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의 아이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평점 :
하, 이런 소설이 좋은 소설일까? 책을 완독하고 생각을 거듭하며 곱씹어 봤지만 결론은 하나다. 작가를 가리고 블라인드로 독자의 반응을 물으면, 단번에 매우 안 좋은 소설이라는 평을 들을 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대체로 코맥 매카시 소설은 읽을수록 당황스럽다. 치명적인 문장 때문에 끝까지 읽을 수는 있지만, 다 읽고 나면 도무지 주제의식을 찾을 수 없다. 항상 물음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말하는 바가 뭘까?
매카시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 출발은 <로드>였다. 그래도 로드는 가독성 하나는 끝내줬다.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도 좋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역시 물음표는 없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희석시키는 뭔가가 컸다.
'그 뭔가'는 콕 집어서 표현할 수 없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작가가 캐릭터를 통해 구축하는 분위기랄 수 있다.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심리적 긴장감과 공포감을 조장하는 사건은 시적인 문장과 만나 매카시 만의 아우라를 만들어 낸다. 매카시가 만들어내는 묘사는 소설이 구축할 수 있는 미학의 절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아니 하나가 더 있긴 하다. 그가 창조해 내는 캐릭터. 코맥 매카시는 캐릭터를 설정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범죄성을 부여하는 데 따라올 작가가 없다. 매우 사악한 주인공들을 매우 덤덤하게 잘도 그린다.
그래서 독자는 작품을 읽어가면서 미궁에 빠져들지만 강력한 캐릭터와 그 치명적인 문장들로 인해 끝까지 읽게된다. 이 작가가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무얼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지만, 읽고 나서 아우라 있는 작품을 만났다는 착각을 일으키곤 한다.
물론 내 얘기다. <로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카운슬러> 등을 보고 코맥 매카시를 계속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고자 든 책이 <신의 아이>다. <카운슬러>가 꽤 좋았기에 이 작품 역시 괜찮으면 나머지 주저 3권을 모조리 읽을 계획이었다.
헌데, 책을 덮고 나니 매카시는 더 이상 관심 대상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내가 읽었던 매카시 작품 모두 딱 부러진 작가의 주제의식이 없었다. 매카시는 작품에서 범죄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걸로 끝이다.
평론가들은 성경적 상징을 들먹이며 매카시의 작품들을 찬양하기 바쁜데, 매카시라는 작가를 제거하고 작품만 판단한다면 결코 좋은 평가를 못 얻을 거라 확신한다. 블라인드 평가를 내린다면 작가적 후광효과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작품을 읽고 남는 건, 캐릭터와 치명적인 문장밖에 없다. 좋은 소설 작품은 일단 재미있는 이야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확고한 주제의식, 더군다나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드러낸다면 명작이라 칭할만하다.
물론 전통적인 소설기법을 파괴하고, '아, 소설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라는 걸 깨닫게 하는 작품도 있다. 대표적인 작가가 파스칼 키냐르와 조르주 페렉 정도. 꽤 매력적인 작가들이다. 전형적인 소설기법을 탈피했다고 하더라도 주제의식의 선명하거나 이야기가 신선하면 그게 바로 멋진 작품이다.
그런데 <신의 아이>는 살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레스터 밸러드이다. 27세의 부랑아. 그가 하는 일이란 숲속을 배회하면서 음식을 훔치고 라이플 총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게 전부다.
여자를 죽여 시간을 하고, 아무 이유없이 사람에게 총을 쏘아 죽인다. 진짜 아무 이유가 없다. 그리고 사체들을 인적없는 산의 동굴에 고히 모셔둔다. 살인의 흔적과 의심의 흔적을 을 싹 없애버린다. 거짓말도 천연덕스럽게 잘도한다.
시골의 한적한 마을에 살면서 그가 살인행위를 저지르는 동기와 정당성은 없다. 결코 없다. 처음 시작할 때 그 지역 부동산 관계자들이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나는 밸러드가 그들에게 땅의 이름으로 복수를 하는 내용을 상상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내용이 전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레스터 밸러드의 기이한 성격과 범죄 행위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는 밸러드의 범죄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뭘까? 원죄의식? 자본주의에 대한 폭력적 항거? 미국 사회의 만연된 범죄행위? 무얼갖다 붙여도 납득할 수 있는 주제의식은 없다.
도대체 작가는 왜 이런 작품을 썼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답은 오로지 하나다. 그냥 캐릭터 습작하기. 이 소설은 매카시의 3번째 장편소설이란다. 40세에 발표된 작품. 그래서 그런지 <로드>보다 문장의 아우라가 떨어진다.
뭐, 주제의식이 박약해도 이야기만 좋으면 읽는 맛이라도 난다. 헌데 이야기는 없고 캐릭터만 있으며, 개연성 없는 시간(시체와 성교), 살인, 절도로 점철되는 사건들이 그냥 나열되는 수준이라면 좋은 소설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소설의 주된 목적이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이라면 <신의 아이>는 완벽히 실패한 작품이다. 벨러드가 '신의 아이'로서 우리와 같은 부류라는 개소리는 하지 말자. 밸러드를 통해 교훈을 줄 수 있는 주제의식은 단언컨대 없다.
한 마디로 이 소설을 총평하자. 캐릭터만 부각된 작품은 이야기와 감동을 압살한다!
[덧]
1. 이 작품의 역자는 정영목이다. 꽤 많은 영문학을 우리말로 번역한 사람인데, 이 소설을 읽으면 이 사람이 진짜 통번역 대학원에서 번역을 가르치는 사람인지 의구심이 심하게 든다. 읽다가 페이지를 다시 읽는 우를 매번 겪게 되는데, 이게 독자가 멍청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역자가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게 번역을 했기 때문이다. 아주 단적인 예를 적시해 둔다.
그날 밤 내내 그는 소유물을 날랐고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그가 산패하고 곰팡이가 핀 마지막 시체를 구덩이 벽을 통해 끄려 내렸을 때는 동쪽에서 울고 있는 하늘의 옅은 회색 띠에 날빛이 이미 구멍을 냈다. (p192)
동쪽에서 울고 있는 게 하늘인가 회색 띠인가? 문장이 길어지고 수식어가 덕지덕지 붙을수록 문장의 애매성은 높아진다. 시체를 형용하는 '산패하고 곰팡이간 핀'은 애교수준이다. 물론 코맥 매카시의 문장이 악명높기로 소문났고, 길게 쓰는 그의 문장 때문에 우리말로 옮기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님을 알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이런 문장들을 문학에서 보는 건 창피한 일이다.
2. 정영목은 이 소설에서 아주 희귀한 단어를 골라서 잘도 번역했다. 도무지 일상에서 그리고 문어에서 전혀 쓰지 않는 단어들을 아주 잘도 찾아 번역했는데, 이런 단어 역시 가독성을 막는 역할을 한다. 위에서도 '산패'가 그런단어다. 헌데 이 책에는 아주 어려운 단어들이 지뢰처럼 흩어져 있다.
3. 코맥 매카시가 미국 현대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임은 틀림없다. 그의 국경3부작을 읽지도 않은 채 주제의식이 없다, 안 좋은 소설이다..라는 개인적 감상을 떠벌리는 것이 같잖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전에 읽었던 <나는 고백한다>와 같은 소설과 비교하면 소설이 갖추어야 할 미덕이 상대적으로 너무 부족해 보인다. 물론 이런 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고, 소설이 꼭 주제의식을 보여줘야 하는지에 대해서 반감을 갖는 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도 거기에 동의하지만, 이 작품에서 작가가 밸러드를 통해 말하고 싶어 하는 바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여 매우 실망했다. 요즘 읽은 작품들이 재미면에서 그리고 그걸 주제로 드러내는 방식에서 매우 탁월했기에 <신의 아이>의 단점(주제를 구현하는 방식과 재미)이 더 도드라졌다. 물론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읽을 사람들은 뭐 개의치 않겠지. 이런 리뷰는 개소리라고 욕하고 열심히 매카시의 작품을 읽으시면 되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