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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 상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무라카미 하루키란 작가를 좋아하는가란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다소 주춤하게 된다. 분명 관심있는 작가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난 분명 단편으로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지만 그의 장편을 보면 적나라한 섹스 묘사에 결국 질리고 만다. 적당히만 했었어도 그를 완벽히 좋아했을지 모를 일이다.
정말 오랫만에 그의 장편 소설을 완독했다. 완독을 해야한다면 <1Q84>여야한다. 오래 전, 세 권을 완비하고 2권 3분의 1까지 읽었던가 하곤 방치했다. 게다가 1권은 무려 두 번이나 읽었다. 다시 읽을 생각을 했다면 2권을 이어 읽으면 되는 것을 그래도 새로운 마음으로 도전하자 하곤 그렇게 되고만 것이다. 그리고는 '역시 하루키의 장편은 내겐 넘사벽이군.' 했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완독하다니. 이유라면 글쎄, <1Q84>는 세권이고, 이건 두권이라는 정도? 아무래도 <1Q84> 보단 빨리 읽을 것 아닌가.
읽지 말까를 고민했던 때가 딱 한 번 있긴 했는데 그건 역시 섹스 묘사였다. <1Q84>을 읽다 포기한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겨우 15살 밖에 안 된 다무라 카프카 군이 가출을 해서 어머니일지도 모르는, 또 누나일지도 모르는 사람과 섹스를 한다. 물론 이들의 존재는 끝내 밝혀지지는 않지만 하루키의 이런 설정은 오이디푸스 신화를 비틀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때 나는 언젠가 읽은 그의 인터뷰 내용을 생각했다. 자신은 성에 대해 보수적이지만 소통의 기재로 다루길 좋아한다고 했다. 나름 인정은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너무 다루니 흥미롭지는 않다. 차라리 그 부분을 빼거나 줄이고 다른 의미있는 것으로 채우면 좋을 텐데 좀 질린다 싶다. 옆에 있으면 알려주고 싶다. "저기요, 그런 거 독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게다가 오해 받을 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별 볼 일 없는 작가가 빨리 주목 받고 싶어 발광하는 걸로. 하지만 매해 노벨 문학상 후보에 지명되는 대가에게 이런 지적질이 가당치 않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읽는 것을 포기할까 했을 때 잠시 숨고르기를 할 겸 읽기를 중단하고 (끝까지 읽기의 동력을 삼으려고) 저 유명한 파리 리뷰지와의 인터뷰 내용을 다시 읽었다. (<작가란 무엇인가> 1권에 실렸다) 마침 <해변의 카프카>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그는 이제까지 쓴 작품중에 가장 어려운 작품이라고 했다. 역시 작품을 보는 눈이 작가와 독자가 다르구나 싶다. 독자인 내가 볼 때 하루키는 다소 지루할 수는 있어도 어려운 작품은 없다. 그것이 그의 장점이다. 물론 이 작품은 약간의 초현실을 다루고 있는데 그래서 어렵다고 했을까. 그렇다면 그는 상당히 겸손한 작가다. 그의 글 쓰기 스타일과 코드를 안다면 어려운 건 없다.
그는 소설을 쓸 때 큰 틀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그때 그때 생각나고 내키는대로 쓴다고도 했다. 어찌보면 그건 재즈를 닮았다. 하지만 우린 그가 재즈 스타일로 글을 쓴다고 하지 않고, 그 자신 즉 '하루키 스타일'로 쓴다고 한다. 그렇게 그에게 오리지널리티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한때 국내외 적잖은 작가들이 그의 글 쓰기를 흉내 내기도 했고 지금도 있는 줄로 안다. 예전엔 누가 누구를 따라하면 독창적이지 못하고 하수로 보는 시각도 없지만, 지금은 글쎄 오리지널리티를 인정 받은 마당에 굳이 하루키 스타일이라고 헐뜯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건 솔직히 독자인 나도 따라해 보고 싶기도 하다. 그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고,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 보지 않고 정말 그날 그날 마음내키는대로 글을 쓰고 싶다. 하다못해 하루키처럼 쓰겠다는 욕망도 내려놓고. 물론 그렇게 쓸 수 있는 게 하나가 있고, 우리는 이미 그렇게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건 일기다. 많은 사람들이 블로그를 사용하면서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일기로 돌아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블로그에 올리는 글은 어느 정도 각을 잡고 써야한다. 게다가 누군가를 흉 보거나 헐뜯는 말도 할 수가 없다. 물론 딱히 누구라고 하지 않고 익명으로 할 수도 있겠지만 이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일기는 그 모든 게 가능하다. 어차피 나밖엔 볼 사람이 없으니까 맞춤법이 틀리거나 말거나, 누구를 흉보거나 좋아하거나 아무렇게나 써도 자유롭다. 그만큼 글 쓰기에서 중요한 건 자유함 아닐까. (갑자기 생각난 건데, <1Q84>에서 편집자 덴고가 어떤 소녀의 원고를 보는데 난독증에라도 걸렸을까 문법은 엉망인데 그 속에 뭔가 있다고 하면서 버리질 못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하루키에 대해 글 참 쉽게 쓴다고 일갈할 수도 없다. 쉬운 게 사실은 더 어려운 법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작품도 쓰는데만도 6년인지 7년이 걸렸다고 한다. 헤밍웨이가 그랬다지. 작가의 모든 작품의 초고는 다 걸레라고. 하루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독자도 만만하게 보고 따라하고 싶은 어느 글도 쉽게 써진 글을 없다는 얘기다. 솔직히 하루키의 문장은 깊이가 느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굳이 표현하자면 겉절이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았던 건, 그는 자신이 읽은 책과 들어 온 음악만 가지고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다. 이 작품도 보라. 카프카는 물론이고, <겐지 모노가타리>도 나오고, <아라비안 나이트>나오고, 소세키도 나온다. 그뿐인가 <대공 트리오>도 나오고, 그의 독서팁도 슬쩍 흘리기도 한다. 이왕 <대공 트리오>가 나와서 말인데, 예전에 문학수 음악 전문 기자겸 평론가가 그런 말을 했다. 혹시 어떤 글에 음악으로 아는 척 하고 싶으면 절대로 흔히 알고 있는 작품을 가지고 쓰지 말라고. 그의 <1Q84>를 보라. 야나체크의 음악이 나온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야나체크가 누구지 하며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만일 거기에 우리가 잘 아는 베토벤의 <운명> 같은 걸 썼다고 하면 그건 정말 싸 보이는 거라고 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읽어 온 책이나 들어 온 음악은 그의 책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끊임없어 대담집이나 에세이 등으로 재생산 되고 있다. 그야말로 하루키 스타일을 넘어 월드,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고 그건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그때 그때 생각나는대로 자유롭게 쓴다는 점에서 빙산의 일각이란 법칙은 하루키에겐 예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즉 작가는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들과 생각들을 수면 아래로 숨기고 아주 조금만 보여준다고 해서 붙여진 법칙. 하지만 모르긴 해도 하루키는 그런 건 바보나 하는 일이라며 오히려 빙산의 일각조차도 다 보여주는 최초의 작가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처럼 화수분같이 왕성하게 써 대는지도 모른다.
물론 작가가 다섯 발자국쯤 앞서가서 독자들에게 "따라 올 테면 따라 와 봐."하며 뭔가 독자의 사고를 고양시키는 작가도 좋지만, 이렇게 뭔가 만만한 게 느껴져서 독자도 따라해 보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면 그게 더 좋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아예 글 잘 쓰는 작가가 있다면 독자는 그냥 우러러만 보면 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 어떤 작가도 그의 처음은 독자였고, 글 쓰기를 가르치기 보다 독자로 하여금 글 쓰기의 욕망을 자극하는 게 더 우위고 상수다. 그래서 하루키는 제자를 두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진짜 하려고 하는 말은 따로 있다. 그건 '작가는 무엇으로 증명되는가'다. 지금까지 작가는 작품으로 증명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일까. 난 거기에 의문을 재기한다. 어쩌면 작가는 작품으로 증명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작가가 죽었을 때나 가능하다. 작가가 죽어서도 그 작품이 회자되고, 독자가 기꺼이 읽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작가다. 그러나 작가는 살아 있을 때가 더 중요하다. 생각해 보라. 나는 하루키란 작가를 80년대 말, 90년 대 초에 듣기 시작했다. 그의 데뷔 년도가 1979년이니 우리나라에 알려지기는 내가 아는 것 보다 더 일찍일 수도 있겠다. 비슷한 무렵에 우리나라에 하루키 못지 않게 이름을 알린 작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작가 수명은 그리 길지 못하다. 기껏해야 20년? 그 기간 동안 뭐가 됐든 열심히 쓴다. 그렇게 문단계에 이름을 알린 작가들은 지금 어디론가 사라지고 가끔 떠올리면 뭐하고 사나 궁금해하다 만다. 그들은 어느 새 신진 작가들에게 문단계의 방석을 물려주고 어디가서 자신이 무슨 작품을 썼다며 추억팔이나 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정말 늙기도 전에 이미 노쇄해져 버린 것이다.
하루키는 마라톤으로 단련되어서일까 아직도 글을 쓰고 있다. 그렇다. 작가는 독자와 함께 나이들고 늙어갈 수 있어야 한다. 작가를 누가 기억해 주겠는가. 당대의 독자들이다. 그걸 작가들은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과거의 자신 속에 안주해버리는 것 같다. 지금 작품을 쓰고 있지 않다면 그는 작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의 2, 30대 독자들이 앞으로 기억할 사람은 8, 90년대 작가들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의 작가들만 기억할 것이다. 그나마 그들도 언제부턴가 새로운 작품을 쓰지 않는다면 선배 작가처럼 될 것이고, 그 소수의 독자들만 멈쳐버린 시간까지만 기억할 것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기억될 수는 있다. 그러나 증명되지는 않는다. 작가는 그 존재감으로 증명되어져야 한다. 내가 당신들과 함께 있다고 독자들에게 잊을만하면 한번씩 새 작품을 투척해 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키에게 커다란 동굴같은 도서관도 지어주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게 만들지 않는가. 우리나라에 사람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 과연 있던가. 김대중 도서관이 있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작가 이름을 딴 도서관이 있던가. 그러고 보니 이 책에 고무라 도서관을 소개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 작품 년도가 2006년인데 그로부터 15년 뒤에 그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 지어질 거라고 하루키는 예감했을까. 그에 비해 우린 뭔가? 원로중 최근까지 작품활동을 한 조정래나 황석영 작가를 위해 도서관을 짓는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 타계한 작가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박물관이나 생가 보존 정도는 하는 것 같다만. 이건 또 작가만의 문제는 아닌듯 히다. 뭔가 국가적으로 예우할 것이 있으면 해야하는데 (늘 우리 소시민이 하는 소리를 되풀이 한다. 정치인들 서로 싸움박질만 할 줄 알지 그런 것도 신경없다고) 한숨만 나온다. 혹 그런 시도가 있다고 해도 사상 검증이 안 됐다고 퇴짜를 놨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과북이 갈렸다는 건 얼마나 많은 발전을 저해시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재밌지? 그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19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두꺼운 장편을 읽었다고 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는 거의 읽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놓고 그는 이렇게 두서너 권씩이나 되는 장편을 잇달아 내놓기도 했다. 그나마 팔에 힘이 떨어졌는지 요즘엔 제법 얇은 책도 내더라. 아무튼 독자와 함께하는 작가가 좋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루키를 완전히 좋아하진 않지만 존경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데미안>은 몰라도 이 작품을 감히 청소년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차마 권하진 못할 것 같다. 읽을 것 같지도 않고. 지금은 20세기를 너머 21세기다. 그냥 15세 소년이 나오는 어른들을 위한 판다지 동화 같은 소설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난 그의 단편과 에세이는 좋아하는데 그것만이라도 부지런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