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비발~* > 낱말의 <음성적 가치>
말들과 더할 수 없이 덧없는 인상들과 유희하기를 즐기는 몽상들에 관한, 환상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우리는 한번 더, 표면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우리의 의도를 고백한다. 우리는 태어나는 이미지들의 얇은 층만을 탐험할 따름이다. 아마도 가장 약한 이미지, 가장 단단하지 못한 이미지라도 깊은 진동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감각적인 삶의 피안 전체에서 형이상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다른 양식의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특히 침묵이 어떻게 인간의 시간과, 인간의 말과, 인간의 존재에 동시에 작용하는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책 한 권이 소요될 것이다. 그 책은 씌어졌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Le Monde du silence』를 읽어볼 것이다.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곽광수 번역, 민음사, 339
때로 한 언어 요소의 소리, 한 글자의 힘이, 그것이 그 한 구성요소로 되어 있는 낱말의 깊은 생각을 열어주고, 확정한다. 막스 피카르트의 훌륭한 저서, 『인간과 말Der Mensch und das Wort』에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을 수 있다ㅡ<파동Welle이라는 낱말 안의 W는 그 낱말 안의 파동을 함께 움직이게 하고, 숨결Hauch이라는 낱말 안의 H는 숨결을 올라가게 하며, 단단한fest, 굳은hart이라는 낱말 안의 t는 단단하고 굳게 한다.> 이러한 고찰로서 『침묵의 세계』의 철학자는 우리들을, 음성 현상과 로고스의 현상이ㅡ언어가 그 고귀성을 전부 지니고 있을 때ㅡ서로 조화하게 되는, 가장 예민한 감수성의 경지로 데리고 간다. 그러나 우리들이 낱말의 내적인 시, 한 낱말의 내적인 무한을 살기 위해서는 명상을 얼마나 느리게 이끌 줄 알아야 할 것일까! 모든 위대한 낱말들, 시인에 의해 웅대함에 초대되는 모든 낱말들은, 우주의 열쇠, 외부의 우주와 인간 영혼의 깊이ㅡ이 이중의 우주의 열쇠들이다.
앞의 책, 359-360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이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 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을 울린다.
그래서 '숲'은 늘 맑고 깊다. 숲 속에 이는 바람은 모국어 'ㅜ' 모음의 바람이다. 그 바람은 'ㅜ' 모음의 울림처럼, 사람 몸과 마음의 깊은 안쪽을 깨우고 또 재운다.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들여다보아도 숲 속에 온 것 같다. 숲은 산이나 강이나 바다보다도 훨씬 더 사람 쪽으로 가깝다. 숲은 마을의 일부라야 마땅하고, 뒷담 너머가 숲이라야 마땅하다.
김훈, 『자전거 여행』, 75-76
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저의 부름이 당신의 이름에 닿지 못해서 당신은 마침내 삼인칭이었고, 저는 부름과 이름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건너갈 수 없었는데, 저의 부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몸은 햇빛처럼 완연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을 떠올릴 때 저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이 경어체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일 것입니다. 아니면 눈보라나 저녁놀처럼,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말의 환영일 테지요.
김훈, 『화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