블로그나 SNS는 매력 정도로 얘기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거야말로 가히 혁명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전에 누가 감히 책을 권했던가. 일반인들은 감히 상상도 못했다. 물론 아는 지인끼리야 정보 공유와 선물을 하지. 그러나 어디에 대고 감히 이 책 좋으니 한 번 읽어 보라고 권한단 말인가. 그건 소위 셀럽들이나 하는 일이고 당연히 그들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것을 일반인들도 블로그나 SNS에 익명의 사람들을 상대로 추천을 할 수 있게 됐다. 또 이를 통해 파워블로거 또는 인플루언서가 양산되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게 너무 잘 알려져서 실감을 못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혁명이라 부를만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책을 읽게 된 건 현실도피의 이유가 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 병원에 입원을 했었고 2 학기를 통째로 날려 먹었다. 이후 다니던 학교를 계속 다녔다면 좋았을지 모르겠는데 그 사이 우리 집은 이사를 했고 전학은 불가피했다. 새로운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학업을 잘 따라가지 못했다. 그때 갑자기 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계집아이가 현실을 도피한다면 어디로 하겠는가. 이것밖에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도 없겠다 싶었다.


책을 읽으니 새삼 깨달은 건 세상엔 책 읽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았다. 우리 집에서도 책을 읽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고나 할까. 그나마 아버지가 신문과 시사 잡지를 돌아가시기 전까지 읽으셨지만 당시만 해도 잡지나 신문은 독서 행위에 포함시키지 않는 분위기라 그렇게 따지면 내가 유일했다. 그에 대한 자부심도 작지 않았다. 더구나 학교에서는 독서를 장려하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책을 많이 읽으면 굳이 학교를 다닐 필요가 있을까란 의문을 갖기도 했다. 실제로 난 학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겨우 마쳤다.


블로그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책도 그 점을 지적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것에 나 역시 쉬 동의하지 못하겠다. 물론 비슷한 취향과 관심을 가진 블로거들만 모인 곳이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교육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자식들 공부에 좋다는 건 뭐든 다 시키는데 설마 독서를 제외했다고 보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 초등학교 때 부모로부터 세계 명작 한 질 정도 안 받고 학교 다닌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학교에선 늘 책을 읽으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다녔다. 그 후로도 TV를 비롯한 매스컴에서 캠페인성 독서 프로그램을 수시로 방송했었다. (지금은 좀 뜸해진 느낌이긴 하다.) 그러니 우리나라 사람들 1년에 1권 내지는 1권도 읽지 않는다는 통계는 어쩌면 정확하지 않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아니면 독서 편중이 심하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아도 어디선가 '샤이 북맨' 또는 '내숭 독서인'이 적지 않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뭐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아주 근거 없는 얘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렇게 온라인에 멍석을 깔아줬더니 정말 책 읽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다. 난 그때야 비로소 내가 책을 그리 많이 읽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전까지는 비교가 안 됐는데 이제는 비교가 가능해진 것이다. 고백컨대, 나는 지금까지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읽은 게 70권 정돈데 (그나마 그것도 오래전 수치다) 어떤 사람은 그에 2배 3배를 읽는 사람이 있어 놀랐다. 또한 한 분야의 책만 파는 사람이 있고, 전작주의 독서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처음으로 독서에 대한 열등감 내지는 비교 의식 같은 것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렇듯 온라인 서점이 한 일들은 놀랍다. 적어도 은둔형 외톨이에 가까운 나를 (온라인이긴 하지만) 사람들과 소통하도록 했던 게 바로 블로그 활동이었다. 작가와 독자의 간격을 좁혀 준 것도 인터넷이 아닐까. 예전에 작가와 독자가 소통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예전엔 아주 유명한 사람이 아니면 어떤 작가가 어떻게 생겼는지 코빼기도 알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얼굴을 알리며 소통하게 되었다.


편의와 효율성만을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온라인으로만 책을 사야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수가 줄어서 그렇지 거리 서점은 아직도 건재하다. 아니 최근엔 오히려 상대적으로 약간 늘었다는 느낌도 든다. 그리고 그건 예전의 일반 서점과는 차별화된 느낌도 든다. 그리고 그것을 '독립 서점'이라 부르기도 한다. 왜 거리의 서점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걸까. 온라인 서점이 줄 수 없는 뭔가를 독립 서점에서 찾으려는 걸까. 앞서도 얘기했지만 예전에 서점은 책을 높이 쌓아놓고 판매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그 공간을 활용하려고 한다. 이 책에서처럼 커피도 팔고, 작가와 독자 간의 가교 역할도 하고, 독서토론은 물론이고 글쓰기 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랑방 역할을 한다. 그냥 책만 팔아도 힘들 텐데 무슨 사서 고생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사람들은 책을 통해 생각을 함께 공유하고 순환시킬 때 책이 가장 책 다워진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그러기엔 온라인의 한계를 알지 않았을까. 그래서 서점은 사멸되지 않고 독립 서점으로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책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책과 연결된 사람들의 이면을 다뤘다. 책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얼핏 작가나 편집자, 비평가 등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책이라면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이란 작품을 추천한다.) 이 작품은 그것을 소비하고(독자) 판매하는 사람(서점 종사자) 등을 다뤘다. 주인공이자 서점 주인인 영주를 비롯한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트라우마 내지는 인생의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어떻게 서점이란 공간에서 책을 매개로 치유와 회복, 희망을 발견해 나가는가를 나름 진지하고 밀도 있게 그렸다.


무엇보다 주인공 영주는 한때 워커 홀릭으로 산 지난날을 후회하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이혼을 선택했다. 그녀의 그런 선택을 보면서 결혼이 꼭 불행해서 이혼을 하는 것은 아니구나 싶다. 결혼이 선택이듯 이혼도 선택이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물론 그 선택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서점을 오픈한다. 적어도 나라면 이혼은 하지 않고 직장만 그만두고 서점을 오픈할 것 같다. 서점을 평생 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고, 요즘같이 경기도 안 좋은데 부업 정도로 생각하지 누가 올인을 할까. 하다가 망하거나 너무 힘들면 그만두기도 용이하고. 하지만 영주는 그런 여지를 두지 않는다. 그런 걸 보면 영주의 이혼은 단순한 이혼이 아니었다. 더구나 남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이혼을 감행했다. 이기적이란 오해도 받을만하다. 망하는 것은 나중 일이고 오로지 서점 운영에만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한다.


일은 해 본 사람만이 할 줄 아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인생을 소극적으로 재미없게 산다 싶기도 하고. 한때 서점을 운영해 보는 것이 꿈이라면서 해 보기도 망하면 어쩌나부터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은 실패할수록, 아플수록 단단해지는 법이다. 영주의 그런 단단함과 진지함이 서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이 책을 읽는 사람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건 아니지만 서점을 해야겠다는 생각 하나가 그처럼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서점은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전엔 책을 읽는다는 것이 개인의 지식 축적에만 머물렀다면 이제는 타인과 함께 나누고 토론하며 공동체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곳 이상의 독서 클럽 내지는 SNS나 블로그를 통해 소통하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서점이란 공간이 중요해졌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문득 영주가 서점을 열고 단 하루라도 편하게 잠을 잔 적이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사업하는 사람 대부분이 다 그렇지 않을까. 그렇게 원했던 일을 하게 되었음에도 마음 한편에서는 지구의 한 귀퉁이를 떠 안은 느낌일 것이다. 영주는 책 팔아서 노년까지 돈 걱정 없이 잘 살아 볼 생각으로 서점을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더더욱 서점 같은 건 꿈꾸면 안 된다. (아직 노년을 생각하기엔 젊어 보인다.) 그녀의 꿈은 소박했다. 그냥 책 냄새 맡아가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부딪혀 보는 것. 그런데 이런 영주의 꿈을 응원해 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작품엔 나오지 않지만 영주를 아는 사람은 개업했다고 축하는 해 주지만 속으로는 낭만주의자라고 냉소하지 않았을까. 책 팔아서 무슨 부귀영화를 두리겠냐며.


사람은 목적 보다 목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목표를 들어보면 거의 십중팔구는 돈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게 돈 모르면 뭐 할 거냐고 물으면 답은 왠지 더 듣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또 그런 식으로 사람을 재단하거나 판단하려고 한다. 적어도 민주주의 나라고 세계 경제 10위 안에 드는 나라라면 아무리 소박한 꿈이라도 냉소하거나 훼손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서점을 포함한 우리나라 자영업은 개업도 많이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폐업도 많이 한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뭐가 좀 잘 된다고 하면 돈 냄새부터 맡으려고 한다. 그것이 천민자본주의를 키우고 누군가의 꿈 꿀 권리를 짓밟는다.


내가 이 얘기를 왜 하냐면 앞서 얘기한 나의 단골 서점의 주인아저씨가 생각나서다. 모르긴 해도 그 아저씨는 서점을 그만두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저씨는 그때 40대 초쯤은 되었던 것 같다. 건강이나 신변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는 한 그렇게 이른 나이에 서점을 폐업할 분이 아니다. 아저씨에게 어떠한 꿈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일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삶의 보람을 얻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물론 임대료가 싼 어느 변두리로 터전을 옮겼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밀리고 밀리면 어디까지 밀려날지 알 수 없다.


이제 휴남동 서점 같은 독립 서점은 낯선 곳이 아니다. 그건 독립서점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다. 난 이런 서점이 계속적으로 늘어나길 희망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서점은 영주 같은 사람 혼자만의 의지로는 지켜나갈 수 없다. 이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위에 휴남동 같은 서점이 있다면 그곳을 열심히 가 주어야 한다. 누구는 그랬다. 도서관 하나가 문을 닫는 건 도시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고. 어디 도서관뿐이겠는가. 서점 역시 마찬가지다. 없어지면 온라인에서 사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어찌 보면 그게 더 편하고 효율적일 수 있다. 있을까 싶어 서점을 갔는데 없으면 그 허망함과 민망함은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하지만 독립 서점은 필요한 책을 사러 가는 곳이 아니다. 그냥 한가한 저녁 산책 삼아 마실 삼아 갔다가 보물 찾기하듯 책을 사 가지고 오는 곳이다. 동네에 그런 독립서점 하나 있으면 마음의 등불 하나가 켜지는 느낌 이텐데 내가 사는 동네엔 아직 그런 곳이 없다.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거리 서점이 사멸되지 않고 진화에 진화를 지켜보고 싶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사라진 서점과 도서관을 설명한다는 건 좀 끔찍할 것 같다. 제2, 제3의 휴남동 서점 이야기가 나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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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09-01 0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tella님의 서점 이야기도 흥미로워요.
저야말로 샤이북맨 혹은 내숭독서인이 아닌가, 잠시 찔끔했어요.

stella.K 2024-09-01 20:14   좋아요 0 | URL
ㅎㅎ 의왼데요? 그러지 마십시오.
긴 글인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cyrus 2024-09-01 08: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부산에서 유명한 책방이 ‘주책공사’에요. 주책공사 책방지기가 제일 싫어하고, 비추천하는 책이 <휴남동 서점>이래요. 그분을 실제로 뵌 적이 없어서 싫어하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요. 제 생각인데, 책방을 운영하는 그 분 입장에서는 <휴남동 서점>이 책방 운영을 미화하는 소설로 느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이 책을 읽고나서 책방을 열고 싶다고 생각한 독자들이 있었다고 해요. ^^;;

꼬마요정 2024-09-01 12:15   좋아요 1 | URL
저 지난 4월에 주책공사 다녀왔는데 분위기 좋더라구요. 생일책 샀는데 <무뎌진다는 것> 투에고 지음 이 나왔어요. 신선했어요.

stella.K 2024-09-01 20:23   좋아요 1 | URL
주책공사. 이름 참 잘 짓는다. 좋은데? ㅋ
근데 네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그분 너무 민감한 건 아닌가
싶기도하네. 이 작품은 그냥 소설이야.
소설은 낭만과 이상을 품고 있지. 나쁘게 쓰려면 얼마든지 나쁘게
쓸 수도 있겠지. 그러면 그분 왜 나쁘게 쓰냐고 또 뭐라고 할걸?
난 작가의 시선과 태도가 마음에 들더라. 아직 젊은 사람 같은데
성실하게 잘 썼어. 너도 기회되면 함 읽어 봐.^^

꼬마요정 2024-09-01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현실과는 다르다고 느꼈지만 뭔가 부러웠어요. 물론 영주는 월말이 되면 혹은 고지서 납부일 등이 다가오면 쉽게 잠들지 못할 거라 생각해요. 그래도 자기 일을 하면 그 고난도 견딜만하다 느끼기도 하니까요. 근데 책에 둘러싸인 삶이라… 좀 두근두근합니다. ㅎㅎ 스텔라 님의 단골 서점 아저씨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서점이나 도서관이 늘 흥하면 좋겠습니다.ㅜㅜ

stella.K 2024-09-01 20:31   좋아요 1 | URL
힐링 소설이잖아요. 당연히 다를 수 있지요.
영주도 그렇고 그 단골 서점 아저씨도 그렇고 지자체에
도움을 받아가면서 자기 일을 놓지 않고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지금 그 아저씨 많이 늙으셨을 거예요. 가끔씩 생각났었는데
이 책 읽느니까 더 생각나더군요. 어디선가 잘 지내고 계시겠죠?
맞아요. 한 국가의 저력은 그런데서 나오는 건데 흥해야죠!

페크pek0501 2024-09-03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40대에 주로 동네 서점에서 책을 샀는데 자주 사니까 서점 주인이 대학원생이냐고 갈 적마다 물었던 게 생각납니다. 이젠 인터넷으로 책을 삽니다. 여행지에선 독립 서점이 눈에 띄면 들어가 보고 책 한 권을 구매하는 편이에요. 나는 인터넷이 편해 인터넷 구매를 하지만 서점이 없어지는 건 섭섭해서 눈에 띄면 사 줘야 할 것 같아서요.^^

stella.K 2024-09-03 16:28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동감입니다. 많이 사 줘야할 것 같은데 저는 그런 서점이 눈에 잘 안 띄어요. 근데 대학원생으로 오해를 받으셨다니 살짝 부러운데요?^^

물감 2024-09-04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스텔라 님이 쓴 <아무튼 서점> 느낌의 글이네요 ^^
저는 어려서 서점을 안다녀봐서 잘 모르지만, 자주 가던 곳들이 사라진 기분은 알 것 같아요.
나만의 추억들이 진짜 추억 너머로 사라져버린 그 기분이요.
요즘은 식당들이 그렇게 줄폐업을 하는데 참 쓸쓸해요 ㅎㅎㅎ

stella.K 2024-09-05 10:07   좋아요 1 | URL
그럼 제가 잘 쓴 건가요? ㅎㅎ 저도 서점 잘 안 다니긴 하는데 근처 중고샵있으면 한번 나가보세요. 시간 잘 갑니다. 책이 뿜어내는 스멜도 좋고. 그러고 보니 저도 언제고 날잡아 한번 나가봐야겠어요. 😂
그래서 울나라는 백년가게가 별로 없다잖아요. 뭐가 좋다면 우르르 쏠리는 것도 문제긴 하지만 길거리만 나가도 저 사람들은 뭐해 먹고 살까 궁금하기도 하더라고요. 에효~
 
퀸스 갬빗 월터 테비스 시리즈
월터 테비스 지음, 나현진 옮김 / 어느날갑자기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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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테비스의 <허슬러>에 이어 두 번째로 이 책 읽었다. 현재 같은 출판사에서 작가의 작품 5권이 번역되어 나와있다. 일단 이 두 권만 가지고 보자면 <허슬러>는 당구를, 이 책은 체스를 소재로 다뤘다. 둘 다 스포츠 소설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스포츠 전문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이 둘은 좋게 말하면 두뇌 스포츠고 나쁘게 말하면 잡기다. 나야 잡기라면 화투 정도 밖엔 모르고, 그것도 혼자 하거나 100원 내기 또는 딱밤 맞기 정도의 미나토(?)여서 이 잡기의 세계가 얼마나 넓고 심오한지는 알 길이 없다. 그나마 화투도 어린 시절 외엔 잡아 본 적이 없으니 말 다 했지.

체스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츠바이크다. 워낙 오래전에 읽어 내용은 거의 기억에 없지만 그 문장의 우아함과 심리 묘사가 뛰어난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알다시피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 작가고 월터 테비스는 미국 작가다. 뭐 당연한 소리긴 하겠지만 같은 소재라도 어느 나라, 어떤 작가가 쓰느냐에 따라 그 문체나 사고방식이 많이 다르다.

월터 테비스는 가장 미국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은 아닐까 싶다. 미국의 가장 세속적인 면을 여지없이 드러내 준다. 난 이미 <허슬러>의 리뷰에서도 그런 언급을 했지만 이어령 교수의 말마따나 미국은 거리의 문학을 표방한다. 이 소설도 8살짜리 소녀 베스 허먼이 사고로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고아원으로 가게 되는 게 첫 시작이다. 가정이 없어진 것이다. 좀 놀라운 건, 주인공이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는데도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인다는 거다. 뭐 8살짜리가 죽음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만 그래도 부모가 돌아갔는데 어떻게 그렇게 담담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보모를 회상해도 좋고 아름다운 기억보단 불온하고 불만스러운 기억을 떠올린다.

더 놀라운 건 베스가 들어간 고아원에선 아이들에게 일괄적으로 약을 주는데 그게 일종의 신경안정제다. 하도 아이들이 울고 보채니 약으로 신경을 마비시킨다는 건데 그게 좀 충격적이었다. 문득 60년 대 미국의 고아원은 다 이랬을까? 다 그렇진 않더라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란 생각도 든다. 아무튼 이로 인해 베스는 약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성인이 된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일까? 고아원 수위 아저씨로부터 우연히 체스를 접하게 되고 베스는 그것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 비슷한 구성은 소설 '허슬러'에서도 보인다.) 하지만 고아원 원장은 어린아이에게 체스를 가르치는 걸 금지시켰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그로 인해 베스는 체스를 못하게 될 줄 알았는데 운 좋게도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입양을 가게 되고 거기서 계속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된다. 하지만 완벽한 행운은 없어 베스가 입양되던 날 양아버지란 작자는 집을 나가버리고 결국 양어머니와 둘이 살게 된다. 하지만 역시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고 비록 짧은 인연이지만 베스는 체스로 양어머니를 기쁘게 하며 나쁘지 않은 모녀지간으로 지낸다.

작품을 읽으면서 새삼 놀랐던 건, 체스 선수가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줄은 몰랐다. 베스는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체스에 관한 책을 사고 공부를 한다. 특히 체스에 관한 잡지를 빼놓지 않고 사던데 문득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에도 체스에 관한 책과 잡지가 있는지, 있으면 얼마나 있는지 잠시 알아봤다. 그랬더니 체스에 관한 책은 나름 꽤 있지만 잡지는 보지 못했다. 뭐 이해 못 할 건 없다. 우리나라는 잡지를 내면 낼수록 적자 구조고, 바둑이나 장기도 특정한 사람들 아니면 즐기지 않는데 이 서양장기는 또 얼마나 알겠다고 잡지까지 사 보겠는가.

책은 평이하게 잘 읽히는 편이다. 물론 체스의 기본 지식을 알고 봤다면 더 재미나게 읽었겠지만 모른다고 해서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난 베스가 체스를 어떻게 싸우고 이기며 어떻게 성장해 가는가를 보기보단 그녀의 앞으로의 인생이 자꾸만 궁금해졌다. 무엇보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었고, 약물중독에, 좋은 가정으로 입양되지도 못했다. 그나마 자신에게 잘 대해줬던 양어머니도 일찍 죽었다. 남자 친구도 사귀는 족족 그녀를 떠나간다. 그렇다면 그녀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궁금하고 걱정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나 스스로가 이런 인물은 불행할 거란 쪽으로 자꾸 상상하고 싶은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다 결국 작가에게 한방 먹었다. 작가는 주인공의 인생을 그리 길게 재단하지도 않았다. 주인공은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채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렇다면 그 인생이 앞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지 불행한 삶을 살지 판단하기엔 너무 이르다. 그 나이에 연애에 두어 번 실패했다고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거라고 장담도 할 수 없다. 약물에 중독됐다고 해서 당장 폐인이 되어 거지 꼴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도 성공적인 인생을 살 거라고 할 수도 없겠지. (우린 약물중독에 걸린 인생이 어떤 최후를 맞게 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사실 난 작가의 작품이 나와는 썩 맞는 편은 아니었다. 지난번 <허슬러> 때도 그렇고 이 작품도 그렇고 미국 특유의 세속적 낙관주의와 허무주의가 작품 전반에 흐른다. 그래도 작품의 구성이나 심리 묘사는 <허슬러>보단 훨씬 입체적이란 느낌이 든다. 문득 월터 테비스가 미국 문학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 인정하는 건 정말 열심히 썼던 작가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지난 1984년에 50대의 나이로 타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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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4-08-19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청 재밌게 본 드라마인데ㅎ 소설도 괜찮나 보군요ㅎ

stella.K 2024-08-19 21:03   좋아요 1 | URL
그런가요? 전 드라마는 못 봐서 말씀 드리기는 뭐한데 드라마가 훨 낫지 않을까 싶어요. 책은 그냥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어요. 어떤 작품은 원작 보다 영화가 나은데 미국 작품들이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