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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사실 난 몇 년 전 동명의 작품을 영화로 봤다. 영화와 원작이 다를 수 있음에도 난 영화를 봤다는 이유만으로 원작을 볼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영화나 책이나 거기서 거기지 별 건가? 이 말은 영화가 별로였다는 말도 된다. 영화가 좋으면 책으로도 읽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와 책의 협업은 긴밀하다. 그런데 이 작품 책으로 안 읽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래도 내가 전에 작가의 작품을 즐겨 읽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이 책은 여전히 나에게 봉인된 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작가들이 한 번쯤 가족 소설을 쓰긴 한다. 그건 또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고전적 면서도 감성에 호소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천명관 작가 역시 이 작품을 통해 가족 소설을 썼는데 그의 주무기인 레트로한 감성과 그 특유의 익살과 입담이 잘 버무려져 역시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영화감독 일을 하던 인모가 영화를 실패하고 설상가상으로 아내도 자신을 떠나 꿀꿀하던 차에 자살이나 해 볼까 하다가 그것도 실패한다. 뭐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그때 엄마에게서 닭죽 먹으러 오라는 전화에 살 의욕은 없는데 식욕은 당겨 결국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말도 있으니 죽 한 그릇 먹고 죽자했다. 하지만 역시 그도 실패. 이번엔 아예 엄마 집에 눌러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가족 이야기다.
엄마 혼자 사는 집에 잠시 얹혀사는 게 뭐 문제가 되겠는가? 잠시 창피한 일이지. 문제는 그 비슷한 시기에 형 한모와 동생 미연이도 같이 살게 되었다는 게 문제지. 심지어 형 한모가 인모보다 먼저 들어와 있기도 했다. 그야말로 오 마이 갓이다. 둘의 관계가 좋으면 또 무엇이 문제겠는가? 어렸을 때 좋던 관계도 머리 크면 견원지간이 되던데 이 형제들 딱 그짝이다.
그의 동생 미연과도 오누이 지간이지만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더구나 비록 이혼은 했지만 미연이 중학생 딸까지 있다. 엄마까지 이들 다섯 식구의 나이를 합치면 족히 200살은 될 것이다. 그래서 제목을 그렇게 지은 걸까? 아니면 나이 들어 한 지붕에 살게 된 것을 조소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무튼 제목이 그렇다.
그런데 이상한 건 엄마가 그렇게 된 걸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늘그막에 자식 끼고 살게 되었다고 분통을 터뜨려도 아무 소리 못하는데 오히려 환영의 의미로 한 달 내내 고기를 먹인다. (영화도 그렇지만) 이들의 고기 먹는 모습은 꽤나 이기적이다. 문득 우리 집 옛 풍경과 왠지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이들처럼 한 달 내내 고기만 먹지는 않지만 먹기 위한 노력은 좀 치열했다. 물론 우리 4남매를 먹여 살리느라 부모님도 어지간히 힘드셨을게다. 그걸 생각하면 좀 먹는 것 앞에서 겸손하고 신사적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그게 잘 안 됐다. 무조건 먼저 먹고, 빼앗아 먹고, 훔쳐 먹는 게 집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다 엄마한테 뒈지게 혼나기도 했지만 먹는 거 앞에 본능적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쩌다 먹을 것을 여축해 놓고 나중에 먹는다? 그런 감짝한 생각은 있을 수도 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부모님은 이상했다. 딥다 해 먹일 때는 언제고 화가 나면 늬들은 쳐 먹는 것만 안다고 역정을 냈다. 어쩌라고? 그럼 먹을 걸 해 주질 말든가. 그래놓고 이런 우리들을 남에게 말할 땐 자라느라 한창 먹을 때라고 호호한다. 우리 부모님의 위선도 알아줄만했다. (물론 커서 자식이나 그 비슷한 존재를 키워보니 알겠다만.)
이런 집의 특징은 오사박하고 다정한 비둘기 집 같지는 않다. 그건 또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어렸을 때부터 서로 먹을 걸 두고 으르렁거리며 싸우며 자라고 서로 볼 꼴 안 볼 꼴, 있는 인간성 없는 인간성 다 보며 심지어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 훤히 보이는데 바라는 게 뭐가 있다고 그 앞에서 우애 있는 척 고상을 떤단 말인가. 그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철저한 보복과 응징만 있는 것 같다. 그런 집에 화목은 고물상에 팔아먹은 지 오래다.
그런데 이 가족이 좀 독특하긴 하다. 무엇보다 이 집엔 가부장이 빠져있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죽어 과거로만 기억될 뿐이다. 아버지가 없어도 이 집에 가부장이 이어지려면 남자의 보수성과 경제력이 있어야 하는데 한모와 인모는 경제력은 집에 들어올 때부터 바닥이었고, 그런데 비해 엄마와 미연 심지어 미연의 딸 민경까지 경제력 꽤나 행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또 그들이 그것을 발휘하면 할수록 한모와 인모 형제는 쪼잔한 인물이 된다.
엄마의 집에서 당장 할 일이 없는 인모는 집을 떠날 때도 하지 못했던 가족에 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우선 새롭게 안 사실은 미연이 20대부터 아는 언니와 함께 지낸다는 건 사실은 룸살롱에서 일하며 가족들을 부양했던 것으로 판명 났다. 하지만 이 사실을 가족들이 정말 모르고 살았을까? 그건 아니다. 단지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알면 뜯어말려야 하는데 그러기엔 대신 감당해야 할 짐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또한 이들 삼 남매의 출생의 비밀도 이때 밝혀지기도 한다. 삼 남매는 혈통이 같지가 않다. 즉 한모는 아버지가 바깥에서 낳은 자식이고, 그런데 비해 미연은 엄마가 남자를 방에 끌어들여(?) 낳은 자식이다. 오직 인모만이 정상적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이만하면 콩가루 집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버지와 엄마의 전적이 셈셈이다. 그러므로 서로를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가 이 모든 것을 모성이란 넓은 치마폭으로 감싸 안는다. 그래서 이들 삼 남매는 외풍은 있을지언정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랐다.
하지만 인모는 어머니가 제일 이해가 안 갔다. 그건 엄마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되니 엄마에 대한 불온한 기억들이 살아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중 가장 이해 못 할 건 시시때때로 물어보는 밥 먹었냐는 질문이다. 이해 못 하다못해 넌덜머리를 낸다. 엄마는 그 질문 밖에 못하는 걸까? 가방끈이 짧고 할 줄 아는 건 밥해 먹이는 재주밖에 없으니 그런가 싶기도 했을 것이다. 하긴 늬들이 모성을 알아?
하지만 엄마가 마냥 밥만 해 먹인건 아니다. 나중에 엄마는 누구와 살까를 고민하다 미연의 아버지와 합치기로 한다. 인모가 어렸다면 무조건 반대하며 반항했을지 모르지만 그럴 나이는 이미 한참 지났다. 좋고 말고 할 입장이 아니다. 물론 이건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한 것이지만 거기엔 엄마의 주도적인 선택이 더 많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엄마에게 이런 당당함이 있다니. 하지만 미연에 아버지 역시 죽은 아버지만큼이나 집에선 존재감이 없다. 그런 것을 보면 앞으로 가족 형태는 어떻게 변화될지 모르겠지만 전통적인 가부장이 아니라 모계를 중심으로 한 모성이 좌우할 수 있음을 이 작품은 예시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어머니의 "밥은 먹었니?"란 질문이 상징적이면서도 압축적으로 보여 주기도 한다. 초반에도 자살하려는 인모를 살린 건 하필 울린 엄마의 전화에 밥 먹었냐는 질문 아닌가. 그 질문은 그렇게 위대하다!
하긴 엄마들은 왜 하나같이 이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좀 다른 질문을 하면 안 되나 싶기도 하지만 이것만큼 모성을 드러내는 원형적인 질문이 또 있을까?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밥을 먹었는가 안 먹은 가로 인사를 하며 만남을 풀어 가려는 경향이 많다. 그도 알고 보면 어머니에게서 받은 영향이 아닐까.
어떤 이는 '언제 한 번 밥 먹자.'라는 공수표 날리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하는데 난 아직 이 인사가 좋다. 그런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헤어질 때 하는 인사 안녕계세요나 잘 지내란 말은 그냥 잘 지내기를 바라는 거지만 언제 밥 먹자는 말은 약속이 있는 인사로 밥 한 끼 정도는 내가 살 수도 또는 너의 외로울지도 모르는 식사에 함께해 주겠다는 말도 포함되어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인사를 할 수 있는 정도면 공수표를 날릴 리 없다.
아는 사람이 슬픈 일을 당하거나 안 좋은 일을 당하면 그럴수록 잘 먹고 든든히 있어야 한다고 다독이곤 한다. 물론 정신이 무너지면 육체도 무너지지만 육체를 먼저 돌보면 정신도 세움을 받기도 한다. 그 모든 것엔 엄마의 밥 먹었냐는 말을 듣고 자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소설 맨 끝에 인모가 이런 말을 한다. 헤밍웨이가 아기였을 때 완벽한 문장으로 처음 한 말은 '나는 버펄로 빌을 몰라요.'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또한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처음 했던 말은 '개가 불쌍해요.'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역시 비범한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며 자신은 무슨 말을 처음으로 했을까를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을 말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인모의 엄마는 그렇게 미연의 아버지와 살다가 홀연히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건 당연히 "맘마"였을 테니까.
그러자 작가의 의도를 알 것도 같았다. 이 작품은 모성에게 바치는 작가의 헌사였던 것이다. 집(가정)은 머물기 위한 곳이기도 하지만 떠나기 위한 곳이기도 하다. 엄마가 해 주는 맘마 먹고 힘을 내 둥지를 박차 오르는 새처럼 떠나는 곳이 집인 것이다. 맘마는 곧 엄마다. 거기에 가족들의 진실을 파헤치려고 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냥 함께 있어 온기를 서로 나눠 주면 또 알아서 자기 길 간다. 그 집에 엄마가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로인가.
그러니 성질 나쁜 가족이라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 비록 집에선 악다구니를 써도 필요할 때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게 가족이다. 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가정에서 소외되어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정에 할 일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가정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그 가정이 나를 지켜준다.
작가는 후기에서 이 작품은 아는 동료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착상이 되어 썼다고 한다. 역시 작가는 언제 어디서고 소설의 순간을 잡아내는구나 싶다. 그러니 작가는 얼마나 예리하고 예민한 족속인가. 작가의 수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