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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하녀 마리사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천명관 작가는 한 권도 읽지 않을 수는 있어도 한 권만 읽게 되지 않는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나의 삼촌 블루스 리'를 재밌게 읽어서 곧이어 이 책을 읽었다.
첫 번째 수록작인 '프랭크와 나'는 문학상 수상작이라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이 책에서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남편의 사촌 형이 랍스터 사업을 같이 하자며 그가 살고 있는 캐나다로 시찰을 하러 오라며 남편을 불러들이면서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그때부터 아내인 나의 불안은 시작된다. 남편은 착하고 좋기는 한데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경제력은 별로다. 또 그렇게 먼 곳으로 혼자 보내는 건 왠지 불안하고 미덥지가 않다. 한마디로 물가에 내놓은 아아 같다. (이런 사람 집에 한 사람쯤 있지 않나?)
어쨌든 남편은 물 건너에 있으니 매일 전화로 자신의 안부를 전해주지만 그 전하는 말들이 실로 범상치가 않다. 갱단을 만났다고도 하고, 갱단 두목이 자기 사촌 형과 이름이 같은 프랭크라고도 하며 그 두목이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자세히 말해주기도 한다.
또 그러다가 어떤 땐 연락이 두절되기도 한다. 그러니 아내인 내가 겪는 불안은 그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탄다. 더구나 남편을 캐나다로 보낼 때 없는 돈에 오빠에게 꾸기까지 했다. 연락이 두절됐으니 행방불명이면 대책이 없다. 피가 바짝바짝 마를 것이다. 물론 나중에 남편과 연락이 닿고 후에 무사히 귀국해 예전의 일상을 되찾는다.
나름 재밌고 작가 특유의 능청스러움과 스타일리시한 면이 느껴져 좋았다. 그러면서 (이국적이라기 보단) 무국적 느낌의 하루키 단편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이런 기시감은 이 작품에서만 느껴지는 건 아니다. 다른 작품에서도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천명관 작가가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게 지난 2천 년 초였으니 아무래도 하루키의 영향을 안 받았을 리 없다.
기왕 '무국적 느낌'이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한국 작가가 썼다고 해서 등장인물을 꼭 한국 이름을 쓰란 법도 없다. 프랭크('프랭크와 나') 토마스(유쾌한 하녀 마리사' '프랑스 혁명사-제인 웰시의 간절한 부탁'), 마리사(유쾌한 하녀 마리사') 등 외국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다못해 '더 멋진 인생을 위해-마티에게'는 미국식 이름이 대거 등장(?)하면서 작가의 주특기인 영화 그것도 마틴 스코세이지의 애정을 드러낸다. (근데 내용은 영화와는 별로 관련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일종의 맥거핀 같은 건가?)
그나마 국적을 알 수 있는 건 '프랑스 혁명사-제인 웰시의 간절한 부탁'과 앞서 언급한 '더 멋진 인생을 위해-마티에게 정도를 제외하면 짐작하기가 어렵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는 무슨 프랑스나 프라하의 어떤 여자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것을 보면 작가는 도도하리만치 글쓰기에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고,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란 말에 갇히지 않으려는 작가의 어떤 의지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어쨌든 상상력이 풍부하면서도 힘이 느껴진다.
게다가 '프랭크와 나', 표제작 '유쾌한 하녀 마리사', '비행기'의 공통점은 화자나 주인공이 여자다. 가끔 남성 작가가 여자를 또 반대로 여성 작가가 남자를 화자나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보곤 하는데 난 그게 좀 신기하다. 뭐 여러 등장인물의 한 사람으로 그릴 수는 있겠지만 보통의 자신감이 아니면 그렇게 쓸 수 있을까.
그런데 막상 읽어보면 쓸데없는 기우란 생각도 든다. 뭐 그러니까 작가겠지만 특히 중편 '비행기'는 50대 여성의 불안하고도 다채로운 심리를 잘 표현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기대하지 않고 읽다 빠져들었다.
또한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을 알아채고 남편에 대한 살의와 증오심을 화자의 하녀 마리사의 수다스러움과 유쾌함에 슬쩍 묻어버리는 '유쾌한 하녀 마리사' 역시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잘 쓰지 않는 고백체로 썼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건 '프랑스 혁명사- 제인 웰시의 간절한 부탁'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일화를 각색했는데 참신한 시도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난 작가들 너무 자기 창작에만 매몰되지 않았으면 한다. 가끔은 각색에도 도전해 봤으면 한다.
이 이야기는 그 유명한 토마스 칼라일과 존 스튜어트 밀에 관한 이야기다. 거 알지 않나? 토마스 칼라일이 '프랑스 혁명사'를 쓰고 어찌어찌해서 존 스튜어트 밀이 검수해 주기로 했는데 그만 하녀가 그 원고를 불쏘시개로 쓰는 바람에 일순간 재로 날려버렸다는 그 유명한 일화 말이다.
사실 이 일화는 여타의 설교가들이 즐겨 사용화는 예화이기도 하다. 즉 후에 토마스 칼라일은 그 원고를 다시 쓸 수밖에 없었고, 초고 때 보다 훨씬 잘 써서 세계적인 명저가 되었다는 훈훈한 미담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이 작품에서는 흥미롭게 살이 더 붙는다. 그리고 그 관점을 원고의 주인인 칼라일이 아닌 존의 관점이다. 즉 존이 볼 때 토마스의 원고는 형편없었다. (거기엔 토마스에 대한 시기심도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뭐 때문인지 자신도 바빠 죽겠는데 선배의 원고를 봐주겠다고 해서 그 원고를 집으로 가져온다. 물론 후회하면서. 일종의 공명심 같은 거였겠지. 그런데 하녀가 그런 실수를 한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녀의 잘못도 아니다. 왼쪽과 오른쪽을 잠시 착각해서 말한 존의 잘못이었다. 즉 왼쪽(?)의 것이 평소 불쏘시개용 종이 묶음이었는데 말을 잘못하는 바람이 그런 사단이 일어난 것이다.
처음엔 남의 원고를 날려 먹었으니 소스라치게 돌란다. 그런데 이내 뒤따라 오는 감정은 묘하게도 잘 됐다는 회심의 미소가 지어진다. 어쩔 것인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그렇지 않아도 자신도 원고를 불쏘시개용으로 쓰고 싶을 정도였는데 그걸 자신의 하녀가 대신해 줬으니 손 안 대고 코 푼 거 아니겠는가. 마침 자신의 집에 온 토마스는 존의 미소를 보고 내가 모르는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냐며 호기심을 드러낸다. 알면 경천동지할 일인데.
물론 그렇게 초고를 잃을 수밖에 없는 칼라일에겐 비극적인 일이지만 원고는 쓰면 쓸수록 더 좋은 글이 된다는 건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아무리 유명한 철학자라고는 하나 어디 초고만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만들려고 하는가. 그건 완전히 날로 먹겠다는 거지. 아무튼 재미있었다. 주변의 등장인물과 배경을 살려서 이야기가 훨씬 풍성하고 코믹하다.
'숟가락아, 구부러져라'라는 작품은 확실히 독자에게 작가가 386 세대라는 것을 새삼 각인시켜준 작품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찌 보면 386 세대라면 민주화 운동을 떠올리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유리 겔라를 아는지 모르는 가로 알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단순한 마술사가 아니었다. 초능력자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숟가락을 구부리는 신공을 펼칠 뿐만 아니라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도 따라 해 보라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정말로 구부러지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이 숟가락이 구부러진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기적이 늘 가능한 건 아니라는 것. 그 때문에 그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심지어 집을 나와 노숙자 신세가 된다. 또한 하나밖에 없는 딸에겐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숟가락을 구부린 기적을 잊지 못해한다.
왜 작가는 그때를 소환하는 걸까. 바로 그 386 세대가 오늘날 어떤 삶을 사는지를 작가 특유의 웃픈 현실로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386 세대는 대단했지. 하지만 세월 흘러가면 그냥 추억을 먹고 사는 평범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마침 이 소설을 읽은 즈음 한 TV 프로에서 유리 겔라의 근황을 전하는 방송을 봤다. 역시 한번 초능력자는 영원한 초능력자인가 보다.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그에 대해 열광할 즈음이 미국이나 유럽 같은 데서는 그를 좋게 말해서 쇼맨 정도로 보고 외면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다 운 좋게도 우리나라를 만난 거지. 지금도 자신의 SNS를 통해 다소 황당한 주장을 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대통령 선거 때면 후보로 나와 황당한 공약을 펼쳤던 누가 생각나기도 했다.)
우린 그때 유리 겔라에 열광했지만 그보다 앞서 프로 레슬링이나 프로 권투에 열광하기도 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린 그렇게 열광할 어떤 존재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나의 삼촌 브루스 리'에서 작가는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소설 자체가 아니라 소설을 쓰는 시간들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작품은 무슨 대단한 의미보단 정말 이야기의 재미 그 자체에 많은 공력을 들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시도를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 게 보인다. (물론 모든 작품이 다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다. 몇몇 작품은 그저 그런 범작도 있었다. 그런 걸 보면 작가는 장편에 특화된 작가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작품 속에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그건 일종의 작가의 트레이드마크 같기도 하다.
나에게 있어서 천명관 작가의 발견은 좀 늦긴 했다. 그래서 이제 와 이런 얘기 하는 건 좀 어색하긴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작품을 내줬으면 좋겠다. 나에겐 어떤 신통력이 있는지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알아볼 때쯤에 문을 닫던가, 멀리 떠나던가 그러더라. 이 작가에게만큼은 나의 그런 신통력이 안 통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