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왕조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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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214년, 서기로는 1881년이었다. 수도 한양의 어느 봄날, 이제 막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는 더없이 좋은 계절이요, 화창한 날씨였다. - P11

김일한은 서재에 앉아 둘째 애가 태어났다는 전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한의 본관은 안동이었다. 그가 지금 앉아 있는 방은 온돌방으로서 이 집에서 제일 크고 안락했다. 남향집이어서 담 위로 솟아오른 햇살이 종이 창문을 통해 은은히 비쳐들었다. 그는 낮은 책상 옆에 공단 방석을 깔고 앉아 책상에 펴놓은 책에 정신을 집중해 보려고 애썼다.  - P11

아내가 친정 자매와 산파 그리고 몸종들과 함께 안방으로 들어간 지도 벌써 세 시간이 지났다. 같이 들어간 여인들이 번갈아 세 번이나 나와 모든 게 순조롭다고 하며, 아직 애를 낳으려면 멀었으니 제발 뭐 좀 들라고 하더라는 아내의 말을 전해 주었다. - P11

그는 여성에 대해 조금은 무시하는 태도로 생각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내, 순희만 빼고는 다 마찬가지지! 그는 아내를 그토록 사랑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심지어 아내에게도 내색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결혼하기 전에는 얼굴도 못 본 사이였지만 다행히 중매쟁이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점쟁이들도 사주를 제대로 보아 주었던 것이다. 순희는 새댁으로서의 온갖 일을 빈틈없이 해냈다. 그녀는 결혼식 날 친척과 친구들이 끈덕지게 놀려대도 절대 웃지 않았다. 새색시가 혼인날 웃으면 딸만 낳는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순희는 올해 세 살 나는 첫아들이 있는데, 점쟁이 말대로라면 오늘 또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일한 일가는 나라가 어지러운 이때에도 아늑한 보금자리를 이루고 있었다.  - P12

"현재 우리나라는 노서아, 중국, 일본의 세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우리를 이들의 탐욕으로부터 지키는 길은 세상에서 물러나 있는 것뿐이옵니다. 우린 은둔국이 돼야 하옵니다."
할아버지는 벌써 50년 전에 상감께 이렇게 아뢰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가끔 할아버지의 이 말씀을 인용하곤 했는데, 일한은 속으로 은근히 무시했다. 선조들의 어리석음이라니! 그는 대원군을 몰아내려는 첫 음모에 가담했었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도 감추고 있었다. 일한은 당시 소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음모를 꾀하는 지도자들과 젊은 왕비 사이를 오가는 쓸 만한 전령이었다. 섭정인 대원군은그의 아들 고종을 너무 어린 나이에 민씨 문중의 한 규수와 결혼시켰는데. 그녀는 임금보다 나이가 많았다. 대원군은 후일 이 일에 대해 후회막급이었다. 그 아름답고 품위 있는 소녀가 그처럼 강인하고 영악하게 섭정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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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키스의 말 - 2024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배수아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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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오비디우스의 《변신》에서 바우키스와 그녀의 남편 필레몬은 변장한 신을 잘 대접한 보상으로 죽는 순간까지 함께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을 말한다.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순간 서로의 몸에서 자라나는 잎사귀를 보는 순간 두 사람이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배수아 작가의 <바우키스의 말>은 이 마지막 순간에 관한 아름다운 소설이다. 하지만 바우키스의 말이 무엇이었을지 알 수 없듯이 배수아 작가의 소설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붙잡으려는 생각에 문장을 여러번 자꾸 읽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리듬을 발견하게 된다. 




특별한 줄거리를 찾을 수 없는 소설이지만 그래도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음악가(이 작품에서는 등장 인물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모형 비행기 수집가, 예술가, 음악가'라는 식으로 호명이 된다)'의 즉흥 퍼포먼스에 초대를 받았을 때의 일을 쓴 문장들이었다. 음악이 연주된 홀은 텅 비어 있고 초대를 받은 몇 사람만이 연주회장에 모여있었는데 음악가는 오래전부터 피아노 앞에 앉아 뚜렷한 음악의 시작도 알 수 없고 "최초의 음이 발현하기를 기다리는 행위"를 하는 것, 그것이 전부인, 그럼에도 계속해서 계속해서 듣고 있는 행위..., 그러면서 음악가는 여기에 없는 것들을 향해서 귀 기울임으로써 음악을 시작하고 있었다 말한다. 


"보리수 안의 바람, 강비탈에 핀 부처꽃들의 기울어짐, 언젠가 붉은 가을, 자갈을 밟으며 다가오는 발자국, 기차가 도착하는 신호음,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책상 위의 편지들이 흩어지는 소리, 서로 은밀하게 마주 잡는 두 손, 새들이 만들어내는 허공, 하나의 편지 위로 내려앉는 또 다른 편지, 그리고 붉은 가을, 오직 하나의 어휘가, 하나의 음이, 하나의 그림이 떠오를 때까지 마침내 모든 음들이 소리의 최소 성분으로 수렴될 때까지. 멜로디 없는 음악, 최소의 음악. 돌과 나모의 내부로부터, 저절로_중얼거림. 겨울 아침 서리의 속삭임. 지금 여기 없는 것들의 기억. 그 어휘가 무엇일까. 강물에 비친 하루.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음악가는 피아노 건반을 하나 누르고 소리의 울림이 사라질 때까지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았다.(45쪽) 




이어서 연주회장의 몇몇 사람들이 돌을 하나 들고 음악가의 연주에 공명하여 어느 순간, 자신이 원하는 순간, 음악의 일부가 되어 돌을 떨어뜨리면서 하나의 어휘를 발설하는 행위를 하게 되는 이 퍼포먼스, 이 연주가 아주 아주 느리게 느리게 천천히 이어져 나간다. 그 어휘가 무엇일까! 이 문장들은 자연스럽게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마지막 발화를 삼킨 바위키스를 연상하게 만들고, 돌과 돌이 떨어지는 사이, 음악가는 사람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을 말해주는데 "이 곡의 이름은 '바우키스의 말'입니다.(51쪽)"   


"말을 꺼내려는 인간이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이미지는 소설 전체를 장악하면서 여러 번 반복된다. 이를 테면 '나'는 언젠가 모형 비행기 수집가와 숲을 산책하다가 각각 나무를 깊이 껴안고 포옹한 적이 있다. 나무의 떨리는 내면이 느껴질 때까지. 그제야 마침내 입 없이도 하나의 어휘가 발설되고, 두 사람은 숲속 나무의 이미지와 포개진다. 그러니까 가장 결정적인 말이 나오기 위해서는 언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이 영원히 발설되지 못할 것 같은 어휘가 언어의 차원에서 음악의 차원으로 변신하는 순간에 예상치 못하게 온다."(8~9쪽, 심사평 중에서) 


이 단편의 의미를 '나무'에서 찾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최후의 순간 바우키스는 나무로 변하는 자신을 느끼고 지금 이 순간 나무로 변하고 있을 필레몬을 느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이 나무껍질로 변하기 직전, 바우키스는 사랑하는 필레몬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으리라. 마침내 도달한 최후의 순간, 하나의 어휘가 해방되었으리라. 그리고 나는... 배수아 작가의 잡히지 않지만 아름다운 문장들을 되풀이해서 읽고 있었다.






문지혁의 <허리케인 나이트>는 마지막의 반전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도 이 단편의 줄거리는 계속해서 기억할 수 있을 거 같다. 문지혁의 단편과 더불어 예소연 작가의 <그 개와 혁명>은 《2025이상문학상작품집》에서 이미 읽었기 때문에 다시 여기서 새삼스레 리뷰를 쓰지는 않겠다. 예소연 작가의 단편은 이상문학상 대상수상작이었는데 아버지의 장례와 관련한 단편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사실 공감하기는 어렵고 너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작품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과정도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면서 하나도 재미있지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재미있게 읽은 단편이 있는데 예소연 작가의 작품 외에 아버지의 장례와 관련한 작품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박지영 작가의 <장례 세일>이었다. 이 세상 모든 물건들, 아니 인간 비인간 할 거 없이 모든 것들을 다 파는 세상인데 아버지의 장례를 세일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전제 하에 아버지 독고 씨의 장례 비용을 가늠하고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상식적으로 최소한의 체면을 차려줄 수 없을 지도 모를 얼마되지 않을 조문객을 걱정하면서 공정한 죽음 비용에 대해 생각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리고 그 과정이란 것이 아버지란 사람의 애도를 소비할 가능성이 있는 지인의 지인들까지 찾아낸, 최대한 많은 예비 조문객들에게 앞서서 "따뜻하고 육즙이 가득한 맛있는 동그랑땡의 맛을 보여주고 애도를 준비하게 하는 것"을 영업 목표로 하여 아버지의 영업일지와 수첩들을 토대로 감사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시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하지만 평생을 그러한 기회와는 등을 지고 산 아버지가 그럴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현수의 노력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인연과 뜻밖의 대가 없는 순수한 애도를 받게 되면서 현수는 깨닫게 된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는데 애써 하는, 어떤 가격을 매겨도 공정하지 않은 완벽히 불공정한 선의"(143쪽) 아무 관계 없는, 아무 이유 없는 완벽한 타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완전한 선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한 사람 몫의 공정. 현수는 아들이면서도 아버지의 인생을 '그래도 싼' 인생으로 비하하려던 생각을 바꾸어 나간다는 사실이 너무도 먹먹하게 다가왔다. 아버지의 인생을 '그래도 싼' 인생이라고 말하는 이면에는 자신에 대한 비하도 담겨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의 삶과 죽음에 가능한 애도란 없을 거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지금부터 천천히 공정가를 높이는 장례 세일을 준비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그 늦은 밤, 뜻밖의 완전한 타인의 완벽한 선의에 의해 이루어진 애도의 몫을 보면서 오늘밤만큼은 "아버지 독고 씨의 죽음과 함께 세상의 모든 '그래도 싼' 죽음을 모르는 자의 선의로 다만 애도해보고 싶어지는 것"이었고, 내 애도의 값은 내가 결정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전춘화 작가의 <여기는 서울>은 조선족 청년인 '영화'가 한국의 서울에 있는 대학에 대학원생으로 유학을 오게 되고 연변에 있는 아버지의 소개로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본부'라는 단체에서 일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잘 보여주어 흥미로웠다. 여태는 우리 눈에 비친 조선족, 연변 동포(혹은 고려인, 새터민, 일본 교포 등으로 치환가능하다)를 우리의 시각으로 조명했다면 이 작품은 조선족 청년의 눈으로 본 현재의 한국과 청년세대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한국말을 쓰니까 그저 적응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결코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물며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도 다르고 우리와 달리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서 우리의 역사를 배울 기회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해나가고 원활하게 대화를 해 나간다는 것이 어려운 과정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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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려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
얼마나 재밌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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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단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다니엘 J. 옮김 / 오픈하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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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커버가 되어 스스로 적진에 뛰어든 리처의 원맨쇼 같은 활약은 이번에도 멋졌다. 악당을 처단하는데 화려한 수사 따윈 필요 없다. 오직 한번의 단호함이 필요할 뿐.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옳은 일을 하는 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문장이 잭 리처에게 딱 맞는 문장이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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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해. 동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어쨌든 난 옳은 일이 이루어지는 걸 보는게 좋아."

리처의 이 말이 넘 멋지다!
˝옳은 일을 하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념이 되어도 좋겠다.



체포 작전 전날 밤 식당에서 도미니크 콜이 물었었다. "왜 이런 걸 하는겁니까?"
뭘 묻는 건지 확실히 알아듣지 못했다. "같이 저녁 먹는거?"
"아뇨 헌병으로 일하는 거 말입니다. 뭐든 될 수 있잖아요. 특전사, 정보부, 공수부대, 기갑부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을 텐데요."
"자네도 마찬가지지."
"알아요. 그리고 난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리처 당신은 왜 이 일을 하는지 알고 싶네요."
누구든 나에게 그런 걸 물어본 건 처음이었다. - P554

"항상 경찰이 되고 싶었어. 하지만 군대는 내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지. 집안 배경도 그렇고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어. 그래서 군 경찰이 된거야"
"그게 답은 아니고요. 애초에 왜 경찰이 되고 싶었던 겁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난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인 것 같은데, 경찰은 여러 가지를 바로잡으니까."
"무슨 여러 가지요?"
"사람들을 돌봐주잖아. 약자들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그게 다입니까? 약자 보호?"
나는 고개를 저었다. - P554

"아니. 사실 그건 아냐. 나는 약자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어. 그저 센 놈들을 싫어하는 거야.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만한 놈들이 싫은 거지."
"그럼 순수하지 않은 동기로 시작했지만 올바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거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해 동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어쨌든 난 옳은 일이 이루어지는 걸 보는 게 좋아."
"저도 그렇습니다.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해요. 비록 모두가 우리를 미워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나중에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더라도요.  옳은 일을 하는 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래야만 하는 거죠. 그렇지 않나요?" - P554

"당신은 옳은 일을 했소?" 그로부터 10년 뒤인 지금, 나는 더피에게 물었다.
더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가 답했다.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소?"
"없어요"
"확실하오?"
"100퍼센트."
"그럼 마음 편히 먹으시오. 그게 당신이 바랄 수 있는 최선이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나중에 고마워하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 P555

그녀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당신은 옳은 일을 했나요?" 그녀가 물었다.
"물론."
우리는 그걸로 끝을 냈다. - P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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