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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시작하며]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이 통쾌하고도 자극적이면서 웬지 불편한 타이틀. 이 4단어 만큼이나 이 책을 집약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건 없을 듯 싶다. 일인칭 관찰자 시점인 내가, 이제... 상대방인 애인나부랭이한테 지겹다고 과거를 날려버린다.. 쿨하게 말하는 이 4단어...정말 타이틀 하나 잘 뽑은 거 같다.
쿨걸 배수아의 장편소설인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5년전에 현대백화점 책코너 가판대에서 잠시 구경했던 책이다. 제목이 하도 재미있어 배수아라는 작가를 내 머리속에 각인 시켜두고 있었다. 그래서그런지 간간히 문학상집에 묶인 그녀의 단편들을 만나보고 배수아 작가를 좋아하게 됐다. 내가 배수아 작가를 좋아하는 건 다름아닌, 작품에 가식이 없다는거. 뭐든지 작가가 쓰고 싶은 대로 쓴다는 거. 그래서 쿨하다는거...항상 배수아를 칭할 때 나는 쿨걸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읽기]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는 작가가 뭐라든, 작가의 자전적 생각이 가장 많이 담겨 있는 소설이라는 게 내 주관적인 평가다. 연애에 대한 배수아식 고찰이라고 해 두고 싶다. 쿨걸인 배수아는 자신이 분신인 유경을 통해 쿨걸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보여진다. 읽으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배수아의 분신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의 말에서, 아니라고 두루뭉실하게 말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유경이 전투적으로 쏘아내는 냉소는 바로 배수아의 생각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수의사 자격시험에 모든 걸 걸고 생화학 시험에 매달리는 유경과 "생각이 앞으로 나가지 않을 때 무한급수와 확률분포 같은 문제를 풀고 있는" 배수아는 닮아도 너무도 닮아있다. 세상에 생각이 앞으로 안나간다고 수학문제를 푸는 사람이 있다니~
"어리석을 정도로 고집이 세고 자기 중심적이고 타협이나 화해를 싫어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특히 냉정하고 자신은 아프거나 빚을 지거나 남의 도움을 빌려야 할 정도로 곤란에 처하는 일은 영영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종교나 도덕이나 사랑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에 관심이 희박하고 앞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한 사람. 생물학적 성별은 피메일이고 나이는 33세. 독신. 건강상태 양호. 중산층 출신이나 노동 의지와 독립심이 특이할 정도로 상당히 강하다. 어떤 점에서는 과겨하기 조차 하다."(217p)
이소설의 주인공 유경의 인물 설정이다. 한 마디로 까칠한 노처녀라고 하면 될 것을.. 이 소설은 이 까칠한 마르크스 걸인 유경이 자신의 직장 부원장인 길과 옛 애인 교진 그리고 그녀들의 친구와 논하는 <사랑과 전쟁>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유경이 다니는 직장에서 새로 부임한 40대의 부원장과 썸씽이 있고 난 후 섹스 파트너로서 유경을 원하는 길과 길에게 끌리면서도 감정에 질퍽거리는 걸 참지 못하는 유경의 내면적 투쟁이 줄거리의 한 축이다. 그리고 옛애인인 교진을 만나면서 갈등이 심화되고 연애의 진정성에 대한 회의와 그 탈출구를 찾는 과정이 쿨하게 그려진다.
한편 유경과 그녀의 친구 넷이 정기적으로 모여 떠는 수다가 책의 색다른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노처녀의 한탄과 결혼관 그리고 남자에 대한 품평과 서로에 대한 애증섞인 질투와 상처주기. 그리고 동생의 결혼에 쯔음하여 가족에 대한 비판과 자학이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그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이다. 여기서 나는 유경이고 너는 길과 교진이다. 길은 유경이 다니는 회사의 부원장이고 교진은 유경의 옛 애인이다. 교진과는 쿨하게 헤어졌다. 교진은 연애의 정점에서 연애의 허망함을 알게 해준 사람이었다. 서로 동의하에 쿨하게 헤어졌다. 겉으론 쿨하게 헤여졌지만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짐은 그녀에게도 고통이었나 보다. “....헤어짐이 아프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오만이다.”라고 한 그녀의 추억 속에 잘 나타나 있지 않은가. 아무리 전투적이라도 그녀는 여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교진을 만난다. 비록 쿨하게 헤어졌다 하더라도 그와는 연애의 진정성과 정점 그리고 청춘을 함께 했던 사람이었기에 유경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선뜻 전화번호를 불러준 유경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다.
아무리봐도 ‘지겨움’의 대상은 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길은 한 때의 원나잇 스탠드의 대상이기에는 너무 무겁다. 연애의 정점에 올라가 본 그녀에게 또다시 구태를 반복한다는 건 그녀 자신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유경은 과거의 애인 교진과 현재의 불안한 관계인 길 사이에서 갈등한다. 길보다 교진은 연애에 있어 더 진정성을 갖췄지만 그는 가난했다. 길은 여자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가졌다. 중후한 멋, 재력, 그리고 사회적 위치. 하지만 그는 유부남이고 그와 연애를 한다는 자체는 유경에게 뻔한 결말이 예비된 불륜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니가 지겹다는 대상은 누굴까? 그것도 바로 이 시점에. 이제 지겨우니 과거에는 지겹지 않았음을 추론해 볼 수 있고, 그 대상은 교진 일수밖에 없다. 하지만 위에서 잠깐 살펴본 대로 교진은 지겨움의 대상이 아니지 않는가. 이미 끝난 상태다. 대상은 길 일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경은 길과 같은 자유주의로 무장한 여자들을 사냥하는 사람에게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라고 쿨하게 날려주고 싶어한다.
“지금 당장 나에게도 꿈이 있다. 탈한국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프라이드도 아니다. 바로 웨이터가 서 있는 저 문으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다. 근사하게 옷을 차려입고 있는 척하는 계급의 그런 사람이. 상대편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드름과 자신이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존재라느 오만한 광용으로 뭉친 사람이. 그리고 나를 쳐다본다. 헤게모니의 승자가 된 자신 만만한 미소를 띠고,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에게 아주 쿨하게 말해 주는 것이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는 이제 니가 기겨워, 하고.”(pp207~208)
여기까지 본다면 유경의 지겨움의 대상은 분명히 길이다. 하지만 갈등하고 고민하다가 유경이 내린 결론은 어처구니 없게도 탈연애주의 였다.
“나에게 교진과 길이다른 점은 무엇인가. 없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나 역시 자유주의자인 삼십대 여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친구들에게 얘기하는 순간 나 역시도 길에게 상당히 끌리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인격자나 도덕군자하고만 같이 잘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세상 누가 완전한 인격을 가졌을까. 나 자신도 도덕보다는 스스로의 열정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말이다.(212p) 계속해서 그녀는 말한다.
때론 나도 남자가 그리운 밤이 있다. 진짜 섹스가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길이라도 괜찮고 교진이라도 상관없다. 그들은 나에게 정도으 차이일 뿐 어차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다. 대개 미덕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더 마음이 끌린다거나 나를 더 생각해 준다거나 도덕적으로 장애가 없다거나 순수하다거나 심지어는 사랑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다 무의미한 핑계일 뿐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섹스에 명분은 필요없다. 사랑하지 않는 섹스에 죄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다. 길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건 내 알 바 아니다. 그는 그의 입자에 나는 나의 입자에 충실할 것이다. 마무런 책임도 과장도 미화도 없는 진짜 섹스 말이다.(213p)"
"미라: 너를 찾는 데 남자야. 누군데 그래?
유경: 길
미라: 만나러 간단 말이니? 그런 거구나
진숙: 마음을 정리했다고 하지 않았어?
유경: 그와 관계를 갖기로 정리했어.
진숙: 그를 사랑해
유경: 무슨 바보 같은 소리.
나는 코웃음 치며 일어섰다. ····겁낼 것이 무엇인가. 나는 연애라는 게임에서 패배하지 않는 방법을 안다. 그것은 ‘탈연애주의’이다.(pp214-215)"
이렇듯 그녀는 마지막에 가서 길의 정부가 되기를 결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의 대상은 교진이고 그녀를 거쳐간 연애라는 이름하의 모든 대상이 지겹다는 말로 귀결된다. 유경은 말은 쿨하게 했는지 모르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쿨하지 못했다. 결론에 이르는 추론 과정이 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탈연애주로 포장하기에는 너무 어설픈 추론이다. 결론은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입장보다 나을게 없어 보인다. 마교수의 다른 작품에서도 보여지는 자유연애주의와 탈연애주의는 무엇이 다른건지. 본질은 똑같은데 말이다. 과대포장이랄까..
[나오며]
책을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다...읽으면서 막 웃었다. 유경의 입을 빌어 말하는 배수아의 냉소적인 말이 너무도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막다른 골목에서 외치는 결혼을 일종의 폭력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가난한 대학 강사에게 시집갈 결심을 하는 친구 자연에게 "너 청록파 시쓰니?"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부분에서 푸하하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배수아식 자유주의적 독신관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자유란 더 이상 읽은 것이 없는 고독한 상태'라는데...(이웃 블로그에서 좋은 표현이 있어서리..) 자유의 부산물일수밖에 없는 고독을 피해 쾌락으로 몸을 던지는 유경의 어설픈 철학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단 말이다. 독신은 다그런가? 독신은 무엇으로 살지?...라는 대답에 유경처럼 대답하는 게 삶의 쿨한 대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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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어차피 인생이 초이스라고 말한다면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것이 문제가 아닌가. 난 가정경영 따위에 관심이 없고 요리나 육아도 하고 싶지 않다.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다. 난 다른 것이 더 좋다. 땀을 흘린다면 다른 것을 위해서 흘리고 노동한다면 다른 것을 위해서 하고 싶다. 난, 다른 것에 걸겠다. ........세상을 너 마음대로 사느냐구? 그래, 난 마음대로 살고 싶어. 남들 하는 대로 살고 싶지는 않아. 아, 난 그래서 결혼 안 해. 남자가 필요하다면 같이 자겠어. 하지만 결혼을 전제로 남자를 만나고 싶지는 않아. 난 그게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동물을 학대하는 것보다 더 이상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어. 절대로." (72p)
덧붙임..
나는 배수아의 소설이 좋다. 비록 그녀가 나와 다른 생각으로 작품을 쓰지만 약간 어설퍼 보이는 문제의식이 좋다. 대부분 해답이 없지만 서도..작품의 완숙기로 접어들어 소설이 세련된 맛을 풍기더라도 데뷔때의 이런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작품은 그녀의 첫 장편소설 데뷔작이란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문자화 됐다나... 하지만 그런 면이 더 좋다. 완전하지 않더라도 항상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면을 신랄하게 비꼬고 풍자하는 ...그 속에서도 유모가 빛나는 그런 시도가 밋밋한 완성도 높은 작품보다 훨씬 값지다는 게 내 생각이다. 씩씩하고 대담한 그녀의 글을 계속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