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눈물을 자아내는 영화일 것이 분명해 보이니까.
그런데 이 영화는 의외성이 강했다. 우선 생각보다 최루성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고, 스토리는 그다지 새로워 보이진 않는데 담백하다. 새로워 보이지 않는 대신 과연 이런 엄마가 있을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이를테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남아선호 사상에 남아 있지 않은가. 더구나 배경이 전라도 깡촌이다. 그렇다면 그 보수적 경향 때문에 여느 엄마라면 아들을 더 끔찍이 여겼을 법한데 영화는 반대로 딸을 더 끔찍이 여긴다. 내 새끼. 내 새끼 하며 불면 날아갈까 그런 애지중지가 없다.
나름에 이유는 있다.
엄마가 이 영화의 화자인 지숙을 낳기 전 얼굴도 모르는 언니를 낳았지만 얼마 안 있어 죽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자신이 태어났는데 엄마가 거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퍼붓는 것이다. 그런데 비해 지숙의 남동생은 거의 학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구박을 한다. (아들이야 구박은 해도 그 기저엔 남아선호가 깔려 있으니 그러려니 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이만하면 엄마의 딸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돈지 짐작이 갈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서사를 따라가기보단 인물에 집중해 보는 것이 좋다. 엄마 역의 김혜숙 배우의 연기가 단연 압권이다. 워낙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라는 건 이미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 입증한 바 있으니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 영화에서 시골 깡촌의 촌부 역을 그야말로 찰떡 같이 소화해 낸다. 그녀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하다.
우리네 엄마들은 왜 그렇게 바리바리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시는 건지...
이 엄마의 딸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하냐면, 원래 종교가 천주교다. 신부에게 고백성사를 하는데 딸을 그렇게 지켜주고 싶다면 묵주나 십자가 목걸이라도 해 줄 일이지 자꾸 부적을 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죄라는 걸 아니 자꾸 고백성사를 하는 것이다. 신부는 그러면 안 된다고 단단히 충고하려 하지만 답답증에라도 걸린 걸까? "아, 신부님도 아를 낳아 보쇼. 내 맴을 알텐께. 아참, 신부는 결혼을 안 하니 아를 못 낳제. 그러니 나 마음을 알리 없지." (뭐 이 비슷한 대사를) 하며 속죄소를 박차고 나간다.
그만큼 딸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나 같으면 그런 사랑 줘도 안 받고 숨이 막힐 것 같은데 적당한 사랑만 준 울 엄마가 얼마나 고맙던지. 솔직히 요즘에 과연 이런 엄마가 있나 싶다. 할머니라면 가능할 것 같긴 하다.
어쨌든 지숙도 엄마가 자신을 사랑해주니 사랑은 길을 잃지 않는다고 못지않게 엄마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정말 나만이 하는 사랑이다. 그렇게 사랑하면 누구에게 말해도 부끄럽지 말아야 하는데 지숙은 촌스러운 엄마가 자기 엄마라는 걸 차마 남에게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 학부모 참관수업을 위해 나름 학교에 조신히 차려입고 온 엄마를 거의 쫓아 보내듯 돌려보낸다. 문득 이 지점에서 난 그 옛날 나의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학급 환경미화를 위해 물품을 준비해야 했는데 조그만 나의 몸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니 일단 나는 학교에 먼저 가고 엄마는 마침 집에 와 계신 외할머니를 시켜 그 물건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퀵을 시켰겠지. '학교에 누구를 보내겠다고? 외할머니를...?' 그건 안 될 말이었다. 내가 외할머니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누구한테 내보일 만큼 자랑스러워했던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는 나름 오랫동안 한복에 쪽진 머리를 하고 계셨다.
그때 외가가 부천에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곳은 꽤 시골이었다. 시골이야 나이 든 여성들이 한복에 쪽진 머리가 흔했으니 그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는데 문제는 할머니가 그다지 예쁜 스타일은 아니었다. 입도 크고, 코도 큰 그야말로 여장부 스타일이라 가끔 뵈면 어린 마음에도 놀라곤 했다. 물론 그건 할머니가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면 이내 가려지곤 했지만 그게 또 남의 눈도 가릴 만큼은 아니었으니 누가 할머니를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어린아이의 눈도 눈 아니겠는가.
할머니는 학교에 5분도 채 계시지 않았을 것이다. 물건만 담임 선생님께 바로 넘겨 드리고 가셨으니. 그런데 왜 내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지. 아마도 그때가 내가 위선을 처음으로 경험한 때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날 집에 돌아와 할머니한테 얼마나 미안했던지.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가 떠오르면서 영화 속 지숙의 마음이 너무 이해가 가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사랑하면 신도 시샘을 한다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자신의 사랑으로 딸이 승승장구하고, 시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해 토끼 같은 손녀도 낳아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싶을 때 하필 딸이 췌장암에 걸린다. 처음엔 아무런 이유 없이 혼자 친정에 온 딸이 그저 반가울 뿐이었는데 사랑하면 직감은 더 예민해지는 법이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는 것도 수상하지만 결정적인 건 딸이 욕실에 들어간 사위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건, 그 후 지숙의 투병과 이를 간호하는 엄마를 통해 모성을 보여주려 했다면 그렇고 그런 뻔한 드라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제 보면 다시 못 볼 엄마를 만나고 기차에서 헤어지고 바로 딸의 장례식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딸을 먼저 보낸 엄마의 절절한 슬픔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본지 하룬가 이틀 후에 이태원 압사 사고를 뉴스를 통해 접했다. 처음에 그 보도가 참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나름 치안이 잘 되어 있다고 하는 나라. 밤을 낮 삼아 돌아다녀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은 몇안 되는 (아마도 거의 유일할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160명 가까운 사망자가 났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차라리 세월호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물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사람이 다니는 좁은 골목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압사 사고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다소 못 살고 후진 국가라면 이해할 것도 같다. 이런 선진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뉴스는 건조하라만큼 사고 경위와 사상자를 보도하고 있는데 눈에선 알 수 없는 눈물이 자꾸 흘렀다. 내가 이 정돈데 하루아침에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는 어떤 마음일까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내가 이런 소식을 접하려고 그 영화를 봤던 걸까? 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2, 30대의 피해가 가장 컸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런 생각이 전혀 도움은 안 된다는 걸 알지만, 하나 아니면 둘 낳는 시대에 그들의 부모는 어떤 자식에게서 이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을까. 그 자식을 가슴에 묻기까지 또 얼마나 가슴 쓰리고 참혹한 시간을 보내야 할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영화는, 엄마가 딸의 장례식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엄마의 일상은 이미 예전의 일상과 같지 않다. 이제까지의 일상은 사랑으로 충만한 일상이었다면 앞으로의 일상은 하늘나라에 간 딸을 만나기 위한 부서진 일상을 사는 것이다. 영화는 저 세상으로 간 딸에게로 가기 위한 첫날을 세는 것에서 끝이 난다.
오늘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며칠에 해당하는 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