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중왕’ ‘벤허’에선 사랑과 용서의 신성한 이미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등 고뇌하는 인간 모습 담아


지난 2일 국내 개봉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예수의 인생 마지막 12시간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12제자와 최후의 만찬을 마친 예수가 기도를 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올랐을 때부터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둘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로마 병사로부터 매질 당하는 장면은 20여분에 걸쳐 묘사된다. ‘브레이브 하트’로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멜 깁슨이 감독과 제작을 함께 맡았고, 미국 텍사스의 한 살인범이 이 영화를 보고는 경찰에 자수했다고 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그러나 좋은 쪽의 화제 이상으로 이 영화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감동적인 명작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게 한 장본인으로 유대인을 조명함으로써 반(反) 유대정서를 부추긴다’고 반발하고 있다. 뉴욕타임스와 USA투데이 등도 ‘유혈이 낭자한 난도질 영화’라고 혹평했다. 이 영화를 관람하던 한 유대인 여성은 심장마비로 숨지기도 했다.

이에 반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영화를 관람한 후 “강렬하고 감동적인 명작”이라고 찬사를 보냈으며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영화”라고 말했다.

그런데 일반 관객들의 주목을 끈 것은 ‘반유대주의’ 논쟁보다도 작품 속에서 생생하다 못해 처절하게까지 그려진 예수(짐 카비젤)의 수난과 인간적인 면모였다. 영화는 예수의 살점 하나, 핏줄 하나 놓치지 않는 극사실주의를 차용했기에 예수는 신(神)보다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재현됐다.

이처럼 예수는 영화를 통해서도 계속 부활하면서 점점 인간의 형상을 갖기에 이르렀다는 평가다. ‘신’에서 ‘인간’으로, ‘성인(聖人)’에서 고난받고 고뇌하는 ‘성인(成人)’으로의 변천과정을 겪어온 것이다.

예수가 등장하는 초창기 영화 속에서는 인간성보다는 신(神)성이 강조됐다. 세실 B 드밀 감독의 흑백무성영화 ‘왕중왕’(1927년작)에서 예수(헨리 워너)는 전형적인 성인(聖人)의 모습으로 등장해 4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성경 구절을 재해석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예수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머리 주위에 둥근 모양의 후광도 비춘다. 예수는 늘 광채에 휩싸여 있거나 스스로 빛을 발한다. 이는 신성을 강조하는 전통적 예수의 모습이다. 또한 베드로는 긍정적으로, 유다는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등 선악대비가 뚜렷하다.


▲ 나사렛 예수(1977), 예수의 마지막 유혹(1988), 가든 오브 에덴(1999),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 (왼쪽부터)

1961년 니콜라스 레이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된 ‘왕중왕’은 1920년대 작품과 유사한 줄거리 구성과 해석을 보여준다. 예수의 광채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경외의 대상으로 묘사돼 전통적인 예수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오슨 웰스가 내레이션을 맡고 제프리 헌터가 예수로 출연했다.

1890년 소설을 원작으로 1926년 제작한 무성영화를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리메이크한 작품, 찰턴 헤스턴 주연의 ‘벤허’(1959년작)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예수는 유대민족과 로마의 갈등과 원한을 초월한 사랑과 용서의 근원으로 형상화된다. 예수의 모습은 대사없이 뒷모습이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모습으로만 등장한다. 철저히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인간과는 다른 신성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즉 벤허의 예수상은 ‘왕중왕’의 예수상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다.

노먼 주이슨 감독의 뮤지컬 영화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1973년작)에서부터 예수의 인간적인 면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의 1971년작 록 오페라를 영화화한 작품. 이 영화를 통해 화려한 화면과 음악은 물론, 이전 영화들에 비해 확연하게 달라진 예수상을 관람객들은 목격했다. 예수(테드 넬리)를 배신하는 악역 유다를 새로운 인물로 그리며 예수의 두려움, 분노 등 인간적인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이 같은 예수의 인간적인 면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예수의 마지막 유혹’(1988년작)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작품 속에서 예수(윌렘 데포)는 악마의 유혹, 로마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만들어준 것에 대한 죄책감, 세상에 대한 미련, 신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부름으로 괴로워한다. 결국 나사렛의 목수 예수는 신이 자신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하지만 그의 사명이 거의 이뤄질 때쯤 그는 보통 남성으로서의 커다란 유혹에 직면한다.

사탄이 변신한 소녀 수호천사가 “이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복종을 충분히 보여줬으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아도 된다”고 유혹한다. 고통에 몸무림치던 예수는 십자가를 내려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한다. 이어 인간 예수는 자신의 상처를 닦아주던 아내와 육체적 관계를 갖는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예수는 그것이 악마의 유혹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스인 조르바’ 등으로 유명한 그리스 출신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원작 소설을 영화한 이 작품은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는다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뜨거운 논란을 낳았다. 예수가 자신의 신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인간적인 고뇌를 하는 것으로 인해 기독교계의 반발을 빚은 것이다. 한국에는 1998년 수입돼 개신교계의 거센 반발로 등급심의가 보류됐다가 2002년 1월 뒤늦게 개봉됐다.

이 밖에도 ‘위대한 생애’(1965년작)는 예수(막스 폰 시도)의 생애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자이언트’ ‘젊은이의 양지’의 조지 스티븐스 감독이 연출했고 찰턴 헤스턴, 시드니 포이티어 등이 출연했다. ‘나사렛 예수’(1977년작)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프랑코 제피렐리가 메가폰을 잡았다. 예수 역의 로버트 파웰과 성모 마리아 역의 올리비아 핫세가 최고의 캐스팅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예수가 등장하는 작품으로는 이외에도 ‘가든 오브 에덴’ ‘마태복음’ ‘나사렛 예수’ 등이 있다. 알렉산드로 달라트리 감독의 ‘가든 오브 에덴’(1999년작)도 논란의 대상이 된 바 있다. 4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 예수의 12~30세 시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마태복음’(1962년작)은 복음을 충실히 담아내면서도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민중을 부각시켰다. 파졸리니 감독의 유물론적 관점으로 이 영화는 예수를 영혼의 구원자이자 막시스트로 묘사하기도 했다.

(서일호 주간조선 기자 ihseo@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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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가 예술의 도시라는 명성을 누리는 것은 이처럼 기존의 관습과 관성을 일상적으로 뛰어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파리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타성(惰性)이라는 사실 입니다. 타성은 그것이 억압이나 구속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그것은 견고한 무쇠 방입니다.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감성이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 추구해야할 목적이나 예술이 수행하는 기능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개인과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에너지를 해방의 역할에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관용과 다양성은 그런 점에서 예술의 전제이며 예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해방이 어떠한 예술 양식을 만들어 내고 얼마만한 성취를 이룩하였느냐 하는 평가는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인간을 예술화하고 사회를 예술화 하는 미래적 과제는 무엇보다 먼저 해방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진부한 틀에서 해방하고 완고한 가치로부터 해방하는 일입니다.

                                                            -신영복, <더불어 숲>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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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09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덕에 요새 <더불어 숲>을 발췌해서 매일 조금씩 읽고 있어요.
홍세화의 똘레랑스...같이 생각해 봤었던 부분이죠.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타성이다"라는 부분을 읽었을 때 그 앗차!하던 느낌이라니...

stella.K 2004-04-09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감입니다.^^

waho 2004-04-2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영복님 글 너무 좋아여...
 
 전출처 : 카를 > 마카아벨리와 다른 사상들과의 비교

마카아벨리와 다른 사상들과의 비교

고려대 심재우교수

1. 韓非子와의 비교

흔히들 韓非子를 동양의 마키아벨리로 비유하기도 하며, 일견 이둘은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韓非子와 마키아벨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은 거의 흡사하다. 韓非子는 전국시대의 전쟁상태에서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루고자 하였으며, 마키아벨리는 16세기 유럽의 혼전 양상 속에서, 조국 이탈리아를 지켜내고자 했다.

먼저 韓非子의 법사상을 간략하게 요약해보자.47) 韓非子는 전국시대 후기에 법가의 제학설을 집대성하여 법가이론을 완성한 사람으로서, 수세기에 걸친 전쟁과 혼란으로 점철된 천하대란의 상태를 안정으로 이끌기 위하여 강력한 군주중심의 국가체제를 정립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 하에서 전개된 韓非子의 법사상은 크게 法治, 術治, 勢治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하들과 백성의 일체의 언행을 통제하기 위한 法治, 신하들로부터 군주의 권한을 보호하기 위한 술책으로서의 術治, 신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천하를 호령하려고 하는 勢治 등은 하나 같이 군주 중심의 권력국가 사상을 대변한다. 韓非子의 최종목적은 군주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에 놓여 있는 것이지 인민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다. 法治는 권력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며, 術治는 군주를 위한 술책이다. 勢治는 천하를 호령하기 위한 전제에 불과하다. 이렇게 본다면, 韓非子의 법치주의는 모든 사람(특히 정치권력)을 법의 지배 하에 두고자했던 서양의 법치주의사상와는 무관하다. 한비자의 법치주의는 군주를 구속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고, 인민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한비자를 마키아벨리과 비교해 보자. 흔히 마키아벨리의 여러 가지 비도덕적 정지지침과 한비자의 술치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둘은 그점에서 매우 비슷하다.

한비자 : 군주는 그의 의도를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군주가 그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면 신하는 자신의 표현을 달리 꾸밀 것이다..... 군주는 지략이나 지혜도 감추어야 한다48)

마키아벨리 :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인간적이고 정직하고 경건한(종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좋고, 또한 실제로 그런 것이 좋다. 그러나 달리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면, 당신은 정반대로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군주론, 123쪽)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둘은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한다. 한비자는 "군주의 이익" 그 자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계속하여 권력국가사상을 유지하였다. 전국시대의 천하대란을 평정하고 천하통일을 가져오게 한 권력국가론을 전개한 것은 그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맞는 것이었으나, 천하통일 후에도 (법치국가로 이행한 것이 아니라) 권력국가를 계속 유지한 것은 문제였다. 이를 받아들인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긴 했지만 곧 망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다.49)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경우는 다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키아벨리는 궁극적으로 시민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공화정"을 꿈꾸었으며,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일단 "무법의 자연상태"를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도덕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식했으며, 다만 위기 상황 속에서는 "비도덕적 정치행위"를 사용해서라도 일단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일견 비슷해 보이는 "정치기술"들도 실은 그 이유가 전혀 다른 것인데, 한비자가 이를 "군주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면, 마키아벨리는 이를 "시민의 자유보호"를 위해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마키아벨리와 韓非子의 정치기술이 유사하다고 해서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렇게 본다면 마키아벨리는 韓非子 보다는 오히려 홉스와 유사한 점이 더 많다고 하겠다.

2. 홉스와의 비교

홉스가 처한 상황(종교전쟁과 내란)은 마키아벨리와 거의 유사했으며, 그들이 내놓은 대안 역시 거의 일치한다고 보여진다. 먼저, 홉스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상태"를 벗어나는 것 자체가 급선무라고 본 것과 마키아벨리가 일단 "국가 그자체"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는 점은 같다. 그리고 홉스가 "국가의 목적은 개인의 안전이다"50) (앞서 지적한 바대로) 마키아벨리가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공화정의 최대가치를 "시민의 자유 보장"(First Book, Chap.16, pp.162~163)에 두었다는 사실과 완전히 일치한다. 게다가 두 사람 "국가 그 자체의 존속"을 상당히 강조함으로서, 권력국가사상이 아니냐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았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그러나 두사람은 "전쟁상태"에서 일단 국가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지, "권력국가사상"을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홉스나 마키아벨리는 모두 "인간의 존엄"이나 "인권"을 자연법적인 법가치로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연법이 실정법의 우위에 있으며, 실정법이 이에 구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지는 못했다. 이점은 그들의 사상이 "실질적 법치국가"를 지향했다고 보기 힘들게 만드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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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카를 > 마키아벨리와 정치기술

마키아벨리와 정치기술

고려대  심재우교수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나감으로서, 정치적 공동체의 확고부동한 토대, 즉 국가를 구축할 수 있도록 "정치기술" 또는 "통치술"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악명높은 마키아벨리즘의 유래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는 정치를 기독교 윤리의 틀 속에서만 고려하던 중세적 한계를 벗어나, 군주의 세속적 행위기준을 제시하고 독립적 주권을 옹호함으로써 독립국가를 보존하고자 했다. 이제 군주는 더 이상 신법이나 자연법과 같은 상위법의 제약 없이 오지 국가의 보존과 유지만을 지상목표로 삼으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군주는 종교와 도덕이 명령하는 당위성에 따르기보다는 항상 본심을 감추고 운명과 상황변화에 따라 적절히 처신해야 한다.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인간적이고 정직하고 경건한(종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좋고, 또한 실제로 그런 것이 좋다. 그러나 [달리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면, 당신은 정반대로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군주는, 특히 신생군주는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처신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종종 신의 없이 무자비하게 비인도적으로 행동하고 종교의 계율을 무시하도록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운명의 풍향과 변모하는 상황이 그를 제약함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거기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바꿀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급적이면 올바른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지 말고 필요하다면 비행을 저지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은 마키아벨리가 정치현상을 도덕과 종교와는 분리되는 독립적인 영역으로 상정했음을 잘 나타내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마키아벨리를 "근대정치사상의 시조"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점은 다음에 계속되는 항목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1) 이익지향과 폭력의 문제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은 먼저 철저하게 이익지향적이다. 이익의 개념은 두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는데, 한편으로 마키아벨리 이전의 시대에 만연되어 있던 도덕적인 원리나 규범으로부터 정치행위의 독립성을 선언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 그 원리들은 군주에게 명료하고 건전한 지침을 제시하는 동시에 정념이나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의지를 표상하는 것이었다.32)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특정한 이익(민족국가의 건설)을 추구하는 정치야말로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의 핵심이었다.

이는 폭력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폭력은 무조건 나쁜 것이다"라는 식의 견해는 전통적인 도덕원리에 기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폭력도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적절하게 사용된다면, 오히려 이로울 것이라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폭력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함과 동시에 계속해서 감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차이는 잔인한 조치들이 잘 사용되었는가 또는 잘못 사용되었는가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믿는다. 그러한 조치들이 단번에 저질러졌다면 ... 잘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조치은 권력을 확립하는데 필수적이며, 연후에는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신민들에게 가능한 유익한 조치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 저질러진 조치들이란 처음에는 빈도가 적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감소하기보다는 증가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군주론, 65쪽)

2) 외양과 상징, 가장과 위선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핵심을 "외양"과 "상징"으로 파악했다. 다시 말해, 정치는 본질의 영역이 아니라 외양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적 행위자로서 통치자는 능란한 위선자요 가장자여야 하며 성실함, 자비, 인간애 및 종교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본다. 마키아벨리는 기만과 폭력이 횡행하는 정치상황에서 정치적 행위자는 정치적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보호색으로서 능숙한 가장과 위선을 필요한 한다는 의미에서 외양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만약 정치적 행위자가 한결같이 기존의 도덕률을 채택하게 되면, 그의 행위는 적에게 쉽게 노출되고 간파되어 정치적으로 파멸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자는 내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적절한 기만과 위장을 통해 외양을 조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볼 수 있는 반면에 당신의 진면모에 대해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 인간의 모든 행동에 관해서 특히 직접 설명을 요구할 수 없는 군주의 행동에 관해서 특히 직접 설명을 요구할 수 없는 군주의 행동에 관해서 인간은 결과에만 주목한다. .... 왜냐하면 보통사람들은 외양과 결과에 감명받기 때문이다. (군주론, 124쪽)

3) 목적과 수단의 문제

그리고 이렇게 외양과 상징, 가장과 위선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민의 지지를 확보하고 적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의 위선"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었던 것이다.33)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목적과 수단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흔히 마키아벨리즘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명제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마키아벨리가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논증과정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마키아벨리는 일단 목적은 근본적으로 (가치판단을 해볼 때) 선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수단은 언제나 목적에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라고 보는 것이다.34)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생명과 자유를 구하기 위해서는 수단의 선악여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군주론, 123쪽) 정리하면, 수단은 목적에 종속되는 것이며,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단이 되도록 통산의 도덕(선)에 일치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것 또한 마키아벨리의 주문이기도 하다. 이는 그의 결과주의적인 사고와도 관련이 깊다. 물론, 비상상황에서만 그러하다는 단서가 있기는 하지만, 군주는 국가의 보존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이라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다. 국가의 존립에 위기에 처해있다면, 그 위기를 극복하는 것(즉, 군주의 행위의 결과)가 그 과정보다 훨씬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외양과 상징 같은 기만술이 정당화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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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카를 > 시대적 상황과 마키아벨리의 생애

시대적 상황과 마키아벨리의 생애

고려대  심재우교수

1) 시대적 상황

마키아벨리(1469~1527)가 살던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였다.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인간위주의 화려한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었고, 사실은 엄청난 위기와 투쟁이 상존했던 격동의 시대이기도 했다. 당시는 정치사적으로 민족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근대국가 형성기로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침략과 방어가 끊이지 않던 그러한 시대였다.

이제 국가들은 점점 자국의 운명이 그들 자신의 손안에 있으며, 순전히 민족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을 각성해가고 있었다.4) 그리고, 군주들은 더 이상 신성로마황제와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인정하지 않은 채, 군주 자신의 몫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군주권력의 강화는 신흥 상인계급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확대되었으며5), 그결과 느슨한 권력분산체제인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적인 절대군주정이 곳곳에서 성장하게 된다.6)

하지만, 이탈리아만큼은 예외적으로 통일된 민족국가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나라였다. 반면, 이탈리아 국경 알프스 이북의 여러나라에서는 프랑스 등 강력한 근대국가가 건설되었고, 이는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큰 위협으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주변국가들은 이탈리아를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았고, 이탈리아는 내외적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7) 1492년에는 프랑스의 샤를 8세가 피렌체를 침공하여 메디치 정권을 붕괴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탈리아의 지도자들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이탈리아를 지켜내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데 골몰했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내적으로도 역시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외부세력이 강력한 근대국가를 형성하고 있는데 반해, 이탈리아는 본래 무수한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다가, 13세기에 들어서 겨우 몇나라로 정리되기 시작한 나라였다. 15세기에도 여전히 4~5개의 왕국(밀라노, 피렌체, 나폴리 등)이 혼재해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는 급격한 충돌과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피렌체 같은 경우에는 형식상 공화정체제임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사회 각계층간의 불안정한 연합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각계층간의 불화와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 지도자들에게는 이러한 분열상을 수습하고 정리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요컨대, 이탈리아의 이러한 내외적인 어려움은 이탈리아의 지도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러한 내외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강력한 통일 이탈리아를 지켜낼 수 있는가"하는 것을 최대의 화두로 던져주었으며, 마키아벨리의 사상도 여기서부터 출발한다고 하겠다.

 

2) 마키아벨리의 생애

마키아벨리는 1469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교육적인 분위기에서 순탄하게 자라난 마키아벨리에게 첫 번째로 큰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가 25세일 때 발생한 프랑스 샤를8세의 피렌체 침공이었다. 권력자들의 변동, 왕국의 전복, 농촌의 황폐, 도시의 살육, 잔혹한 살생, 피비린내 나는 전투양식 등 골육상잔의 가혹한 세태 속에서 인심은 나날이 흉악해지고 도의심은 땅에 떨여졌다. 샤를8세의 침공은, 외세의 침입으로 겪어야 하는 약소국의 비침함이 얼마나 큰지를 마키아벨리에게 똑똑히 보여주었던 것이다.8)

다음으로 마키아벨리에게 문제의식을 던져준 것은 사보나롤라였다. 사보나롤라는 본래 피렌체의 수도원장 출신으로 1494년 샤를8세의 이탈리아 침공을 계기로 메디치가를 추방하고 인민정부를 수립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기반으로 하여, 일종의 神政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러한 神政을 통해 모든 시민이 기독교 신자다운 생활의 재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철저하게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개혁을 꿈꾸었던 것이다. 또한 사보나롤라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중요시했고, 실제로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로마교황청과의 불화, 피렌체 내부의 반대파 등장, 경제위기 등으로 인해 파탄나게 된다. 결국, 1498년 사보나롤라는 화형대에 오르게 되고, 시민들은 죽은 시체에 돌을 던진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두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하나는 훌륭한 도덕심(도덕적 이데올로기)과 정신력만으로는 강력한 국가를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또 한가지는 민중의 지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민중에만 의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9) 그런데 우연히도, 사보나롤라가 화형당하던 바로 그날, 마키아벨리는 29세의 나이로 드디어 공직(제2정무처장)에 오르게 된다. 이때는 프로렌스공화국의 소델리니 정권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의 임무는 주로 외교분야였다. 그는 중요한 외교임무를 띠고 동분서주했다. 그는 주로 외국에 나가 활동하면서 상세하고 정확한 현지보고서를 많이 제출하는 등 성실하게 일했다. 그는 적은 봉급에 오랜 외국생활로 가난과 싸우면서, 헌신적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했다. 이때 외교사절로서 겪은 수많은 경험들은 나중에 "군주론" 등의 저작을 집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10)

1512년에는 새로운 시련이 시작되었다. 스페인군이 이탈리아에 진격하여, 피렌체를 정복한 것이다. 그리고, 피렌체에는 소데리니가 축출되고, 18년만에 다시 메디치 가문의 왕정이 복원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추방되고, 설상가상으로 1513년 2월에는 메디치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기에 이른다. 1513년에 특사로 석방되자,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로 하여금 자신이 쓸만한 인물이며, 그냥 놔두기에는 아까운 전문가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시키게 위해 "군주론"을 집필한다.11) 마키아벨리는 메디정권 하에서도 공직에 오르기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군주론"은 당시 군주인 로렌즈에게 헌정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관직에의 꿈은 멀어져간다. 낙심한 마키아벨리는 결국 피렌체 교외에서 침거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저술활동에 돌입한다. "전술론"(1519~1520), "로마사론"(1513~1519) 등의 저작은 이때 집필된 것이다.

1527년에 프랑스군의 로마 약탈, 교황의 도주,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인민봉기 등으로 메디치 가문은 마침내 붕괴되고, 피렌체에는 공화정이 복원된다. 마키아벨리는 다시 공직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같은 해에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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