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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9
솔 벨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평점 :
이 책을 처음 발견하고 완독할 때까지 솔 벨로가 언제 이런 소설을 썼지? 좀 놀랐다. 더구나 작가 연보를 보니 결혼을 다섯 번이나 했다. 아니 결혼은 언제 또 이렇게 많이했을까? 더 놀랐다. (최근 안 건데 일론 머스크도 그 비슷한 결혼 이력이 있더라.) 그럼 뭐야? 무슨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산 것은 이미 그전에 세상 재미 볼 거 다 보고 들어갔던 거임?
그러다 한참 있다 비로소 현타가 왔다. 아니나 다를까. 난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완전 착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소로를 솔 벨로와 완전 겹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착각을 해도 그렇지 남의 이름과 성을 교묘하게 섞어서 착각을 하다니 나이 들면 책도 못 읽겠구나 싶다. OTL
이 이야기를 한마디로 뭐라고 해야 할까? 하는 일마다 안 되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옛 속담에도 재수 없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데, 주인공 윌헬름이 그런 사람이다. 이 남자가 얼마나 재수가 없냐면, 부모와 형제들이 다 학벌이 좋은데 자신만 변변치 않다.
그나마 20대 때 배우가 돼볼까 했는데 그도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두어 곳 직장을 다녔지만 상사와 대판 싸우고 홧김에 사표를 던지고 나와버렸다. 그뿐인가? 결혼도 했는데 행복하지 못하다. 별거하고 있는데 그런 중 애인이 생겨 정식으로 이혼하고 새 출발을 하려고 하지만 아내가 이를 알고 이혼을 해 주지 않는다.
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아내도 똑같이 법으로 대응하면서 그 비용을 윌헬름에게 청구한다. 게다가 아내가 아이들을 데려갔기 때문에 만나지도 못한다. 아버지에게 빌붙어 보지만 역시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살기는 그리 나쁘지 않은지 아버지와 함께 같은 호텔에서 산다. 물론 방 호수는 다르게 하여.
사실 난 오래전부터 궁금했는데 호텔을 제집 삼아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살면 그렇게 살 수 있는지. 물론 호텔마다 급수가 있겠지만 어쨌든 하루 숙박료도 싸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무슨 짓을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게 남의 나라 얘기는 아니더라. 우리나라에 무슨 랩 가수가 돈을 얼마나 많이 벌던지 우리나라 5성급 호텔 그것도 펜트하우스에서 사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호텔족이 있었다. 물론 훗날 이사을 하던데 또 모르지 다시 호텔로 복귀했는지.
아무튼 그런 사람이 행복을 모르고 끊임없이 자신의 불행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그게 참 낯설지가 않다. 이 책이 지난 세기에 씌여졌는데 요즘에도 도처에 이런 사람은 깔려있고,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을 아직 못 만났다면 자신이 혹시 그런 사람은 아닌가 의심해도 좋을 만큼 흔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나라일수록 많다.
부모 자식의 관계도 그다지 좋지 않다. 자식은 부모에게 왜 나를 도와주지 않나 늘 섭섭해한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을 투자의 대상으로 보고 투자한 만큼 성과가 없으면 그도 눈밖에 나는 건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렇게 아버지 아들러 박사는 윌헬름을 거의 내놓은 자식처럼 취급한다. 하긴 새도 새끼가 시원치 않으면 둥지 밖으로 밀어내지 않던가.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렇게 약한 새끼까지 힘들게 키울 여력이 없다. 인간의 세계나 자연의 세계나 적자생존이고 비정하다.
윌헬름 주위엔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없는데 탬킨이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그 주위를 맴돈다. 그는 일명 박사로도 통한다. 무슨 박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식 분야에서는 해박한가 보다. 솔직히 아이러니한 건, 믿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말은 그럴듯하게 한다는 것이다. 탬킨이 이런 말을 한다.
...... 우리에게 과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미래는 근심 걱정만 가득하고, 진짜는 현재뿐이야. '지금 여기뿐이라고. 오늘을 잡아야지."
79쪽
바로 여기서 책 제목을 정했겠다. 하지만 오늘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솔 벨로는 지금 여기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날카롭게 포착하려한다. 윌헬름처럼 대부분 부족함이 없이 살아온 사람들, 그것도 자신의 노력이 아닌 부모가 만들어 준 온실속의 화초처럼 성장해 온 사람일수록 무엇이 지금, 여기의 삶인지를 잘 모를 경우가 많다. 그나마 부모의 세대는 가족과 함께 잘 살아야겠다는 꿈이라도 있지, 그렇게 호의호식하며 잘 살게 된 자식들은 꿈도 투지도, 쏟아부을 열정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왜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역으로 윌헬름의 저 넋두리가 현실에서 다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과연 그는 만족하고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는 동물이니까. 또 어디선가 새로운 불만족을 찾아내고, 불평하며 누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주문처럼 푸념하겠지.
그런데 탬킨이 한 저 말 자체는 뼈를 때릴만하지만 받아들이기 때라선 그냥 현재를 (말초적으로) 즐기라고만 하는 것도 같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엄밀히 말해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므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더구나 윌헴름이 평소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듣고 넘기지 않을 텐데 시종 시큰둥하다. 게다가 말미에 가서는 탬킨이 어떻게 된 일이지 모르겠지만, 죽는다. 허무하게. 그러다 보니 이야기도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사실 '지금 여기'의 삶은 실존주의 철학이나 상담학에서 많이 다루는 사상이다. 외부적인 여건이나 어떠한 존재가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끊임없이 알기를 힘써야 한다. 삶의 의미를, 왜 살아야 하는지를,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끝이 비록 죽음으로 끝날지라도 말이다.
윌헬름의 나이가 40대 초반으로 나오던데 그 나이면 불혹이 아니던가. 무엇을 새롭게 하기에 적절한 나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젊음을 자랑할 나이가 아니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나이다. 살아온 날들 보다 살아갈 날이 아직 조금 더 남아있지만 그것을 더 이상 자랑할 수도 없는 나이다. 삶과 죽음이 비등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죽음이 삶을 추월하는 때를 맞이하게 되겠지.
비록 소설은 탬킨의 죽음을 보고 윌헬름이 이후에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는 보여주지 않고 있지만 좀 이제와는 다른 삶을 살길 바랄 뿐이다.
소설은 꼭 4, 50년대 저예산으로 만든 미국 영화를 보는 것도 같다. 뭐 그렇지 않아도 이 작품은 1956년도에 발표된 작품이다. 소설가를 규정하는 여러 말들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너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자꾸 수시로 새처럼 짹짹거려 주고 의식을 쪼아주는 것에 있다고도 했던 말을 기억한다. 솔 벨로는 그 일을 세련되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미국적으로.
사실 삶을 생각한다는 건 아주 피곤한 일이긴 하다. 나는 삶을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걱정이 너무 많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삶의 힘을 빼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욕망하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훗날 후회가 남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오늘을 잡는 것이 아니라 밀도 있게 살아야하지 않을까.
참고로 난 요즘 이 '밀도'라는 단어에 꽂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