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코는 코냑을 권하며, "그래서 저보고 어쩌란 건가요?"
하고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독특한 나른함 같은 열의를 담아 말했다.
아까 꺼낸 반지를 장난으로 새끼손가락에 끼웠다 뺐다 하며 혼다는 말했다.
"이것을 당신이 잉 찬에게 돌려주며 꼭 받아 달라고 말씀해주셨으면 해요. 이 반지가 그분 몸에서 떨어지면 그분과 내과거가 영원히 단절될 것만 같아요."
내지 - P385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있는 게이코가 화를 내지는 않을까 혼다는 두려웠다. 게이코는 코냑 잔을 눈의 높이까지 든 다음 기리코 유리의 곡선 면에 코냑이 찰랑인 여파가 투명한 점액질 구름을 그리며 서서히,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오는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검고 숱 많은 머리 아래 그 커다란 눈동자는 독기 어려 보일 정도였다. 조소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히지만 그 표정이 극히 자연스럽게 진지해 짓밟은 개미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 같다고 혼다는 생각했다. 재촉하든 거듭 말했다. - P385

"그것만 부탁하고 싶어요. 그뿐이에요.
혼다는 이 사소한 과장의 극한에 어떤 내기를 했다. 아무리 바보 같은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윤리적 경향 말고 어디에 혼다의 쾌락이 있을까. 쓰레기통 같은 이 세상속에서 혼다는 잉 찬을 주웠고 아직 손가락 하나 닿지 않은 여자아이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는 이 어리석음을 높이 끌어올려, 자신의 성욕과 별의 궤도가 맞닿는 접점을 찾으려고 했다.
"그런 아이, 이제 내버려 두면 어때요?"
게이코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요전에도 소문으로 들었는데, 무도회에서 어떤 품위 없는 학생한테 기대 뺨을 맞대며 춤을 추는 잉 찬을 봤다고 하더군요." - P386

"내버려 두라고요? 그럴 수는 없어요. 내버려 두면 성숙을 허용하는 것 아닙니까."
"당신에게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말이네요. 그렇다면 그 아이가 처녀여선 안 된다는 요전의 마음은 어떻게 됐나요?"
"저는 단번에 그분을 성숙시켜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당신의 얼간이 조카 때문에요."
"얼간이죠, 가쓰미는. 정말로."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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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사원>
전편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너무 다른 혼다의 생각과 행동에 적응하기 힘들지만 역시 미시마 유키오 작품답다.
풍요의 바다 시리즈의 첫 권인 <봄눈>에서 일본에 유학을 왔던 태국 왕자의 딸인 공주 잉 찬에게 차갑게 거절을 당한 형국에 수치심을 느끼며 크게 낙심한 58 세의 혼다.
그 모습이 왜 이리 시원하고 통쾌한지...
자,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난 이 이야기의 결말 한 가지는 예측할 수 있다. 전편에서 기요아키의 환생이었던 이사오가 어린 나이에 죽어 다시 환생한 사람이 잉 찬인 것처럼 아직 시리즈의 마지막 한 편이 남아있으므로 잉 찬도 역시 젊은 나이에 죽으리라는 것!

걸으면서 혼다는 만약 자신이 젊었다면 소리 높여 울면서 걸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젊었다면! 하지만 젊은 시절 혼다는 결코 울지 않았다. 눈물을 흘릴 시간에 이성을 움직이는 편이 자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유망한 청년이었다. 얼마나 달콤한 슬픔인가, 얼마나 서정적인 절망인가. 그렇게 느끼면서 그 느낌을 ‘만약 젊었다면‘이라고 가정한 과거에만 허용한 혼다는 눈앞 감정에서 신빙성을 뿌리째 뽑아 버렸다. 만약 자기 나이에도 달콤함이 허용된다면! 하지만 지금도, 옛날에도, 자신에게 달콤함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은 혼다의 천성으로, 그나마 가능한 것은 과거와 다른 자신을 꿈꾸는 일이었다. 어떻게 다른 자신을? 혼다가 기요아키나 이사오처럼 되는 일은 처음부터 완전히 불가능했다. - P382

젊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상상력에 탐닉하는 것이 모든 나이에 상응하는 감정의 위험에서 혼다를 보호했음이 확실하다면, 반대로 현재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수치심은 그 극기했던 청춘의 먼 흔적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혼다가 소리 높여 울면서 걷는 일 따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가 보든 버버리 코트를 입고 보르살리노 중절모를 쓴 초로의 한 신사의 걸음은 변덕스러운 밤 산책자의 모습일 뿐이었다.
- P383

이렇게 불쾌한 자의식이 모든 감정을 간접 화법으로 말하게끔 지나치게 길들인 결과, 이제 자의식이 없어도 될 정도로 안전한 처지가 된 혼다는 어리석거나 파렴치한 모든 행동을 할 수 있었다. 혼다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간다면 ‘감정대로 움직이는 남자‘라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지금 게이코의 집에 가려고 비가 내릴 듯한 밤길을 급하게 걷는 것도 바로 그 어리석은 행동 중 하나였다. 걸어가면서 혼다는 자기 목에 손을 집어넣어 심장을 꺼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마치 조끼 주머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회중시계를 끄집어내듯이.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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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사는 것이 경제적으로 거의 파괴적인 부담이 될 것이라던 윌리엄의 걱정이 곧 현실이 되었다. 
그가 월급의 용도를 꼼꼼히 분류해 놓았는데도 월말이면 항상 돈이 부족해서, 여름학기 강의를 하며 모아둔 보잘것 없는 예비비가 매달 꾸준히 줄어들었다. 
집을 산 첫해에 그는 이디스의 아버지에게 돈을 보내야 하는 날짜를 두번 놓쳤다. 그러자 재정계획을 탄탄하게 짜야 한다고 차갑게 꾸짖는 편지가 날아왔다. - P142

그럼에도 그는 이 집을 소유하게 된 것이 점점 기뻐져서 미처 예상치 못했던 위안을 얻었다. 1층 거실 옆에 있는 그의 서재에는 북쪽으로 높게 창문이 달려 있어서 낮에 부드러운 빛이 스며들었다.
나무로 된 벽은 세월의 풍요로움을 안고 은은히 빛났다. 지하실에는 상당량의 판자가 있었는데, 먼지와 곰팡이 투성이기는 해도 서재의 판벽널과 같은 판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판자들을 손질해서 책꽂이를 몇 개 만들었다. 언젠가 책에 에워싸인 서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중고 가구점에서 낡아빠진 의자, 소파, 아주 오래된
 책상을 몇 달러에 사서 몇 주 동안 수리했다. - P142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그가 책꽂이를 만들기 위해 낡은 판자들을 사포로 문지르자 표면의 거친 느낌이 사라졌다. 낡은 회색 표면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면서 나무 본래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더니, 마침내 풍요롭고 순수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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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RHK코리아.

초판본은 구매했다 내내 못읽고 책장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길래 이사 오면서 팔아먹고, 무슨 바람이 불어 다시 중고로 같은 책을 또 사들였다.
그러고도 내내 안읽고 있었는데 집에 왔던 딸램이 빌려가 먼저 읽고는 재밌다고.. 그냥 특별한 뭔가가 없는데 이상하게 술술 잘 읽힌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 이제야 읽기 시작했다.
정말로 무언가 특별하게 큰 사건이 없는 듯 전개되는데..
그런데 또 한편으로 순간순간 묘하게 긴장감이 흐른다.
뭐지?

... 이디스는 가방에서 종이 한 묶음을 꺼내더니 작은 쪽지 하나를 윌리엄에게 건네주었다.
6천 달러짜리 수표였다. 윌리엄 스토너 부부 앞으로 되어 있는 이 수표에는 거의 알아보기 힘들 만큼 힘차게 갈겨쓴 호러스 보스트윅의 서명이 있었다. 
"이게 뭐요?" 스토너가 물었다.
이디스가 나머지 종이도 그에게 건넸다. "빌려온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여기에 서명만 하면 돼요. 난 이미 서명했어요."
"하지만 6천 달러라니! 어디에 쓰려고?"
"집을 살 거예요." 이디스가 말했다. "우리의 진짜 집."
윌리엄 스토너는 다시 종이 다발을 바라보며 재빨리 뒤적였다.
"이디스, 안 되오. 미안하지만…………… 이디스, 내년에 내 연봉은 겨우 1600달러에 불과해요. 이 빚을 갚으려면 한 달에 60달러 이상을 내놓아야겠지. 그건 내 월급의 거의 절반이오. 게다가 세금이며 보험이며...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소. 미리 나한테 이야기를 하지 그랬소?"
이디스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를 외면했다. 
"당신을 놀래주고 싶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없잖아요. 그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는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이디스의 기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난 당신과 아기를 생각해서 이렇게 한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한테는 서재가 생길 거고, 그레이스도 마당에서 뛰어놀 수 있어요" - P134

"알아요" 윌리엄이 말했다. "몇 년 뒤에는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몇 년이라니요." 이디스가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고는 침묵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렇게 살 수없어요. 더 이상은 안 돼요. 이런 아파트라니. 집 안 어디서든 당신. 소리와 아기 소리가 들려요. 게다가・・・・・・ 냄새는 또 어떻고요? 나는. 그 냄새를 참을 수 없어요! 날이면 날마다 기저귀 냄새∙∙∙∙∙∙ 참을 수 없다고요. 그런데 도망칠 수도 없어요. 모르겠어요? 몰라요?"
결국 그들은 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스토너는 연구와 집필을 위해 여름 강의를 그만두려고 했지만, 적어도 몇 년 동안은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 P135

파티가 끝난 뒤에도 남은 사람들은 거의 새벽 4시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술을 계속 마셨는데도 말소리가 점점 조용해지더니 나중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파티의 잔해 속에서 온기와 위안을 얻기 위해 섬에 고립된 사람들처럼 가까이 붙어 앉았다. 얼마 뒤 고든 핀치와 캐롤라인 핀치가 일어서더니 로맥스를 집까지 태워다주겠다고 제의했다. 로맥스는 스토너와 악수하며 그가 쓰고 있는 책에 대해 묻고는 책이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등받이가 곧은 의자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있는 이디스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파티에 대해 감사인사를 했다. 그러더니 조용한 충동이라도 일었는지 살짝 몸을 수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디스의 손이 그의 머리를 향해 가볍게 뻗어 올라갔고, 두 사람은 다들 지켜보는 가운데 잠시 그 자세를 유지했다. 스토너는 그렇게 정숙한 키스를 본 적이 없었다. 흠 잡을 데 없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키스였다. - P140

이디스의 옷이 침대 옆 바닥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이불도 아무렇게나 젖혀져 있었다. 이디스는 주름 하나 없는 하얀 침대보 위에 알몸으로 누워 빛을 받고 있었다. 알몸으로 널브러진 그녀의 모습이 느슨하고 방탕하게 보였다. 게다가 연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윌리엄은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디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빛의 장난 때문에 살짝 벌어진 입술이 소리 없이 열정과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참 동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련한 연민과 내키지 않는 우정과 친숙한 존중이 느껴졌다. 또한 지친 듯한 슬픔도 느껴졌다. 이제는 그녀를 봐도 예전처럼 욕망으로 괴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다시는 없을 터였다. 슬픔이 조금 가라앉자 그는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끈 뒤 그녀 옆에 누웠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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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를 골다‘
남편이 시를 쓴다면~~~
이런 시가 나올지도 ㅎㅎ


오랜만에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괜히 반갑고 반갑다!



최정례

코를 골다

코를 골았다고 한다. 내가 코를 골아 시끄러워 잠을 못잤다고 한다. 그럴 리 없다. 허술해진 푸대자루가 되어 시끄럽게 구는 그자가 바로 나라니, 용서할 수가 없다. 도대체 몸을 여기 놓고 어느 느티나무 그늘을 거닐었단 말인가. 십년을 키우던 고양이 코기토도 코를 골았었다. 그 녀석 죽던 날, 걷지도 못하면서 간신히 간신히 자기 몸을 제집 문 앞까지 끌고가 이마 반쪽만을 문턱에 들여놓은 채 죽어 있었다. 아직도 녀석은 멀고 먼 자기 집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끌고가기 너무 고단해 몸을 버리고 가는 자들, 한심하다. 어떤 때는 한밤중에 내 숨소리에 놀라 깨는 적이 있다. 내 정신이 다른 육체와 손잡고 가다가 문득 손 놓아버리는 거기. 너무나 낯설어 여기가 어디냐고 묻고 싶은데 물어볼 사람이 없다. - P84

곽재구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104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 P104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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