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우리는 이 타이틀을 단 사람에게 어떤 문제 해결을 원하거나, 값어치를 치루고 전문적인 카운셀링을 받을 준비가 돼 있다. 아니, 지금까지 우리의 생활 경험상 종종 도움을 받아왔다.
쉽게 생각하자. 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변리사 등등을 떠올리면 된다. 몸이 아픈 사람은 병을 고치기 위해 의사를 찾아가고, 권리를 침해당하여 억울한 사람은 변호사를 찾아간다. 세금 문제로 고민이 있는 사람은 회계사나 세무사를 찾는다.
그래서 전문가는 권위를 갖게 된다. 이들의 권위는 해당 분야의 국가 자격증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문가들은 국가가 주관하거나 혹은 어떤 공식적인 단체가 인증하는 시험을 통과하여 그 자격을 획득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전문가가 아닌 일반 사람들은 전문가의 권위를 존중하며, 정당한 서비스 가격을 지불하여 전문가들이 보유한 전문 서비스를 공급받는다.
이는 매우 상직적이고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이 인문학이라는 학문의 장으로 넘어오면 아주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다. 일반인들이 사회에서 값어치를 치르고 전문가의 서비스를 받는 것과는 아주 판이하다.
예컨대 백화점을 비롯한 무슨 무슨 문화센터나 무슨 강연회에서 어떤 인문학 강좌가 열린다고 치자. 보면 몇 강에 얼마 하는 식으로 프로그램이 열거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공공 도서관에서 인문학 책읽기 강좌도 열린다)
<처음 만나는 인문학>, <OO와 함께 읽는 들뢰즈>,<OO를 위한 철학강좌> , <쉽게 읽는 고전>, 등은 꽤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인문학 강좌들이다.
인문학 책들은 또 어떤가? 심지어 경제학과 경영학에까지 '인문학'타이틀을 붙여 출간한다. 인문학이 죽었다고 하는데, 몇 년전부터 인문학 르네상스가 도래한 것 같다. 도서관과 대형서점에서 저자 출간 인문학 이벤트를 안하는 곳이 없을 정도이니.
그런데 도처에 열리는 인문학 강좌와 세미나는 과연 전문성을 보장하는가? 하나의 사례를 상정해 보자. 한 대학의 영문학 교수(그냥 K교수라 하자)가 라캉을 통한 소설 읽기라는 주제로 책을 낸다. 그 교수가 이번에는 라캉의 이론으로 영화를 분석하는 단행본을 낸다.
그런 다음 그 분석틀을 갖고 사회를 비평하는 에세이를 출간하다. 그리고 나서 각종 대형 서점을 위주로 저자 강연회에 나선다. 이후에 그는 각종 TV 프로그램에 종횡으로 나오면서 문화비평을 한다. 문화비평서와 영화비평서의 잇따른 출간을 계기로 그는 논객으로서 대접받는다.
이렇게 문어발 식으로 지식을 확장하는 K 교수의 전공은 현대 영미 소설이다. 영국 OO대학에서 헨리 제임스의 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게 이 교수의 전공이다.
이 사람은 현대 영미 소설, 그것도 헨리 제임스에 관해서는 확실히 전문가 이다. 제임스의 소설 문체나 그의 소설기법을 배우기를 원하면 K교수에게 값어치를 내고 배우면 된다. 그는 제임스 연구에 권위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K교수가 이번에는 영화비평을 넘어 사회 비평을 한다. 과연 그는 영화비평과 사회비평의 전문가인가? 매스컴에서 또는 강연회 소개에서 그는 전문가로 소개받는다. 인문학은 한 분야에서 전문가이면 두루 전문가인가 보다. 그가 제임스 전문가를 넘어 사회비평 전문가로 행세하는 것은 내과 의사가 법률전문가라고 강연회를 다니면서 강의료를 받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문학에서는 전문가가 누구인가? 적어도 우리는 학문 분야에서 그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을 그 학문 분과의 전문가라고 인정해 준다. 대학 교수이건 초등학교 선생이건 그가 박사학위 소지자라면 그는 그 분야에서 전문가다.
비록 초등학교 선생이라도 그가 들뢰즈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어떤 곳에서건 요청받은 곳에서 혹은 필요에 의해 강좌를 열어 소정의 값어치를 받고 들뢰즈 문외한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있다.
이게 우리가 전문가에게 해당 지식을 배우는 상식이자 기본이다. 하지만 현실의 대한민국에서 일반 대중을 상대로 인문학을 강의하는 해당분야 전문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보자. 현재 가장 인기있는 인문학자는 단연 지젝과 들뢰즈다. 들뢰즈는 인기가 좀 식었지만 지젝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지젝과 지젝에 관련된 도서가 20권도 넘게 출간되고 있다.
여기 저기서 세미나가 개최되고 지젝을 통해 이름을 알리려는 지식인들이 도체에 있다. 그런데 나는 지젝의 사상을 열심히 전파하고 있는 사람 중에 지젝으로 논문을 써서 학위을 받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들뢰즈 연구로 학위를 받아 그를 소개하는 인문학 강좌를 들어본 적도 없다. (내가 전에 열심히 참가 했던 미술모임에서는 들뢰즈로 학위를 받은 분이 와서 들뢰즈에 대한 미학이론 강의를 해 준 적이 있다.) 대개가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관심 영역을 넓혀 지젝의 저서를 전방위로 읽은 정도 뿐이다.
지젝의 사상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문제점과 그를 넘어서는 비판적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관련 논문들이 별로 없으니. (물론 내가 미학이나 영화 또는 문학 논문을 뻔질나게 찾아보는 열성분자는 아니다. 그런면에서 우물안 개구리일지도 모른다)
누가 있는가? 지젝을 연구하여 연구 논문을 써서 교수사회에서 검증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가 내는 책은 모조리 사 볼 의향이 있으며 심지어 어느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면 찾아가 청강이라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문가가 낸 책이나 강연은 정말 쉽고 핵심을 청중의 수준에 맞게 풀어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입문서에서 확인하곤 한다. 대개 개론서나 입문서는 그 분야의 권위자나 전문가가 쓰는 책이 쉽고 알차다. 이런 대표적인 인문학 개론 총서 중 하나가 살림문고에서 펴내고 있는 [e시대의 절대사상]시리즈이다.
이 시리즈 책중에 김용환 교수가 쓴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있다. 홉스 사상의 핵심이 키워드와 주제를 중심으로 아주 간결하게 소개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홉스의 심오한 철학 사상이 매우 평이한 설명 속에 녹아 있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윤리교과서 정도의 수준으로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정리하고 있다. 이건 정말 그 분야에서 오랜 공력을 쌓은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전문가의 공력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책이 있다. 서민 교수의 <기생충 열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출간되기 전에 네이버에 연재되었는데, 우연히 연재 글 한 꼭지를 읽었다. 그리고는 이전에 쓰인 글을 모조리 찾아 읽어야 했다. 이름도 희한한 기생충에 대한 얘기가 너무 웃기고 재미있어 소설을 읽듯 단숨에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라딘 서재에서 마태우스라는 필명으로도 유명한 이분의 글을 읽어보면 기생충을 다루는 학문이 매우 전문적인 분야인데도 불구하고 전문적인 내용을 너무도 쉽게 알려준다. 심지어 웃기기까지 하다. 기생충에 대한 내용이 말이다!
위 두 책의 사례에서 보듯이 전문가는 어려운 내용의 핵심을 아주 쉽게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문외한이 전문가로부터 무지를 깨우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전문가들의 책과 강연이 있으면, 그 나라 국민의 교양이 향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지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인문학 세미나와 강좌에서는 넘쳐난다. 왜 윌리엄 제임스를 전공한 사람이 '문화'에 대한 강좌를 여는가? 그 사람이 왜 들뢰즈에 대해서 전문가인냥 말하는가? 그가 문화와 들뢰즈에 대한 논문으로 학계에서 검증을 받았는가?
논문도 쓰지 않고 잡문인 단행본 몇 권을 내고 전문가 행세하는 건 대중을 기만하는 행태아닌가? 인문학이 하나에 전문가이면 여러 분야를 넘나들 수 있는 전문가이자 권위자라는 걸 보장해 주는 학문인가? 그렇다면 위 제임스 전공 교수가 하는 행태는 지극히 정상적일 것이다.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적어도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라면 제임스 소설 전문가가 문화 분석 전문가가 아닌 것쯤은 대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작금의 대한민국에서는 하나의 학위를 받은 전문가가 인문학의 여러 영역에서도 당연히 전문가로 통용될 수 있는지 정말 미스테리다.
위에서 예를 든 제임스 전공교수 사례는 극단적 사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수도 아닌 사람들이, 아니 박사학위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여러 학분 분야에 걸쳐 인문학의 전문가로 회자되는 현 실태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페이퍼를 통해 이 현상을 짚어보고 싶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대중 지식의 첨병이 될 때 그 나라의 인문학적 교양의 토대는 매우 척박해 질 것이다. 이것이 내 우려이고, 이 페이퍼를 쓰는 목적이다.
덧붙임
현재 우리나라나라에서 들뢰즈나 지젝, 그리고 프랑스 현대철학 이론을 수입해 소개해 주는 인문학자는 많아도, 들뢰즈나 지젝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학문적 한계점을 논하는 인문학자들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 학자가 쓴 들뢰즈 비판이나 지젝 비판서를 본 적도 없다. 그냥 외국의 신 이론틀로 무장하여 그들이 해 놓은 인식의 틀로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인문학자만 넘쳐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