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흐리고, 비
오랫동안 가물다 비가 내려서 좋긴한데 대신 꽃잎이 많이 떨어졌다.
비만 오면 좋을텐데 바람이 부니 봄꽃들로서는 좀 억울할 것이다.
1. 안 좋은 일이 있었다.
미주알 고주알 쓰진 않겠지만 하도 마음이 상해서 잠도 못자고 한동안 좀 부글댔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안정이 됐고, 점점 나아질 것이다.
1-1. 그런 일이 있기 전 한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난 한 지인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지금까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안 당해 본 일이 없는데 그때마다 사람이 바닥을 치면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위로삼아 얘기하던데 그거 다 뻥이라고 했다. 올라가긴 뭘 올라가냐고. 올라 간다고 나아질 것도 없다고. 단지 바닥에 내려 앉았을 때 처음보단 좀 단단해져서 덜 놀라고 당황하지 않는다는 정도라고.과연 그 말이 맞겠다 싶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지 일주일쯤 지나서 그 일을 당했고 또 일주일이 지나서 새로운 일로 마음을 확 긁히고 말았다.
1-2. 나는 정중동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떠한 것에도 흔들림이 없는 사람. 그도 그럴 것이 그 두 가지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다 과거에 경험해 봤거나 연장선상에 있던 일이다. 그러나 난 그런 사람은 결코 되지 못할 거라는 걸 안다. 대신 이런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욕쟁이 여사. 그러다 나중엔 욕쟁이 할머니가 되겠지.
뭐 그런다고 해서 정말 욕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뭐든 마음에 쌓아두지 않고 사안에 대해 그냥 명중시켜 버리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정중동의 사람이 되고 싶다고 가만히 있으면 정말 가마니로 보겠더라. 그래서 그 사람을 앞으로 다시 만날 것 같지는 않아 이메일로 당신이 지금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낱낱이 까발려줬다. 그랬더니 속이 좀 후련해졌다. 까짓 거, 내가 앞으로 세상을 얼마나 더 살겠다고 할 말도 못하고 산단 말인가. 하도 하고 나오는 행색이 우습고 구려서 (아니 구린 것도 아니다. 이건 완전 저능이다.) 한마디로 까줬다. ㅎㅎㅎ
하지만 그렇다고 잠을 잘 잤던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잠은 못 잤는데 그래도 할 말은 해줬다는 것에서 뭔가 차오르는 쾌감은 있었다. 무엇보다 다시 만날 것도 아닌데 할 말도 못하고 안 만나는 거 보다, 할 말은 하고 안 만나는 것이 낫지 않나?
그러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난 단순히 욕쟁이가 되려는 게 아니라 싸움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걸 알았다. 상대의 급소를 정확히 알아 명중시키는 사람.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지난 날을 회상하며 그때 내가 좀 참고 있을 걸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 후회한 적도 있는데 과거는 과거고, 난 평화주의자는 못 될 것 같다. 평화주의자가 되려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허허거려야 하는데 글쎄 막상 상황에 돌입하면 그게 안 된다. 아직도 덜 여물어서일까? 아직은 싸우는 쪽을 택하고 싶다. 물론 항상 싸우겠다는 건 아니고 적어도 싸워야 할 때는 싸우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해야하는 일은 어설프게 사랑하고 평화하는 일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일하고 최선을 다해 싸우는 일인거 같다. 사랑과 평화는 진심일 때만 하는 것이여야 하는 것 같다.
1-3. 내가 그렇게 아파서 끙끙거리는 동안 나를 위로해 줬던 것들이 있었다.
사실 안 좋은 일을 당할 땐 뭐가 눈에 들어오겠냐만, 특히 책에 눈을 박고 있기는 쉽지가 않은데 나는 요즘 저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 잡고 있는 중이다.
정말 괜찮은 책이다. 특히 저자의 논조가 뭐랄까, 이 저자야말로 진정한 욕쟁이 할아버지인 것 같다. (실제로 도수 낮은 욕이 등장하기도 한다) 냉소적이면서도 거침이 없고, 정확한 곳을 긁어주거나 냉정하게 찔러준다. 한마디로 직설화법의 달인. 정말 아껴 읽고 싶은 책인데 이 책의 큰 장점은 그렇다고 정말 아껴 읽으면 언제 다 읽을지 모를 정도로 두껍다는 것과 저자가 인세를 포기하는 바람에 말도 안 되게 가격에 사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이건 책 읽는 사람에겐 실로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재벌집 막내아들>은 솔직히 요며칠은 거의 모든 것을 작파하다시피(? 그래봐야 특별히 하는 일도 없다. ㅎ) 하고 보고 있는 중인데 정말 재미있다. 이 드라마는 한마디로 다윗과 골리앗 구조인데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늘 다윗 즉 송중기가 이긴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드라마는 송중기가 아닌 이성민의 드라마란 생각이 든다. 이성민이 진양철 역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난 솔직히 이성민을 보기 위해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나도 나이를 먹었다 싶다. 송중기가 안 보이고 늙은 진양철이 보이다니.ㅠ)
아, 그러고 보니 영화도 나름 꽤 챙겨봤는데 여기선 생략한다.
아무튼 속상할 때 마음에 드는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보는 건 영혼의 스프를 먹는 것과 같다.
하지만 속 아플 때 이런 걸로 위로 받기 보단 루틴을 유지하는 게 오히려 더 빠른 회복의 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