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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6-05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인형같네요. 굳이 따지자면 전 왼쪽 애가 더 귀여워요.

stella.K 2004-06-05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주말 잘 보내세요. 마태님.^^

진/우맘 2004-06-05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른쪽. 왼쪽은 너무 순하고 착해보이기만....오른쪽 강아지가 인생을 좀 아는 눈빛인데요.^^

stella.K 2004-06-05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인생이 아니라 견생이겠죠. 근데 지가 알아 봤자 얼마나 알겠슴까? 왼쪽 개는 뭘 모르는 인상이고, 오른쪽 개는 문가 모르게 불쌍해 보여요.

갈대 2004-06-05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 다 아무 생각 없는 것 같은데요... 아니면 벌써 달관했을지도....
'인생 뭐 있나~'

stella.K 2004-06-05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견생이라니까요, 갈대님.
 
 전출처 : 잉크냄새 > 유월의 숲에는


유월의 숲에는

  
                -  이해인 -

초록의 희망을 이고
숲으로 들어가면

뻐꾹새
새 모습은 아니 보이고
노래 먼저 들려 오네

아카시아 꽃
꽃 모습은 아니 보이고
향기 먼저 날아 오네

나의 사랑도 그렇게
모습은 아니 보이고


먼저와서
나를 기다리네

눈부신 초록의
노래처럼
향기처럼
나도 새로이 태어 나네

유월의 숲에서면
더 멀리 나를 보내기 위해
더 가까이 나를 부르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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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슬비 > 천천히 느긋한 마음으로 감상하시길

끝까지 보세여..정말 웃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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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6-05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어.... (>0<)b
 

트로이 지형 지질조사로 확인

일리아드에는 그리스군이 해안에 인접한 트로이성을 코앞에 두고 대치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러나 트로이 유적이 발굴된 히살리크는 에게해에서 6km, 다르다넬스 해협으로부터는 4.5km 떨어진 내륙에 있다. 오랫동안 역사학자들을 괴롭혀온 이 미스터리가 최근 지질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결론은 호메로스가 옳았다는 것.

지난해 1월 미국 델라웨어대의 존 크래프트 교수는 일리아드에 묘사된 트로이의 지형이 지질 조사 결과와 일치한다는 논문을 미국 지질학회 저널인 ‘지질학(Geology)’에 발표했다.

그래프트 교수는 1977년부터 터키 에게대학의 일한 카얀 교수와 함께 히살리크와 에게해 사이의 평원에 대한 지질 조사를 실시해 왔다. 그 과정에서 트로이와 에게해 사이의 평원 아래 70m를 시추해 지질학적 연대 측정을 한 결과 이곳이 한때 소금기가 있는 개펄이나 습지였으며, 더 이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크래프트 교수는 3000여년의 세월 동안 강 하구에 침전물들이 쌓이면서 지금과 같은 평원을 형성했다고 설명했다. 뽕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된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거꾸로 일어난 셈이다.

호메로스는 일리아드에서 “그리스군이 트로이 서쪽 에게해 연안에 진지를 세우고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 배를 띄웠다”고 당시 대치 상황을 묘사했다. 크래프트 교수는 이를 토대로 그리스군의 주둔지가 당시 트로이만의 서쪽에 손가락처럼 튀어나온 곶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그리스군이 이 곶 남쪽에 물이 흐르는 깊은 해자(垓字)를 설치해 트로이군이 공격해 오는 것을 막았다는 일리아드의 서술과도 일치한다.

(이영완기자 ywle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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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유골·돌무더기… 
헬레네 빼앗긴 스파르타 대신 미케네가 전쟁을 주도한 것은
청동 제작원료인 주석을 트로이에서 확보하기 위해…



1871년 세계는 고대 그리스의 절세미인 헬레네의 부활을 목격했다. 어린 시절부터 일리아드에 심취했던 독일의 부유한 기업가 하인리히 슐리만이 터키 북쪽 히살리크의 언덕에서 헬레네에 어울릴 만한 고대 트로이의 화려한 장신구들을 대량 발굴한 것. 과연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는 역사적 사실인가.

슐리만의 발굴은 틀렸다

히살리크 언덕에서는 선사시대부터 로마제국 말기까지 적어도 9개 도시가 전쟁이나 지진으로 명멸했다. 도시가 멸망하면 다시 그 위에 새로운 도시가 세워진다. 그러므로 히살리크 언덕에는 9개의 도시 유적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슐리만은 아파트 15층 높이의 유적층에서 겨우 한두 층을 발굴했던 것이다. 1998년부터 독일 튀빙겐대의 만프레드 코프만 교수와 미국 신시내티대의 브라이언 로즈 교수는 50여년 동안 중단됐던 트로이 발굴을 재개했다. 여기서 호메로스가 노래한 그대로인 높이 8m의 거대한 성채와 망루가 발굴됐다.

트로이의 성문은 열려 있었다

그런데 새로 발굴된 성채에서는 그리스 연합군이 그토록 열고 싶어 하던 성문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왜 성문이 없었을까? 이 미스터리는 성채를 둘러싼 외곽 도시가 발굴되면서 해결됐다. 연구팀은 성채를 둘러싼 도시의 외부 경계선에서 적군의 전차를 막기 위한 700미터에 이르는 깊은 도랑을 발견했다. 또한 불탄 유골과 마지막 저항에 사용했을 돌무더기 등이 트로이 최후의 날을 증명해줬다. 외곽 도시까지 포함해 트로이의 인구는 당시로선 거대도시 규모인 4000~8000명이었다.

전쟁의 원인은 청동제 무기


▲ 트로이 유적에서 발견된 각종 토기와 술잔들. 금빛 찬란한 모습에서 당시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다.

헬레네를 빼앗긴 스파르타도 아닌 미케네가 전쟁을 주도한 이유는 청동제 무기였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다. 미국 텍사스 A&M대의 케말 풀락 교수 연구팀은 1984년부터 1994년까지 터키 앞바다에서 트로이 당시의 침몰선을 발굴했다. 이 배에서는 11톤의 청동을 만들 수 있는 금속 주괴가 발견됐으며 화려한 금장신구와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타조알도 발견됐다. 서구와 아시아를 잇는 다르다넬스 해협에 인접한 트로이는 말 그대로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던 것. 반면 그리스 최강의 군대를 유지하고 있던 미케네에는 청동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주석이 나지 않았다. 미케네가 이런 트로이를 그냥 뒀다면 더 이상했을 일이다.

파리스는 실존 인물

당시 터키를 지배하고 있던 히타이트 제국의 석판 기록에서는 윌루샤(Wilusha) 해안에서 미케네가 연루된 분쟁이 있었다는 문구가 나온다. 고고학자들은 윌루샤가 트로이의 다른 그리스어 이름인 윌레오스(Wileos)일 것으로 믿고 있다. 석판에는 히타이트의 군대가 트로이가 위치한 터키 북부로 이동했다는 내용이나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의 또 다른 이름인 알렉산드로스도 등장한다.

한편 히타이트의 기록에서는 윌슈아의 수로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최근 발굴된 트로이의 수로 벽면에 달라붙은 석회암 성분을 조사한 결과 기원전 2600년부터 이 수로에 물이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히타이트의 기록에 나온 윌슈아와 트로이가 다시 일치하는 순간이다.

(이영완기자 ywle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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