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군인 - 가장 슬픈 이야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5
포드 매덕스 포드 지음, 손영미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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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소설이 왜 유명하고 필독서가 됐는지 도통 모르겠다. 이런 종류의 소설 이야기는 쌔고 쌨다. 부제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라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훌륭한 군인>(문예출판사, 2013)을 완독하고 난 직후의 내 생생한 감정이다.)

 

자녀가 없는 두 커플이 만나 9년 동안 그 관계를 유지했다면, 그래서 그것이 소설의 소재라면 거의가 커플의 한 쪽 여자와 다른 쪽 커플의 한 쪽 남자가 바람이 나거나, 아니면 쌍쌍이 바람이 나거나. 뭐 그 중의 하나다.

 

줄리언 반즈의 작품 중에서도 두 커플이 바람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고, 이언 매큐언의 소설에서도 비슷한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여타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너무 많이 봐서 식상한 소재 중 단연 으뜸이다.

 

그런데 타이틀이 훌륭한 군인’. 커플 간 불륜이라는 걸 꿈에도 몰랐고, 책 표지에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20세기 최소의 소설이며 영어로 쓰인 최고의 프랑스 소설이라 찬사 받은 작품!"이라는 사탕발림에 넘어가 읽기 시작했다.

 

, 그런대로 읽을 만은 했다. 근데 주제가 너무 맥빠지는 얘기고 식상한 얘기라 책을 덮고 이 소설의 의의와 가치를 곱씹어 봤다. 결론은 옛날에나 통용되는 문학성이라는 거. 그리고 더 중요한 작가의 숨기지 않는 오리엔탈리즘에 냉소를 금치못했다.

 

저자인 포드 매덕스 포드는 1870년대 사람이다. 영국의 작가이자 비평가. 그는 대영제국의 그러니까 빅토리아 후기 시대의 문화적 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어보면 상류층 문화와 종교생활이 어떻게 데카당스적 라이프스타일로 수렴되는지 캐릭터에 생생히 녹아있다.

 

사실 이 부분이 이 소설을 끝까지 읽는 원동력이었다. 식상하고 뻔한 내용을 아주 훌륭하게 포장하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다. 그 시대상을 인물들에 수렴해서 보여주는 것은 아주 훌륭한 작가적 능력이다. 문학성을 담보하는 지표 중 하나랄까.

 

그래서 이 작품을 번역한 손영미는 빅토리아조 후기에서 1차 대전까지의 사회상을 화려하고 정교한 표면 아래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는 의미심장한 소설이다. 또한 한 번 읽으면 잊을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장면들이 작품의 아름다움을 베가시킨다.”라고 상찬했다.

 

번역자만 그런 게 아니고 영미 쪽 평론들도 대체로 찬사 일색이다. 그리고 권위있는 문학지나 대학에서 필독서로 지정되어 있다. 진부한 내용의 소설이 이만한 가치를 받을 만한지 의구심이 정도로 필독서 리스트는 찬란하기 그지없다. 아래 추천 목록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영어 소설 100

<옵서버>지 선정, 가장 위대한 소설 100

영국 가디언지 선정, 필독 소설 1000

하버드 대학 필독서 100

미국 대학위원회 SAT 추천 도서

피트 박스울, 죽기 전에 읽어야할 1001권의 책

랜덤하우스 선정 20세기 영문소설 100

칼리지 보드 추천 고등학생 필독도서 100

 

무려 하버드 대 필독서 100선에 선정되어 있는 것도 모자라 칼리지 보드 추천 그교생 필독서 100선에 포함되어 있다. 이 식상하고 진부한 불륜 이야기가 말이다. 아무리 그 시대상을 작품에 생생히 반영했다하더라도 그 중심 주제가 불륜인데 고교생 필독서라니 이건 너무하다싶다.

 

아마도 이 소설을 이리도 높게 평가한 건 영미쪽 시선이 많이 반영된 듯하다. 제국주의를 지나 냉전체제를 이어오며 영미 상류층에 이보다 더 판타스틱한 문학적 데카당스는 없을 듯해서다. 이 시절(187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자본주의는 맹위를 떨쳤으니,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던 때였다.

 

그래서 이 작품의 화자 존 다우얼(억만장자쯤 되는)은 사랑 없이 돈으로 마음에 든 여자를 산 다음 영국으로 이주한다. 거기서(정확히는 독일 온천) 비슷한 부류의 에쉬버넘 부부를 만나 9년 동안 친분을 쌓는데, 이 친분의 세월이 슬픈 이야기라는 거다.

 

슬픈 이야기의 요체는 이렇다. 다우얼의 아내 플로렌스가 자신을 속이고 에드워드와 붙어먹었다는 사실을, 에드워드가 죽은 후 그의 아내 레오노라에게 그 진실의 전모를 전해 듣는 것이다. 이걸 다우얼의 입을 빌려 회상하는 형식으로 전달하는 내용.

 

이 작품은 외형상 전형적인 불륜 이야기이다. 그런데 작가 포드 매덕스 포드는 그 자신과 그가 포함된 계층의 아비투스를 천연덕스럽게 잘도 인물에 구현해 놓았다. 이 소설이 최악인 이유는 포드의 그 유감없이 발휘되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작중에서 에드워드 에쉬버넘은 훌륭한 군인으로 그려진다. 키가 크고 금발에 잘생겼으며, 동정심이 많고 감상적이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대대로 내려오는 부와 권력의 상징인 에쉬버넘 가문의 기둥이다. 여자들이 안 좋아 할 수 없는 요소를 다 갖고 있다.

 

그는 손만 뻗으면 여자들을 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난봉꾼이 되는 건 아마도 필연적이었을 거다.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여자들에게 그는 항상 휘둘렸다. 잘생기고 튼튼한 육체에 비해 감상적이고 소심한 성격은 늘 그런 여자들에게 먹잇감이 됐다.

 

그런데 그가 사랑했던 순수한(?) 여자들 대부분은 그가 인도에서 주둔했던 때에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이다. 자기 부관의 아내를 사랑했고, 그곳에서 20살도 안 된 메이시 메이단을 만나 사랑하여 영국으로 데려와 자살하게 만들고, 더욱이 에쉬버넘 부부의 양녀로 삼은 낸시까지 사랑하게 된다.

 

에드워드의 정부였던 플로렌스를 제외하고 에쉬버넘이 마음이 아플 정도로 사랑했던 여자들은 모두 인도 여자들이거나 하녀들이었다. 그리고 그 성적 대상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그녀들이 죽었을 때 에드워드의 행동으로 나타났다. 그는 전혀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메이시 메이단이 죽은 이유도 그가 플로렌스에게 그녀는 자기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말을 들어서였다.

 

보통 제국주의를 풍자한 만평 중 일부는 제국주의 국가들을 힘있는 군인으로 표현하고 식민지 나라를 여성으로 그려 놓는다. 그래서 제국주의적 착취를 보다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는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 바로 에쉬버넘 대령이라는 인물을 통해서이다. 그를 통해 작가는 영국과 인도와의 관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이 소설을 읽고 딱 이 이미지가 떠 올랐다. 물론 태평양 전쟁기에 일본제국주의 만평이지만, 인도에서 에드워드는 메이시와 낸시를 저런식으로 대했을 거 같아서..ㅎㅎ))

 

이 소설이 최악인 이유는 작가의 오리엔탈적 인식에 더해 그 윤리적 인식의 박약함에 있다. 아무리 타이틀을 반어적으로 사용했더라도 전편을 흐르는 에드워드 삶의 궤적을 동경하는 듯한 화자 다우얼의 인식을 보면 대번 알 수 있다.

 

존 다우얼은 에드워드 에쉬버넘과 9년 간 친분을 쌓으면서 그의 난봉꾼적 기질을 그가 돈이 많고 감상적이어서 어쩔 수 없는 본성이라고 치부한다. 자기라도 에쉬버넘처럼 행동했을 거라고 서슴없이 결론내린다. 자기 부인하고 바람난 사람에 대한 평가치곤 매우 관대하다.

 

다우얼이 에쉬버넘 부부를 만나 레오노라에게 플로렌스의 악행(?)과 에드워드의 바람기와 낭비벽을 전해들어도 다우얼은 에드워드를 비윤리적인 사람이라고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감상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약점으로 단정짓는다. 다우얼의 회상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시점까지도 여전하다.

 

물론 여과 없이 이러한 불륜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며 훌륭한 군인이라는 반어법을 사용하여 당시 시대상을 고발하는 비판적 작품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있다(대부분의 평단이 이런 시각이지 않을까)하지만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곰곰 생각해 보면 나는 매덕스 포드라는 사람이 가진 계층적 아비투스를 도저히 좋게 봐 줄 수 없다.

 

이와 같은 작품을 청소년 필독 권장도서로 추천한다는 게 참으로 개탄스럽다. 우리가 그만큼 오리엔탈리즘에 부지불식간에 길들여져서 그런듯하다. 이보다 좋은 작품들은 널리고 널렸다. 모두가 상찬해 마지않는 작품이지만 나는 별로였다. 단언컨대 페미니즘 관점에서는 최악의 평가를 받을만한데 아직까지 이런 평이 없다는 게 신기할 뿐!()

 

 

[]

1. 며칠 전 쿳시의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를 읽고 보니, J.M. 쿳시가 포드 매덕스 포드를 연구하여 학위를 받았다고. 그래서 그런지 쿳시도 페미니즘 계열에서 좀 비판을 받는 듯하다.

2. 포드 매덕스 포드는 서구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달랑 <훌륭한 군인> 하나만 번역된 듯하다. 그 어떤 다른 작품도 발견하기 어렵다.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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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5-18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독서 100선, 을 오래전부터 불신했어요. 이걸 정하는 사람들이 완독하지 않고 정했을 거라고 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책을 필독서로 선정해서 말이죠. 그다음부턴 내가 읽고 좋았던 것만 남에게 추천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악행과 불륜이 들어가면 저는 재밌던데... ㅋ 님의 리뷰를 읽어 봐도 재밌을 것으로 느껴집니다. 점수는 짜게 주셨지만요...ㅋㅋ

yamoo 2023-05-19 09:37   좋아요 1 | URL
저도 필독서 100선 별로 신뢰하진 않습니다만..
타임지 선정 100선, 하버드 필독서 100선..뭐, 이런 추천리스트는 독서 활동 실체를 떠나 세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심지어 비밀독서단 선정 책들의 경우 그렇지 않은 양서에 비해 엄청난 판매부수를 자랑하죠. 유진 오닐의 밤의로의 긴 여로가 뭐가 그리 대단한지 지금도 도통 모르겠습니다. 물론 톨스토이의 부활같은 책들은 정말 충분히 그 위대함에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만...그렇지 않은 책들 때문에 불신이 쌓인다는..^^;;

악행과 불륜...프롯이 재미있고 드라마틱하게 짜인 소설이라면 확실히 재밌다고 느낍니다. 가독성도 뛰어나고...근데 포드의 책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확실히 읽어보셔야 알 거에요~~그런 면에서 페크님은 이 책을 한 번은 일독하셔야할 듯합니다..ㅎㅎ
 
파울리나 1880 대산세계문학총서 112
피에르 장 주브 지음, 윤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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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소설을 읽을 때, 처음에 느낌이 별로라고 느끼면 바로 손절해야 매몰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래서 소설 초반부, 즉 50여 페이지를 읽고 계속 읽을지 말지를 결정한다. 대체로 그렇다. 예외는 문장이 아주 유려하거나 가독성이 좋게 편집된 작품인데, 이 소설은 후자에 속했다.

 

더군다나 피에르 장 주브라는 프랑스 작가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생소한 작가다. 오래 전 일본에서 건너온 세계문학 전집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작가였고, 최근에 민음사나 을유문화사 등 새롭게 단장한 세계문학전집에서도 소개되지 않는 작가였다.

 

그런데 문지의 대산세계문학 총서 112권에 장 주부의 <파울리나 1880>(문학과지성사,2012)이 출간된 거다. 이건 아마도 대산세계문학 시리즈라서 가능한 듯하다. 이 총서에는 정말 희귀한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목록을 보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즐비하다.

 

어쨌거나 생소한 작가의 생소한 작품을 읽기 시작했는데, 초반이 무척 지루했다. 흡입력 있는 사건이랄 게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타이틀에서 보듯이 파울리나라는 한 여자의 일생을 소개하기 때문이리라. (이와 같은 인물 전기 형식의 소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은 대체로 그 주제가 사랑으로 수렴되는데, 작가마다 사랑의 서사가 다른 것은 뭐 상식에 속하는 편이다. 신파로 끝나거나 아님 사랑의 쟁취로 끝나거나. 이도저도 아닌 제3의 선택으로 끝나거나. 뭐 사랑했던 남자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 뭐 그런 얘기.

 

이 소설 역시 위에서 분류한 3가지 중 하나로 귀결된다(하지만 여 주인공은 안 죽는). 뻔한 이야기인데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 즉 형식적 미학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매우 짧은 118개의 장과 상대적으로 매우 긴 마지막 119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은 다시 프롤로그 격인 푸른 방(1~2)’과 에필로그 격인 햇빛에서(119)’를 제외하고 토라노(3~32)’, ‘1870~1876(33~62)’, ‘성모 방문(63~92)’, ‘검푸른 천사(93~118)’ 4개의 부로 묶여 파울리나 삶의 궤적을 따라간다. 물론 그녀와 미켈레 백작의 사랑이야기도.

 

이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19세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지역의 영주인 주세페 판돌리니 가의 딸이 매우 아름답게 태어난다. 태어날 때부터 격정적이고 아름다운 딸은 매우 종교적인 성향을 가졌다. 아버지와 오빠의 시기와 감시 속에서도 몰래 유부남이자 아버지 친구인 백작을 사랑하게 된다.

 

파울리나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한 몸에 성()과 욕()이라는 상반되는 두 힘에 끌리게 된다. 그래서 마치 두 인물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인다. 마음은 유부남을 사랑하며 육체적 쾌락을 갈구하지만 종교적으로는 이게 명백한 죄라는 사실에 너무도 괴로워한다. 그러다가 수녀원에 가서 마음을 정화해 보려 하지만 실패한다.

 

수녀원을 나온 후 연인 생각에, 백작이 사랑했던 자신의 사진을 그에게 보내 다시 만나게 되고, 격정적인 시간을 함께 보낸다. 그리고 나서 권총으로 백작을 살해하고 감옥에서 형을 받아 살다가 풀려난다는 게 주된 얘기다. 요즘 잘나가는 막장 드라마나 영화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줄거리.

 

118장에 파울리나 판돌피니의 생애가 요약적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이게 이 소설의 줄거리라 봐도 무방하다. 이 작품은 결국 파울리나의 생애가 핵심이기 때문.

 

1849614일 밀라노에서 출생. 마리오 수세페 판돌피니와 그 아내 루치아 카롤리나의 막내딸.

독신, 무직.

1877년부터 1879년까지 만토바의 성모 방문 수녀원에서 수련 수녀로 지냄.

1880828일 피렌체에서 정부(情夫)인 미켈레 칸타리니 백장을 살해함.

1881412일 자로 피렌체 법정에서 25년 형을 선고받음. 토리노의 감옥에서 형을 살다가 1891615일 사면됨. (p242)

 

사실 표면적으로는 별것도 없는 진부한 사랑 얘기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소설의 형식미가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원래 피에르 장 주부는 시인으로 출발했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의 시에 심취하여 문인들과 함께 <황금 띠>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첫 시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인 출신이 소설을 쓰면 어떤 작품이 산출되는지 이 작품을 읽어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산문이 매우 시적이고, 4부의 성모 방문편은 아예 기도문을 빙자한 시를 대놓고 시전한다. 심지어 65장은 한 문장이다. “나는 은총을 잃고 전락했지만 행복하다.”

 

이 뻔한 작품을 끝가지 읽을 수 있었던 동력은 이와 같은 짧은 장의 매력 때문이다. 짧으면 1문장 많으면 3페이지를 넘지 않는 장들은 매우 함축적인 문장들과 압축적 서사 전개로 파울리나의 삶을 끝까지 살펴볼 수 있게끔 한다.

 

보통 여성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건 전기적 성향의 소설들은 여주인공이 대개가 빼어난 미인이다. 그 옆에는 항상 돈 많고 잘생기고 부러울 게 없는 백마 탄 남자가 연인으로 등장한다.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주인공도 클리셰. (헌데 책 표지의 그림 여인은 내 생각에 정말 짜증나게 안 생겼다.)

 

여기서 그쳤다면 이 작품은 3류 연애소설에 그쳤을 거다. 이 작품이 이런 진부함을 가볍게 뛰어 넘는 건 두 가지 요소 때문이지 않을까. 하나는 위에서 밝혔다시피 형식미이고, 다른 하다는 캐릭터의 성격이다. 주인공인 파울리나가 가진 그 이율배반적인 성향을 작가는 무의식의 심연을 통해 들여다보기를 시도한다.

 

물론 아르투어 슈니츨러처럼 정신분석적 메타포를 능수능란하게 작품에 녹여내지는 못했다. 슈테판 츠바이크처럼 무의식의 심연을 심리적 초조함으로 형상화하지도 않았다. 단지 투박하지만 내면의 그 상반된 두 힘의 이동을 서사를 통해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죄의식과 쾌락적 성향, 즉 성적인 성향과 종교적인 성향이 아주 팽팽하여 분열적 성향을 자주 보여준다. 이는 투박하지만 정신분석적으로 인물을 분석할 여지를 주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이 3류 통속소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연대를 참작하면 충분한 작가적 역량이지 않을까 한다.)

 

작가는 이 부분을 매우 상징화해서 보여주고 있다. 7장에서 파울리나는 토라노 영지에 있는 새끼염소를 매우 사랑했다. 헌데 파울리나를 좋아하지 않던 농부는 다른 염소들을 죽일 때 그 염소도 같이 죽이겠다고 했다. 염소를 구할 시간이 없었던 파울리나는 직접 염소를 죽였다.

 

그녀는 축사로 들어갔다. 염소를 죽이라고, 죽이라고, 하지만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중략) 그녀는 칼이 염소의 목에 파고드는 것을 느꼈고 그녀의 손은 뜨거운 피로 물들었다. 얼어붙은 듯 그대로 서 있는 그녀의 눈빛은 끔찍할 정도로 공허했고, 오직 가녀린 아랫입술만 파르르 떨렸다.” (p26)

 

이 장면은 113장에서 그대로 차용된다. 염소는 미켈레 백작으로 치환되어 있다. 칼이 염소에 목에 파고든 것처럼 총은 백작의 목을 관통했다. 그녀의 얼굴은 피로 물들었고, 얼어붙은 듯 그녀는 끔찍할 정도로 겁에 질리고 절규한다. 파울리나는 소유할 수 없는 사랑이면 대상을 멸함으로써 자기 사랑을 완성하는 성향을 가졌다. 정신분석적 접근이 놓칠 수 없는 인물이다.

 

, 여러 얘기를 장황하게 하긴 했지만, 딱히 추천할 만한 소설은 아닌 듯하다. 재미 면에서 이 작품은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릴 듯하다. 다만, 소설의 형식미를 주로 보는 분이나,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는 분들이 보면 더할나위 없는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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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5-10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별 3개라니! 작가가 이 사실을 알면 섭하겠어요.ㅋㅋ
어쨌든 읽어 볼만은 하겠어요.^^

yamoo 2023-05-12 06:41   좋아요 1 | URL
작가는 아주 오래 전 사람이라 뭐, ..ㅎㅎ
아마 유미주의나 탐미주의 계열 좋아하는 분들이면 그래도 재밌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근데 이 계열 좋아하는 사람이 좀 드물고, 이 소설은 가독성은 좋은데 진부한 면이 많아 인기가 많이 없을 듯합니다..ㅎㅎ

그나저나 휴대폰으로 댓글 달기는 조심스럽네요. 댓글이 안 달려서 어제와 그제 날려먹은게 많아요..ㅜㅜ

페크pek0501 2023-05-12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신분석학과 관련한 책이라면 흥미로울 듯합니다. 심리학, 인간 이해, 정신세계 등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검색해 보겠습니다.^^

yamoo 2023-05-13 09:00   좋아요 0 | URL
페크 님, 정신분석학과 관련한 소설이긴 합니다만..
정신분석학을 디테일하게 살려 작품속에 녹여내진 못한 작품이에요. 작가가 살던 당시는 정신분석학이 태동하던 시기라서 감안하시고 보면 좋을 듯한데...어쨌거나 정신분석학을 소설에 반영한 초창기 작품군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한 듯 보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프로이트와 동시대에 살면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절묘하게 작품속에 녹여낸 슈니츨러에 비하면 격이 많이 떨어지긴 합니다.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장 주브 보다는 아르투어 슈니츨러 작품들을 강추드립니다!!
 

아주아주 안 좋은 상황이 도래했다. 아주 고약한 병이 다시 발발했기 때문인데, 이 병에는 약도 없다. 이게 왜 재발했는지 나는 도통 모른다. 정말 왜 다시 도졌을까? 도대체 왜? 왜?!!


어제 책을 40여 권 샀다. 그 전날에도 30여 권을 우습게 구매했는데...

저번 주 4월의 마지막 주에 무려 100여 권을 샀나보다. 책이 아직 정리도 안됐고 도착하지 않는 책 박스도 2박스다. 한 박스에 30여 권씩 담겼을 거다.


무슨 책을 샀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다만 내 통장에는 30여 만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통장을 보며 자책했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버려야 할 책을 왜 사냐고~~~~!!, 다 갖다 버릴 거다!!"라는 아부지의 험악한 언성이 두렵다. 그래서 사무실로 배송을 했는데...


사무실에도 내 책 때문에 골치다. 어디 놓을 때가 없다..--;; 저번달에 70여권 기증했는데, 이번 달에도 한 20여 권 기증할 태세다. 읽으려고 사 놨는데, 자꾸 하드커버 책을 사제끼니 저저번 달에 산 책도 없애버려야 할 상황이다..ㅜㅜ


4월 초부터 띠엄띠엄 계속 산 게 마지막 주에 무지막지하게 지른 원동력이 된 듯하다. 아~~ 난 항상 왜이럴까??



이게 4월 초에 구매해서 찍은 사진인데, 미술과 관계된 책을 사다보니, 듣보잡 소설도 눈에 밟히는 즉시 데리고 오니 정말 책이 기하급수적으로 느는듯하다. 


원래 유발하라리 책들은 읽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1급 책만 읽는 분이 예상외로 끝내준다고 해서 닥치고 뒷북치고 있다. 오른쪽 위 3권이 행복의 본질에 대한 1급서로 취급되는 책들이다. 1급인지 아닌지 읽어보려고 구매했다.


이렇다 보니 정말 책은 순식간에 100권이 200권이 된다. 월간미술과 미술세계 잡지도 자주가는 헌책방에 나와있어 닥치고 구매하고 보니 책이 순식간에 쌓이는 거다.


정말 내 사무실 책꽂이는 비었었는데 어느 순간 책으로 넘치고 있다. 하~~ 정말 돌아보니 무섭다. 오늘 보니 책에 치여 사는 듯하다. 버려야 공간이 생기는데 내 방에는 발디딜 틈이 없다. 이렇게 살아야하는지 모르겠다.


책만 보면 돌아버리겠는데, 아침에 읽는 책 읽는 맛은 뭐하고 바꾸지도 못해 돌아버릴 지경이다. 난 왜 이러고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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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05-02 2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남 일 같지 않은 상황인데요... ㅎㅎㅎ 제 방에 책 탑이 엄청 많이 생겼어요. 책장에 꽂힌 책을 빼려면 책장 앞에 생긴 책 탑을 치워야 해요. 그리고 다시 책 탑을 쌓아요.. 이거 진짜 은근히 시간 잡아먹는 일이에요. ^^;;

yamoo 2023-05-03 19:14   좋아요 1 | URL
사이러스님 올만입니다!
예전부터 사이러스님두 책 때문에 골치아픈 상황을 많이 겪은 듯해요. 저하구 비슷하십니다요~~~ㅎㅎ

맞아요, 정말 시간 잡아 먹는 일이에요!!!

새파랑 2023-05-03 0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ㅋ 책탑 사진이 웅장합니다 ~!! yamoo님은 정말 미술에 진심이시군요 열정이 너무 부럽습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군요 ㅋ

yamoo 2023-05-03 19:16   좋아요 2 | URL
어제 밤에 박스 하나가 도착했고, 아마도 낼 한 박스 더 도착할 듯한데...모아 놓고 사진 찍으면 가관일 겁니다..ㅎㅎ

예...미술책...한국작가론이 있으면 거의 구매하는 편이구요...도록도 괜찮은 거 있음 구매합니다. 도록은 책도 크고 무게도 무거워서 정말 골치아픈데...이게 또 보는 재미는 끝내주는지라...^^;;

열정은...무슨~~ 미친거죠..ㅎㅎㅎ

stella.K 2023-05-03 13: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뭔가 마음이 헛헛하셨나 봅니다.
혹시 이 책들 사실 때 단게 땡기시진 않던지요?
그렇다면 이미 산 책이야 어쩔 수 없고 다음엔
단 것을 드시면서 살 건지 말 건지를 천천히 고민해 보시는 건 어떨런지요? ㅋㅋ
저도 책탑을 쌓아놓고 건드리지도 못하는 모순에 빠져있습니다.
잘못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어서리.ㅠ
암튼 아침에 책을 읽는 기쁨이 있으시다니 이왕 사신 책
즐겁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yamoo 2023-05-03 19:19   좋아요 3 | URL
마음이 헛헛한게 아니라...이상하게 주기적으로 책탐이 심해지는 거 같아요. 해마다 4-5월이 한 해동안 가장 많은 책을 사는 거 같아요..--;;

단 거 먹어도 소용이 없어요. 책방 둘러보면 미친듯이 주문하고...그땐 정말 내 정신이 아녀요. 택배 상자를 받아야 정신을 차려요..그땐 이미 늦어서뤼...--;;

아침에 책을 읽는데 어느 세월에 산 책을 다 읽을지 한심합니다...ㅜㅜ

페크pek0501 2023-05-05 17: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서 사고 싶은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그중에서 골라 나중에 한꺼번에 구매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즉흥적으로 사는 건 금지하고 있어요. 그렇게 신중하게 사도 넘겨 보지 못한 책이 생기더라고요. ㅋㅋ 보석보다 책이 저렴하다는 사실로 위안을 받읍시다요...
그래도 책 많은 걸 보면 행복하실 듯합니다!!!

얄라알라 2023-05-05 21:38   좋아요 3 | URL
페크님 방식에 한표요!!^^ 오늘 담아 놓고, 바로 결제하지는 않는다! 저는 옷이나 책 모드 그 방식을 씁니다~

보석보다 책이 저렴하다는 사실로 위안 ㅋㅋ
아! 여유로우신 페크님의 농담에 웃고 갑니다.

yamoo 2023-05-08 20:14   좋아요 1 | URL
저도 엔날에 쓴 방법인데...
주기적으로 필요한 책을 구하러 책방에 가면 관련된 책들을 많이 쓸어옵니다.
배송받고 나면 후회가 밀려와요...ㅜㅜ
아무리 좋다고한들....공간이 없으니 치워야하는데...이건 뭐, 답이 없어요...--;;
요즘은 책탑만 보면 한숨이 나고 저걸 어쩌지...라는 생각에 가습이 답답해집니다..--;;

yamoo 2023-05-08 20:15   좋아요 1 | URL
얄라님은 옷을 그렇게 구입하시는군요!!
저는 옷은 거의 입어보고 구매하는지라..ㅎㅎ

당근 보석보다야 저렴하고 다른 놀이거리보다 확실히 저렴하지만...책 읽은 다음 보관이 문제에요..보관이!!
 
알렉시.은총의 일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1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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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그대여, 무척 긴 글이 될 거요.” 소설의 첫 문장입니다. 자신의 부도덕함을 토로하기 위해 선택한 이 문장은 매우 인상적이고 강렬했습니다. 책을 펼쳐 첫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대작을 만났다라는 느낌이었고, 이어지는 문장을 따라가면서 이는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 고전적 소설 한 편을 아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편지 형식의 고백체 소설은 아주 오랜 만인데, 그냥 한 통의 편지를 94페이지에 담았습니다. 장이나 절과 같은 소설의 형식은 찾아 볼 수 없고, 그냥 아주 긴, 사연을 담은 편지 한 통입니다.

 

편지 내용은 동성애자인 남편이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는 형식으로 돼 있지만, 그게 자기변명이 아니라, 한때의 경솔한 약속에 대한 사죄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도덕함을 토로하는 글이지만 문장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강력합니다.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나 앙드레 지드의 <배덕자>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1인칭 화자가 삶을 반추하며 말하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특히 주인공이 말하는 방식에 반해 계속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죄를 범할 기회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소. 이내 우리의 행동은 징후로서의 가치밖에 지니지 않음을 깨달았소. 우리의 타고난 기질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거요.”

 

처음의 생각이 시간이 지나 다르게 깨달아지고, 이를 통해 판단으로 나아가는 화자의 말하기 방식은 글을 읽는 내내 빠져들 수밖에 없게 합니다. 하오체 문장은 고전적이지만 화자의 고백에 독자를 끌어당기는 묘미를 줍니다.

 

그리고 다음 부분을 읽게 되었을 때 줄을 치고 별표를 하며 3-4번 반복해 읽었습니다. 평소 내 생각과 너무도 일치하는데, 멋진 문장들로 화자가 말해주니 감동이 배가 되었습니다. 베그르손을 깊이 연구한 철학자가 생의 마지막에 들려주는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요. 좀 길게 인용해 봤습니다.

 

삶은 그냥 삶이오. 삶은 우리가 가진 단 하나의 좋은 것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저주요. 우리는 사는 거요, 모니크.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특별하고 유일한 삶을, 우리가 아무것도 손댈 수 없는 과거 전체에 의해 결정된 삶, 아주 작은 것으로도 미래 전체를 결정지을 수 있는 삶을 사는 거요. 자기의 삶. 오로지 그 자신만의 것인, 두 번 있지 않을, 스스로 온전히 이해했는지 단 한 순간도 확신하지 못하는 삶 말이오. 삶 전체에 관한 이 말들은 삶의 매 순간에 대해서도 똑같소. 타인은 그저 우리가 있고 움직이고 말하는 것을 볼 뿐이오. 우리의 삶을 볼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뿐이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보고 우리의 삶이 이러저러하다는 데 놀라면서도, 그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오. 우리의 삶을 심판할 때조차 우리는 여전히 그 삶에 속해 있소. 삶을 향한 찬양도 비난도 삶의 일부인 거요. 삶은 언제나 삶을 비출 뿐이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우리 각자에게 세상은 오로지 우리 삶에 와 땋을 때에만 존재하는 거요. 그리고 삶을 이루는 요소들은 분리될 수 없소.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본능들과 우리가 드러내지 못하는 본능들은 결국 같은 곳에서 나왔소. 그중 하나를 바꾸면 다른 것도 함께 바뀔 수밖에 없지. 말은 이제, 너무도 많은 사람이 사용하기에, 모니크, 더 이상 그 누구한테도 적합하지 않게 되어버렸다오. 어떻게 과학적인 용어 하나가 하나의 삶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이오. 하나의 사실조차 설명할 수 없으면서. 그저 가리킬 뿐이지. 늘 비슷하게 가리키는데, 그런데도 다른 삶 속에 있는 것 같은 사실일 수 없고, 하나의 삶 속에 있을 때조차도 아마도 같은 사실일 수 없다오. 사실 따지고 보면 단순하오. 해명하기 쉽고, 어쩌면 당신은 이미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 해도 나 스스로를 설명하는 일은 그대로 남는다오. (pp32-33)

 

정말 놀랍지 않나요?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이 작품을 발표한 때가 20대였습니다. 그것도 대중에게 첫선을 보이는 데뷔작에서 말이죠. 20대 여성 작가가 중년의 남성 화자를 통해 삶에 대한 통찰을 이 정도까지 설파할 수 있다는 데에 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책에는 <은총의 일격>도 수록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알렉시>가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앞에 인용된 부분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다른 모든 문장은 이 부분을 위한 사족같이 여겨졌으니까요. 정말 끝내주는 책이라 아니할 수 없고, 작가 유르스나르를 모르시는 분들에게 강추하는 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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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4-26 14: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런 평을 받는 작품은 궁금해서 안읽을수가 없더라구요 ㅋ 저 읽어보겠습니다~!!

yamoo 2023-04-26 19:30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은 일독한 후 어떤 느낌이실지 궁금합니다. 리뷰로 남겨주시면 얼른 가서 탐독하겠습니다..ㅎㅎ

정말 대단한 데뷔작입니다!

페크pek0501 2023-05-01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추하신다니 어떤 책인지 궁금합니다. (검색해 봐야징... 후다닥!!!)

yamoo 2023-05-02 10:12   좋아요 0 | URL
이 책, 페크 님께서 읽으시면 어떠실지...
전 굉장히 인상깊었습니다.
강추해 드립니다~ 일독하시면 아주아주 좋을 듯합니다!!^^

그레이스 2023-05-01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입력합니다.

yamoo 2023-05-02 10:13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두 일독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4.20.은 내 생일이다. 생일이라고 뭐 특별한 뭔가를 하지 않는다. 가끔 친한 지인들이 생일이라고 밥을 사 주거나 공연 티켓을 주곤했지만 이런 것도 요 몇년 사이는 없었다. 평일이라면 주야장천 일하다가 집에 와서 엎어져서 자는...뭐 평소와 똑같다. 


근데, 23년 4.20.은 달랐다. 지인 중에 공연 전시 꼭꼭 챙겨보는 마니아가 있는데, 이분이 20일 지방 일정으로 시간이 겹쳐 예매한 걸 내게 넘긴다는 거다. 이 때가 3월 하순 무렵이다. 에드워드 호퍼전이라니. 것두 4.20.이 오프닝하는 날이었다.


난 바로 콜~을 했고, 은근히 20일만 기다렸다. 에드워드 호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현대미술가 중 한 사람이라, 사전 예매하려고 했는데, 가장 바쁜 때라서 예매시작하는 날도 몰랐다. 근데 예매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매진됐다고. 어렵게 구한 티켓을 내게 양도해준 지인이 고마울 뿐..ㅎㅎ


15시 오픈이라 조퇴를 하고 서둘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으로 향했다. 오래 전에 몇 번 왔었는데, 다시 가려니 어디가 어딘지 몰라 헤멨다. 배재빌딩 앞이었다는 데 다시 한 번 놀랐다. 아니, 미술관이 바로 배재빌딩 바로 앞이네?! 신선한 충격..ㅎㅎ


15시 오픈 시간 이전에는 들여보내 주지 않아 옆 배재 박물관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냈다. 거기 2층에 보니 임진우 건축가의 서울 정동 일대 일러스트 전시가 있었다. 매우 볼만했다. 작은 수채화(A4 크기) 그림이 대부분. 50점은 넘어 보였다. 정동 지역의 곳곳을 일러스트로 담아냈는데, 건축가의 섬세한 스케치가 돋보이는 그림들이었다.


시간이 돼서 호퍼전시관으로 가서 둘러보았다. 호퍼 그림을 다량 보유한 휘트니 미술관과 서울시립 미술관이 협약을 맺어 전시가 성서됐단다. 휘트니 미술관이 보유중인 호퍼 그림 중 270점이나 들여왔다. 호퍼의 아주 유명한 그림 몇 점은 빠졌지만 초기작품부터 상업용 일러스트까지 아주 다양했다. 미술관 1층부터 3층까지 꽉 채운 전시. '호퍼; 길위에서'

(위 그림이 주제 '길위에서'의 메인그림으로 걸려있다. 그의 일대기를 조명하는 주제 치고는 좀 문학적인듯. 호퍼는 판화 유화 수채화 일러스트 등 미술분야에서 안 해본 분야가 없는 전천후 작가였고, 그래서 전문성이 모호한 작가로 분류된다고..)



사실 호퍼 책은 딱1권 봤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2010년 쯔음에 읽었는데 당시 번역된 책은 딱1권이었다. 엔날 마로니에북스에서 나온 책이었는데, 지금도 표지만 바꿔서 꾸준히 나오고 있다. 내 기억에 표지 갈이만 3번이상이었던 거 같다. 내용은 하나도 안바뀌고 표시 바뀔 때 가격만 뛰었던 듯하다. 어쨌든, 호퍼에 대한 지식은 이 거 한 권 읽는 게 전부였다.


요새 보니 호퍼 책이 몇 권 더 출간됐다. 헌데 타센에서 2만5천원에 나와있는 호퍼 책은 왜 번역을 안해주는지 몰겠다. 










1904년 즈음에서 호퍼는 프랑스 파리로 가서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 기독교(개신교)도이던 어머니의 도움으로 같은 교파의 집에 머물렀다. 당시 이 집 내부를 그렸던 그림들이 전시 초반부를 길게 장식하고 있다. F3 크기의 판넬에 유화로 그린 그림이 20점은 족히 돼 보였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서 복기해 보면 호퍼는 작은 사이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주로 판넬에 유화로 그렸다. 물론 큰 사이즈의 그림은 캔버스로 그렸다. 수채화도 꽤 많이 그렸는데, 이건 아내에게 받은 영향이라고. 


보통 수채화는 아무리 잘 그려도 잘그렸다는 느낌을 못받는 1인. 헌데 호퍼의 수채화는 정말 잘그렸다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불투명하게 해변이나 당시의 주택(주택은 호퍼가 관심있는 주제였다) 또는 배들을 묘사한 그림들을 보면 매우 치밀하게 계산하여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다. 


2시간을 꼼꼼히 보고 1층에 내려오니 호퍼가 그린 상업용 일러스트들이 즐비했다. 호퍼는 10년 간 그림을 하나도 팔지 못했는데 이를 만회하고자 상업용 일러스트를 주로 그렸다고. 잡지 표지나 신문 연재물에 일러스트 그림을 주로 그렸다. 


(A4크기 잡지의 표지 일러스트. 1919년10월호 MORSE지)



20세기 전반기의 미국은 일러스트의 시대였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들에게 상업용 일러스트 주문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고. 호퍼의 일러스트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이게 도록에서 보던 그 호퍼의 그림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 작가를 가리면 호퍼가 그린 그림이라고 전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주 작은 크기의 일러스트. 엽서 크기. A4를 반으로 접은 정도. 이것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정방형 스케치도 전시되어 있다.)


1층 전시관이 제일 컸는데, 신문과 잡지에 그린 일러스트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예외적으로 사진도 찍을 수 있어 열심히 찍어 왔다. 세계 미술의 연대기와 호퍼의 작품 연대기도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그리고 전시 공간 앞 쪽에 스크린에 영상을 틀어주는데, 호퍼 다큐였다. 미술관 큐레이터와 호퍼 전문가들이 나와 호퍼의 성격과 그림의 특징 그리고 예술사에서 호퍼의 위치를 설명해 주는 다큐. 매우 유익한 다큐영화였다. 1시간38분 분량. 후반부 15분 정도는 못보고 나왔다. 


3시에 입장했는데 6시가 넘어서고 있었고, 7시에 저녁 약속이 잡혀 있었다. 부랴부랴 나오다가 보니 호퍼 굿즈를 파는 부스가 있는 거다! 시간이 없어 대충 보다가 저렴한 거 위주로 여러개 구매했다. 스카프퍼럼 천으로 된 4만원 짜리 굿즈는 아직 안판단다.ㅠㅠ 교보에서 구매하란다. 


어쨌거나 뭘 집어 넣었는지 모르고 있다가 집에 와 가방에서 꺼내보니 많이도 샀다. ㅎㅎ 아주 유명한 그림만 굿즈로 만든듯보인다. 상대적으로 그림이 큰 건 안경닦개다.ㅎ 무려4천원..ㅎㅎㅎ 그래도 그림이 커서 액자에 넣어 보관할까 생각중이다..ㅋㅋ



넘넘 뿌듯한 전시였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게 없는 게 아니라 아주 풍성했다. 명성에 맞지 않게 우리나라에서 한 번도 전시된 적 없는 호퍼의 1회 개인전이다. 꼭 가서 다큐 영상을 보시라 강추드린다. 책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호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끝)



[덧]

1. 역시 전시는 혼자 봐야 자유롭게 꼼꼼히 둘러볼 수 있다. 여유는 덤. 담부터 전시는 꼭 혼자가서 봐야지~~

2. 8월20일까지 합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꼭 한 번 가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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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4-22 1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야무님께 딱 어울리는 생일선물이네요.
복도 많으십니다.
저는 대본 쓴다고 온 동네방네 소문내도 누구 하나
연극 티켓 선물해주는 사람이 없던데...ㅎㅎㅎ
암튼 늦었지만 생일 축하합니다.^^

yamoo 2023-04-23 11:54   좋아요 2 | URL
네..결과적으로..의도치 않게 그렇게 됐습니다. 솔직히 별로 기대 안했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첫 전시하는 호퍼전이라 관심은 갔지만 티켓도 요즘 인터파크 같은데서 예매해야하기에 너무 귀찮고 해서 나중이 가려했습니다. 끝무렵에. 경험상 이렇게 생각하다가 이건희 전도 놓쳤거든요. 해서 기회가 온김에..마침 생일이기도 해서 겸사겸사 겄는데...설사립미술관에서 했던 전시 중 최고로 볼게 많아서 좋았습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서 더 그랬던거 같아요. 굿즈도 사놀 줄 몰랐어요. 어쨌건 의미있는 생일 선물이 된 거 겉아 뿌듯해요..ㅎㅎ

그레이스 2023-04-24 20: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 주 수요일 예약해 놨어요~~

yamoo 2023-04-25 19:10   좋아요 2 | URL
아, 그레이스님두 가시는군요~~
정말 볼 게 많아서 후회하지 않으실 거에요. 1층에서 반복적을 방영하는 다큐영상은 꼭 보셔야 해요!!

그레이스 2023-04-25 19:4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