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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들어가며] 반성적 사고로서의 본다는 것
책의 내용을 간단히 하면 다음과 같이 도식화 시켜 볼 수 있다.
도시에 사는 정상적인 사람들 ----> 차츰 눈이 멀어서 수용되는 공간 ----> 백색의 질병의 전 도시로의 확산 ----> 회복; 의사의 집
책은 반성적 사고로서의 본다는 것을 가르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성철스님이 해탈하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도 생각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을 빼고는 전부 회의를 해보고 나서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양을 시작하면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든다고 한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기존에 있던 것들이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다. 산은 산이 아닌거 같고 물도 물이 아닌 거 같다. 그러다가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사물의 본질을 보게 된다. 깨달음을 통해 보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은 깨닫기 전에 보통 사람이 보는 산과 물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승화된다. 매일 보던 산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자체만으로 고맙고 즐거운 것, 자연속에서 모든 이를 이롭게 하는 그 자체로서의 산. 물은 거기 있어야 모든 것을 이롭게 하고 자연스러운 그 자체로서의 물. 결국 성철 스님이 한 말은 반성적 사고로서의 사물의 본질을 봐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눈이 있어도 이런 것을 볼 수 없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지만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는 우리들은 눈먼 사람들과 하등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여기 한 편의 멋진 허구가 이 반성적 사고를 가르쳐 주고 있다. 책을 덮고서 무수한 논의들과 상념들이 교차한다. 책 한 권에 이리도 심오한 생각들을 담을 수 있다니...사라마구라는 작가의 역량에 놀라고 말았다.
2. 인식의 근본으로서의 본다는 것
책을 본다. 그리고 이해한다. 지식을 축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문명을 건설한다. 인간은 보는 것으로부터 일차적으로 배운다. 전통적인 인식론의 관점으로부터도 우리는 보는 것으로부터 대상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인식하는 것이 진실은 아니다. 백미러로 뒤에 있는 차를 보면 현실보다 가깝게 보인다. 물 속에 담겨져 있는 젓가락은 휘어져 보인다. 직사각형의 책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평행사변형으로 보였다가 사다리꼴로도 보인다. 눈에 의한 착시 현상은 얼마나 많은지 셀 수조차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여지는 것이 진리인양 믿으며 살고 있다. 오히려 눈 먼 장님이 나을 수 있다. 적어도 왜곡된 현실의 모습은 보지 않으니..
사라마구는 눈을 멀게 함으로써 인식의 근본에 도달하는 바른 눈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바로 보고 올바로 생각하라고..
3.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눈
눈이 먼다. 모든 인간의 기능 중에서 눈만이 제기능을 하지 못할 때 인간은 어찌되는가?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것이 엄청난 착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직 눈만이 제 기능을 잃어버렸을 때 모든 인간은 동물보다 못한 존재로 떨어지고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순식간에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다. 생각해보라. 단지 눈만이 제 기능을 못할 뿐이다! 눈에 뵈는 게 없으면 막 살아가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것이 현실처럼 구현된다고 생각해보라! 인간의 존엄성 운운하기가 우스워진다. 눈이먼 그들은 이전에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던 인간이 아니었다. 생리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을 때, 이 땅에서 지옥은 구현된다.
4. 눈에 의존하는 인간의 문명-가치의 역설
사실 인간의 문화와 문명은 거의 눈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멋진 디자인, 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건축양식, 보기 좋은 모양을 낸 음식, 책, 여행, 도시, 영화, 그림, 절경 등 모든 게 눈에 의존하는 것들이다. 보는 것이 즐거운 모든 것들이 문화와 문명과 관련된다. ‘아름답다’라고 평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눈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사실에 흠칫 놀라게 된다. 바로 눈이 멀면 이 모든 것들이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가치를 평가하는 일도 거기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무가치하게 된다. 솔직히 이런 것들은 없어도 되는 것들이다.
가치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다. 경제학의 빌어먹을 개념이다. 생활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다이아몬드나 명화의 가격이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물이나 공기보다 훨씬 비싼 이유는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압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희귀한게 비싼거라는 거. 눈이 멀면 가치있는 것은 가치없어지고 평소 무가치 한 것이 가치있는 것으로 탈바꿈한다. 가치의 역설이 바로 잡힌다고나 할까. 생존에 필요한 것일수록 귀중한 것이 된다. 먹고, 입고, 배설할 공간. 가장 기초적인 생리현상을 충족시키는 것이 가치의 최 일선에 선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최고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생존만을 위한 상황에서 걸리적 거리는 불편함으로 전락한다. 필요없다는 것이다.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켜야할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없게 된다. 당장 굶어 죽을 판국인데, 무슨 얼어죽을 인간의 존엄성 운운 한다는 말인가. 가치의 전복! 그러고보면 눈은 가장 일차적인 가치를 재는 척도인지도 모른다.
특히나 인류 문명을 지탱해 주고 지속시켜 주었던 날짜와 시간이란 관념이 공허한 개념으로 날아가 버린다. 눈먼 자들에게 낮과 밤의 변화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지금이 몇 시이고 몇 일인지 모른다. 살아가는 기준이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 삶. 표준시를 알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했던 인간 역사의 모든 노력들이 한 순간에 하찮은 것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몇 시에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 그리고 셀 수도 없으니 수의 과념도 없어진다. 눈먼 자들은 그런 불쌍한 존재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도 없고 가치를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인간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무색할 정도이다.
5.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우리는 너무도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불필요한지 조차 모르며 살고 있다. 우리의 육체적인 기능이 하나씩 사라질 때 그것과 관계된 가치는 하나 씩 사라진다. 생존에 필요없는 것들을 우리는 너무도 가치있게 생각하고 거기에 매달려 살고 있다. 이 소설은 그런 것들이 무의미 함을 알려준다.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의 삶의 변화를 가르친다고 할까. 눈이 멀면 우리가 그렇게도 가치있게 생각하던 상당수가 무용지물이 된다. 그런 것들은 생존에 아무 쓸모도 없고 삶을 연명하기 위한 어떤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사회적 지위, 기능, 어떤 것도 필요 없게 된다.
6. 이 소설의 등장인물에 이름이 없는 이유
이 소설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름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의사, 의사의 아내, 처음 눈이 먼 자, 그 사람의 아내, 검은 색안경을 낀 여자, 눈에 안대를 한 노인, 사팔뜨기 소년 등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왜그럴까? 그도그럴것이 눈이 멀면 이름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름은 사물에 붙여진 기호나 다름없다. 아무개를 확인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얼굴과 이름이 매치되어야 기억된다. 진달래를 진달래라고 하기위해서는 진달래라는 대상이 눈에 보여야 하고 그 대상에 진달래라는 기호가 일치해야만 우리는 안보고도 그것을 떠올릴 수 있다. 중요한 건 처음에 그 기호에 맞는 대상을 봐야한다는 거. 그렇지 않으면 매칭할 수 없고 진달래를 떠올릴 수가 없다. 눈이 멀어버린 상태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매칭시키기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장님에게 최신의 가전제품을 설명해주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들에게 각각의 명칭은 아무 의미가 없다. 들을 수 없으면 사물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볼 수 없어도 그 대상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름은 숫자와 같은 기호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 행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더군다나 모두가 눈이 먼 경우라면 더 말해서 뭘할까.
7. 눈이 멀어도 여전히 건재하는 것들
하지만 눈이 멀어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있으니 언어와 권력이다. 권력은 인간이 인간이 아닌 존재로 전락해서도 여전히 그 파괴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권력이 있는 자가 여전히 생존할 확률이 높았다. 적자 생존에서 남을 딛고 살아갈 수 있는 힘. 권력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언어는 더욱 중요해 진다. 보이지 않는 불편함을 언어에 의해 그나마 해소할 수 있기에. 그나마 언어로 말할 수 있고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최소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의 마지노선을 지탱해 주고 있다.
8. 결론
이 소설의 백미는 모두가 눈이 먼 상태에서 단 한 사람만 볼 수 있다는 설정이다. 소설은 눈먼자들의 모든 행위를 의사의 아내 눈을 통해 고발한다. 때로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때로는 의사의 아내 눈으로. 인간 본성의 모든 추함과 악랄함과 더러움의 극치를 본 단 하나의 눈은 부끄러운 눈이다.
부끄러운 눈은 반성적인 눈이다. 눈이 멀었다 다시 뜬 사람들은 결코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다. 눈 먼 사람들은 결코 인간 본성의 사악함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눈은 부끄러운 눈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라마구는 이 소설을 통해서 눈을 떠도 보지 못하는 인간들의 무리에 속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다. 눈을 뜨고 있으면 사물의 본질을 바로 보라고, 마음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라고, 그러면 참 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비트겐 슈타인은 '내 언어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우리에게 있어 내 눈은 내 세계의 한계이다. 우리들은 아는 만큼 보고, 본 만큼 안다. 하지만 사마라구는 그것을 뛰어 넘으라고 이 눈먼자들의 실험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