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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평점 :
나는 태어나기는 을지로 어디쯤에서 태어났지만(정확히는 집과 가까운 어느 산부인과 병원이었을 것이다) 워낙 어렸을 때라 태어난 집은 기억에 없고, 두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이사한 광희동 집이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집이다. 그 집에서 거의 9년을 살고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적잖이 기쁘고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 집에서 너무 오래 살까 봐 내심 걱정을 했었으니까. 하지만 새롭게 이사 간 집에서 산 세월을 생각하면 그 집은 그렇게 긴 세월도 아닐 테지만 확실히 9년이란 세월은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다.
내가 그 집에서 오래 살까 봐 걱정이었던 것은 집으로 보나 동네로 보나 별로 좋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리도 회색빛 그 자체인 것인지. 풀 한 포기 제대로 구경할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동네는 또 얼마나 후미지고 지저분한지. 한 때 집 앞 공터는 쓰레기 집하장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영아의 시제가 발견되기도 했다. 게다가 누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이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라고 했던가. 어느 집에서 싸움이 시작됐다 하면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구경하기 바빴다. 글쎄 그게 보기에 따라선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두고두고 생각하면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책에도 보면 어느 교양 있는 점잖은 중년 부부가 이사와 그대로 점잖게 살고 싶어 했지만 동네가 워낙 그렇지 않아 결국 악다구니를 쓸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구나 싶다.
그래도 우리 집이 나쁘지 않았던 건 옥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엄마가 그 집을 원했던 것도 바로 이 옥상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 4 남매는 한창 자랄 나이라 마구 뛰어놀 공간이 필요했다. 그 집은 마당이 작은 대신 옥상이 있었으니 뛰어노는데 이만한 장소도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빨래를 말리고, 간장을 달이기도 좋고.
어느 날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동네 아이들이 눈을 크게 굴리며 "야, 이 집은 옥상이 있어." "어, 정말? 좋겠다. 옥상도 있고." 그게 내 귀엔 나름 크게 들렸다. 뭐야, 그럼 쟤네들 집엔 옥상이 없단 말이야? 아이들은 우리 집에 옥상이 있는 것을 부러워했겠지만 난 그 아이들의 집에 옥상이 없다는 게 놀라웠다. 난 그때 우리 집에 대해 조금은 자부심을 가져도 되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집들은 하나같이 오래된 기와집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학교를 다니게 됐는데 어느 날 학교 가는 길에 당시론 현대식 이층 양옥집 두 채가 지어지는 걸 보면서 다녔다. 그게 어찌나 신기하고 부럽던지 도대체 누가 이런 집을 짓고 사는 걸까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를 했다. 학교와 친구들을 뒤로하고 떠나야 한다는 게 아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새로운 집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때는 70년 대 중반 지금의 강남의 옛 지명인 영동지구였다.(난 오래도록 이 의미를 몰랐는데 국회가 있는 영등포구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해서 실소했다.) 난 지금도 궁금하긴 하다. 왜 하필 부모님은 하고 많은 곳 중 그곳을 선택했을까. 그곳이 지금의 '강남 불패'라고 이름 지어진 곳이란 걸 아셨을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그전에 아버지와 엄마는 천호동을 알아보기도 했다고 들었다.
아무튼 우리가 이사한 곳은 정확히 논현동이었다. 이사할 집은 앞서 말했던 학교 가는 길에 보았던 이층 양옥과 비슷했다. 똑같은 건 아니지만 흡사했다는 점에서 만족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동네는 '친애할만한 곳'은 못 됐다. 논현동의 논이 논 논자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도로가 포장이 되지 않아 비가 오면 질척해 발이 빠졌고, 바람이 불면 흙먼지가 말도 못 했다. 나는 서울에 아직도 붉은 흙과 개천과 달구지를 맨 소가 똥을 싸고 지나다닌 곳이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떠나 온 광희동 옛집을 그리워했다. 적어도 그 동네는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런 생각은 그 후 2, 3년 내에 말끔히 사라졌지만.
저자는 아랫동네와 윗동네로 어린 나이에 느꼈던 계층의 문제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나 역시 그 경험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나의 경우는 공부에서다. 즉 학습격차. 먼저 다니던 학교에서 공부를 썪 잘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은 했다. 하지만 전학한 학교는 여간해서 중간을 하기도 쉽지 않았다. 학교는 생긴지는 얼마 안 되었고 이런 시골 같은 곳에서 처음부터 이렇게 경쟁적이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나지만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반에서 2, 3등을 했던 언니가 고등학교는 중간으로 떨어지더니 3년 내내 반등을 하지 못하고 졸업을 했다. 사실 언니는 이사는 해도 전학은 하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다녔다. 그러니까 언니가 다녔던 중학교는 소위 말하는 8 학군 지역이 아닌 것이다. 고등학교 때야 비로소 8 학군 내에 있는 학교를 다녔는데 난 처음 그런 언니가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공부하는 차원이 달라서 그런가 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특정 학군이 주목을 받는 것을 보면 공부가 평등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원래 학교란 나의 존재가 인정되고, 학습의 만족도를 극대화하는 곳이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학교는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다. 커트라인을 만들어 놓고 미달자, 패배자를 만들어 놓고 시작한다. 중학교 때 언니는 당당했고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런 언니가 중간을 했으니 그 박탈감이 어느 정도인지는 언니만이 알 것이다.
더 놀라운 건, 딸의 성적이 그렇게 떨어졌는데도 아버지나 엄마는 그것을 학교의 문제로 보지 않고 언니가 실력이 없고 공부 머리 없는 집안 내력 탓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건 차라리 우리를 살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엄마와 아버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중간만 해라 주의였으니까. 안 그랬으면 우리 중 성적 비관 자살자 명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식이 공부를 못하는 원인을 학교에서 찾지 않고 개인의 문제로 본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학교란 공부를 하는 곳이고, 내 자식을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보내는 곳이 아닌가. 내 아이가 학교에 적응을 못하고 공부를 못하는 것이 어떻게 본인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왜 학교의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하는 걸까. 그랬다면 부모는 내 자식 공부 못하는 것에 대해 학교에 더 많이 문제제기를 하고,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러기보다 오히려 촌지를 바치고 과외라는 편법을 선행학습으로 둔갑시켜 정당화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더구나 언니가 학교를 다녔던 때는 학력고사 시대였고, 대학도 전기와 후기로 나누던 때였다. 당연히 전기의 대학은 좋은 대학이고 후기는 실력 없는 대학이었다. 이건 또 얼마나 아이러닌가. 학교가 학생을 맞춰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학교를 맞춰야 한다. 지금은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매년 학교에서 실시하는 가정환경조사는 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가. 그거야 말로 "어디 살아?"란 질문을 노골적으로 제도화했던 비열하고 비인격적인 것이었다. 그래도 강남의 8 학군이니 뱀의 머리가 되느니 용의 꼬리가 되라고 할 텐가.
어쨌든 그 집을 25년을 살았으니 우리도 그렇게 오래 살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원래 미국은 잘 사는 집일수록 언덕 꼭대기에 저택을 짓고 산다던데 우리나라는 어디 그런가. 언덕 꼭대기면 달과 가까워 달동 네고 산동네지. 그곳을 우리 4남매야 평지를 오르내리고, 아버지는 자가용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출퇴근하신다지만 그 집에서 제일 고생한 건 역시 엄마다. 집에서 시장까지 일주일이면 거의 두세 번은 무거운 시장 가방을 들고 오르내려야 했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더구나 그땐 우리가 한창 자라느라 먹성이 좋았고 도시락도 싸 가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또 본의 아니게 있는 집 자식들이라 아무 반찬이나 싸 가지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귀한 집 자식일수록 마구 굴리며 키워야 하는데 그 시절 우리네 부모들이 다 그렇듯 못 살고 못 먹던 시절을 경험한지라 '내 자식 마는 좋은 것으로'란 생각이 엄마, 아버지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뼈골 빠지는 건 당신들이고 그걸 알리 없는 우리는 천하의 후레자식 되는 거다. 엄마는 지금도 가끔 그때의 고난을 밥반찬 삼아 얘기하곤 한다.
그러던 중 동네가 리모델링 바람이 불었다. 집을 아예 부수고 새로 짓기 시작했다. 우리도 그 바람을 타고 집을 새로 지었다. 지하 일층, 지상 이층으로 지어 1층은 우리가 살고 나머지는 세를 주는 방식으로 살게끔 지었다. 처음엔 새집이었으니 그 기분이 남달랐던 것도 사실이다. 마당을 3분의 1로 줄여 실내는 널찍했지만 역시 마당이 줄은 건 아쉬웠다. 그 집의 하이라이트는 마당에 있었는데 말이다. 25년 중 10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세상 공부하려면 집에 세를 들여 보아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엔 있는 사람이 입바른 소리 하면 갑질로 비치고 이 책의 기조와도 맞지 않아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서로를 이해한다는 건 역시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언제까지나 그 언덕 꼭대기의 집에서 살게 될 줄로만 알았던 우리가 이사를 했다. 이사 경험은 그리 많지 않지만 우린 이사할 때마다 좋아졌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의 이사는 집안이 기울어 줄여가는 이사다. 오빠가 사업에 실패해 집은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고 우린 마지막 2년을 전세로 돌려 살았다. 그때 처음 세입자가 되었다. 만감이 교차했지만 그래도 우리 집을 산 새 주인은 대체로 좋은 사람 같아 별 마찰 없이 살았다. 하지만 우리 집이 이사를 했을 땐 가차 없었다. 그 주인은 2년 후에는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집을 부수고 새로 지을 거라고 했다. 이미 남의 집에 뭐라고 할 건 없지만 10년 정도밖에 안 된 집을 부순다니 뭔가 낭비 같기도 하고 되게 아쉬웠다. 그 집에서 우리 4남매는 학교를 마쳤고, 언니가 시집을 갔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사 한 달 앞두고는 반려견인 (몰티즈 암컷) 제니가 죽어 마당에 묻혔다. 그땐 반려견의 장례업이 아직 활성화되기 전이라 어떻게 할 바를 몰라 그렇게 했다. 그런 저런 사정을 알리 없었던 주인은 제니의 뼈가 다 삭기도 전에 우리가 이사를 하자마자 당장 그다음 날 포클레인이 밀고 들어와 집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 얘기를 듣자 좀 서늘했다. 만일 우리 집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예정했던 날 보다 하루나 이틀만 늦어도 그렇게 했을까 알 수가 없었다.
우린 그렇게 그곳을 25년 만에 떠났다. 저자는 집에 관해 쓰는 건 한 시대를 쓰는 거라고 하는데 그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난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청년 시절의 반을 보냈다. 처음 이사 오고 살 수 있을까 싶지만 우린 어쨌든 살았다. 살다 보면 살아온 곳은 다 친애하는 곳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참 많은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그런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집 얘기를 하면서 자신의 삶을 풀어내고 있다. 유년 시절은 물론이고 도시와 공간, 사회 계층 간의 문제 나아가서 페미니즘의 문제까지 두루 다루고 있다.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누구든 인생에 한 번은 자기 이야기를 써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속담에도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이름만 남겨서야 되겠는가.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와서 무엇을 경험하고 살았는지 자기 인생 보고서 정도는 남겨야지. 어찌 보면 집에 관한 이야기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다. 누구든 그 시작은 집이란 공간에서부터 시작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난 많은 부분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고 동의하지만 장르가 좀 불명확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순수하게 자전 에세이로 써도 충분했을 텐데 굳이 참고 도서와 인용구 등을 밝혀놓은 것이 무슨 논문이 되기를 바랐나 좀 애매모호한 모양새가 됐다. (그러다 보니 어느 부분 저자 개인의 생각을 일반화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려면 더 많은 논증이 필요한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에세이라면 그건 개인의 생각이란 걸 전제하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해도 별무리가 없었을텐데 말이다. 그냥 그렇다고.) 열심히 썼다는 건 인정하지만 에세이도 아닌 것이 논문도 아닌 것이 저자의 의욕이 너무 앞선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