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의 사랑타령은 모두… 욕정일 뿐이야”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 실비아 플라스 지음 / 김선형 옮김 / 문예출판사 / 709쪽 | 2만5000원
작년 11월, 나는 노스햄튼의 스미스 대학에서 포에트리 센터가 주관하는 낭독회를 열었다. 그곳에서 만난 그 대학의 교수들은 모두 나에게 닐슨 도서관에 가보자고 제의했다. 왜냐하면 그곳이 실비아 플라스의 기념관이며, 그곳엔 그녀의 일기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물론 이번에 출간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중 절반 이상이 그녀의 스미스 대학의 학생 시절과 강사 시절을 다루고 있다.) 그들 중에 특히 여자 교수들은 실비아 플라스가 그 학교 출신이라는 것, 재학 기간 중 400편의 시를 썼다는 점 등을 기꺼워 하는 눈치였고, 그 대학에선 해마다 수많은 실비아 플라스 강좌와 그녀와 관련된 행사가 열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얘기 끝에 시인이 일기를 남기고 죽는 것이 좋은가, 아닌가에 대해서 농담 섞인 토론을 했다.
나는 자살한 예술가들의 신화를 믿지 않는다. 자살하지 않고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살한 예술가가 남긴 깨끗하고 넓은 백지 위에다 자꾸만 무언가를 쓰려고 한다. 그 예술가의 삶이 정지되었다고 하는데도 한참이나 남아 있는 백지가 부담스러워서일까. 아니면 여전히 살아가느라 지리멸렬함을 견디고 있는 자신의 백지가 한심스러워서일까. 어쨌든 사람들은 그 예술가가 남긴 백지 위에다 무언가를 끄적거려야만 자신의 생의 알리바이가 성립된다고 믿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심지어는 살아서 자신의 신화를 완성하려고 덤비는 예술가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요절한 예술가의 삶은 나날이 뚱뚱해지고, 그의 순진하고 단순했던 생의 시간들은 신화라는 덧칠로 괴팍해지고, 주인공도 없는데 나날이 길어지기까지 한다.
실비아 플라스도 그런 사후 대접을 받은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서른 살에 어린 두 아이 앞에 먹을 것을 두고 가스 오븐에 머리를 처박아 자살한 여자의 짧은 생에 관해 무수한 글들이 쓰여졌다. 그녀의 삶은 난도질되었고, 부풀려졌으며, 소비되었다. 자살 사건은 수십 명의 정신분석의들에 의해 분석되면서, 끝없이 우리 앞에 반복 상연되었다.(심지어 BBC는 영화로 만들 거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남성 세계에 의해 희생된 여성 시인의 전형, 혹은 갖가지 신화의 베일을 둘러쓴 여신이 되었다. 심지어 남편이었던 테드 휴즈는 아이들이 읽을까봐 두려운 나머지 자신과의 적나라한 관계가 드러나는 마지막 나날의 일기 한 권은 폐기한 채(그는 ‘그 당시 나는 망각이 생존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썼다.) 그녀의 일기를 출간했으며, 그녀가 죽은 후 35년이 지나서야 그녀를 기리는 88편의 시(‘생일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번에 번역 출간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고백적 언술 방법과 여성으로서만이 발화할 수 있는 시적인 언어들, 그리고 그 언어들의 구축 원리를 스스로 체득한 자의 내면 세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어린 처녀에서 성숙한 성인으로 커가는 한 여성의 평범하나 입체적인 삶을 치사할 정도로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모든 생의 경험들을 이 일기 쓰기를 통해 시의 근원에 다가가는 몸짓으로 탈바꿈시킨다. 마치 그녀는 시를 위해 헌신하는 하녀, 창녀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물론 덤으로 구역질 0나도록 처절한 세속적 욕망과 망설임들을 읽을 수 있다.)
“신경체계의 작용이란 얼마나 복잡하고도 오묘한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는 전화기의 전자음은 자궁벽을 따라 짜릿한 기대감을 전송한다. 전화선 너머 거칠고, 건방지고, 허물없는 그의 목소리에 창자가 꽉 죄어온다. 대중 가요의 ‘사랑’ 타령을 모두 ‘욕정’이라는 단어로 바꾼다면 아마 훨씬 더 진실에 가까워질 텐데.”(1959년 대학 신입생 시절의 일기)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의 한 대목을 읽을 때는 거대한 스미스 대학 강의실 한가운데서 온몸에 전율이 좌르륵 흐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자살, 1953년 여름, 나는 그녀의 자살을 재현하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다.”(1957년의 일기)
“글쓰기가 나의 건강이다. 차가운 자의식에서 벗어나 만사를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다면, 내게 어떤 의미인가, 내가 뭘 얻을 수 있는가를 따지지 않는다면.”(1959년의 일기)
이 일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남성들이 써내려간 히스토리에 자신의 몸을 처단하는 히스테리로 반항한 한 여성시인의 시의 가면들이 오히려 진정성이었음을, 지독히 정상적이었음을 깨닫는 진한 아픔이 밀려온다. 그리고 죽어서도 남들에 의해 쓰여지고 있는 온갖 신화의 덧칠을 정직한 일기와 죽음의 형식으로 완성한 시들로 떨쳐내려는 여성시인의 안간힘이 느껴진다.
(김혜순·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