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에 나라가 좀 어수선하긴 하지만, 올해 우리나라를 기분 좋게 해줬던 건 뭐니뭐니해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아닐까 한다. 그건 또 아시아 여성 작가로는 최초란 수식어도 함께 했다. 그렇다면 최초 여성 노벨문학상은 누군가 했더니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란 단편집을 낸 1909년에 스웨덴의 셀마 라게를뢰프라고 한다. 


사실 한강 작가가 이 상을 받기 전만해도 나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의 신포도'마냥 노벨문학상이 별거냐, 괜히 안 부러운 것마냥 시큰둥한 척 했다. 작품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대중성은 없고, 최근엔 듣도 보도 못한 작가만 된다고 노벨문학상은 뭐 듣보잡 작가의 등용문이냐고 툴툴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것도 내로남불일까? 막상 우리나라 작가가 됐다니 마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 것마냥 기분이 좋았고, 상 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노벨상을 거절한 사람도 있긴 하다. 이를테면 장 폴 사르트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레득토 같은.) 무엇보다 적지않는 상금을 생각할 때 별 것 아닌 걸로 치부해 버리기엔 아닌 것 같다. 실제로 한각 작가는 상금을 자신의 작품을 번역해 준 번역가와 함께 나눴다고도 한다.(적지 않은 상금이라 세금도 많이 냈겠다 싶지만 상금은 세금이 붙지 않는다고 한다.)

어쨌든 이로써 우리나라는 지난 2000년 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이래 두번째로 노벨상과 인연을 맺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다가 아니다.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상을 제정할 때 국적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만일 그렇게 따지면 역시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 있는 마더 테레사 수녀는 3개국을 아울어야 하고 지금도 국적 논쟁을 한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국적이 아닌 출신으로 따진다면 지난 1987년 화학상을 받은 찰스 J 피터슨은 미국 사람이지만 그의 출신은 1904년 아직 대한제국 시절 부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노벨상과 인연을 맺은 건 생각 보다 오래다. 그걸 생각하니 내가 노벨상을 너무 신포도 보듯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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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12-18 0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시아 여성 작가로 첫번째로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받아서 더 좋네요 여성 작가가 처음 받은 건 1909년이었군요 그런 건 알아보려고도 안 했네요 이번에 한국 작가가 상을 받아서 언젠가 또 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됩니다 벌써 그런 생각을 하다니... 세계에서 한국 작가한테 관심을 가지기도 할 테니, 그런 일 또 일어날지도 모르죠 미국 사람에 부산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군요 그런 인연도 있었다니, 그것도 신기하네요


희선

stella.K 2024-12-18 12:12   좋아요 0 | URL
사실 한강 작가 말고도 오래 전부터 후보로 거론되어 온 작가도 많고 지금도 탈만한 작가도 많죠. 아마도 그런 일이 앞으로 몇십 년만에 한 번은 더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첫 여성 수상자는 저도 며칠 전 로쟈님 서재에서 알았네요. ㅋ

hnine 2024-12-18 0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찰스 피터슨이 한국 출생이라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어요.

stella.K 2024-12-18 12:15   좋아요 0 | URL
아, h님도...?! 우린 왜 이제야 알게된 걸까요? 좀 더 일찍 알 수도 있었을텐데. ㅠ

니르바나 2024-12-19 14: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마디로 한국인의 위상을 높인 쾌거입니다.
그런데 상금을 번역가와 나눴다고요. 그 일도 대단히 훌륭한 일이네요.
여러모로 훌륭한 작가입니다.^^

stella.K 2024-12-19 15:51   좋아요 1 | URL
그렇죠? 근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다른 작가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더라고요.
자신들이 누구 덕에 그런 노벨상 시상식 자리에 서 보겠어요? 적어도 답례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요?
아,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고요. ㅎㅎ
 

요 근래 드라마만 보다가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한마디로 말하면 대만판 '먹방 사랑이 꽃 피는 나무'라고나 할까? 어느 고등학교에 퀸카에게 같은 반 남자아이가 아침밥 조공을 바치는데 그걸 뭐든지 먹기 좋아하는 일명 먹방 소녀가 대신 먹으면서 벌어지는 사랑과 우정을 그린 영화다. 사실 난 요리 영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먹지도 못하면서 눈요기나 하는 영화는 내 취향이 아니다. 근데 여자 주인공이 복스럽게 먹는 장면은 좀 인상적이긴 하다.


대만 영화는 평소 잘 접할 기회가 없어선지 이 영화에서도 좀 낮설었다. 게다가 스토리가 명확히 와닿지는 않았다. 내가 못 따라가는 건지 아니면 영화가 좀 불친절한 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전체적으론 따뜻한 영화다.


솔직히 난 로맨스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래도 끝까지 보게 만드는 건 학교 영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예 자막이 없어도 끝까지 봤을 것 같다. 내용과 상관없이 옛 추억에 젖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배우들이 연기는 잘하는데 인물은 좀 빠진다는 느낌이 든다. 학교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역시 학교 축제 장면이다. 내내 보면서 난 왜 저 시절을 즐기지 못했을까, 다시 청소년 시절로 돌아가면 끝내주게 잘 살 것 같은데 역시 하나마나 한 소리겠지? 그래도 돌이켜 보면 추억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다. 헛헛할 때 보면 좋긴 한데 너무 빠져서 보진 마라. 그러다 나도 모르게 먹을 것까지 챙겨 먹으면 책임 못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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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해 다시 안 볼 책을 두어번 추려서 버렸다. 한 번에 몇권씩. 그전 같으면 주민센터 도서관에 기증했을 것이다. 근데 지난 9월인가, 10월에 비교적 깨끗하게 본 책 몇권을 가져갔더니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이 안내 데스크에 있는데, 내가 가저간 책뭉치를 보더니 대여해 간 책을 반납하러 온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나는 책을 기증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순간 안면이 바뀌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뭔가 기분이 안 좋은지 내가 가져 온 책을 꼬나보기만하고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나오면 그만이긴 했지만, 그의 사람 대하는 태도가 하도 불쾌해 속으로 '헛, 이것봐라.'하며 일부러 한동안 지켜보았다. 기증 받은 책 반갑지 않다는 건 알겠는데,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는 이상(그 안내 데스크의 사람은 수시로 바뀌긴 한다. 그런 걸 보면 자원봉사나 싼 일일 아르바이트로 운영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사람을 맞고 보내는 일에 충실해야 하는 거 아닌가? 순간 오기가나서 나를 언제까지 세워 둘 건가 몇 초를 더 서 있어 보았다. 그러다 결국 내가 안 되겠다싶어 "가면 되나요?" 했더니 그제야 나와는 눈도 잘 마주치지도 않고 겨우, "네."라고 하고는 딴청을 하는 것이다.  

난 그런 예의도 없는 애는 보다가도 처음 봐 수고하란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나왔지만, 나오면서 내 아들 같았으면 벌써 뒤통수를 한 대 갈겨줬을 것이다. 뭐 사람을 그딴 식으로 대하냐며. 기증을 많이 한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하면 받은 측에서 좋건 싫건 예의상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듣고 나왔다.  

아무튼 난 그 이후로 더 이상 번거롭게 주민센터까지 내 책을 들고 가 기증하는 수고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기증한 책이 항상 서가에 꽂혀 있으란 법도 없고 인기가 없으면 그것도 폐기처분하느라 골머리를 썩을 것이다. 게다기 주민센터도 기왕이면 새 책이 꽂히는 게 좋지 남아 가져다주는 헌책 꽂는 게 좋겠는가?

어쨌든 그러다보니 난 훨씬 더럽고 자유롭게 책을 보게 되었다. 대신 책에도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집 밖에 내놓을 땐 마음이 좀 쓰리다. 업동이 보내는 심정 같다고나 할까?


2.

             

어제 알라딘에선 서재의 달인 발표가 있었다. 올해 나는 작년의 반도 활동을하지 않아 당연히 안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이번엔 서재의 달인이 되었다. 작년엔 나름 열심히 서재 활동을 했는데도 안 되서 여기저기서 왜 안 됐는지 모르겠다며 한동안 위로 받기 바빴는데 올핸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알라딘선 자격요건을 완화했나? 아니면 내가 리뷰나 페이퍼 쓰는데 게으른대신 여기 저기 좋아요, 댓글은 열심히 한 편이라 그점이 참작이 될 걸까? 어쨌든 안 되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는 막상 되고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요즘 며칠째 뒤숭숭한데 위로받는 느낌도 들고.


무엇보다 다른 건 별로 관심이 없는데 서재의 달인이되면 다이어리가 생긴다. 오래 전, 싸구려 스프링 노트가 있어 그냥 버리기도 뭐해 잊을만하면 한 번씩 일기를 쓰곤했다. 근데 역시 그것도 나중엔 갖고 있기도 버리기도 뭐한 애물단지가 될 것 같아 앞으론 쓰지 말자 했다. 그런데 이렇게 쓸 것이 생겨버렸으니 안 쓸 수도 없고, 결국 내년에도 적자생존하게 생겼다.


3. 달력을 사는 사람도 있나? 해마다 이맘 때면 이게 좀 궁금했다. 달력은 어디선가 받거나 얻는 거 아닌가? 그런데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걸 나는 머리털나고 처음 본다. 바로 내 동생. 동생도 그렇게 사 보기는 머리털나서 처음 일거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달력은 벽걸이형 달력을 말한다. 나도 나이를 먹는지 탁상달력은 별로다. 숫자도 크지도 않고. 그래도 몇년을 두고 모처에서 보내주는 탁상달력은 그나마 마음에 들어 썼다. 그런데 며칠 전 내가 거래하는 은행에서 달력을 얻어 왔는데 내 동생이 그렇게 머리털나고 하지 않아도 될 짓을 한 덕분에 하나만 더 얻어도 되는 수고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됐고, 내 동생이 그렇게 한 건 나 좋자고 한 건 아니고 순 우리 노모 때문이다.덕분에 하나가 남아 돌아 몇 년만에 내 방에 벽걸이형 달력을 다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문득 어렸을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땐 연말이면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알아서 몇 권의 달력을 챙겨 귀가하시곤 했다. 새삼 그 시절이 좋았단 생각이 든다.    

일년이면 그것도 끝내 선택 받지 멋하고 연초에 버려지는 달력이 수억 권일텐데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갈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새 달력을 얻어 마음은 든든한데 당장 내년부터 곶감 빼먹듯 하루하루 없어지는 날짜를 생각하면 좋아하는 것도 잠깐이다.       


4. 와, 여기까지 쓰는데 몇 시간이 소요되는지 모르겠다. 근육도 안 쓰면 퇴화된다고, 몇 개월만에 페이퍼를 썼더니 우왕좌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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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12-06 2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인 축하드립니다 ^^
선정기준은 저도 잘 모르겠는데 뭐랄까, 내려놓는다는 마음으로 살면 주더라고요? 하하하

stella.K 2024-12-07 09:59   좋아요 1 | URL
역시 시크한 물감님! 그게 좋겠죠? 그래도 어제 이달의 당선작 안 되서 그것까지되면 금상첨환데 그러고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역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요. 근데 알라딘 서재 활동한지 20년이 넘었는데 당락을 결정하는 요인이 뭔지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그냥 신경 끄고 살아야겠죠? 그러다보면 주고 싶을 때 주겠죠. ㅎㅎ

yamoo 2024-12-07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올핸 되셨네요..ㅎㅎ 서재의달인...워낙 게을러서 이런 건 신경도 안써요..ㅎㅎ

달력 산적이 없어요. 항상 받아서 사용...근데 ibk 25 탁상용 달력은..그림이 유영국이에요!! 받지 않았으면 몰랐을듯..이거 한 개 더 받아야될듯요..ㅎㅎ

stella.K 2024-12-07 10:03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날도 있네요. 근데 말씀하시는 달력 어디가면 구할 수 있나요? 욕심 땡기는데요? ㅎㅎ

yamoo 2024-12-07 13:31   좋아요 0 | URL
기업은행가시면 됩니더~~탁상용 달력 달라고 하시면 돼요^^😊

stella.K 2024-12-07 19:38   좋아요 0 | URL
오, 야무님 고맙습니다.^^

blanca 2024-12-07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그 직원 정말 뭡니까. 제가 대신 화내드릴게요. 달인 선정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탁상 달력 돈 주고 산 저는 정말 찔리네요. ^^;; 그리고 달력 하루하루 없어지는 마음...그것도 너무 공감가요.

stella.K 2024-12-07 10:1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요즘 애들 그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잖아요. 대신 화내 주셔서 고마워요, 브랑카님.
근데 뭐 달력이야 필요에 따라 살 수도 있죠. 제 동생도 샀는데. ㅎㅎ 고맙습니다. 올해 남은 곶감 잘 빼먹고 내년에도 잘 빼먹고 살아야죠. ^^

니르바나 2024-12-07 1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서재의 달인 축하합니다.^^
올해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되셨으니까 기쁨 두배로 더 기분 좋으시겠어요.
이 기세로 내년에도 좋은 일이 많으시길 빌겠습니다.

stella.K 2024-12-07 19:36   좋아요 1 | URL
ㅎㅎ저는 오히려 니르바나님 축하를 받게되서 더 기쁩니다.
내년은 니르바나님 응원으로 좋은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선 2024-12-11 0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민센터 도서관 말고 시립이나 작은 도서관에 기증하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거기는 ‘최근 5년 이내에 출판되어 상태가 양호하며 활용가치가 있는 자료’ 만 받는가 봅니다 이건 제가 다니는 도서관이지만, 어디나 오래 된 건 안 받을 것 같아요 책은 안 봐도 버리기가 아쉽기는 합니다 안 보거나 기증하기 어려운 건 버리는 게 좋을 텐데... 책 별로 없는데도 정리를 못하는군요

stella.K 님 서재 달인 축하합니다 저는 달력 사 본 적 없어요 은행에 가서 받아 와요 언제부턴가 달력 하나씩밖에 안 주더군요 그런 것도 달라졌네요 그것도 돈 들여서 만드는 거니 그러겠습니다 그래도 달력 사는 사람 많겠지요 달력이 나오는 걸 보면...


희선

stella.K 2024-12-11 19:40   좋아요 0 | URL
아고, 그렇게 먼 곳은 들고 갈 수는 없고 그나마 집과 가까워서요.
게다가 전 출판된지 꽤 된 책들이구요. 그래도 깨끗이 본 건데...

희선님도 축하합니다. 달력이야 필요하면 살 수도 있지요.
오늘 알라딘에서 서재의 달인 선물이 도착했는데
스누피 그림은 좋은데 숫자가 넘 작아서 혹시 글씨 큰 탁상달력이 있으면
밀릴 수도 있어요. ㅎ
 
레지스탕스
이우 지음 / 몽상가들 / 202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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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저자의 이름에서 조선의 왕자를 생각했다. 본명일까?

좀 놀라운 건 이 책이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2018년에 초판이 나왔고, 지금까지 3쇄가 나왔다. 조금 더 놀라운 건, 그렇게 쇄를 거듭할 때마다 다듬고 살을 붙여 개정판을 냈다는 것. 물론 쇄를 거듭하는 책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리커버로는 나와도 여간해서 개정판을 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난 책에 애정이 남아 있을까? 책을 쓸 때 별의별 고생을 다해 썼다면 다시 쳐다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설혹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책을 보고 대대적으로 손을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겠지만, 예전에 개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을 것 같다. 개정판을 냈다고 책이 잘 팔릴 거란 보장도 못 하고. 그러니 애써 외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쇄를 거듭할 때마다 그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고, 지금까지 세 번의 작가의 말을 썼다. (모르긴 해도 근성 있는 작가인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이 작품이 지난 초판이 나온 이래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의 문학 권력자 내지는 유수한 문학상을 주관하는 어느 출판사나 기관으로부터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빼어나고 훌륭한 작품이 어떻게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신인문학상을 비롯한 여타의 문학상은 출판된 지 1년 안의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줄로 안다. 그것도 장편이 아닌 단편에. 그것이 맞는다면 이 작품이 무슨 무슨 문학상을 받을 일은 과거에도 없지만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나는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반면 뭔가 모를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은 소위 말하는 제도권을 벗어나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 얼마나 레지스탕스적 아닌가?


세상의 모든 작가들 대부분은 문청의 시절을 지난다. 그도 그럴 것이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망은 보통은 그 시기 전후로 갖게 되니까. 그러므로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름하여 성장 문학 한 둘은 쓰기 마련이다. 이 작품의 저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젊은 날에 젊음을 모른다고 노래했던 지금은 중년이 되어버린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젊었을 때 나는 막상 이런 장르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동의할지 모르지만, 이런 작품은 하나같이 우울한 방황과 허무, 섹스, 일탈 뭐 이런 것들로 대표되기도 하니까. 내 삶 자체가 꿀꿀하고 허무한데 굳이 이런 책을 읽어 더 꿀꿀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성장 문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데미안'도 나는 지금까지 두 번쯤 읽었지만 왜 이 작품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수긍은 할 수 있지만 강한 이펙트 같은 건 없지 않나.


이 작품 역시 '데미안'의 그림자가 짙다. 실제로 '데미안'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기도 했다. 좁은 소견이지만 이문열의 일련의 작품도 생각이 났다. (이를테면 '젊은 날의 초상'이나 '사람의 아들' 같은.) 하긴 이쪽 장르의 작품들은 데미안의 사생아들 아닌가. 그러니 이 작품을 젊었을 때 읽었다면 비웃었을지 모른다. 왜 그 시절엔 조금만 뭐가 보여도 모방이니, 아류니 하면서 아는 척 조소하기 좋아하지 않는가. 문학의 'ㅁ'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머리만 커져 모든 게 시큰둥하고 만만하게 보였던 게지. 마치 이 작품의 화자 기윤처럼.


그런데 이 나이 되어 이 작품을 읽으니 오히려 좋았다. 작가가 철학과 역사와 문학을 기반으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썼을지 알 것 같다. 이 작품의 밑 작업만 4년이 걸렸다니 알만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난 이 작품을 다 읽었을 때 뭔가 모를 허전함과 숙연함마저 느꼈다. 왜 가끔 좋은 작품을 읽으면 이 작품 이후에 무슨 책을 읽을지 막막함이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건 여간해서 잘 체험되지 않는데 아주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갖기도 했다. 바꿔 말하면, 난 어쩌면 이 작품 이후에 다른 책들이 나의 의식에 틈입해 오는 것을 쉽게 허락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단 생각도 든다.


문장이 좋다. 그렇다고 뼈를 때리고, 가슴을 후비는 뭐 그런 문장이어서 좋았다는 게 아니다. 그런 문장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뭔가 쉽게 잊히면 안 될 것 같은 문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밑줄이라도 거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어디서 멈춰야 할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따라 해 보고 싶은 문장이었다. 그리고 인물이다. 공감이 간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나 형제보단 친구가 더 중요해진다. 특히 상급학교 진학을 두고 부모와 갈등을 겪으면 더 그렇다. 부모는 가급적 자식이 배경이 되어줄 만한 학교를 진학해 주길 바라지만 기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철이 없어서 이 세상이 학연, 지연 등으로 엮여져 있다는 걸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더구나 대입도 아니고 고입을 재수한다고? 그건 기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지방의 이류쯤 되는 학교에 지원해 다니게 된다. 어떤 학교가 되든 어차피 한 시절 대충 때우다 가는 곳이다.


하지만 학교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된다. 흔히 일진이란 불리는 불량서클에 발을 들여놓은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거기서 일진의 수장인 상민와 친해진 건 따분한 학교생활에 활력이 되고 권력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이를 경계하게 만드는 건 이인자인 관석이다. 그는 알게 모르게 기윤이 상민과 친해지는 것을 방해한다. 상민은 이런 권력의 역학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영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다 결국 기윤이 일진에서 떨려 나가는 사건을 맞이하는데, 그건 어처구니없게도 상민이 보다 좋은 신발을 신었다는 것에서 발생한다. 한마디로 기윤은 거기에도 엄연한 질서와 조직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즈음 <데미안>에서 화자인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소개를 하듯, 기윤은 민재를 소개한다. 민재는 기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전학생으로 오면서 이들의 만남은 시작된다. 하지만 기윤에게 민재는 처음부터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부잣집 도련님에,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인 한마디로 재수 없는 타입이었다. (사춘기는 열등감을 이런 식으로 표출할 줄 아는 탁월한 시기이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잘나가는 아이가 왜 이런 지방 소도시 그것도 일류도 아닌 이류 학교에 전학을 왔을까? 특이한 건, 민재는 특별히 친구를 사귀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 늘 책을 가까이하며 홀로의 자유를 고독과 맞바꾼 아이였다. 민재와 가까워지게 된 건, 기윤이 상민이 패거리에서 쫓겨나자 점심시간이면 급식실에서 만나는 것이 불편해서다. 상민을 피해 도서실에 가면 늘 민재는 혼자 책을 읽고 있다.


그렇게 가까워진 민재는 알면 알수록 새로웠고 여느 아이와 달랐다. 이미 그 나이에 깊은 사랑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고, 독서 편력을 쌓기도 했다. 덕분에 기윤은 덩달아 책을 읽고 민재와 가까워지게 된다.


사실 민재를 가장 적확하게 보여준 사건이 몇 개가 있는데, 하나는 학교에 학생과 교사 간의 어떤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가 보여준 행동이었다. 그럴 경우 일반 아이들이라면 세를 결집해서 데모를 하거나 업무를 마비시키고, 고작 기물을 파손하는 정도겠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건 그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때 민재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학생들 편에 서는데 이른바 프랑스 대혁명 때를 모방하여 학교 측에 몇 개의 반박문을 써서 대자보를 붙이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것이 레지스탕스를 연상케 해 한동안 회자가 되기도 한다.


또 하나는, 그는 문학을 사랑해 시인이 되기를 바랐지만 좌절하고 부모가 바라는 대로 의대에 어렵지 않게 합격한다. 하지만 부모가 바라는 자신은 거기 까지라며 등록을 하지 않은 채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을 계획을 세운다. 그는 떠나기 전 기윤에게 선물처럼 자신이 타던 오토바이와 쓴 많은 시중 100편을 추려 기윤에게 맡긴다. 너무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아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시에 큰 제목이 없다. 나중에 혹시 시집을 낸다면 제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기윤이 민재가 잘 떠나려니 했는데 뜻밖에도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 민재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슬펐지만 기윤은 민재의 장례가 끝난 후 그를 위해 시집을 출판하기로 한다. 결국 이 책의 제목 레지스탕스는 민재의 시집의 제목인 동시에 그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나는 한동안 기운이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기윤에게 그토록 울림을 줬던 민재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것으로 끝이 난다고?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충격적이면서 동시에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이내 그를 인정하기로 했다. 민재는 민재로서 민재답게 살다 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스무 살도 채 살지 않은 민재에게 함부로 연민을 갖는 건 오히려 그를 욕되게 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단 얼마나 자기답게 값지게 살았냐가 아닌가. 그는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자신이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 봤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희곡도 써서 자신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는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래서 신은 그렇게 민재를 일찍 데려갔나 보다. 결국 신도 인정한 삶 아닌가.


그런데 이 책은 기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 지나 동창회에 참석했다 우연히 잊고 있었던 민재를 회상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물론 작가의 그런 설정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겠지만, 나라면 민재 같은 친구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보다 몇 보는 앞서 가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해 주는 친구를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외톨이가 될 위기에서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준 친구다. 그런데 기윤은 지난 10년 동안 민재를 잊고 남과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걸 그때야 비로소 자각했던 것이다. 왜 그런 설정이 필요했을까?


우리의 삶은 기윤과 얼마나 다른가? 나이 들수록 몇 살에 죽더라도 사는 동안 아프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게 대부분의 바람 아닌가? 우리도 기윤이 같이 느끼고 생각하며 나이 들지 않았나? 상민이의 세계를 누구는 동경하기도 하고 누구는 비판하기도 하지만, 우린 어느덧 남들만큼 살자는 게 삶의 모토가 되어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고, 뒤처지고 소외당하는 걸 못 견뎌하지 않았는가? 우린 그런 삶에 마땅히 저항할 필요가 있는데도 오히려 끌어안고 살고 있다. 기윤이 민재를 떠올리는 순간 가슴을 쥐어짜듯 괴로워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어쩌면 독자에게도 기윤이처럼 깨어날 시간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더불어 소설은 어때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여러 의견이 많을 수 있겠지. 그것은 옳고 그름으로 얘기되어 지지 않는다. 이런 소설이 있는가 하면, 저런 소설이 있다. 한동안 치유와 위로를 주는 소설이 유행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강세다. 하지만 역시 궁극의 소설은 이렇게 잠자고 있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당신은 지금 잘 살고 있느냐고 물어봐 주는 소설이 정말 좋은 소설 아닐까?


이우 작가는 이 책에서 그런 말을 한다. 소설가는 발표한 작품과 무관하게, 처음 문학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을 때의 순수함으로 사유하고, 탐구하고, 집필하는 존재라고. 작품을 출간해서 소설가가 아니라, 문학에 헌신하여 살아가고 있기에 소설가라고 했다.


올해도 어느덧 한 달여 밖에 남지 않았다. 올해가 마감될 때까지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을까? 작년엔 천명관의 발견이 좋았는데, 올해는 이 책이다 싶다.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 될 것 같다. 또한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다.

남은 한 달도 잘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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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11-23 13: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우 작가 youtube에 자기 채널도 운영하고 있어요. 흥미로운 작가이지요.

stella.K 2024-11-23 18:15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한번 들어가 봐야하겠네요. 흥미로운 작가 맞는 것 같습니다. 똑똑한 거 같고요. ㅋ

니르바나 2024-11-23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이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라니까 급땡기네요.ㅎㅎ
한달밖에 남지 않은 2024년도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stella.K 2024-11-23 18:20   좋아요 1 | URL
니르바나님은 안 읽으셔도 되지않을까요? 더 좋은 책 읽으시잖아요.ㅎㅎ 그래도 뭐 젊은 작가들 응원 차원에서 읽으시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ㅎ
세월 참 빠르죠? 니르바나님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물감 2024-11-26 2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데미안>을 포함해 이런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비교적 건강하시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전에 누군가에게도 그랬었는데, 방황하는 사람만이 헤세를 찾고 읽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저 또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서 이런 장르들에 많은 위로를 얻었어요. 하지만 반대로 건강한 사람들처럼 나도 시큰둥했으면 좋겠다고 누누히 생각했고요. 그래도 별다섯 주신걸보니 정말 잘쓴 책인가봅니다 ㅎㅎ

stella.K 2024-11-27 13:39   좋아요 2 | URL
앗, 그런가요? 사실 이런 장르 답을 주진 안 잖아요. 니가 답을 찾아라는 식이죠. 어찌보면 겸손한 것 같고 어찌보면 무책임한 것 같고. 이 작가에 대한 평이 좋더군요. 이 책 독일에도 팔려 나가고 나름 잘 나가는 작가더군요. 자기는 매년 장편 한 권씩 낼거라는데 그 패기도 맘에 들고. 당분간 지켜보고 싶은 작가예요. 기회되면 함 읽어 보시길! (사실 민재 죽는데 눈물이 찔끔.. 나이 드니까 눈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일단 안구건조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듯요. 😆 )

고양이라디오 2024-11-27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먼가 흥미로운 작가와 흥미로운 책이로군요! 찜해놓고 갑니다ㅎ

페크pek0501 2024-11-29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작가를 발견하는 것이 우리 같은 사람에겐 큰 기쁨이지요. 저도 맘에 드는 작가를 만나면 그의 모든 작품을 읽고 싶어지곤 해요. 전작 읽기를 하고 싶지만 우리의 인생이 짧은지라 시작하게 되진 않더라고요. 그래도 몇몇 작품을 읽으려고는 합니다. 확실히 각자 독서 취향이 있어요.

stella.K 2024-11-29 21:14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맛에 책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도 이 작가 다 보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주요작은 좀 보려고요.
마침 중고샵에도 있더라구요.^^

2024-11-30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30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03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구는 추리소설를 범죄소설이라 불러야 한다며, 범죄소설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솔직히 난 추리소설이 됐든 범죄소설이 됐든 이쪽 장르의 소설을 그나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얘기하기가 뭐하지만, 초등학교 때 코난도일의 추리소설이 어린이용으로 쏟아져 나온 적이 있다. 그때 잠시 관심을 가진 적이 있기는한데 그건 순전히 당시 내가 좋아했던 같은 반 남자 아이의 눈에 들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이쪽 장르는 일단 사람을 죽여놓고 시작되는 이야기라 그 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피비린내를 맡는 것만큼이나 나에겐 불온한 느낌이라 그렇다. 게다가 이쪽 장르는 인간의 어둡고 내밀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 그것 역시도 나에겐 그다지 매력이지 않다. 무엇보다 이런 소설을 좋아하면 영혼마저도 사악해지는 건 아닌가 해서 아주 잘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면 보지 않는다. 


이 작품은 TV 방영 때부터 작품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누구는 매주 선물을 받는 느낌이라고 했던가 그랬다.) 무엇보다 영화 <<화차>>를 만든 변영주 영화감독이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끔 영화 감독이 드라마 연출을 맡는 경우가 있다. 변영주 감독이라면 알아줄만하니 결코 후회는 안 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영화와는 또 다른 것이라 관객을 1시간 반 내지는 2 시간 화면 앞에 앉히는 것과 물론 끊어보긴 하겠지만 14시간 내지 16시간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하지만 역시 변영주 감독은 드라마에서도 그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또 드라마 하겠다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뭐 한 번 정도는 더 한다고 덤빌지 몰라도 감독도 아직 중년이긴 하지만 이제 노년을 생각할 나이라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인간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무엇보다 살인이 개인의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 즉 집단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을 때 얼마나 추악하고 이기적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어느 작은 마을에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한 소년이 하루아침에 살인의 누명을 쓰고 10년 동안 교도소에 수감됐다 만기 출소한다. 그 소년은 10년 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살인을 한 적이 없는데 억울하게 교도소에서 성인이 된다. 사실 교도소 생활 10년이면 보통의 정신력이라면 거의 대부분은 가스라이팅으로 어쩌면 내가 무의식적으로 살인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래 그런 보통의 이야기로는 드라마가 될 수 없다. 어떻게든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와 노력, 그에 대해 어떠한 댓가도 치르겠다는 사람에게만 주인공이란 이름을 허락한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반대하고 방해하는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세력이 주인공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이 드라마에선 하나 같이 존경하고 의지했던 마을의 아줌마와 아저씨들 즉 친구의 부모들이기도 한다. 그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 고정우(변요한 분)가 출소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건 그저 살인자를 혐오해서만도 아니다. 사실은 마을 사람들이 그 살인사건에 이렇게 저렇게 다 연루가 되어 있다. 하다못해 피해자의 아버지와 엄마도 직간접적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니 고정우의 출소와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자신에게 어떻게 불리하게 작용할지 몰라 사람들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혐오를 이유로 정우가 마을을 떠나줄 것을 바라고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정우로선 그렇게 안 보면 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행복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알고 싶고, 누명 만큼은 벗고 싶어한다. 진실을 아는 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다. 그것은 확실히 새로운 국면이어서 새롭게 누군가는 죽어야하고, 누군가는 진짜 살인자가 되며, 누군가는 파멸을 향해간다. 이렇게 진실이 혹독한 것이라면 차라리 그냥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조용히 사라져 주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마져 들게 만든다. 자신이 누명을 벗는다고 해서 행복해질 것도 아니지 않는가. 더구나 믿거라 하는 사람이 하나 같이 검은 속내를 감추고 있다가 결정적일 때 들어내면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무지와 이기심이 사람을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도 이 드라마 교훈은 있다. 진실은 늘 용기있는 자 편이라는 것. 고정우가 너무 괴로워 중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친다면 드라마 자체로도 성립이 안 될뿐더러, 악은 또 다른 악을 부른다고 누군가 진실을 바로 잡지 않으면 더 큰 불행이 올 것이다. 누구는 그랬다. 섣불리 행복만을 추구하지 말라고. 어차피 이 세상은 그리 행복한 곳이 아니다. 나의 행복만을 추구하다 내 이웃이 불행해질 수도 있다. 그 보단 힘들어도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훗날 덜 불행해질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른다. 또한 행복을 위해서는 아니지만 희망을 위해서는 걸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작품은 이것을 웅변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각색이나 연출은 거의 퍼펙트인데 원작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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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4-11-17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추리소설 마니아는 아니지만, 추리소설을 범죄소설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뜩이나 상상 이상의 범죄들이 뉴스에 나와서 세상이 흉흉한데, 범죄소설이라고 부르면 추리소설 입장에서는 시무룩할걸요.. ㅋㅋㅋㅋ

stella.K 2024-11-17 21:30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럴수도 있지. 근데 이건 내 말이 아니고 장강명 소설가가 했던 말이야.
그런 추세라네. 그러니까 무시할 수도 없겠더라구.
근데 너도 추리 별로구나? 근데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은 정말 재밌기는 해.
그맛에 보는 거겠지?

니르바나 2024-11-18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인, 피비린내 싫어하는 것은 니르바나와 스텔라님의 취향이 비슷한 편이네요.
퀴즈를 풀듯이 사건을 추리하는 드라마,
이를테면 아주 오래 전에 형사콜롬보 시리즈는 재미있게 보았는데
범죄 과정을 필요이상 길게 묘사하는 영화나 소설은 별로입니다.
뭐~ 다 개인 취향이지요.

stella.K 2024-11-18 11:49   좋아요 1 | URL
ㅎㅎ 형사 콜롬보! 진짜 옛날 영화죠? 그리고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극장인가 그런 시리즈물도 했던 거 같아요. 전 그때 넘 어려서 제목만 알고 있었죠. ㅋ

참, 어제 실황음악인가? 거기서 말러 교향곡 5번을 틀어주더군요. 앞서 베토벤 5번은 좋았는데 역시 전 좀...ㅎ 무슨 영화나 연극 중간 배경음악으로 쓰면 좋겠다 싶기도 하더군요.

yamoo 2024-11-19 1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은 그닥 좋아하지 않고 첮아 읽지도 않아요. 오직 첩보소설을 좋아할 뿐이죠..^^;; 프레드릭 포사이쓰와 잭 히긴스, 로버트러들럼의 광팬..ㅎㅎ

stella.K 2024-11-19 15:28   좋아요 0 | URL
첩보소설은 좀 잔인한 게 없죠? 주로 두뇌 싸움 아닌가요?
저도 책은 잘 안 보는데 드라마가 사람을 들었다 놨다하는 게 있어요.
잔인한데 또 나름 멋있거든요. 그게 문제인 것 같긴합니다.
걍 가끔 보는 걸로. ㅎㅎ

물감 2024-11-20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게 그런 내용이었군요. 원작을 읽진 않았지만 워낙 유명해서 작가이름과 작품은 알고 있었는데, 이 작가는 이상하게 손이 안가더라고요. 저는 장르소설 좋아합니다만 확실히 세월이 갈수록 멀리하게 됩니다. 딱히 그런 장르가 싫다기보다 슴슴한 맛(?)의 문학들이 좋아졌달까요? 과자도 늘 달다구리만 찾다가 뻥튀기 같은 게 좋아지듯이요 ㅋㅋㅋㅋ

stella.K 2024-11-20 11:23   좋아요 1 | URL
저도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장르소설 원래 안 좋아하는데다가 표지가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었죠. 리커버로 나오니까 그나마 관심은 가는데 저는 책 보다는 드라마를 더 추천합니다. 모르긴 해도 원작 보다 각색이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근데 과자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달달한 과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성격이 스윗하고 짭짤한 과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한 성격이란 결과가 나왔다더군요. 그렇다면 뻥튀기는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어디에도 잘 어울리는... ㅋㅋ

고양이라디오 2024-11-20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차> 감독이면 기대가 되네요ㅎ

저 지금까지 stella.k님 남자 분인줄 알았어요ㅎㅎㅎ... cyrus님하고 말씀편하게 하시는 거보고 남자 분으로 착각했다는. 근데 cyrus님 남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것도 착각일려나요ㅎ;;

stella.K 2024-11-20 15:57   좋아요 1 | URL
ㅎㅎㅎ 댓글 생활 20년만에 저를 남자로 착각하시는 분은 고라님이 처음이어요. 고맙습니다. 착각해 주셔서. ㅋㅋ 사이러스는 남자가 맞고요, 오래 전부터 누나 동생하기로한 사이예요.^^

레삭매냐 2024-11-25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 드라마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화제가 된 원작인가 봅니다 :>

제가 드라마도 책도 보지 않은지라...

사회 곳곳에서 진실과 정의가 무너
져 내리니 더 암울해지는 그런 느낌
입니다.

stella.K 2024-11-25 19:35   좋아요 0 | URL
이 드라마 재밌습니다.
제법 묵직하구요.
요즘에 본의 아니게 범죄 스릴러물을 연달이 보고 있는데
재밌긴 하더군요. 대신 영혼은 좀 암울하긴 합니다.ㅋㅋ
책을 안 보실 리는 없을 것 같고 가끔 책 보다가 지치시면
이 드라마 함 보세요.^^

페크pek0501 2024-11-29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리소설을 한때 재밌게 봤었는데 읽어야 할 필독서가 많다고 느껴져 추리소설은 재밌으나 그다지 공부가 되지 않을 것 같아 멀리했어요. 이젠 생각이 달라졌어요. 추리력 상상력 창의력 향상에 좋다는 걸 알았거든요. 낯선 여행지에 가는 게 유익한 것처럼 낯선 내용의 책을 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네요. 두뇌에 자극을 주기 때문에 두뇌 발달에 좋다는 거죠. 드라마나 영화도 추리극일 때 더 흥미로운 것 같아요.

stella.K 2024-11-29 21:12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저는 연달아 이 작품하고, 김명민, 손현주가 나오는
<유어 아너>란 드라마를 봤다는 거 아닙니까?
지금은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보고 있는데 셋 다
범죄 스릴러물이거든요. 재미는 있는데 정신적으로는 피폐해지는 것
같아 다음엔 좀 코믹이나 휴먼 드라마 찾아서 보려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