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명작 단막극 선집 - 국내외 단막극 16편과 해설
김성희 엮음 / 연극과인간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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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부끄러운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 작품을 많이 보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많이 읽는 것(희곡을)이 좋은가 의문을 가졌었다. 하지만 작가에게나 연출가에게나 또는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독자)에게나 희곡은 많이 읽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새삼 깨달았다.

이 책을 역은 김성희 씨도 이 책의 머릿말에서, "희곡의 독서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으면 문화산업으로서의 드라마가 발전하기 힘들다."라고 그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그는 헤겔의 말을 인용해, 희곡이 시와 소설의 특성을 다 갖춘 변증법적 형식이라 하여 가장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사실 몇몇 작품은 좀 얼른 와 닿지는 않았다. 몇몇 작품이 나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건, 일상어가 아닌 시어에 가깝고 초현실적인 감이 없지 않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예를들면, 장정일의<어머니>나 오태석의 <교행>등. 

하지만 이근삼의 <막차탄 동기동창>이나 머레이 쉬스갈의 <타이피스트> 같은 경우는 여운이 꽤 오래 남았고, 나 개인적으로 단연 압권이라고 생각되는 작품은 뒤렌마트의 <황혼녘에 생긴 일>이란 작품이 좋았다. 작품이 갖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면도 인상적이거니와 탐정소설의 구도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작가와 독자의 존재 양식을 너무나 섬뜩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 작품의 탁월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아가서 과연 이 사람이 누구며 이 밖에 어떤 작품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이 책의 장점은 16 작품에 대해 작품 하나가 끝날 때마다 저자의 꼼꼼한 해설과 깊이 보기를 위해 몇가지 질문 사항을 써 놨다는 것일게다. 그러므로서 작품을 더 상세히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연극의 흐름에 맥을 짚어 볼 수가 있어 좋은 독서 체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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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2004-03-19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게 읽었습니다. 연극과 인간에서 나오는 희곡집들이 꽤 괜찮은 편이에요.
저도 희곡읽기와 연극보기 모두를 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연극을 보러가기가 무척힘들답니다. 직장인이며 지방에 있기에....
 
 전출처 : 비발~* > 펌> 감독들의 3.12

"한나라당 의원들이 뒷짐지고 서 있는 장면, 공포영화를 보는 듯했다"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42)

                                                                       
"요즘 파주에서 계속 영화 촬영중이라 '생중계'로는 보지 못했다. 저녁뉴스로 편집된 화면을 봤다. 내게 그날의 영상은 한 편의 '공포영화'였다. 의장석에서 끌려나와 통곡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의원들 모습이 슬펐다기 보다 한쪽 편에서 뒷짐지고 있는 서 있는 한나라당 의원들을 보면서 괴괴한 느낌이었다. 뒤쪽 멀리 떨어져 최병렬 대표나 박근혜 의원 등 지도부가 당당하게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그랬다.

다들 생각이 비슷할 거라고 본다. 한심했다. 마음 한편에선 사회개혁이나 개선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좌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국 정치역사의 엄청난 퇴보다. 87년 6월항쟁이 떠올랐다. 그 때 청산하지 못한 기득권 세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끈질길 수 있는지, 또 그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질긴지 이번 탄핵안이 통과되는 걸 보면서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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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좀비들...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반드시 귀환한다"
- <조용한 가족> <반칙왕> <장화, 홍련> 김지운 감독(42)

"참담하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탄핵 결과에 대한 파장이 클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설마 가결이 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국회의 정치수준은 영화감독의 상상력을 초월했다. 어떤 잣대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만약 지금의 탄핵정국을 시나리오로 쓴다면 유치하다고 충무로에서 퇴짜맞는다. 말도 안되는 상상력은 공감대를 얻지 못한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박수치고 만세 부르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러니까 박수를 치고 좋아하는 것 아니겠나. 탄핵이 가져올 여파에 대해 판단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나. 물론 전에도 정치인들이 실소를 자아내는 장면은 여러 차례 연출되었지만 이번 사태는 그 정점이다.

탄핵에 찬성한 193명의 의원들은 괴상망측한 몰골의 '돌아온 좀비들' 같았다. 앞으로 나가던 역사를 거꾸로 돌려놓는 집단적 광기였고, 동시에 좀비를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좀비들에게 역사가 발목이 잡힌 것이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반드시 귀환한다. 지난 역사 속에서 국민들이 잘하겠지 하면서 봐준 게 있다. 그 잔재가 망령을 불어들였다.

어쨋든 살아 있는 사람들과 좀비들과의 한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번 총선을 기점으로 다시는 좀비들이 살아오지 못하게 확실히 매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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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으로 눌러버린 강간...결국엔 자위로 끝난 포르노 스펙타클" 
 [기고]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본 3·12 
 
그날 대통령 탄핵가결안을 통과시키는 국회의 스펙터클은 내게 정치적이라기보다는 포르노그래픽하게 보였다.

첫 번째 이유는 그걸 보는 내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협상과 토론의 중재에 의한 정치가 없었다. 그냥 힘으로 눌러서 벌이는 강간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보는 우리에게 즐겁지 않느냐고 뻔뻔하게 물어보는 중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이유이다. 그건 사실상 했는데 당사자들은 안 했다고 생각하고 있거나(그래서 국민들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안 했는데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여전히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갈 데까지 가서 다 보여주고 말았다. 그런데 그건 한 게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 애처로운 일이다. 거기서 오르가즘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그들이 잊어버린 것이 있다. 포르노그래픽한 스펙터클은 두 가지 약점이 있다. 그 하나는 흥분은커녕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아무리 잘해봐야 그건 자위행위로 끝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민주주의라고 착각한 포르노그래픽한) 스펙터클을 보여주었지만, 거기서 흥분한 연기는 가증스럽고 유치한 것이었다.

사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포르노그래픽한 스펙터클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것은 항상 그걸 보는 사람들이지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걸 보고 그냥 웃자면 익살스럽기도 하지만, 이 스펙터클에 함께 참여하라고 제안을 받으면 그건 끔찍한 일이다. 그러므로 광화문에 선 그 수많은 시민들이 노! 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그대들은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런데도 방송국을 찾아다니고 신문사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중언부언하는 중이다. 무슨 말을 이렇게 복잡하게 말하느냐고? 그냥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같다'는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 당신이 잘 해서 이 포르노스펙터클과 맞서면서 당신 대신 거리에 서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한국군을 이라크에 파병한 것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의 차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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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짓 존스의 일기 - [할인행사]
샤론 맥과이어 감독, 르네 젤위거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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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재미있다. 로맨틱하고, 코믹하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르네 젤위거는 어쩌면 그렇게도 짜증나는 푼수역을 천연덕스럽게 잘도 소화해 내던지. 그것이 주인공이 갖는 캐릭터가 아닌가.

영화는 결혼 안한 여자들이 갖는 환상이나 강박관념을 가벼운 터치로 잘 보여준다. 예를들면, '바람둥이를 조심하라.' 그러나 그것 역시 주인공을 피해 가지 못했다. 어찌보면 그건 통과의례 같은 것이 아닐까? 조심하면 왜 조심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로 조심해야 하는 것인지. 등등. 사람들은 결과만 막연하게나마 알거나 씁쓸하게 안다. 전자는 경험을 안 해봤을 경우고, 후자는 해 봤을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고민을 하지. 나는 이대로 독신으로 지내야 하는 것일까? 과연 나에게도 맞는 짝은 있는 것일까 하고.

대부분의 사랑 영화가 그렇듯, 사랑을 이루는 과정은 보여주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에게 맞는 짝은 이 세상 어디엔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랑을 지켜나가는 것은 역시 본인들의 몫인 것 같다. 그런데도 그 사랑을 못 만난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 남의 사람이 되있어."라고. 얼마나 서글픈 현실인가.

내가 이 영화에 관과할 수 없었던 건, 일기가 갖은 특성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일기는 나만이 아는 얘기를 독백으로 쓴다. 거기엔 누구도 볼 수 없고 개입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일기에 갖는 보편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오늘 날 인터넷 사이트나, 자기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공공연히 자신의 일기를 공개한다. 거기엔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 아직 쑥스러워서 그런지 공개일기는 확실히 100% 공개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내가 공개할 수 있는만큼만 공개되는 것같다.

일기는 어디까지 진실을 쏟아 부을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영화에서의 일기는 정말 일기라기 보단 메모나 낙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메모나 낙서 같은 일기에서도 진실할 수 없는 주인공의 심리를 포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기란 필요없는 걸까?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일기는 쓸 때는 자기 자신에게(또는 위하여) 쓰지만 언젠가는 공개된다. 아니 어쩌면 무의식 중에라도 공개되길 바라면서 쓰고 있겠지. 개인사적 사료로서도 필요할 것이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족적을 남기고도 싶고. 또 잘하면 문학사(안나의 일기처럼)나 미시사적 관점에서 필요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이 생각이 난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기가 쓴 일기를 태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실제로 태워버리기도 하지만, 또 언젠가는 그런 자신을 후회하게 된다고.

난 아직까지 그런 충동을 느껴 본적은 없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다시 읽고 싶은 생각도 없고. 요즘엔 모아두는 건 좋은데 쌓아두는 건 왜 그리도 부담스러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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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5-01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그렇지만 책도 가볍게 읽기 좋더군요. 전 글을 쓰는 버릇이 안 되어 있어서 일기는 초등학교 이후로 써 본적은 없지만 남의 일기를 읽는 것은 즐겁죠...비록 소설이라도...전 즐겁게 읽은 책입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나 「고통의 문제」 등으로 이미 국내에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대단한 영적 통찰력을 지닌 작가이지 않는가? 내용이 쉽지 않은 면도 있던데….
지난해 영국에 갔을 때 잠시 머문 집 주인이 루이스의 애독자였다. 그에게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한국어판을 보여 주며 “내용이 쉽지 않다”고 말하자, “쉽지 않은 게 아니고 깊이가 있다”고 대답하더라. 그 말에 수긍했는데, 정말 쉽지 않다기보다 그 깊이가 여느 작가들과 달라 ‘쉽지 않게 느껴지는’ 것 같다.

「예기치 못한 기쁨」에는 ‘C. S. 루이스 회심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지금까지 나온 루이스의 책들과 달리 지극히 사적인 고백들을 많이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그 점이 「예기치 못한 기쁨」의 큰 매력 중 하나다. 그리고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루이스의 어릴 적부터 청년기까지 사진들이 맨 앞에 별도 편집돼 있어 흥미를 더한다. 루이스는 머리말에서 “내가 어떻게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의 대답은 아주 성공적이다.

내용을 짤막하게 간추려 들려준다면?
루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고 상상하기를 좋아했다. 이미 다섯 살 때 직접 동화를 쓰고 그 동화의 삽화를 그릴 정도였다. 암에 걸린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회의를 가져다 준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 후 여러 학교를 거치면서 그는 희미하게 남아 있던 신앙의 그림자를 모두 지워버리고 마침내 중학교 시절에는 무신론자가 된다.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기 전 커크 패트릭이라는 개인 교사에게 배우게 되는데, 패트릭은 무신론자에다 철저한 변증주의자였다. 그런데 그에게 배운 변증론적 사고가 나중에 루이스의 무신론을 깨는 무기로 쓰이게 된다는 점은 참 흥미로운 역설이다. 1929년 루이스는 여름 학기에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회심을 두고, 하나님께 ‘강제로 끌려갔기 때문에’ 제 발로 집을 찾아간 탕자보다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특별히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주목해 읽어야 할
포인트가 있다면?

루이스의 책들을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할까?’하고 절로 탄성이 나오는 적이 허다하다. 「예기치 못한 기쁨」은 루이스의 생각의 속살이 오래도록 씹히는 책이다. 또한 이 책은 큰 틀에서 종교적 회심을 그리고 있지만, 문체나 글의 구성상 영문학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문체뿐 아니라 그 문체를 고스란히 맛보게 해 주는 번역, 자기 고백적인 생각, 사고의 편린들을 한 올씩 음미해 보라. 그리고 번역자의 분투를 보여 주는 역주(譯註)를 성실히 따라가 보라. 그러면 왜 다 읽고 난 사람들이 ‘이런 재미가 있는 책도 다 있네’라고 말하는지 알게 된다.


글·옥명호 홍성사 편집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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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박사 2004-03-15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개인적으로 c.s.루이스를 좋아합니다만.. 이 책은 읽다가 말았습니다. 그 예기치 못한 기쁨을 발견하기까지 좀 지루하더라고요. 아마, 지금 읽으면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stella.K 2004-03-15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읽지도 못했습니다. 전 귀가 얇아 남의 얘기 잘 듣는 편인데, 설박사님 때문에 이 책 고려대상이 되었네요. 저에겐 이 책이 '예기치 못한 슬픔'이 될 것 같습니다. 어쩌죠...흠흠.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신다. 그자체는 연극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커피에 독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것은 연극이 될 수 있다."

                                                                                 -뒤렌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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