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자주 가는 사이트에 누가 올려 놓은 글입니다. 그도 어느 사이트에서 [펀글]이던데...사이트 내에서 덧글 논쟁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좀 된 글인데,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적인 글이라 제 서재에 옮겨 놓습니다. 

 

 

1

남성 문제와 관련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앵무새처럼  "모든 여성이 그렇지 않다." 라는 주장이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라는 논리는 실제로 그러하거나, 항상 그럴 준비가 되어 있거나, 반론에 대한 도피처로서의 자기방어이거나, 실제로 그러하다고 믿고 있거나... 전형적인 자기방어, 자기변명일 뿐이다. 
 

 

"모든 여자가 그렇지 않다."는 논리는, 실제로 "모든 여성이 그러하거나 그럴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정말로 그렇다고 믿고 있다면, 단지 여성들 개개인의 외부적인 상대적 차이점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그렇다고 믿고 싶어하는 희망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윤리적 학습과 자신의 감정과 본능을 통제하는 하나의 지지대 역할을 하는 가치관의 세계가 깨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과 그로 인해 받을 상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타 등등의 이유로 그러하리라 할 수 있다.  


남성운동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이다. 이것은 하나의 현실에 대한 도피처를 제공하는 해악일 뿐입니다. 남성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아편을 입에 물려주고 현실을 외면하게끔 유도하는 의미 이상의 것은 없다.  


여성단체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남과 여의 전체적인 극심한 대립이다. 여성단체... 페미들이 지향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가족해체이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겉으로는 가족해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있어서 비빌 언덕이 될 수 있어야 그들이 생존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존의 보수적 가치관들 중에 자신들의 존립 여부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는 부분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의 단계적 수정을 통해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적 페미니즘의 가장 큰 요인중 하나는, 여성부의 의도적인 변형된 전통관습 유지에 기인한다. 정상적이거나 아니면 아예 폐지 시켜버리면 세상이 엉망이 되더라도 나름의 균형이 생길 수 있지만, 남성들에게 보이지 않는 희망과 권리란 탈을 쓴 의무를 부여하기 위하다 보니 눈에 띄게 삐걱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주어진 현실이 잘못 되었다 여긴다면, 그것이 어떠한 방향으로건 균형을 갖추길 원한다면, 그 현실을 물러설 공간이 없다는 뼈저린 자각을 통한 인식을 통해, 정면으로 맞서야 합니다. "모든 여성들이 다 그렇다."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남성들의 대부분이 그렇게 인식해야만, 세상을 바꿀수가 있는 거죠.  


"모두가 그렇지 않다"라는 논리는, 현실도피를 불러오고 남성들이 원하는 이상향에 가까운 부분들에 대한 가능성으로 인해 남녀간의 문제에 있어서 현실적인 해결 의지를 잊어버리게 한다.  



항상 단순한 인간들이 고정멘트로 달고 다니는 말..

"니 엄마, 니 여동생, 누나, 딸... 어쩌고..." 처음에는 전부 여자들이 썼다. 그녀들이 알바였는지...사전공작에 의해 주입된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수의 남성들도 이 말을 좋아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말은 절대적으로 "여성 취향"의 논리적 접근과 사고방식에 근거해야만 나올 수 있는 말들이다. 저는 이해가 안 가는 것 중 하나가, 미성년과 성관계를 맺은 남성들을 보고 "자신의 딸을 생각해 보라"는 주장들입니다. 그럼 결혼을 할때는 자신의 누이를 떠올리며 상대를 고르고, 잠자리를 가질때도 누이를 떠올리라는 것인지... 결혼 상대자와의 연령차가 정확히 몇 년 몇 개월이 되어야 하고, 연애 상대자 또한 그래야 하는 것인지...

가족은 가족이고 남녀관계는 남녀관계일 따름입니다. 가족은 나와의 관계일 뿐이지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나와 똑같은 가족이 아닌 것이다.
(응답맨 註 : 참고로 니 엄마, 니 여동생이란 말을 달고 다니는 무뇌충 페미들에게 이런말을 "니 오빠, 니 아들, 니 아버지였다면?"..라고 반문하라. 니 엄마니 여동생이니 이런 말은 전형적인 남성우월주의적 시각이다. 즉 남자는 무조건 강자, 여자는 무조건 약자이고 무능력한 존재인 하등한 인간으로 간주하는 데서 나오는 말이다. 즉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시각으로 본다면 절대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들이다)

이것은, 공과 사의 구분을 못하는 전형적인 여성들의 사고방식입니다. 또한, 유아적 사고에 기인하고 있기도 하다. 인간은 아무리 똑똑하고 많이 배웠다 하더라도, 평생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되는 정신연령이 굳어지는 시기가 있고 그 시기의 정신적 수준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여성의 경우는 이러한 시기가 굉장히 빨리 찾아오는데, 바로 초경을 전후해서 생긴다. 신체적 변화와 더불어 굳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임신과 출산과 결혼생활에 적합한 신체적 환경과 더불어 정신도 그에 걸맞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고, 2세의 출산과 육아를 위해 능동적인 배우자 선택이 아닌 수동적인 배우자 선택이라는 본성으로 인해 언제 불시에 선택당해 2세를 위한 환경에 돌입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찍 완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즘에는 10세를 전후해서 대부분 초경을 치른다.

성장이 지금보다 더디었던 과거에도 대부분 지금보다 조금 늦었을 뿐이다. 이러한 나이 때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기는 부분이 강한 편이다.

세상의 중심은 나이고, 나를 중심으로 가족이 형성되고, 그 가족을 중심으로 세상이 형성되었다. 아무리 덜떨어진 사람이라도 성인남성이라면, 이와 정반대의 개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남녀의 가장 큰 의식차이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어긋남의 하나가 이것에 기인한다.

유아적 정신연령으로 세상을 살아가기에 모든 사물을 자신을 둘러싼 가족에 비쳐보기에 "니네 엄마, 니네 딸..." 운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은 공과 사의 구분을 잘 못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공과 사를 구분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시야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여성이, 특정한 사상적 학문이나 주변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100% 필연적으로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고 주변을 원망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떼를 쓰는 것과 똑같다고 보면 정확하다.
(응답맨 註 : 제가 항상 하는 말 "아마에"와 같은 의미이다. "아마에"라는 것은 애들이 하는 것이지 성인이 하면 덜떨어진 애 취급 받아야 한다는 생각)

"모든 여성이 그렇지 않다"는 논리는 남성들의  자기권익뿐만이 아니라, 여성들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도 독만 될 뿐이다.  A 수준의 것들을 남성들이 용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두가 그렇지 않다"란 논리로 인한 남성들의 자기안위와 현실무시는, A에 대해 어느 정도 적응된 시점에서 등장한 진행된 B가 나올수 있는 시간만 벌어줄 뿐이고, 이는 최종적으로 Z의 결과가 나오도록 만들 뿐이다. A 에서 문제인식을 제대로 했다면, 대부분의 남성들이 A선에서 확실하게 막을수 있는 것들도 분명 많다.


2.

여성은, 선악의 개념이 자신에게 이익이냐 손해냐에 따른다.

순결을 중요시 하는 여성이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로 인해 생기는 손해가 중요한 것이며, 수단만 있다면 수많은 남성과 관계를 맺고도 태연하게 자신이 순결한 척 행동할 수가 있으며, 또한 이러한 면들이 젊어서는 자유분방한 연애와 성을 주장하다가 결혼할 때에 현실인정이라는 표현을 통해 드러나는 실재적인 그들의 속마음이다.

한국의 현실은 보수적(?)이어서 순결하지 못하면 질타를 받는다라는 이유가 아니라, 젊어서는 놀고 즐기는게 이익이고 그로 인한 손해는 거의 없기 때문이며, 결혼 후에는 그 반대가 손익이기 때문이며, 상대 남성의 남성이 가진 근본적인 본성을 억제시키고 자신만을 위한 노예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명분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가진 본질에 가깝게 다가갈수록, 모든 여성이 그러하지 않다라고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망상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것... 남성과 여성의 상생(?)은 끝없는 요구의 연속이라는 여성이 가진 속성에 이끌리기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제대로 된 조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여성의 치마자락을 붙잡지 말고 당당히 남성들이 홀로 서서 현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 그것이 남성만을 위한 것이건, 남녀 모두를 위한 이상적인 방향을 향해 나가는 것이건 가능해질 수 있다는것...  


조선속담에, "여자와 입씨름하는 남자 치고 제대로 된 남자 없다..." 라는 말이 있죠.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여자가 하는 요구와 주장들을 그냥 들어주고 잠잠코 침묵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옮고 그른 것을 따지기에는 상대로서 적합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무리 상대의 의견을 듣고 또 설득해 봐야 쓸데 없는 시간낭비라는 뜻인 것이다. 조선시대는 남녀의 역할구분과 권리와 의무를 동등하게 구분지었고 그 선을 명확하게 나누었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못한 세상이 되버렸다.  


그러니 다시금 어떠한 방향으로건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날의 우리는 옮고 그름을 논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그렇지 않다." 라는 논리는 옮고 그름을 공의적으로 논할 필요와 명분이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과, 정말로 소수만의 문제라면, 남성들이 느끼는 분노감의 색채는 지금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며, 수많은 대다수의 여성들이 자신의 이익이 침해받는 것에 대한 감정적 반발로 인해 그들이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알라딘에 각 분야의 고수분들이 많은 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만...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분도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몇 일 전 제 서재를 오랜 만에 찾아오신 알라디너분의 서재에 인사차 갔다가 엄청난 서재를 운영하시는 분을 알았습니다. 

포스팅이 많이 없어 처음글부터 마지막글까지 금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읽고 나서는 그분(이하 J님)이 주장하시는 바가 사실이라면(미천한 제 눈에는 주장하는 바가 모두 타당한 것 같습니다) J님은 도올이거나 아니면 도올에 필적할, 아니 우리나라 노장철학계의 독보적인 전문가 이실 것입니다.

글의 문체가 도올과 너무 흡사하여, 혹시 도올밑에서 수학하신 분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그만큼 J님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볼 때 매우 독선적입니다.

그가 원색적으로 비판하는 부분은 거의 모든 노장 철학 번역서들이 노장 철학을 잘 르고 번역해서, 진정한 노장철학을 오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J님이 비판하는 바를 따라가 보면 노장에 관련된 책들의 중요한 오역이 무엇인지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오역이 사실이라면 노장에 관계된 책들은 모두 다시 출간되어야 될 듯싶습니다.


제가 J님의 서재에 들어가 이 글을 옮겨 놓는 이유는 J님의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 많은 공감을 했기 때문입니다.

   
  노자를 아는 체는 사람들 또한 전혀 노자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글에 댓글 달면서 감사하다느니 하고 잠꼬대하는 사람들.  우리나라에 노장전문가가 별로 없다고 비전문가의 왜곡된 번역서를 두고 이런 한심한 작태가 벌어지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제대로 아는 전문가 누가 한번 나와서 방송강의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J님이 지적한 노장에 관계된 책의 오역 비판에 대한 핵심을 옮겨 놓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제대로 된 노장 철학서를 선택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분이 지적하시는 부분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1인 이기에....

대표적인 장자해설서 <장자, 안동림 역주, 현암사>를 비판한 부분입니다.

철학적 바탕이 없는 번역은 상식 수준의 해설이 되어버린다. 철학책 번역은 문자, 한문실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에 대한 깊은 철학지식과 특히 장자는 선사상적인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 이해가 있어야 번역이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도 많이 떨어진다. 그런데 다른 책은 또한 이보다도 못하니 이 책을 보는 자가 많은 것이다. 
 동양철학, 도가철학의 매우 중요한 개념들을 통일성없이 막 번역어를 갖다 붙여놓았다. '천지'를 '천지자연'으로 해놓으면 오역이다. 천지는 천지이지 자연을 왜 가져다 붙이는가? 뜻이 맞다고? 천만에. 천지는 우주라는 뜻이지 자연이라는 뜻이 아니다. "道德" 은 '도와 덕'이지 '도덕'이 아니다. 도덕은 우리가 모랄을 번역한 개념이다. 장자의 도덕은 도와 덕을 붙인 두 단어이다. 모랄이라는 뜻이 아니다. 절대. 노장에는 도덕, 모랄을 초월하라고 하지 모랄에 대한 철학이 없다.
이런 두 예들 외에 무수히 많은 장자의 중요한 철학개념들에 대한 번역어가 철학적 고찰이 없이 그냥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막 한글로 옮겨 놓았다. 무수히 많은 부분에서 오역, 장자사상을 왜곡하는 오역이 발견된다.   
 꼭 이 책만이 아니라, 모든 장자 번역의 기초적이면서 핵심적인 오역을 하나 짚어보자.  본책 덕충부에 '인기지리무진' 얘기에서 '天죽'이 나온다. 여기서 '天'을 역자가 '자연'이라 번역했는데 오역이다. 장자에 나오는, 노자도 마찬가지, '天' 자는 지금 우리가 아는 자연, 네이쳐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의미를 '하늘'이라는 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장자를 강의하는 거의 모든 교수들과 장자 번역서 모두, 장자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천'을 '자연'으로 알고 장자를 '자연철학'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다 틀렸다. 
"자연이 먹여살리는데 어찌 또 '人爲'가 필요하랴"  자연이니 인위하는 말들이 모두 장자의 용어가 아니고 장자사상에는 이런 개념을 쓰지 않는다. 이런 법주로 설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정 자체를 이렇게 하지 않았는데 이런 범주개념으로 설명을 천 페이지를 해도 다 꽝이다. 자꾸 서양철학개념을 노자, 장자를 설명하려고, 아니 동양철학 다 마찬가지다, 하니까 노자, 장자사상을 왜곡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쓰는 '자연'이라는 개념과 하이데거의 '존재자'라는 개념이 동일할까? 하이데거 기초만 알아도 같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전혀 다른 개념이다. 여기에 하이데거의 독창성이 있는 것이다. 노자 장자에 나오는 '物'이란 개념은 어디에 가까울까? 우리가' 물질' 또는 '사물'이라고 쓰는 용어에 현혹되어 이 '물'자를 물질적인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서양의 '자연'은 물질이다. 그러나 노장의 물은 물질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존재자'라는 개념과 거의 같은 의미다. 노장의 '물'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존재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물의 본질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그러하다'를 한자로 '自然'이라고 노자가 한 것이다. 그러니 이 '자연'을 지금 우리가 쓰는, 서양의 용어인 '네이쳐'로 읽으면 절대 안 된다. 하나님을 뜻하는 '신'을 '신발'로 보면 안 되듯이.  노자가 '自然'이라고 한 표현을 장자는 '天'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곽상이 장자의'천'을 '자연' 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이때의 '자연'은 '네이쳐'가 아니라 노자의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으로 쓴 것이다. 도의 본질성격이 스스로 그러함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는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본질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노장의 주장이다. 왜? 모든 존재자는 다 虛허하기 때문에. 즉 비워져 있기 때문에.  그러니 자연을 팔아먹는 모든 장자 번역책 잘못 것을 알 것이다. 장자를 왜곡하지 말라. 이 책의 모든 부분이 다 틀리다는 게 아니라 이런 중요한 부분은 분명히 알고 가려 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건 이 책뿐 아니라 모든 장자 번역서에 대해 하는 말이다.



다음은, 역시 가장 많이 팔린 <도덕경, 오강남>에 대한 비판 부분입니다.

우리나라에 노장전문가(노장철학으로 박사논문 쓴 사람)은 몇 명 안된다. 이런 사람들만 노자를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것도 안 되는 사람 중에 노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까놓고 애기해보자. 오강남 역자가 노자의 도를 정확하게 알까? 내가 이 책을 본 바로는, 모른다.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그럴 듯하게 써놀았다. 다른 거의 모든 번역서처럼.
 노자는 대자연에 대해 설교한 적이 없다. 자연을 말하지 않는다. 문명에 대해 말하지. 자연에서 살라? 자연의 순리에 맞추어서 살라?
 인간은 이미 자연의 순리에 따라 태어났다. 인간이 자연의 산물이다. 뭘 또 자연에 맞추어서 사는가? 그렇게 안 살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그렇게 살기 싫어도 살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자연을 벗어나서 살고 있단 말인가? 1초라도 벗어나면 인간은 바로 사라진다. 아니, 벗어날 수가 없다. 죽는다는 현상도 자연 현상이므로.
 노자가 자연을 찬양했는가? 찬양할 필요가 없다니까. 당신들은 공기를 찬양하는가? 하늘과 땅을 찬양하는가? 찬양할 필요없다. 찬양 안 해도 인간은 이것들과 더블어 살수밖에 없는 자연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냥 살다가 가면 된다.
 노자는 자연은 말하지 않는다. 자연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말 안 해주어도 자연은 그들이 스스로 그러하게, 스스로 알아서 자연의 순리대로 잘 살고 있다. 문제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자연의 하나이면서도 자연을 파괴하면서, 4대강 사업이나 하면서, 살고 있는 인간이다. 노자는 자연이 아니라 문명에 대해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노자에 있어서는 문명도 자연이다. 새가 집을 짓는 것도 문명이다.  이만하자, 당신들이 노자를 모른다면 당신들 책임이 아니다. 아는 사람들이 잘 알려주지 못한 것이 문제지. 이 한심한 현상들을 어찌해야 하는가? 오강남의 번역과 해설은 다른 일반 번역서와 다름 없는 비전문가의 어설픈 왜곡이다.

 

 이 외에도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대표적으로 유명한(?) 번역본에 대한 오역의 지적 예입니다. (이외에도 부지기수로 많지만 아래 대표적인 책들만 소개)


 <도덕경> 노태준. 도의 본체? 이 표현을 보면 역자가 노자의 도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도가 본체라는 말인가, 도에 대한 본체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다 틀렸다. '본체'라는 말이 서양의 실체론에 빠진 말이다. 도에는 본체가 있지도 않고 도가 본체도 아니다. 도가 본체일 수 없다는 것이 노자의 도사상이다.  자연? 네이쳐 노자의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이지 네이쳐가 아니다. 자연의 이치대로 살라? 이런 것은 노자사상이 아니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강신주
장자의 도가 타자와의 소통이라고 하는데 그럴 듯해 보인다. 철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런 서양스러운 용어로 표현하면 대단해 보일 것이다. (중략) 도가 과연 타자와의 소통인가? 타자와 우리가 소통을 하는 영역은 사회정치적인 공적 영역에서 일뿐이다. 타자와의 소통은 도가 가지고 있는 곁가지의 한 성격일 수는 있지만 이것이 곧 도는 아니다.  장자는 무아론을 말하는데 빈배 설화같은 것이다. (중략)나가 없는데 누구와 소통을 한단 말인가? 타자와? 타자도 무아상태라면 누구와? 그 누가 없는데 누구와 누가 소통을 하는가?  타자와의 소통이 필요한 것은 정치영역에서 있다. 왜? 합의를 해야 하니까. 타자는 나와 다르기때문에 서로를 인정하든가, 결정을 하려면 합의를 해야 한다. 3, 4냐 4, 3이냐. 그럼 3.5로 합의하자라든가. 이게 조삼모사의 메세지인가? 조삼모사가 말하는 것은' 허' 불교용어로 '공' 이 바탕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숭이는 어리석어서 그걸을 모른다. 알면 원숭이에서도 부처가 나왔을 것이다. 원숭이에겐 보통 인간 마음을 초월한 영혼수준은 높은 정신경지가 없다.  

 

<노자 잠언록>, 보누스
노자에 관한 번역서가 많은 데 이런 책이 가장 짜증난다. 노자는 철학이다. 어떤 한철학, 관점을 가지고 81장을 번역하고 해설을 해야지 무슨 격언집처럼 아무 것이나 그때 그때 갖다 끼워넣는 식으로 해설을 하는가? 노자는 인생론을 위한 격언집이 아니다. 노자의 우주존재론과 정치철학을 알고 성인론을 이해하라. 이런 책은 종이낭비다.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강신주
노자의 정치철학을 왜곡하지 말라. 노자를 국가주의에 파묻친 사기꾼으로 만드는가? 노자는 원래 아나키즘에 가깝지 않았는가? 난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노자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로 먼저 주어라라고 했다? 지금의 맑시즘을 자본주의가 있지도 않았던 노자에 갖다가 붙여 비판을 한다. 노자를 다시 읽어라.


  

 <노자강의-김충렬 교수의>
이 책의 저자는 우리나라 동양철학계에 유명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노장철학을 할려는 사람은 거의 다 이 저자 밑으로 가서 논문을 썻다.  이 사람의 동양철학에 대한 박학함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과연 이 저자가 노자의 도를 알까? 글쎄.......  노자의 도를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 몇 구절 번역을 어떻게 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그 구절을 살펴 본 바로는 모르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역시 방동미류의 틀을 못 벗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선사상적인 깨달음이 있는냐 그것도 아닌것 같다. 이 저자 밑에서 쓴 박사논문을 다 읽어 봤는데 이를 지도한 이 책의 저자가 노장을 아는지 의심스러웠다.  우리나라 노장계는 정말 정글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 쪽의 큰 인물이 나온다면 이 책은 제외하고라도 노자, 장자의 허섭한 번역서가 이렇게 날립하지는 않을 것이다.

< 노자-꼭 읽어야 할 인문고전 동양편4> 타임기획 호승희 역                            청소년을 위해 노자를 읽히는가? 노자 도덕경은 청소년은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다. 절대 읽히지 말라. 청소년을 위해 쓴 책이 아니다. 얘들이 읽어서 도움 받을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도 모르고 역자가, 출판사가 이 책 작업을 했단 말인가? 한마디로 노자를 모르는 자들이다. 노자를 알면 이런 기획 안 한다. 이 책뿐 아니라 청소년 시리즈에 노자, 장자를 넣는데 절대 넣지 말라. 있어도 얘들에게 읽히지 말라. 읽히면 오히려 독이 된다. 물론 읽혀도 전혀 모르겟지만. 만약 애들이 읽고 이해했다면 그건 잘못 안 것이다. 그건 절대 노자의 도가 아니다. 노자는 철학교수도 어려워 못 읽는 책이다. 


<철학콘서트>
"도는 철학, 덕은 정치학" 노자 도덕경에 어디 이런 사상이 있는가? 도와 덕은 이런 식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의 초보 같은데 뭐 이리 여러가지로 아는 체를 하는가? 다른 부분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나 똑 바로 알고 책을 써라. 개론이나 입문서는 오히려 철학의 해박한 대가들이 써야 한다.

 

그렇다면 제대로 번역된 노장에 관계된 책은 한권도 없느냐? 그렇지 안답니다. 장자에 대한 좋은 번역서는 없지만 제대로 된 도덕경의 번역서는 있다는 군요! 

J님께서 추천하신 제대로 번역된 4권의 도덕경 (우리나라에서 도덕경을 제대로 풀이한 도덕경 전문 주석서)  

심재원, 노자도덕경, 그 선의 향기, 정우서적. 감산덕청의 주석을 함께 완역하고 철학 설명을 해 놓았음.    

임채우, 왕필의 노자주, 한길사. 왕필의 주석을 완역.     

최진석 정지욱, 노자의소, 소나무. 성현영의 주석을 완역.    

이석명,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 소명. 하상공의 주석을 완역. 각주 충실 



 

 

  

 

어떤 분이 J님의 추천대로 <이석명,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를 읽었는데, 오강남 역본의 미진한 부분이 해결되었답니다. 저도 한 번 이들 책으로 유명한 도덕경을 제대로 읽어볼 요량입니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9-06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7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9-07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충렬을 비판하면서 방동미를 부정적으로 거론하는 것을 보면 필자가 도올 제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도올이 김충렬과 방동미 제자거든요.

노이에자이트 2011-09-08 23:07   좋아요 1 | URL
그래서 도올 책에 김충렬 씨에 대한 회고가 가끔 나오죠.도올이 대만국립대학에서 석사학위 준비할 때 지도교수가 방동미였어요.방동미의 마지막 제자죠.

yamoo 2011-09-09 09:37   좋아요 0 | URL
아, 도올이 김충렬과 제자였군요! 오늘 노이에자이트님으로부터 첨 알았습니다! 근데, 말하는 폼이 참 도올하고 비슷합니다. 도올 논어 강좌...그보다 더 잘된 책은 없다는 걸 보고, 전 도올의 제자가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yamoo 2011-09-09 09:38   좋아요 0 | URL
흠...대만국립대학에서 석사 준비할 때 지도교수가 방동미 였군요! 방동미의 마지막제자라...

글면, 노이에님 도올이 하버드에서 박사 받을 때 지도교수는 누구였는지 혹시 아시나요?? 전, 이것도 궁금해 지네요..헤~

노이에자이트 2011-09-09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벤자민 슈워츠.러시안 유태인 자손이고 세계적인 학자입니다.중국사상사 전공인데 중국혁명과 공산주의운동에도 정통했어요.7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에 온 적도 있고...




yamoo 2011-09-13 20:5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벤자민 슈워츠였군요!

2011-10-27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매 2012-01-25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데 헛소리 그럴듯하게 써놓았네요. 남 비판하기 참 쉽죠. 유명한 학자 비판하려면 어느 정도 논리 구조가 있어야죠. 어설프게 옆에서 들은거 한 구절 인용하고 비판하는 비판이 아니죠. 노자가 열린 텍스트인데 '노자의 도를 알까?' <--- 이런 식은 수준 이하의 발언이죠.. 덤으로 방동미 선생 언급한 것도 웃기네요.. ^^

ㅉㅉ 2014-10-30 16:2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런 약장수한테 넘어가는 사람들도 참 딱하기는 마찬가지고요...

2012-01-26 0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곤들매기 2012-08-2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분 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노자도덕경, 그 선의 향기를 사서 앞쪽의 해제를 읽고 있는데, 지극히 명료해서 살며시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이전에 읽은 도덕경(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 김학목 옮김, 홍익출판사)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네요.

붕새철판구이 2012-10-21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자와 장자, 공자와 맹자, 석가와 달마, 예수와 바울, 마호멧과 XX, 이런 귀신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두려워하는 인간은 대개가 태어난 지 2~3년이 지난 것 들이다. 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왜 개와 같은 과정으로 태어나서 '우리 강아지"가 된 인간들은 이 귀신들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 귀신들의 요란한 재롱이 먹고 사는 일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걸핏하면 불려나와 재롱을 부려야 하는 이 귀신들, 이제 그만 평안히 죽도록 풀어주면 어떨까?

이런 2013-09-19 01:0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병신

성천 2015-02-2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장 사상을 제대로 이해 하려면 고대의 신선사상을 이해 해야한다. 중국으로 건너간 도교는 물질적인 면만 너무 강조하여 우주의 본질을 많이 놓치고 있어서 본래의 뜻을 알기 어렵다.

우짜자고 2015-03-2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글도 잘 모른다
나는 말도 잘 모른다
하고 시픈 말도 없다
듣고 시픈 말도 없다

태어날떼도 문제 업섯고
사러가는데도 문제 업다
주글떼도 문제 업슬거시다

다만,,
사는동안 넘 만은 생각 안하고 사라서면 한다.
ㅋㅋㅋㅋ

이만 2016-08-31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래전에 쓰신 글이데 지금 처음 봤습니다.

님글에 J라는 분의 서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이 분의 언어가 좀 과격하지만 들을 만한 얘기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원글을 읽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알라딘에 처음인데다 컴에 약해 못 찾겠군요.

나그네 2016-09-09 16:5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현재 저 글들은 알라딘에서 죄다 삭제되었습니다. 못 찾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취향을 "하고 싶은 마음이 쏠리는 방향"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용례로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다'란 표현이 있는데 우리는 이 표현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합니다. 그래서 취향이라고 하면 아주 가볍게 생각하거나 취미와 비슷한 것으로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특히 어떤 주제로 피 튀기는 논쟁을 하다가도 결과적으로 ‘그건 취향의 문제이다’라고 말을 하면. 거기서 논란 종결입니다. 개인의 취향이라는데 더 말해서 뭘 할까요~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취향이라는 건 일종의 방어벽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자기의 성향을 특징짓는 ‘어떤 것’으로 작용합니다. 뭐랄까, 좀 가벼운 것이라 할까요. 잡담 속에 섞여 간간히 표출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어떤 취향을 갖고 계세요?” “취미는요?” 뭐, 이런 물음들은 초면의 사람을 알기위해, 또는 친밀함을 나타내기 위해 인사치레로 하는 시시콜콜한 탐색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취향’이라는 개념이 어떤 힘 있는 사람에게 귀속될 경우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화됩니다. ‘권력’이라는 괴물이 말입니다. 특히 권력자의 취향이라는 건 절대적이라서 하나의 ‘현상’을 낳습니다.(여기서 권력자는 정치가 뿐 아니라 사회의 어떤 특권층일수도 있습니다)

일명 법관이나 변호사 그리고 검사로 대변되는 법조인들은 어떤 사건을 받았을 때 그 사건을 분석하여 그에 맞는 가장 적합한 법적 해석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개인의 취향이 우선한다고 합니다. 취향에 맞게 이론과 해석을 짜맞춘다나요. 그래서 모든 판결문을 보면 그 판결문을 쓴 법관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사건에 더 적합한 저러한 법이 있는데, 왜 이런 가당치 않는 법으로서 요렇게 해석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법관의 취향이 성적으로 보수적이라면 미성년자성범죄자는 이중처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간통죄나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한 판결은 바뀔 것(사실 근래 바뀌었음)이며 사회의 ‘경향’을 좌우할 것입니다.

어떤 문학상 시상식은 어떨까요? 어떤 권위자의 취향은 그 선택의 절대성을 부여합니다. 아무리 독특하게 잘 쓴 작품이라도 심사위원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사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는 어떤가요. 전직 대통령은 코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취향의 정치를 하다 가셨습니다.

결국 취향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브르디외의 <구별과 취향의 사회학>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매우 많은 사회제도와 문화가 어떤 특권층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물인 것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말입니다.


 

  

또한, 취향은 논리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분히 감각적이고 충동적이며 무의식적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선입관이 개입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어떤 현상을 바라보는 진실된 시각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이 사회에서는 말이죠.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개를 흔드는 현상. 이것이 우리 사회의 실상이 아닐 런지 생각해 봅니다. 
 

 

****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폭력을 우리나라만큼 남성 우월적 시각에서 다루는 선진국은 없는 듯합니다. 그도그럴것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취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범죄에는 매우 관대하다는 것을.  

성희롱 파문으로 논란이 됐던 몇몇 국회의원들이 다시 활발히 활동을 하고, 부장검사가 간통한 사실이 현장에서 발각되었는데도 유유히 사표를 쓰고 처벌에서 빠져나가는 나라.  

명백한 강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헤퍼서 그렇다고 소문을 내고 돌아다니는 고대의대 가해자들의 부모.  

참~ 취향한번 독특하군요! 그런 취향이 여성들을 죽이고 있네요...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1-09-0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과 상관없는 댓글이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번에 온 책 보니까 420쇄여요.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yamoo 2011-09-03 22:12   좋아요 0 | URL
커헉! 제가 본것이 2백 몇 쇄였는데....와~ 또 몇 달 사이에 배를 찍었군여! 정말 놀랍습니다..저도 한 번 봐야겠는데, 도서관에 맨날 대출중이니...서점에서 죽치고 앉아 보는 수밖에 없겠어요..ㅎㅎ

cyrus 2011-09-0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요즘 세상 돌아가는 보면.. 아무래도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인거 같아요. ^^;;

이 역시 본문과 상관없는 덧글 내용이지만.. 420쇄라니.. 대단하네요.

yamoo 2011-09-03 22:13   좋아요 0 | URL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대한민국...--;;

시루스님과 같은 대학생을 위해 쓴 책이니 한 번쯤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해요..전 서점에 가서 읽다 오려구요^^

프레이야 2011-09-03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피해자 여학생이 학교로 돌아와 오히려 제2, 제3의 상처를 받게되다니요
이건 무슨 취향도 아니고 선입견도 아니고 폭력이에요.ㅠ
상대적으로 권력있는 자의 취향,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yamoo 2011-09-03 22:14   좋아요 0 | URL
완전 폭력이죠...권력을 가진 자의 취향은 정말 폭력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취향과 폭력과의 관계를 논한 책이 나오면 좋을 텐데요. 꽤 재밌을 것도 같습니다^^

루쉰P 2011-09-05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향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의 영역일텐데 그것이 권력과 결합하며 진실을 가리는 마개가 된다는 것이 참 무섭네요. 사실 취향이라는 것은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참 많은데 그것이 권력과 붙을 때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지고 온다는 것 그것은 결국 인간을 위한 사상이 없는 존재들이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것 때문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합니다. 여성에 대한 취향도 그렇구요. 말이 안 되는 현실이죠. 그만큼 천박한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지 않나해요.
야무님의 글을 읽으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그것을 파헤치고 그것과 연관되는 것을 찾아내고 하는 그런 글이라 읽으며 너무 재밌네요. 퇴근하기 전에 잠깐 들려서 읽고 가요. 이것도 제 취향일까요? 퇴근하기 전에 서재 들어오는거요. ㅋㅋㅋ

yamoo 2011-09-05 20:14   좋아요 0 | URL
취향이라는 것은 좀 깊게 들어가면 충분히 사회학의 주요 연구 테마가 될 듯합니다. 일부 사회학자들이 이 문제를 연구한 것을 일부 보긴 했습니다만...아직까지 활발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은 듯 합니다. 단행본으로 나온 책도 별로 없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우리네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과연 몇 이나 될까?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 생활하거나, 20년 거치 대출로 집을 장만하고, 하루 노동의 댓가를 통해 의식주를 연명하는 서민들에게 있어 자유는 유토피아가 아닐까. 오죽하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카드회사 카피가 떴겠는가.

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먹고 살아야하는 당면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 단연코 자유는 없을 것이다. 확실히 자유는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체제를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에게 있어 자유는 그리움의 대상이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일 수밖에 없다.

여기 우리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리다가 간 사람이 있다. 거친 자연과 더불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썰 들을 풀어내며 ‘자유의 원형’으로 살았던 사람, 조르바! 조르바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순수하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두목 봤어요?」 「……」 「사면에서 돌멩이는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놀랍고도 기뻤다. (아무렴. 무릇 위대한 환상가와 위대한 시인은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던가!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태초에 이 땅에 나타났던 사람들의 경우처럼, 조르바에게 우주는 진하고 강력한 환상이었다. 별은 그의 머리 위를 미끄러져 갔고 바다는 그의 관자놀이에서 부서졌다. 그는 이성(理性)의 방해를 받지 않고 흙과 물과 동물과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p157)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도 그는 놀란다. 그는 소리친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라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p176)

「저게 무엇이오?」그가 놀라도 크게 놀라면서 물었다. 「……두목, 저기 저 건너 가슴을 뭉클거리게 하는 파란 색깔, 저 기적이 무엇이오? 당신은 저 기적을 뭐라고 부르지요? 바다? 꽃으로 된 초록빛 앞치마를 입고 있는 저것은? 대지라고 그러오? 이걸 만든 예술가는 누구지요? 두목, 내 맹세코 말하지만, 내가 이런 걸 보는 건 처음이오!」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그를 불렀다. 「조르바, 혹 돌아 버린 건 아닌가요?」 「무얼비웃고 있어요? 당신 눈에는 안 보이는가요? 두목, 봐요. 저 모든 기적 뒤에 도사리고 있는 마술을 말이요」 (p260)

조르바는 완벽하게 자본주의를 넘어선 삶을 살았다. 장자가 말한 ‘물아일체’와 ‘무위자연’의 사상을 완벽하게 구현하면서 살았던 사람이 바로 조르바였다. 하지만 소설 속의 작가(카잔차키스 자신)인 두목(보스)은 조르바의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지만, 현실의 상황을 끊어낼 수 없어 고민한다. 이를 안 조르바는 보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당신과 함께 갈 수도 있어요. 나는 자유로우니까.”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언젠가는 자를 거요.”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줄을 붙잡아 맬 뿐이지……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p339)

……이해하고 말고. 그래서 당신에겐 평화가 없는 거요. 이해하지 못하면 행복할 텐데. 뭐가 부족해요? 젊겠다, 돈이 있겠다, 건강하겠다, 사람 좋겠다, 만고에 부족한게 없어요. 하나도 없지.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그게 없으면 두목, 글쎄요……. (p340)


조르바가 두목에게 한 말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자본주의라는 사슬에 묶인 채 우리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나는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곧 이따위 돈 벌이를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거야!’라고 결심한다. 하지만 이런 바람과 결의는 두목이 “언젠가는 자를 거요”라고 내뱉는 말과 똑같다. 조르바는 ‘내가 묶인 줄’을 자르지 않고서는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일깨운다. 우리는 누구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보’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조르바의 말이 아프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처럼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펼치는 대화들은 모두 ‘삶의 지향점’으로 귀결된다. 두 주인공 모두 생활고(生活苦) 문제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삶에 대한 관심사는 판이하게 달랐다. 두목은 아폴론적이다. 항상 이성적인 질서와 이데아적인 것을 꿈꾼다. 이에 반해 조르바는 디오니소스적이다. 이 땅에서 자기의 이기심과 감성을 충분히 만끽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데아같은 것은 빌어먹을 개한테나 줘버리라는 것!

이렇게 호탕한 자유를 구가하는 조르바의 삶은 너무도 멋있다. 조르바로부터 가공되지 않는 자유(진리)의 원형을 접하고 고민하는 두목 또한 멋진 삶이다. 그 둘이 춤을 통해서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는 대목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둘이 함께 춤을 추는 엔딩 장면은 정말 잊을 수없는 명장면이다.) 


 

「우리는 함께 춤을 추었다. 조르바는 내게 춤을 가르쳐 주고 엄숙하고 끈기 있게, 그리고 부드럽게 틀린 부분을 고쳐 주었다. … 내 가슴은 새처럼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중략) (춤을 추면서) “두목! 당신에게 할 말이 아주 많소. 사람을 당신만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쌓이고 쌓였지만 내 혀로는 안 돼요. 춤으로 보여드리지.”」 p329


조르바가 현대인들에게 자유의 부재를 강렬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그가 자연과 더불어 살다간 마지막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학작품의 주인공 중에서 그가 유일한 실존인물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한편,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히기를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그래서 그런지 책의 도처에 이들의 사상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놀랐다. ‘붓다가 그 최후의 인간(모든 믿음에서 모든 환상에서 해방된, 그래서 기대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진)이다!’ 나는 부르짖었다. 이것이 그의 비밀이며 엄청난 의미이다. 붓다에겐 스스로를 비운 ‘순수한’ 영혼이 있다. 그의 내부는 공허하며 그 자신이 바로 공(空)이다. ‘네 육신을 비워라, 네 정신을 비워라, 네 가슴을 비워라!’ (p155) 
 나는 조르바의 말을 듣고 당황하고 말았다. 법이 명하는 대로 자진해서 행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현자(賢者)가 누구였던가? 필연에 순응하고 필연적인 것들은 자유 의지의 행위로 바꾸어 놓으라고 한 사람은? 이게 해탈이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비참한 방법이지만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다. (p307)    
 「조르바, 내 말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 마지막 부류는 전 우주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별이나 모두 한 목숨인데, 단지 아주 지독한 싸움에 휘말렸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요. 글쎄 무슨 싸움일까요? ……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지요.」(p315)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超人)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을 가르고 내 연(鳶)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p340)


조르바의 어록을 통해서, 때로는 이 소설의 화자인 나(두목)의 성찰을 통해서 그리고 둘의 대화를 통해서 보여지는 붓다와 니체 그리고 베르그송의 사상은 한데 어울려 ‘자유로운 인간’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의 주제를 한 단어로 말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자유’라고 말하겠고, 어떤 문제의식을 우리에게 던져주느냐고 묻는 다면 단호히 ‘인간에게 있어 자유로운 삶은 무엇인가?’ 라고 답하겠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쉰P 2011-09-0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의 서재에 이렇게 정식으로 놀러옵니다. ^^ 그리스인 조르바는 저 역시 무척이나 강렬하게 읽은 책이에요. 인용해 주신 주인공 '나'의 철학이 저에게는 참으로 가슴 깊이 남았죠. 자연으로 둘러싸인 환경이 아닌 욕망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유를 찾기란 참으로 어렵죠. ^^ 매일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자유로운 삶이란 주체성을 가진 삶이라 생각이 들어요. 환경에 시대에 쓸려 버리는 인생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고 답답한 이 사회 속에서 그런 것들에 함몰되지 않고 파도를 헤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저에게 있어 자유로운 삶인 것 같아요.
리뷰 굳!!

yamoo 2011-09-02 16:47   좋아요 0 | URL
조르바는 누구에게나 매력을 주는 인물 같습니다.^^ 루쉰님도 이 작품을 강렬하게 읽으셨군요~ 재미난 리뷰 기대하고 있을 께요~ㅎ

와~~~루쉰님이 생각하시는 자유로운 삶...멋진데요~ 님의 그 삶의 궤적을 항상 글로 남겨주시길!

sslmo 2011-09-02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삶이란 그저 머리나 마음 움직이는 대로 사는데도,
그게 순리에 가깝고 자연 그대로인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랫만에 만나게 되는 조르바인걸요.
님의 시선을 통해 만나니...새롭습니다~^^

yamoo 2011-09-02 16:51   좋아요 0 | URL
저두 머리나, 마음 움직이는 대로 살고 싶어요...ㅠㅠ 근데, 그게 자연 그대로, 순리에 가까운 삶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 더 미치겠어요...ㅜㅜ

저는 뭐, 이 작품 읽고 자유만 생각났더랬습니다. 여전히 전 편협한 가 봐요..한 가지밖에 못보니...

양철님의 시선을 통해 보는 조르바는 어떤 모습일지 무쟈게 궁금하네요...저에게도 그 새로움을 느끼게 해주세요, 네~~?^^

쉽싸리 2011-09-02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르바'를 예사롭지 않은 자유인으로 느꼈던 기억이 나네요. 아무래도 작가는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도 깊었던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를 마구 흠모해서 '어디 선창가에라도 가서 살아야겠다. 거기서 멋진 연애도 해봐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며칠을 달떴던것도 같아요. 마음먹는게 참 중요한것 같아요. 그리고 본능에 충실하는 것도!! 단, 폐를 끼치면 안되겠죠.

yamoo 2011-09-02 16:5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쉽싸리님, 반갑습니다!

카잔차키스가 불교철학에 심취했다고 해요~

그나저나 쉽싸리님도 그런 생각을 하셨네요..저도 책 읽으면서 조르바를 흠모하며 선창가에 사는 모습을 그려봤습니다만...ㅎㅎ

노이에자이트 2011-09-03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어떤 여자는 조르바같은 남자를 남편이나 사윗감으로 생각하긴 싫다고 아주 솔직하게 말하더라고요.정말 솔직한 답변이죠.

yamoo 2011-09-03 22:11   좋아요 0 | URL
이거 토론 도서였었는데요, 당시 여자분들이 조르바와 같은 남자는 정말 딱 질색이라고 그러더군요~ 솔직한 것 같습니다..ㅎㅎ
 


캐이블 TV에서 우연히 습관에 대한 다큐를 보게 되었다. 오랜 전 다큐의 재방송이었다. 채널을 돌리려다가 피터드러커의 <자기경영노트>라는 책 소개 때문에 채널을 고정했다. 왜냐하면 난 오래전부터 이 책을 갖고 있었지만 여전히 읽지 않고 있었기에.


 

내용 자체는 뭐, 뻔했지만 습관에 대해서 관심을 환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난, 조금 다른 측면에서 궁금한 점이 생겼지만.

습관이 중요하다고 하는 자기계발서들은 꽤 많이 구경했다. 아주 대표적인 책이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일 게다. 이 책의 열풍은 정말 대단해서 이후 비슷한 책들이 쏟아졌다.


 

대체로 습관을 다룬 대부분의 처세용 책들의 요점은 단 하나로 수렴한다. 그것은 ‘습관은 자신을 바꾸는 힘이다’라는 것. 습관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는다고 한다.

요컨대, 좋은 습관을 기르면 좋은 행동이 형성되고, 나쁜 습관이 들면 나쁜 행동으로 나타나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행동을 뿌리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뿌리면 성격을 거두고, 성격을 뿌리면 운명을 거둔다.”는 G. D. Boardman의 경구는 이를 뒷받침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좋은 습관을 가졌다는 주장은 좋은 습관을 갖지 않은 유명인사가 소개되지 않는 한 계속 타당한 위력을 떨칠 것 같다.

헌데, 과연 습관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는지는 좀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할 것 같다. 아니, 논의의 차원이 아니라 철학적 성찰이 필요한 부분 같다. 이 점이 내가 관심을 갖는 지점이다.

그래서 ‘습관’에 대한 철학책을 찾아봤지만 전무했다. 심리학과 자기계발서에 관계된 책만 잔뜩 있었다. 전옥편 <이기는 습관>, <습관부터 바꿔라>, 김경모 <습관-나를 변화시키는 힘>, 브라이언 트레이시 <백만불짜리 습관>, 양창순의 <마인드 포스>, 이시형의 <세로토닌하라> 등등.

집에서 가까운 대형 서점에 나가 살펴 보았지만, 전부 자계서 뿐이었다. 왜 습관에 대한 철학적 분석서는 없는지....의구심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 흔한 철학적 잠언서도 없다니~

이런 생각에 집에 있는 책들도 뒤적거려 봤지만, 역시 관련 책이 있을 턱이 없다. 책은 없었고, 습관에 관해서 내가 찾은 유일한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9장 “행복은 학습이나 관습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인가, 혹은 신이 보내주시는 것인가, 또 그렇지 않으면 우연히 얻게 되는 것인가”가 유일했다. 흠, 하나는 발견했다. 책은 아니지만.. 



에라~ 모르겠다, 포기하고 읽던 책이나 읽기 시작했다. 그제부터 읽고 있는 책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베르그송의 원 저작에 입문하기에는 이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최고라는 전문가의 말에 읽기 시작했다.

‘역시, 베르그송은 천재야’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다가, 무심코 책장 하단에 눈길이 가게 되었다. 그 칸은 현대의 지성 시리즈를 모아놓은 곳이다. 내가 언제 사 놓았는지 모르는 <베르그송 연구>란 책이 거기 꽂혀 있었다.

도대체 이 책을 언제 샀는지 기억에도 없거니와, 내가 이 책을 왜 샀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현대의 지성시리즈라서 그냥 덥석 구매한 모양이다. 물론 지금까지 들춰보지도 않았었다.

베르그송의 주저들을 읽기로 결심했으니, 구경이나 할 겸 펴들었는데, 나는 이 책으로부터 2번 놀라게 되었다.

타이틀만 보고 중요 부분만 훑었는데도, 저자 김진성은 완전히 베르그송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명료한 언어로 베르그송의 핵심 사상을 체계적으로 건저올리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37세에 요절했다는 것이고, 이 책이 김남두 교수에 의해 유고집으로 출간된 책이라는 점이다.

김남두 교수와 동료 교수들이 그의 죽음을 매우 애석해할만 하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짧은 논문 10여 편을 모아 놓은 유고집이었지만 정말 대단한 연구 성과로 비쳤기 때문이다.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베르그송의 사상체계를 한눈에 파악할 정도다)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세계적인 헤겔 전문가인 임석진 교수에 버금가는 베르그송 연구의 대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런데, 또 한 번 놀란 건, 이 책의 7번째 소논문 때문이다. 이 소논문은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의 습관에 대한 고찰>이다. 여기에는 내가 의구심을 가졌던 바로 그 내용들이 논문의 첫머리부터 펼쳐져 있었다.

“습관이 과연 철학의 문제가 될 수 있는가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법하다. 존재․이성 또는 본질과 같은 철학적 개념에 익숙한 사람은 이 대수롭지 않은 심리적 사실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사를 조금만 꼼꼼히 살펴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습관과 덕의 관계를 논한 이후로 데이비드 흄에 이르러 습관이 인과율의 성립근거로 제시되기까지, 그것은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 등에서 중요한 철학적 주제였음을 알 수 있다.
습관의 문제는 발(J. Wahl)이 정확히 지적하듯 특히 프랑스 철학에서 주목의 대상이었다. 데카르트, 루소, 파스칼, 비랑, 라베송, 부트루, 베르그송 그리고 현대의 리쾨르에 이르기까지 습관은 여러차원에서 다각도로 검토되고 있다. 예컨대 파스칼은 습관에서 상상력과 함께 가장 커다란 오류의 원리를 찾는다. 순수한 감정을 이성보다 높이 평가한 루소 역시 습관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습관은 감정의 신선한 유출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에밀>에서 “어린이에게는 오직 하나의 습관만을 갖도록 해야 한다. 습관을 갖지 않는 습관을”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이들의 철학은 습관론에 근거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랑, 라베송, 베르그송 철학에서 결정적인 의의를 갖는다. 이 논문은 이들, 특히 베르그송에 있어서의 습관의 문제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pp154-155)

 

있었다! 습관에 대한 철학적 논의들이. 아쉽게도 ‘습관’이라는 타이틀을 단 책은 아직까지 없었지만 주요 철학자들의 ‘논의’들은 있었다. 저자의 소개대로 흄의 책 <정념에 관하여>를 펼쳐보니 제3부 제5절에 ‘습관의 영향력에 관하여’라는 부분이 있다. 헌데, 2페이지 분량밖에 안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요 철학자들이 ‘습관’에 대해 논의했다는 점이다. 아쉬운 것은 주요 저작 속에 절이나 세항목 속에 포함되어져 있기 때문에 저작을 읽지 않으면 철학자들이 ‘습관’을 다루었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 이 점이 참 아쉽다.

물론 무식한 소치의 원인은 바로 나에게 있지만 <습관에 대해서>라는 편집된 책 1권만 출간돼 있었더라면 이런 의구심은 조금 더 일찍 풀렸지 않나 하는 푸념을 하게 된다.

뭐, 이런 쓰잘때기 없는 생각 때문에 김진성이라는 대단한 철학자도 알게 되고, 흄의 저서를 다시금 들춰보는 수확도 얻을 수 있었으니,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이런 상념 때문에 귀중한 휴가의 하루가 날라간 것은 되돌릴 수가 없구나~

*****
혹시 ‘습관’을 논한 철학책을 아시는 분은 무지한 야무에게 알려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1-09-01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습관'에 관한 가장 유명한 경구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우리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된다. 뛰어남이란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습관이다."), 그 경구는 제가 알기로『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 속에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 책도 사 두기만 하고 읽지 못하고 있는데, yamoo님께서 소개해 주신『베르그송 연구』라는 책은 언감생심일 것 같고, 데이비드 흄의 책들도 읽고는 싶은데 참 그게 쉽지 않네요.

다만, 데이비드 흄의 경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깊이 천착한 인물이니만큼 '습관'을 다룬 부분이 (yamoo님께서 찾아낸) 2쪽으로 그치치는 않았겠다 싶고, 또 그와 '절친'이자 그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았던 아담 스미스 역시 그의 주저인 『도덕감정론』에서 '습관'에 대해 깊은 철학적 성찰을 한 것도 당연하다 싶습니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가 그의 철학책(도덕감정론)에서 '습관'에 관해 살펴본 내용이 그나마 yamoo님께 조금이나마 참고가 될 것 같아 '길게' 덧붙여 봅니다.

* * *

제5부 습관과 유행이 도덕적 시인과 부인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365쪽∼398쪽)


그들 자신의 결핍과 필요가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은 배려를 해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 편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우리 자신의 비참한 상황이 우리 자신을 극도로 괴롭히고 있다면, 우리는 이웃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를 갖지 못한다. 모든 미개인들은 그들 자신의 결핍(缺乏)과 필요가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결핍과 필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미개인은 그의 고통이 어떤 성질의 것이건 간에, 이 고통에 관하여 그의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떤 동정(同情)도 기대할 수 없고, 이런 이유로 남들에게 자신의 약함을 조금이라도 눈치 채이게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의 격정이 아무리 거칠고 난폭하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표정의 태연함 또는 그의 행위 및 태도의 침착함을 어지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북아메리카의 미개인들은 어떤 일을 당해서도 완전히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취하며, 그리고 만약 그들이 어떤 점에서라도 애정이나, 비탄이나, 분개의 격정에 의해 압도된듯이 보인다면, 그들 자신의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담대(膽大)함과 자기 통제는 이런 면에서는 거의 유럽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나의 생각)
'울지마 톤즈'에 나왔던 톤즈 사람들(아프리카 미개인)이 생각난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애정에 약하다는 것

신분(身分)과 재부(財富)에 있어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수준에 있는 나라(즉, 야만상태)에서는, 남녀 간의 상호간의 애정만이 결혼에서 고려되어야 할 유일한 사정이며, 그리고 이 애정은 어떤 종류의 구속도 받지 않고 향유(享有)될 것으로 기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나라에서는 모든 혼인이 예외 없이 부모들에 의해 결정되며, 그리고 만약 어느 한 청년이 한 여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다른 어느 여성보다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또는 자신이 어떤 때 어떤 인물과 결혼해야 할지에 관해서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이 일에 대해 평생 동안 부끄럽게 생각한다.

인간애와 정중함이 존중되는 시대에는 사람들은 애정에 잘 빠지는데, 애정에 약하다는 것은 미개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연약한 행위로 간주된다. 심지어 결혼한 후에도 양 당사자는 성욕에 기초한 관계를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함께 살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남들 몰래 만날 뿐이다. 그들은 계속 각자 자기 부모의 집에서 생활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나라에서는 공공연히 허용되고 있는 남녀의 동거생활은 거기에서는 가장 추하고 가장 남자답지 못한 호색(好色) 행위로 간주된다.


죽음과 고문에 대한 경멸

모든 야만민족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이와 같은 가공할 종말(終末)에 대한 준비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이를 위해서 소위 죽음의 노래(the song of death)를 만든다. 이 노래는 자기가 적들의 손에 붙잡혀서 적들의 고문을 받아 죽어갈 때 부르려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고문자들에 대한 모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죽음과 고통을 극단적으로 무시하는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 노래를 모든 특별한 경우에 부른다. 즉, 전장에 나갈 때에도 이 노래를 부르고, 전장에서 적과 마주쳤을 때에도 이 노래를 부르며, 혹은 자신ㅇ느 이미 가장 무서운 불행을 만났을 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그리고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떤 큰 사건도 자신의 결심을 흔들거나 자신의 최초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는 이 노래를 부른다.

죽음과 고문에 대한 이러한 경멸(輕蔑)은 기타 모든 야만민족들 사이에서도 똑같이 지배적이다. 아프리카 해안에서 온 흑인들은 모두, 이런 측면에서, 탐욕으로 더러워진 그들의 주인의 감정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넓은 아량을 지니고 있었다. 운명의 여신이 인류에 대한 그녀의 절대적 지배권을 가장 잔인하게 행사한 것은, 저 영웅적인 아프리카 민족들을 유럽의 감옥에서 나온 쓰레기들에게, 자신이 떠나온 본국의 미덕도 자기가 찾아온 나라의 미덕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인간쓰레기들에게, 굴종(屈從)하게 만들었을 때이다. 이 인간쓰레기들의 경박함, 잔인함, 천박함은 그들에게 정복당한 자들의 경멸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한 마디 말만 남긴다고 한다

문명한 민족은 천성(天性)을 존중하고 그 요구에 따르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민족은 솔직하고 개방적이고 성실하다. 반대로 야만인은 각종 격정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감춰야만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거짓을 말하고 위장(僞裝)하는 습관을 획득하게 된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또는 아메리카의 야만민족들의 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의 관찰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해하기 어려우며, 그리고 그들이 진실을 숨기려는 마음을 가질 때에는 아무리 알아내려고 해도 그들로부터 진실을 알아낼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가장 교묘한 질문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고문을 하더라도 그들이 말할 마음이 없는 것을 고백하도록 할 수는 없다. 야만인들의 격정 역시, 비록 이 격정들이 외부로 드러나는 어떤 감정으로 표출되는 일은 없고, 그의 가슴 속에 숨겨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격분(激憤)은 최고조에 도달한다. 그가 분노의 어떤 징후를 보이는 일은 매우 드물지만, 그러나 그가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고 이를 실천하려고 할 때에는, 그것은 항상 살벌하고 가공할 만한 것이다. 아주 작은 정도의 모욕도 그를 자포자기로 몰고 간다. 그의 용모와 말투는 정말로 아주 냉정하고 침착하며, 마음의 가장 완전한 평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지만, 그의 행동은 흔히 매우 격렬하고 난폭하다.

북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의 여성이 그 어머니로부터 단지 가벼운 질책을 받았다는 이유로 물에 빠져 자살하는 일이 드물지 않은데, 이런 경우에도 그들은 아무런 격정의 표현도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당신의 딸은 더 이상 없습니다"라는 한 마디 말만 남긴다고 한다.

yamoo 2011-09-01 15:47   좋아요 1 | URL
우와~! 감사합니다...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서도 습관이 다루어졌었군요! 이런 책을 읽지 않으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좋은 습관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오렌님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