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건 행복하지 않건 보드카가 있는 한 징징거리지 말지니"
아이작 B. 싱어 장편소설/ 정영문 옮김/ 다른우리/ 3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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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샤'의 책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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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굴레를 쓴다. 개인이 속한 공동체에 운명적인 박해가 가해질 때면 역사라는 이름의 핑계조차 그럴싸하다. 이 소설은 폴란드에서 러시아식 공산 혁명을 열망하던 지식인들이 스탈린에 대한 처절한 배신감으로 방황하던 때의 이야기다. 이념적 혼란과 추락에 떠밀리는데 나치의 전차바퀴 굉음이 가까이 다가온다면 사랑은 어떤 토굴에 머리를 처박는가.
이 소설은 외형적 줄거리를 엮기 위해 20세기 전반 동유럽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신산했던 삶을 시공간의 배경에 늘어놓고 있다. 1910년대 중반부터 독일이 침공하기 전까지 폴란드에서 이중으로 내몰림을 당하고 있던 그들의 삶이 적실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전쟁이 지나가고, 해방과 피안의 상징이 된 미국으로의 망명과 성공이 주인공들의 운명을 또한번 휘저어 놓는다.
주인공은 바르샤바의 크로크말나 거리 10번지에 살았던 아론과 쇼샤다. 백짓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아론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옛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사용하던 언어)와 이디시어(독일어, 히브리어 등의 혼성언어)를 쓸 줄 아는 천재 소년이다. 랍비의 아들인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극작가로 성공을 거둔다. 쇼샤는 가죽가게집 딸이다.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공립학교에서 2년 정도 뒤처져 있는, 말하자면 약간 바보 취급을 받던 아이였다.
엄격한 유대 가정에서 자라난 아론에게는 ‘내가 하고 싶어한 모든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사람을 그리면 십계명 중 두번 째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다른 소년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면 그것은 중상이었으며, 누군가를 비웃으면 그것은 조롱이었고, 이야기를 꾸며내면 그것은 곧 거짓말을 의미했다. 그러나 아론은 이미 아르키메데스, 코페르니쿠스, 뉴턴 그리고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을 읽고 있었다.
쇼샤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미숙한 아이였지만, 아론은 그녀를 찾아가 그가 읽고 듣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해준다. 쇼샤도 아론의 이야기를 자기 나름의 수준대로 이해하며 좋아한다. 그러나 쇼샤네 가족이 이사를 하면서 서로 헤어진다.
아론은 쇼샤를 점차 잊어 간다. 예술에 대한 열망과 퇴락한 생활의 캄캄한 격차 속에서 아론은 글쓰기를 시작하는 한편 여러 여인들과 연애에 빠진다. 문학에 열정을 갖고 있던 셀리아 부인,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모스크바에 갈 계획을 세우고 있던 도라 스톨니츠, 아론에게 희곡에 대한 열정을 일깨워주는 미국인 여배우 베티 슬로님, 그리고 하숙집 하녀인 테클라였다. 도대체 그는 ‘죽어서 무(無)로 돌아가기 전에 쾌락을 찾아야’(87쪽) 했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서 꼼짝 못하고 있던 그때 유대인의 굴레는 섹스와 토라(구약 첫5권), 그리고 혁명 세 가지였다. 히틀러가 군화 발굽을 들이밀기 전 그 시절이 절대적으로 암흑이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마치 러시아 노래처럼 ‘행복하건 행복하지 않건/ 보드카와 포도주가 있는 한/ 징징거리지 말 일’이었다.
다만 ‘모든 약점과 탈선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고자 하는 충동에서 생겨’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어야만 그 ‘자유가 나를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까지 이해할 것이란 충고를 하고 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면 구름에 실려 가게 될 곳’인 팔레스타인 땅을 동경하다가 “그걸 믿어요?”라는 질문에 “아뇨, 내 사랑”이라고 답하게 되는 것이다.
아론은 전쟁이 끝나기 전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은 쇼샤라는 것을 깨닫고 그녀와 결혼식을 올린다. 아론이 문학적 아이덴티티를 찾고, 삶의 본령에 올라서는 것은 쇼샤 덕분이다. 전쟁의 와중에 그녀는 목숨을 잃는다.
아이작 싱어는 특유의 문체로 솜씨좋게 잘려나간 생선회 같은 단문장의 연결, 그리고 문장전환의 상큼한 묘미를 맛보인다. 틈만 나면 그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체념, 공산주의식 탈취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인간의 비참을 외면하는 신에 대해 원망을 드러낸다. 사랑도 예술도 결국은 ‘장난감을 부순 후 울면서 그것을 다시 맞추는 아이 같’은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은 폴란드 태생의 아이작 싱어가 노벨문학상을 받던 1978년에 발표됐다. 싱어 자신도 랍비 교육을 받았으며, ‘쇼샤(Shosha)’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김광일기자kikim@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