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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6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평점 :
이 책을 세 번째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초등학교 때였다. 당연 어린이 세계명작 뭐 그런 정말 아이들 눈높이에 맞혀 나온 것을 읽었고, 두 번째는 성인이 되어서였다. 근데 이상하지. 성인이 되어 읽으면 더 의미 깊게 읽을 것 같은데 어릴 때 읽었을 때 보다 별 감동 없이 읽었던 것 같다. 그때는 또 소설이 시큰둥해져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지금 다시 읽고 나니 '역시 톨스토이!' 속으로 탄성을 지르며 읽었다. 그리고 자꾸 어린 시절 이 작품을 읽었던 때가 생각났다.
비록 어린이 세계 명작이라고 하지만 읽는데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었던 걸 보면 출판사가 나름 편집을 잘한 것 같기도 하다. 더구나 그 시절은 내가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하고, 동시에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때이기도 해서 더 의미 깊게 읽지 않았나 생각한다. 카튜샤와 네흘류도프의 사랑도 두근거리기도 했지만, 뭔지는 모르겠지만 웅숭깊은 톨스토이의 문장이 인상 깊어 계속 따라 읽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모름지기 작가는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하는 일종의 문학의 전범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이후 난 이러저러한 변화를 겪으며 요 모양 요 꼴이 됐지만, 그래도 그 시절은 정말 타락하기 전의 카튜샤처럼 순수했던 것 같다.
(그때 톨스토이를 계속 파기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괜찮은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는데...ㅠ)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읽은 '부활'은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인정해야 하는 건 톨스토이의 사고는 정말 방대하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철학과 법학, 신학의 바탕 위에 고통받는 민중과 귀족들의 이야기를 그야말로 산성처럼 쌓아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나의 일천한 사고가 그것을 다 쫓아갈 수 없음이 아쉬웠다. 하지만 전반적인 느낌은 뭔가 머리가 쨍하고 차가워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런 독서는 실로 얼마만인가, 내가 톨스토이를 너무 잊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부끄럽게도 난 장편은 '부활' 밖엔 읽지 못했고, 몇 편의 단편을 읽은 게 전부다. 그의 주요 작품은 손도 못 댔다. 뭐 할 말은 없지만 점점 고전에 대한 진입장벽이 만만치 않고, 새로운 책은 항상 정신 못 차리게 나오고 있으니 늘 순위에서 밀린다.)
기억이란 놈은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을 다시 펼 쳐들자 예전에 읽었던 이미지들이 하나하나씩 떠올랐다. 특별히 카튜샤의 약간의 사시. 그동안은 가끔씩 머릿속에만 빙빙 돌더니 읽기도 전에 그녀에 대한 인물묘사가 떠오른다. 그리고 자주 눈에 뜨였던 몇 개의 단어들도.
어렸을 땐 다른 건 관심이 없었고 오직 카튜샤와 네흘류도프가 사랑을 이룰 것인가 말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지금은 로맨스나 멜로엔 별관심이 없지만, 그 시절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여자 아이가 그것에 관심이 없다면 다른 무엇에 관심을 두겠는가. 결국 카튜샤와 네흘류도프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꽤나 아쉬웠다. 카튜샤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함께 유형지까지 동행했는데 그쯤 되면 아름다운 엔딩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세상은 반드시 노력한 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세드엔딩이나 열린 결말도 있다는 걸 한참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난 그런 결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 영화나 소설을 접하면서 세드엔딩이나 열린 결말이 해피엔딩 보다 사람의 뇌리에 더 오래 남는다는 걸 알았다.
만일 이 작품을 해피엔딩으로 했으면 이렇게 삼독까지 할 생각을 못했을 것 같다. 이건 확실하다. 무엇보다 내가 이 작품을 보는 눈이 예전과 달라졌다. 물론 이미 결말을 알고 읽기 시작한 것도 있지만, 네흘류도프의 모든 선한 노력으로 카튜샤와 사랑을 이룬다면 결국 그가 한 여자를 구원했다는 얘긴데, 그러면 이 이야기는 한낱 그렇고 그런 가부장 소설이 되었을 것이고, 톨스토이도 반페미니스트까지는 아니겠지만 한낱 보통 작가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그것도 남자가 여자를? (물론 난 여자가 남자를 구원하는 얘기도 좋아하지 않지만) 그럴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착각이고 허세일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남자는 한 여자를 정복했다는 생각으로 바뀔 것이다. 내가 너를 그 모든 불행에서 구원했어. 하며 상대를 자기에게 굴종시키려 하지 않을까. 경제적 환경적 구원은 진짜 구원이 아니다. 그러면서 사랑과 구원을 결혼에 결부시키면 이야기는 최악이 된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고 또 하나의 시작이다. 어린 시절 읽는 동화마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해피엔딩은 얼마나 가식적이고 무책임한 결말인가.
만일 이 이야기도 둘이 결혼했다면 어쩔 뻔했을까. 네흘류도프 자신이 지은 죄가 있으니 처음엔 무한 인내하겠지. 카튜샤는 카튜샤대로 처음엔 고맙고 행복해 하지만 끊임없이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려 들지 않을까. 그러다 서로 지치고 불행해지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한 결말을 상상할 수가 없다. 오히려 둘이 사랑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더 풍성해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특별히 톨스토이는 카튜샤를 당대 그저 그런 여자로 그리지 않고 결말에 도달할수록 꽤 실존적인 인물로 그렸다. 열악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자기 스스로를 선택하는 인물로. 물론 그 배후엔 네흘류도프가 있어 가능했다. 카튜샤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면 그렇게 받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 사람 없이 못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구원이라고 하지 않는가. 또한 네흘류도프에 대한 용서도 가능했다.
그도 그렇지만 역시 이 작품은 네흘류도프의 의식의 변화를 쫓아가는데 방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절 결혼하지 않은 도련님(귀족 남자)이 하급 여자를 취해 욕망을 채우고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는 건 어디에도 없다. 사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다. 물론 그래서 있을 수 있는 이야기 소설이겠지만. 솔직히 계급을 떠나 사랑했던 사람을 그것도 까맣게 잊고 있다 우연히 10년 만에 법정에서 만났다. 그런데 상대가 부조리한 상황에 놓여있다. 내가 네흘류도프라면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을까? 처음엔 일말의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몇 번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름 무죄 박면을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곧 한계를 느끼고 어느 때가 되면 스스로를 놔버리지 않을까. 그래. 난 할 만큼 했어. 그리고 한동안 괴로워하다가 이내 동정하다 차츰 멀어지겠지. 가진 건 돈 뿐이니 상대가 유배지로 떠날 때 넉넉한 돈을 쥐어줄 수도 있다. 그리고 곧 미련 없이 잊겠지. 그녀와 난 처음부터 안 맞는 상대였어하며.
사랑은 확실히 미친 짓이라고 하지만 네흘류도프는 정말 미쳤다.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특별히 물려받은 땅을 농노들에게 나눠주고 카투샤와 동행하지 않는가. 책에서 거듭 반복해서 네흘류도프의 말은, 카투샤는 아무런 죄 없이 누명을 썼고 나는 그녀의 누명을 벗겨주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라. 충분히 네흘류도프의 입장을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하나 같이 정당히 하라는 식이다.
사실 사람들의 그런 반응은 그도 어느 정도 짐작했을 것이다. 소설에서의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점잖은 편인데 그건 아무래도 톨스토이의 개인적 취향을 반영한 것도 같다. 실제로는 더 현실적이고 가혹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건 어떤 사람에겐 근간을 흔들어 놓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듣는 데에서만 머무는 경우도 많다. 작품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 무서운 변화는 그가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 남들을 믿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그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들을 믿기 시작한 것은 자기를 믿고 사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으면서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안이한 기쁨을 찾는 동물적 자아를 언제나 거슬러야 했다. 남들을 믿으면서 살면 해결해야 할 문제란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모든 게 이미 다 해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언제나 정신적 자아를 거스르고 동물적 자아를 위한 방향으로 해결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을 믿으면서 살면 항상 사람들의 비난이 따랐으나, 남들을 믿으면서 살면 사람들의 칭찬이 따랐다. (1권, 80~81p)
바로 여기서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잠자고 있는 양심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지는 대로 살면 편하긴 하겠지만 대신 진정한 자유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일생에 한 번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대로 살아 볼 필요가 있다. 그걸 외면하면 자기 생의 마지막날에 후회할 것 같다. 물론 그렇게 했을 때 적지 않은 파장과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훗날 후회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네흘류도프는 그 내면의 소리를 기꺼이 들었고 실행했다. 그것도 다른 것도 아닌 사랑을 위하여. 그나마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우린 네흘류도프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그것의 결과가 아니라 행동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톨스토이의 페르소나다.
톨스토이가 독실한 신자지만 원래 그렇게 독실했던 건 아니었다. 그도 50세까지는 방탕한 삶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다 훗날 회심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었는데 그래서일까, 네흘류도프에게서 톨스토이의 그림자가 느껴지기도 하고, 잠깐 등장하다 사라지는 인물 속에서도 역시 그가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그는 그다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지 않은 것도 이 작품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가 무슨 작품을 쓰고 저작권을 포기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아내는 거의 죽을 듯이 난리를 쳤다고 한다. 작가가 저작권을 포기한다는 게 그렇게 경을 칠 일인 줄 몰랐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서 작가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작금에 들어서 우리나라 드라마와 영화는 자꾸 교회와 교인을 희화화하고 있다. 급기야 최근 대박을 터트린 한 드라마에서 이점을 지적하며 우려하는 목소리를 낸 것으로 알고 있다. 서양 고전은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거의 대부분이다. 즉 다시 말하면 그 고전을 썼던 작가들은 끊임없이 신 즉 하나님과 인간의 이해와 화해를 모색했다. 어차피 신의 관점에서 인간은 타락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인간의 이야기 속에서 이것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타락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신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니까. 나는 소설가를 비롯해 이야기를 다루는 모든 스토리텔러들이 이것을 다시 한번 직시해 주길 바란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작품 속에 교회를 회화화하든 진지하게 표현하든 했으면 한다. 톨스토이 같이 오래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 속에 구원이 무엇인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작품을 썼다. 오늘날의 스토리텔러들에게 과연 그런 진지한 고민이 있기나 한 걸까?
...... 인간은 인간이 교정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은 무익하고 해롭고 비도덕적이며 잔혹한 짓을 멈추는 짓이다. 당신들은 지난 수 세기 동안 당신들이 범죄자라고 규정한 사람들을 처벌해 왔다. 그래서 범죄자들은 사라졌는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형벌 때문에 더욱 타락한 범죄자들의 수가, 또 인간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판사, 검사, 예심판사, 간수라는 범죄자들의 수가 불어났을 뿐이다.' 네흘류도프는 그럼에도 사회와 질서가 그나마 유지되는 것은 인간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합법적 범죄자들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부패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서로 동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권, 335p)
이것은 톨스토이의 도전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어떠한 작품에도 구원과 사랑을 말하고자 했던 그. 그의 고민이 어떠했을지 우리는 다 알 수가 없다. 단지 조금이라도 알고자 원한다면 그의 작품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 가지 부언하자면, 톨스토이의 작가 연보를 보면서 그가 부모를 모두 이른 나이에 여의였다는 것이다. 흔히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비교하기 좋아하는데 그중 하나가, 그들을 부자와 가난한 자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자인 톨스토이 보다는 가난한 도스토예프스키가 더 서민적이고 자기와 맞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부모가 없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가난했지만 부모가 성인이 된 후에도 생존했던 것으로 안다. 사람의 부재와 경제적인 가난. 어떤 것이 그 사람의 삶과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지, 나아가서 글 쓰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겠다. 요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그런 구분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 톨스토이는 톨스토이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도스토예프스키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